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200
제200화 – 그리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
나는 서방의 섬으로 갔다.
열흘 전 두고 온 사로를 찾아 서역에 데려다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목적이 있었다.
문상에게 작별을 고한 지 두 시진도 안 돼 십자무련에서 삼만 리 이상 떨어진 대륙의 서쪽 끝으로 날아가 좁은 바다를 건넌 나는 전날 문어 괴물과 조우했던 고원으로 갔다. 황량하고 음산했던 들판은 완전히 딴판이 되어있었다.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었던 곳에 수만 군중이 바글거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일순 어리둥절했지만 나는 곧 연유를 알아차렸다.
혹한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황무지에 운집한 이들은 섬과 대륙에서 몰려든 호사가들이었다. 즉, 흡혈귀와 화룡, 그리고 철괴를 차례로 처치한 ‘동방의 신’이 마지막으로 유령을 잡기 위해 고원으로 올라갔다는 소문을 듣고는 득달같이 달려온 호기심 덩어리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무모함에 쓴웃음이 났다. 유령이 고원에 머물러 있었다면 어쩔 뻔했는가. 호기심으로 인해 광인이 되었다면 얼마나 억울했겠는가.
물론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두었을 터였다. 예컨대 희생양들을 먼저 올려 보내 유령이 온전한지를 점검했다든가 같은.
그렇더라도 경솔한 처사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보물찾기라도 하는 양 잔뜩 들떠서 허허벌판을 이 잡듯 뒤지고 있는 무리를 내버려두고 고원 외부의 마을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문어괴물에게 쫓겨 양천에게서 빠져나간 타우린은 새로운 몸을 찾아 사방을 돌아다녔을 터였다.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었다. 고원을 중심으로 반경 오백 리 이내에 들어있을 공산이 컸다. 그 정도의 범위라면 사흘 이내에 잡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설령 타우린이 그 테두리 밖으로 나갔다고 해도 막막한 상황은 아니었다. 섬은 거대하나 신통을 얻은 내겐 손바닥이나 진배없었다. 그러니 그는 독 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였다.
수색 작업은 싱거우리만치 일찍 끝났다.
고원에서 남서쪽으로 일백여 리쯤 떨어진 소도(小都)에 이르러 기망(氣網)을 펼친 나는 곧 타우린의 혼을 포착했다. 그리로 내려가니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나는 술래를 피해 헛간에 숨은 금발 벽안의 소동(小童)에게 몰래 다가갔다. 이제 일곱 살이나 되었을까. 절로 감탄성이 나올 만큼 잘 생긴 아이였다.
나를 본 아이의 푸른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하지만 아이에게서 빠져나온 건 눈알이 아니라 타우린의 혼이었다. 나는 달아나는 혼을 선기의 그물에 가두었다. 그러고는 풍등처럼 공중에 띄웠다.
이제 타우린은 선망에 갇혀 세상을 배회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다 그를 가둔 선기와 일체가 되면 욕망과 살심이 거세된 순둥이로 거듭 날 터였다. 물론 그가 그 전에 그물을 찢고 나올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완전한 사멸이니 그럴 성싶지는 않았다. 무엇을 택하건 그의 몫이었다.
***
타우린을 처리한 나는 빨강 머리의 성으로 갔다.
그러고는 발광할 듯 격하게 나를 반기는 그녀에게 사로의 소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서방 유력자들의 재소집을 요구했다.
엿새 후 서방의 성산에 번개 사내 제트를 비롯한 절대법사들과 팔십여 명의 왕-영주들이 모였다. 사로도 왔다. 그는 섬의 왕이 보낸 이들의 부름을 받기 전까지 고원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다.
사로와의 재회가 기뻤지만 나는 더 이상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진 않았다. 서방 이인들과의 직접 소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느냐고? 심어(心語) 덕분이었다.
내가 마음으로 발한 소리가 그들의 심상에 울리자 다들 기절초풍했다. 나는 그들에게 전날 보여준 초상화의 인물은 이제 흉적이 아님을 알렸다. 그러면서 양 관주가 작성한 십대통치원칙을 주지시킬까 하다가 말았다. 강요로 비칠 것을 우려해서가 아니라 너무 서두르는 감이 있어서였다.
태평세의 건설은 차근차근 추진해야 할 과제였다. 그리고 강압에 의한 시늉보다는 자발적인 참여가 훨씬 바람직했다. 그러려면 시간과 공을 들여 설득하고 감화시키는 편이 나았다.
