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 안 돼!
나에게로 시선을 돌린 석진이 솥에서 튀어나온 쥐를 본 아낙처럼 움찔거렸다.
나는 그의 고리눈에 담긴 생각을 어렵지 않게 읽어냈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지금이라면 충분히 도주할 수 있었다. 적들과의 거리는 상당했다. 적의 수장들이 좌우에 있으니 설령 후방에 정검문의 검사들이 배치되어 있을지라도 석진의 무력이라면 돌파하는 게 어렵지 않을 터였다. 광마도든 창천검이든 나를 목표로 삼을 터이니 그를 추격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찰나 석진의 눈빛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갈등 끝에 그가 내린 결론은 애원이었다.
흠, 그래도 나를 버려두고 저 혼자 튀지는 않을 작정이로군.
그런데 어떻게 내가 눈빛만으로 이 인간의 속을 간파한 거지? 그리고 이 인간은 내 거부 의사를 어떻게 이해한 거지? 설마 우리가 이심전심이 가능한 사이란 말인가.
내 의중을 읽어내고는 똥 씹은 표정을 한 석진이 무언의 대화를 끝내고 결론을 입 밖으로 내보냈다.
“아, 우라질. 어쩐지 간밤에 꿈이 뒤숭숭하더라니. 꿈에 그리던 환갑을 코앞에 두고 이런 데서 뒈지게 될 줄이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환갑까지는 아직 이 년이나 남았잖소?”
“일 년 팔 개월일세.”
“어쨌거나 코앞은 아니잖소?”
“내 나이가 되면 이 년은 금방일세.”
나와 석진이 짧은 문답을 주고받는 동안 적들은 산등성이와 단애를 내려와 우리로부터 팔구 장 떨어진 곳까지 접근해 있었다.
죄다 절정 극상 이상의 고수들이니 우리의 태평스러운 대화를 들었을 터였다. 일일이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다들 황당하다는 심사를 낯짝에 담고 있으리라.
나와 생사를 같이하기로 마음을 정했음에도 조바심을 내던 석진은 도주의 가능성이 거의 사라지자 체념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를 홀린 게 천룡이 아니라 물귀신이었다니. 누굴 탓하랴. 내 안목이 썩은 것을.”
흠, 초록은 동색이라더니.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한숨이며, 나에 대한 평가 절하며 양 관주와 똑같지 않은가.
하지만 석진을 비난하거나 조롱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목숨을 잃을 확률이 십 할이라고 여길 터임에도 의리를 지킨 그의 담대함에 탄복할 따름이었다.
나는 예의가 아님을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석진을 시험했다.
“물귀신이라니? 내가 언제 당신을 잡았소? 그리고 아직 늦지 않았소. 지금이라도 가쇼. 저들은 당신에겐 볼일이 없을 거요.”
자기를 뭐로 보느냐며 버럭 화를 낼 줄 알았더니 석진이 비굴한 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되겠는가?”
어이가 없었다.
***
석진의 탈주를 막은 것은 유부에서 올라온 것 같은 음산한 목소리였다.
“둘 다 빠져나갈 수 없다. 네가 마협이냐?”
나는 질문이 날아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나는 삐쩍 마르고 다른 하나는 매우 뚱뚱한 대조적인 체형을 가진 두 노인을 양옆에 거느린 청수한 인상의 노인이 시야에 들어왔다.
광마도(狂魔刀) 안견.
인자한 노(老)학사처럼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안견은 ‘미친 악마의 칼’이라는 별호처럼 광포한 성정으로 악명을 떨친 인물이었다. 그는 이백여 년간 대막(大漠)의 지배자로 군림해 온 광풍혈사대의 당대 대장이자 초절정 상(上)의 무위로 평가받는 강자이기도 했다.
광마도를 직접 보니 뚱딴지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실제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이지만 양 관주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는 현재 일흔 살이었다. 나한테 정강이가 깨진 애송이는 많아봤자 약관이었다. 둘이 부자지간이라면 광마도는 애송이를 쉰 이후에 얻었다는 뜻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수십 명의 처첩을 둘 수 있었을 터인데 어째서 그전에는 후세를 두지 않았을까. 애송이 말고 다른 자식들이 있지 않겠냐고? 양 관주는 애송이가 광마도의 유일한 아들이라고 했다. 참고로 딸은 없었다.
이 상황에서 광마도에게 물어보기는 뭐한지라 나는 이 의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냈다.
혹시 광마도는 나와 같은 부류가 아닐까.
