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199
제199화 – 유감이오.
안진은 하동으로 가는 동안 수시로 오열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했다. 불시에 솟구치는 슬픔은 의지로써 다스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하여간 하도 울어대서 하동에 당도했을 때는 눈이 퉁퉁 부어있었다.
새벽녘이었지만 안진은 만사를 제쳐두고 양천부터 만나러 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침상에 통나무처럼 누워있는 그의 혈도를 풀어주었다. 하지만 닷새 이상 점혈 상태로 있던 양천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서슴지 않고 그의 팔다리를 주무르며 안진이 화를 냈다.
“좀 의심이 간다고 사람을 이 꼴로 만들다니, 나쁜 놈들.”
나는 나를 겨냥한 비난임을 알았지만 모른 척했다. 아르가 나를 변호했다.
“불가피한 조치였어요. 워낙 위험천만한 악귀가 씌어있었으니까. 그런데 정말 그자가 양 공자에게서 떠난 게 맞나요?”
“당연하지. 아무렴 내가 아무런 확인도 없이 이이를 풀어줬겠어? 이이만큼 순수하고 정심한 품성을 가진 이는 천하에 또 없어. 그러니 더는 이이를 두고 왈가왈부하지들 마.”
안진의 심안을 모르는 이들은 불안해했다. 나는 우리를 따라온 친인들에게 내 누이의 판단이 옳음을 보장했다.
“그녀의 말이 맞소. 그는 틀림없는 양천이오.”
양 관주를 필두로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혀가 풀린 양천이 안진과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고맙소, 안 소저. 고맙소, 단주.”
안진이 양천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어쩜 그 곱던 얼굴이 이렇게 상했어. 이제 고생 끝이니까 행복하게 살자. 내가 도와줄게. 근데, 너. 남몰래 나를…….”
‘야, 너무 빠른 거 아니냐?’
나는 안진이 뒷말을 잇기 전에 그녀의 팔을 툭 쳤다.
“왜 그래?”
“그는 병자나 다름없다. 일단 충분히 쉬게 해 주자.”
“뭐? 내가 휴식을 방해했어?”
“그게 아니라…….”
양천이 끼어들었다.
“미안하지만 안 소저와 둘이 있도록 해 주겠소, 단주? 그녀에게 할 얘기가 있소.”
열을 내던 안진이 반색했다. 나도 양천의 적절한 개입을 반겼다.
“그러시구려. 나중에 봅시다.”
나는 사람들을 몰고 나왔다. 내 사랑하는 누이와 둘도 없는 벗이 최고의 한 쌍이 되기 위한 멋진 첫걸음을 떼기를 바라며.
***
나는 별실에서 양 관주와 독대했다.
“안 소저의 말마따나 고생 끝이고 행복만이 남은 것 같아요. 죽은 이들에겐 미안하지만.”
“피해가 어느 정도였소?”
“몰랐나요?”
“그날 괴물을 처치하고는 바로 용궁으로 가는 바람에 듣지 못했소.”
“북원은 그야말로 한순간에 거대한 초상집이 되었어요. 변을 당한 이들이 너무 많아 아직도 사망자 수를 집계하지 못했을 정도예요. 하지만 무조건 삼십만은 넘어요. 어쩌면 사십만에 이를 수도 있어요. 무서운 건 천마(天魔)가 천인공노할 살겁을 일으키는 데 고작 반 시진 남짓밖에 안 걸렸다는 거예요.”
문어 괴물을 천마라고 부르는 건가.
“그나마 단주가 십자무련에 때맞춰 간 덕분에 호원의 백성들은 무사해요. 그러지 않았다면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을 거예요.”
“십자무련에서도 희생자가 적지 않게 나왔을 것 같던데.”
“그래요. 이만 사천 명가량이 화를 입었어요. 불과 일각 만에. 하지만 감히 다행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천마가 저자로 나갔다면……. 상상하기도 싫어요.”
전적으로 동감이었다.
“단주가 없었다면 세상은 종말을 맞이했을 거예요. 단주는 만인의 칭송을 받아 마땅해요.”
나는 양 관주의 찬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오히려 비난받아야 할 대상이었다. 괴물을 깨우는 데 결정적인 일조를 하지 않았던가.
양 관주와 대화를 이어가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무후가 죽었단 말이오?”
“그래요. 창제와 검제처럼 머리가 터졌다나 봐요.”
“문상은 어찌 되었는지 아오?”