그렇더라도 나는 평화와 민초들의 보호가 사대마왕을 처단한 나의 지향점임을 강조하는 건 잊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서방 대륙 곳곳에서 수시로 발발한다는 분쟁을 억제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할 터였다.
서방에서도 나의 권위는 이미 신(神)급이었다.
성산의 이차 회합에서는 소소한 후일담이 있었다.
시발점은 번개 사내 제트의 질투였다. 빨강 머리가 노골적으로 나에게 엉겨 붙자 열불이 난 그가 내 권위에 도전했다.
“동방신이 우리 모두를 상대하고도 남을 만큼 대단한 위인임을 알지만 한 가지만은 나에게 못 미칠 거요. 나보다 빠르지는 못할 거라는 말이오.”
다들 제트의 주장을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게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장난기가 발동해서 나는 그의 도발에 응해주었다.
내가 미끼를 물었다고 여긴 제트가 희희낙락했다.
“바라는 바요.”
“저기 저 탑 위에 로디의 목도리를 걸어놓고 빨리 가져오는 이가 이기는 걸로 합시다.”
다들 제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신전 공터에서 일백이삼십 장 떨어진 지점에 칠팔 장 높이의 뾰족한 탑이 서있었다. 빨강 머리가 신이 나서 소리쳤다.
“좋아. 내가 갖다놓고 올게. 기다려.”
빨강 머리의 경공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그녀가 비호처럼 몸을 날리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첨탑 꼭대기에 노란 목도리를 매어놓고 돌아온 빨강 머리가 나와 제트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저번처럼 내가 손을 내리면 시작하자. 어때?”
제트와 나는 동시에 동의했다.
“그러자.”
빨강 머리가 우리들 발밑에 선을 긋고는 옆으로 물러서서 팔을 치켜들었다. 제트가 왼발을 앞으로 내밀고 상체를 비틀며 달리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냥 꼿꼿이 서있었다. 장내는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한참이나 뜸을 들이며 중인의 애를 태우던 빨강 머리가 별안간 팔을 내렸다.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제트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빨강 머리와 대중이 가만히 서 있는 나를 보며 눈살을 찌푸리거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다음 순간 다들 눈을 부릅뜨며 경악성을 토해냈다. ‘팟’하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내가 손에 빨강 머리의 목도리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막 탑에 도달했던 제트가 상황을 파악하고는 아연실색했다. 그러고는 풀이 죽은 채 나와 빨강 머리에게로 돌아왔다.
“대체 무슨 마법을 쓴 거죠?”
체념한 제트를 흘깃거리며 빨강 머리가 따지듯 물어왔다. 그녀에게 목도리를 돌려주며 대답했다.
빨강 머리가 모두에게 내 답변을 전하자 다들 혀를 내둘렀다. 준수한 면상을 우거지상으로 만들고 있던 제트가 내게로 다가오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내 패배요.”
빨강 머리가 제트를 위로했다.
“낙담하지 마, 제트. 네가 자랑스러워. 동방의 신에게 도전한 것만으로도 너는 최고의 용자야.”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아냐. 진짜 감탄했어.”
“그럼 나를 좀 안아줘라.”
“갑자기 얘기가 왜 그쪽으로 새?”
“온 힘을 쏟았더니 다리가 풀릴 것 같다.”
“흥, 기껏 칭찬해줬더니 앓는 소리는. 쓰러지건 말건 내 알 바 아냐.”
“그러기냐?”
“그러기다. 어쩔래?”
나는 유치한 입씨름을 벌이는 남녀를 보며 그들의 연분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했다.
***
사로를 안고 서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다로제국의 수도인 이드에 들렀다.
마침 정월 초하루였기에 축제가 한창이었다. 내가 궁전 상공에 모습을 드러내자 대소동이 벌어졌다. 의복이 바뀌었지만 모두들 신의 사자인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광장에 몰려 나와 너나없이 엎드린 군중을 내려다보며 나는 심어로 매부리코 황제를 불러냈다. 그러자 뜻밖의 응답이 돌아왔다.
‘신의 뜻’을 거역한 죄로 황제는 그날 장군들에 의해 참수당했단다. 나는 심안으로 반역을 주도한 장수들 가운데 순후한 심성을 가진 이를 찾아내 후사를 맡겼다. 그의 선정이 신의 뜻임을 알렸으니 아무도 그에게 반발하지 못할 터였다.
서역에서는 이레나 머물렀다.