내가 천지조화지경에 이르기 전까지 한눈을 팔지 않고 일로매진하기로 한 것처럼 그도 자신이 정한 무위에 오를 때까지는, 예컨대 초절정의 벽을 넘을 때까지는 원초적인 욕정을 억제하며 수련에만 전념한 게 아닐까. 그러다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후 자식이라는 전리품을 챙긴 게 아닐까.
내 멋대로 상상한 것이지만 나는 광마도에게 왠지 모를 친밀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
“나는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오.”
일단 광마도의 질문에 대한 응답 겸 내 소개를 한 나는 그가 대꾸할 겨를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을 테지만 칼을 뽑기 전에 잠시 고려할 시간을 가지는 게 어떨까 싶소.”
내 말에 호기심이 생겼는지, 아니면 전날 창천검이 그랬던 것처럼 내 배경에 부담감을 가졌는지 광마도가 뒤를 허락했다.
“고려라니?”
긴 이야기가 될 터이기에 나는 입술에 침을 발랐다.
“어떻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애초에 당신 아들의 무리한 행태가 이 일의 발단이었소. 그는 수청을 원치 않는 여인을 강제로 취하려 들었소. 하필 그 여인은 나의 친인이었고 또 하필 내가 우연히 그 자리에 있었더랬소.
나는 그에게 그녀를 놔달라고 정중히 부탁했소. 그랬더니 다짜고짜 나를 공격합디다.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소. 나를 골로 보내려고 작심한 공격이었소. 응당 되갚아주어야 했으나 어린 나이에 객기로 그랬을 거라 여기고는 다리를 부러뜨리는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소.
그 이후의 사단도 내 과오가 아니오. 쌍둥이 노인과 나중에 붙은 두 노인들 모두 전후 사정을 따져 시시비비를 가릴 최소한의 과정도 거치지 않고 무작정 나를 죽이려 들었소. 그러니 그들이 그 꼴이 된 건 자업자득이오.
당신의 노여움을 십분 이해하오. 하지만 여기서 이 일을 매듭짓기를 권고하고 싶소. 만약 그 칼을 뽑으면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요. 부디 현명한 결정을 내리기를 바라오.”
나는 나 자신에게 놀랐다. 내가 이렇게나 달변이었던가. 그리고 이렇게나 관대한 사람이었던가.
유감스럽게도 다른 이들의 평가는 다른 모양이었다.
제일 먼저 반응을 보인 이는 광마도에게 선수를 양보하고는 침묵을 지키고 있던 창천검이었다.
“참으로 가소로운 혓바닥이로다. 네 재주를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또 내가 알거늘 누구를 상대로 허풍을 떠는 게냐?”
하아,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밉다더니.
흠, 비유가 이상한가. 아무튼 사파도 거슬렸지만 정파는 더더욱 내 취향이 아니었다.
“허풍? 그렇게 자신 있으면 확인해보든가?”
내 도발에 창천검 좌우에 늘어서 있던 검사들이 분기를 표출했다. 창천검 또한 노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광마도의 목소리가 그의 발검을 막았다.
“내게 맡겨주시오, 대 문주.”
대 문주?
아하, 창천검의 성명이 대진이었지. 그럼 나는 오 문주나 오 단주라고 불려야겠군.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광마도가 결정한 바를 통보했다.
“이제 와서 이 사태의 원인은 하등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네가 우리를 건드렸다는 것이고 그 대가로서 염왕을 알현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광마도가 손을 올려 등 위로 삐죽 솟아 나온 도병을 낚아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날 당신 아들이 그러더군. 나더러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려 든다며 이후 닥칠 변고는 전적으로 내 탓이라고. 하지만 결과는 그의 엄포와는 정반대로 나왔지. 기어이 아들의 우를 되풀이할 요량이면 더 이상 말리지 않겠소.”
예상했던 대로 광마도는 내가 준 마지막 기회를 걷어차 버렸다.
***
광마도가 일으킨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그리고 확연한 살의가 담겨있었다.
그의 칼이 발한 도풍이 폭풍처럼 밀어닥치자 대경실색한 석진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나는 찰나의 순간 갈등했다. 피할 것인가, 아니면 기방(氣防)을 펼칠 것인가.
노인네에 따르면 팔 단계부터는 기(氣)의 막을 두르는 게 가능했다. 사실 석진과 비무를 하다 자연스레 시도해볼 작정이었으나 적들이 일찍 나타나는 바람에 그럴 짬이 없었다. 하여 일단 회피하기로 했다. 어설프게 기방을 쓰다가 제대로 역할을 못 하면 낭패였다.
석진보다 뒤늦게 그의 반대편으로 신형을 날린 나는 다음 순간 당황했다. 내 몸이 목표했던 지점을 지나쳐 둔덕까지 날아간 것이었다. 그 정도라면 당황할 것까지는 없었겠으나 그대로 둔덕에 처박힌 게 문제였다.