“그날 어디론가 잠적했다가 사흘 후에야 돌아와서는 사태 수습을 지휘하고 있다고 하네요. 뒷배가 사라졌음에도 태연히 자기가 사실상의 우두머리인 양 행세하면서요. 십자무련의 인사들은 그녀에 대한 단주의 태도를 본 연후 대우를 결정하려는 모양이에요. 어떻게 할 건가요?”
“만나보겠소.”
“그 여자는 무후를 등에 업고 단주에게 흉험한 독고를 주입한 악질이에요.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선처는 과도한 관용이라고 봐요.”
“참고하겠소.”
내 응답이 불만스러운 듯 한숨 내쉬기와 도리질을 동시에 행한 양 관주가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게 있어요.”
“뭐가 말이오?”
“문상 말이에요. 단주가 독고를 제거한 걸 알아챈 것 같아요.”
“그야 무후가 죽었음에도 내가 살아있으니 당연히…….”
“그게 아니에요. 벌써 한 달 전부터 은연 중 우리에게 양보하기 시작했어요. 그때까진 상전처럼 굴다가요. 독고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시기적으로도 맞아떨어지는 데다 달리 태도가 바뀐 이유를 찾지 못하겠으니까.”
“일리가 있구려. 이번에 만나면 알아보리다.”
“언제 갈 건가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현마 어르신께 들러 인사를 한 후 바로 가 볼 참이오.”
“그 어른 말고 봤으면 사람이 있어요.”
“……!”
나는 양 관주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
뇌옥은 살풍경했다.
그녀는 해도 들지 않는 지하 맨 안쪽의 독방에 갇혀 있었다. 알몸에 고문의 흔적이 가득했다.
한때 천하제일의 미모를 자랑했을 옥용도 그녀가 망가뜨린 쌍둥이 언니의 얼굴처럼 처참히 뭉개져 흉신악살처럼 보였다.
나를 안내해 간 석진이 이를 갈았다.
“살다 살다 저런 독종은 처음 보았네. 진 대인께 사죄하면 편히 보내준다고 했건만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끝내 참회의 언사를 내뱉지 않았네. 뭐, 나로선 잘된 일일세. 그냥 보낼 수야 없지. 진 대인이 당한 것만큼, 아니 그 이상의 고통을 가하며 두고두고 원수를 갚을걸세.”
나는 여인에게 다가갔다.
하나만 남은 여인의 눈알이 내 발걸음을 따라 움직였다. 짓이겨진 입술에서는 쇠꼬챙이로 철판을 긁는 것 같은 거북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목에 황산이라도 부은 모양이었다.
“드디어 보는구나. 듣던 대로 참 잘생겼네. 아직 머리에 피도 덜 마른 것 같은데 벌써 영세제일인으로 불린다지? 너무 아쉽다. 삼십 년만 젊었어도, 아니 저 얼간이가 얼굴만 건드리지 않았어도 내 가랑이 사이에서 침을 질질 흘리는 버러지로 만들 수 있었을 텐데.”
열을 내며 듣고 있던 석진이 시뻘겋게 달궈진 인두를 여인의 아랫배에 찔러 넣었다. 비명을 지르면서도 여인이 그를 조롱했다.
“간지럽다, 얼간아. 좀 더 흥미로운 놀이는 없니? 아무리 대가리가 모자라도 같은 짓을 반복하면 지루해진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지.”
“오냐, 이년아. 조금만 기다려라. 네년이 만족할 만한 물건이 오고 있으니까. 그때도 이렇게 간살을 떨 수 있는지 보자.”
“호호, 기대되는데. 어서 갖고 와 보렴, 얼간이.”
분을 못 이긴 석진이 주먹으로 벽을 쳤다. 그러고 보니 석벽 곳곳에 구멍이 나 있었다. 나는 승부가 이미 끝났음을 알았다. 평소의 능청스러움을 상실한 순간 석진은 이미 패배한 것이었다. 여자에게 가하는 육체적 학대는 오기에 불과했다.
석진을 말리고 싶었지만 나는 말없이 뇌옥을 나왔다.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다.
***
축공이신을 발한 덕분에 나는 해가 뜨기도 전에 십자무련에 이르렀다.
가급적 조용히 들렀다 가려 했으나 불가능했다. 문상이 고월서고에 없었기에 그녀의 거처를 알려면 부득이하게 모습을 드러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를 본 순찰대 무사들이 경악성을 토해내며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삽시간에 십자무련 전역이 떠들썩해졌다.