나우는 나이가 무색하게 노련하고도 능란하게 광대한 대륙을 다스리고 있었다. 절대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여후(女后)임에도 그녀는 시골처녀 같은 순박함을 간직하고 있었다. 나를 매료시켰던 정의감도 여전했다.
나는 그녀가 오래도록 변치 않기를 바랐다. 혹시라도 초심을 잃고 삿된 길로 빠진다면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날 터였다.
나우에게 정기적인 방문을 기약하고 서역을 떠난 나는 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방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여의주가 알려준 미지의 대륙들을 차례로 탐방했다. 선계로 오르지 않고 인세에 남기로 했으니 온 세상을 살펴볼 참이었다.
할아버지와 천하를 유랑할 때처럼 세사에 일절 개입하지 않고 관찰만 했으나 워낙 땅덩어리가 크고 넓은지라 대충 둘러보는 데만 두 달 보름이나 소요되었다. 다음 번 순회부터는 적극적인 사귐과 참견을 행하기로 작심한 나는 꽃이 필 무렵 중원으로 복귀했다. 처음 시작한 곳에서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
감개무량했다.
공교롭게도 오늘이 삼월 초하루이니 딱 일 년이 지난 셈이었다. 작년 이날 인파로 붐비는 이 거리에 들어와서는 잔뜩 흥분해있던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잠시 감회에 젖었던 나는 거드름을 피우며 대로를 활보하고 있던 배불뚝이 사내를 보고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반반한 낯짝을 땟물로 가리고 있는 거지를 찾으시오?”
죽립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음에도 내 음성을 알아들은 배불뚝이 사내 주태가 화들짝 놀라서는 뱀을 밟은 말처럼 펄쩍 뛰었다.
“주, 주, 주, 주…….”
주태가 말을 잇지 못하자 옆을 지나가던 험상궂은 장한이 나를 노려보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주 총관. 이자가 주 총관께 행패라도…….”
장한도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내가 죽립을 벗어서가 아니라 주태가 별안간 흙바닥에 엎드리며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주 모가 주군을 뵙습니다.”
컥. 괴성을 내지른 장한이 주태를 따라 이마를 땅에 박았다. 주태가 평소 나를 제 주인이라 부르고 다녔다는 방증이었다. 장한만이 아니라 주위의 행인들도 앞다투어 오체투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나온 내 별호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보양 전체가 들썩거리더니 수천수만의 민중이 나를 보러 몰려나왔다. 모두들 먼발치서 나를 보고는 절을 했지만 한 사람만은 내 면전까지 달려와 엎드렸다. 주근깨였다. 나는 그녀를 일으켰다.
“오랜만이오, 예월 소저. 몇 달 못 본 새 더 예뻐지고 몰라보리만치 성숙해졌구려.”
빈말이 아니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앳되기까지 했던 얼굴에 관록미가 물씬했다. 그럼에도 주근깨는 빳빳하게 굳은 채 내 말에 화답하지 못했다.
“별로 반갑지 않은 모양이구려. 나는 모처럼 벗을 보아서 즐겁기 한량없는데. 서운하오.”
내가 슬쩍 눙치자 주근깨가 양 관주처럼 도리질을 했다.
“아니에요. 저도 반가워요. 너무나 반가워서 졸도할 것 같아요. 공자님, 아니 단주님을 다시 뵐 날만 손꼽아 기다렸어요. 이렇게 찾아주시니 정말 너무너무 기뻐요. 그런데 관주님은 여기 안 계세요. 하동에…….”
“소저가 그녀에게서 자하옥관을 물려받았다는 얘기는 진즉 들었소. 하여 소저에게 부탁하고자 하오.”
“뭐를요?”
“주위 사람들과 이런저런 갈등을 겪고 있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 가슴앓이를 하는 이들을 알아봐주오. 꼭 피맺힌 원사가 아니라도 좋소. 주 총관도 함께 하구려.”
내가 그를 언급하자 주태는 황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신선이 된 후 나에겐 특별한 능력들이 여럿 생겼다.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집중만 하면 특정인의 마음만이 아니라 지나온 삶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전날 여의주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거기에 더해 환상환의 공능도 재현할 수 있었다. 작년 말 하동의 뇌옥에서 도봉의 모친을 만났을 때 나는 그녀의 의식을 장악하고 조종해 석진이 원하는 사과를 하도록 강제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터였다.
나는 다만 오만 일에 관여하며 오지랖을 떨고자 할 뿐이었다. 신선씩이나 되어서 무슨 짓이냐고? 세상에 나 같은 신선이 하나쯤 있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지 않겠는가!
——-종(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