내 운신의 속도에 놀랐는지, 아니면 꼴사나운 모습이 황당했던지 광마도의 가일수가 반 박자 늦게 나왔다. 그 틈을 타 석진이 그에게 권풍을 날리며 달려들었고 나는 둔덕에서 빠져나왔다. 광마도는 석진을 무시하고 내게로 날아왔다. 석진은 그를 저지하러 나선 팔보추혼과 막북귀검을 상대해야 했다.
난전이자 고전이었다.
초장부터 비장의 무기인 권강(拳剛)을 꺼내 들었지만 석진은 두 명의 강호를 맞아 순식간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다. 별호대로 신법에 장기를 가진 팔보추혼은 노련하게 석진의 권공을 흘려내며 동료인 막북귀검이 그를 요리할 기회를 제공했다.
석진은 불과 사오 초 만에 옆구리에 일검을 허용했다. 운신불능에 처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견에도 제법 깊은 검상이었다.
나는 석진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사실 내 코가 석 자였다. 팔 단계에 올랐으니 광마도쯤은 압도하리라 여겼던 것과는 달리 일방적으로 밀렸다. 역시 새로이 획득한 힘을 원활히 사용할 수련이 선행되어야 했다. 중간에 멈추어야 했던 석진과의 비무로는 수련 시간의 질과 양 모두가 턱없이 부족했다.
공방전을 벌이다 보면 어떻게든 선력을 조정하고 상대의 수법에 적응해나가겠지만 문제는 그럴 여유를 부릴 형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러는 동안 석진이 이승을 하직할 터이기 때문이었다.
급한 대로 지풍을 쏘아내 위급에 빠진 석진을 구하고 싶었지만 이 또한 실행하기 어려웠다. 광마도에게 묶여있어서만이 아니라 지풍의 위력과 방향과 속도를 통제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없어서였다. 만약 겨냥이 잘못되어 팔보추혼이나 막북귀검이 아니라 석진에게 지풍이 꽂힌다면 큰일이었다.
그렇다고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나는 광마도의 강맹한 도풍을 간신히 빗겨내며 석진이 협공당하는 곳으로 쇄도했다. 마침 그를 절단 내기 직전이었던 막북귀검이 경악성을 토해내며 나에게 몸을 돌렸다. 검첨이 낫처럼 휜 그의 기형검이 내 허리를 가르려는 찰나 내가 먼저 그를 들이받았다.
퍽.
해골처럼 삐쩍 마른 막북귀검을 칠팔 장이나 튕겨냈지만 나도 땅바닥을 나뒹굴어야 했다. 그러고는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석진을 궁지에서 구해냈지만 그에겐 더 큰 위기가 닥쳤다.
나를 쫓아온 광마도가 그를 노린 것이었다. 어느새 강기를 뻗어낸 광마도의 반월도가 석진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쾅!
때아닌 폭음이 일었다. 석진이 양 주먹에 두른 강기로 도강(刀剛)을 막아냄으로써 생긴 기음이었다.
양단은 모면했으나 내력의 차이로 인해 석진은 무릎을 꿇고 말았다. 저래서는 두 번째 칼질을 감당하지 못할 터였다. 게다가 신법 못지않게 수공(手功)에도 일가견이 있는 팔보추혼이 호시탐탐 살수를 작열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석진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승부수를 던졌다.
이판사판이었다.
어차피 내버려 두면 석진은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여 나는 그의 정수리에 칼을 도끼처럼 내려찍으려 드는 광마도에게 지풍을 쏘아냈다. 열 줄기의 송곳 같은 지풍이 칠팔 장을 격하고 날아갔다. 그것들 중 셋이나 아슬아슬하게 석진의 머리카락과 의복을 훑고 지나갔다. 천만다행이었다.
내 기습을 예상치 못했을 터임에도 광마도는 현란한 칼 놀림을 선보이며 지풍들을 쳐냈다. 그러나 지풍에 담긴 선력을 감당치 못하고 휘청거렸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로 돌진했다. 그러면서 기방을 둘렀다. 혹시라도 그에게 붙었다가 칼에 직격당할 것에 대비한 조치였다.
그러나 실책이었다. 기방을 시도하자마자 일천 근의 철갑을 입은 것처럼 몸이 무거워졌다. 나는 느닷없이 불어난 육신의 무게를 제어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걷던 취객이 엎어지듯 땅에 이마를 박았다. 시야가 가려지기 직전 석진의 뒤통수에 내리꽂히는 팔보추혼의 수도(手刀)가 보였다.
나는 부지불식간에 부르짖었다.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