나는 밀물처럼 내게로 몰려든 이들의 배례를 받아야 했다. 얼마 후 문상이 보낸 문인이 그녀의 현재 처소로 나를 안내했다. 전에는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는 단아한 와옥이었다. 문상은 밖에 나와 있지 않고 와옥 안의 다실에서 나를 맞이했다.
“축하해요. 이제 명실상부한 절대지존(絶對至尊)이 되었네요.”
“무후가 죽었다고 들었소. 그녀는 어째서 달아나지 않았소? 그 시점에서는 신창문의 일을 알았을 터인데.”
“나를 놀리는 건가요?”
“…….”
“언니를 죽인 건 천마가 아니에요.”
역시 그랬군.
“한동안 지시가 없어 지난 달 말에 연무장에 가보았더니 두부가 박살 나 있더군요. 시신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그대로 두었는데 마침 무시무시한 괴물이 등장해 고민을 덜어주었어요. 혼란 중에 슬쩍 내놨더니 아무도 의심하지 않더군요. 창제와 검제도 유사한 방식으로 당했으니까.”
“그녀가 천고(天蠱)를 지녔다고 했잖소? 그리고 지고(地蠱)는 천고에게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하지 않았소? 어떻게 된 거요?”
“그날 약간 거짓말을 했어요. 천지독고가 바뀐 것도 그중 하나에요.”
“그게 어떻게 약간의 거짓말이 될 수 있소? 결정적인 사기가 아니오? 아니, 그 전에 그 주장의 진위 여부도 불투명하오. 내가 가졌던 독고는 밖으로 끄집어내자 터졌소. 그렇다면 그게 지고였을 거잖소?”
“그랬다면 언니는 죽지 않았겠죠. 천고가 터진 건 오 공자가 보금자리에서 강제로 몰아냈기 때문이에요. 화가 나서 자폭한 거죠. 나는 설마 오 공자가 그런 모험을 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어요.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무모한 짓이었어요. 일이 잘못됐으면 어쩔 뻔했어요.”
“적반하장이라고 생각지 않소?”
“천만에요. 오 공자를 구하려고 그런 거니까. 그날 천지독고를 준비해가지 않았다면 언니는 결코 오 공자를 놔주지 않았을 거예요.”
“왜 나를 살리려 했소?”
“그냥 그러고 싶었어요.”
“그건 답이 아니오.”
“꼭 이유를 들어야겠어요?”
“그렇소.”
“오 공자가 마음에 들어서요.”
“…….”
“그걸로 부족한가요?”
“……다른 거짓말은 뭐였소? 천지독고가 바뀐 것 말고.”
“잊었나요? 나는 독고의 폭발에 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았어요. 뇌를 갉아먹어 실성한 폐인으로 만든다고만 했지. 행여나 언니가 뇌관을 건드릴까 봐 염려했기 때문이었어요.”
“처음부터 알려주었으면 좋았잖소?”
“그러면 재미도 없었겠죠.”
기가 막혔다.
“나는 오 공자에게 긴장감을 불어넣고 싶었어요. 절박한 처지일수록 분발하기 마련이잖아요. 박차라고 해도 괜찮겠네요.”
“지금 공치사를 하려는 거요?”
“사실을 상기시키려는 것뿐이에요.”
한마디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는 문상을 응시하며 나는 그녀와의 대화를 즐기고 있음을 자각했다. 여느 때처럼. 그러면서 문득 도봉의 모친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문상을 삼십여 년 전에 만났다면 어땠을까.
나는 십중팔구 영민한 소녀에게 끌렸을 터였다. 아주 많이.
문상에게 지난 한 달 보름간 겪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그녀는 태청진인에 관해 헛짚은 것을 그다지 개의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다는 수준 정도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자기는 단지 여러 가설 중 하나를 제시했을 뿐이란다. 그걸 받아들일지 말지는 내 몫이란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더 따지지 않고 넘어갔다. 실제로 전부 내 책임이었다.
서방의 여정부터는 바짝 귀를 세우며 관심을 기울이던 문상은 여의주에 이르러서는 흠뻑 빠져들었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왜 진즉 얘기하지 않았나요? 그런 다지다능한 존재와 만났다면 내가 품은 수많은 의문들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었을 텐데. 설마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떠나보낸 건 아니죠? 제발 그렇지 않다고 해 줘요.”
나는 문상의 소망에 부응하지 않았다.
“그이들은 완전히 해체되었소. 이계로 통하는 문을 폐하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한 게요. 유감이오.”
문상은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도 아쉬워하는 통에 하마터면 그들이 수만 년 동안 우주를 떠돌며 축적한 방대한 지식이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토설할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