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36
제36화 – 맡겨 주십시오.
운공에 들었던 동굴에서 나오니 벌써 해가 서천으로 넘어가 있었다.
워낙 과식한 탓에 평소의 네 배 이상 시간을 들여 되새김질을 거듭했음에도 아직도 소화가 덜 되어 더부룩했다. 그러나 기분 좋은 포만감이었다.
팔자에 없는 호위 노릇을 하느라 밤새, 그리고 해가 뜬 후에도 진종일 동굴 밖을 지키고 있던 안진이 투덜거렸다.
“뭘 하느라 그렇게 꾸물거렸어?”
그녀가 토라진 모습이 자못 귀여웠다.
흠, 이런 심사가 강자의 여유란 건가.
“나야 운공을 했지만 안 소저는 대체 언제 수련하려는 거요?”
“흥, 지금 염소가 봉황 걱정하는 거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신경 끄고 본인 선력이나 부지런히 키우셔. 다음에 붙으면 박살을 내 줄 거니까.”
이게 오냐오냐하니까!
하마터면 당장 결판내자고 할 뻔했지만 이 정도 도발에 욱하면 창피한 노릇인지라 참았다. 실은 아직 청화의 보충이 필요하다는 게 진짜 이유였다.
“그런데 이제 나한테 냄새가 안 나오?”
“그럴 리가 있어? 잠시 코를 닫아뒀을 뿐이야. 그러니 어서 그 홍주인가 뭔가로 씻어내.”
그러면 그렇지.
그건 그렇고 홍주는 어젯밤 헤어지기 전 내 고객들 중 한 명이 알려준 처방이었다. 그 처방에 따르면 몸에 밴 인분 냄새는 홍주로 씻으면 말끔히 사라진다고 했다. 그이는 내겐 귀인이나 다름없었다. 사람이 여럿 모이면 반드시 지혜로운 자가 있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나는 고흥으로 돌아갔다.
저자를 오가는 이들이 하나둘 나에게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나는 죽립을 벗어 그들이 짐작하는 바가 틀리지 않다는 걸 알려주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그러면서 보양에서 늘 일어나던 현상이 재현되었다.
어떻게 다들 나를 알아보느냐고? 그야 물론 내 유명세가 너무나 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못 믿겠다고? 흠, 제법이군.
사실 내가 단시간에 고흥 백성들의 주목을 끌 수 있었던 건 사전 조치 덕분이었다. 어제 나는 하운에게 오늘 중으로 고흥에 들 터이니 미리 소문을 내달라고 청했다. 고흥 사람들은 당금 천하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가 나타나기를 이제나저제나 기다리고 있었을 터였다.
보양만큼은 아니지만 고흥도 인구 오만을 상회하는 대처였다. 일단 소란이 일자 반 식경도 지나지 않아 내 주위엔 구름 같은 군중이 몰려들었다. 족히 오륙천 명은 되어 보였다. 충분한 숫자였다.
나는 입술에 침을 바른 후 여러 차례 반복해서 능숙해진 일장 연설을 시작했다.
“나는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오. 이번에 강호의 악명 높은 흉적인 귀면수라를 잡으러 고흥을 찾게 되었소.”
군중이 크게 동요했다. 귀면수라가 고흥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건 그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재빨리 소요를 수습했다.
“그 노물은 어제 죗값을 치렀소. 일을 마쳤으니 그냥 떠나려다 유서 깊은 고장에 온 김에 여러분에게 인사라도 하고 가는 게 도리일 듯해 이렇게 짬을 내었소.”
기대했던 대로 찬사가 쏟아졌다. 하지만 아직 청화를 일으키기엔 어림도 없었다. 나는 분발했다.
“아는 분들도 있을 터이지만 내가 강호에 나온 건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힘이 없어 원을 풀지 못하는 이들을 도와…….”
내게 호응하고 열광하는 사람들이 분출하기 시작한 작은 알갱이들이 모이며 푸르스름한 운무를 형성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뇌전이 일었다. 상단전에 피어오른 푸른 불꽃이 불길로 화할 수 있도록 나는 더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앞으로 강호십대악인 전원을 모조리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양민을 괴롭히는 흑도의 무리도 남김없이 쓸어버릴 참이오. 누구든 악행을 저지르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임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무너진 법도를 회복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나 자신도 잘 몰랐다. 무슨 상관인가. 근사하게 들리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
고월당은 고(古)미술품을 전문으로 다룬다고 했다.
나는 현판 한 귀퉁이에 보일락 말락 새겨진 네 개의 별로 그곳이 일급 상운임을 알았다. 자하옥관보다는 낮지만 의외로 등급이 높았다.
혹시 자하옥관이 취급한다는 음서의 유통에 관련된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렇게 작은 규모로도 거상들에게나 허락된다는 사성(四星)을 달 수 있었을 터였다.
하운을 만나기 전 나는 그가 내준 홍주로 몸부터 씻었다. 검붉은 색깔의 술이 가득 찬 항아리에 반각가량 전신을 푹 담갔다가 찬물로 서너 번 헹궈내니 개운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고는 하운이 내준 흑색무복을 차려입으니 내가 봐도 멋있었다. 이러니 나를 본 여인들이 노소를 불문하고 침까지 질질 흘리며 맥을 못 추지.
참, 최근엔 나에게 붙어있던 고자란 꼬리표가 떨어져 나갔다. 내가 양 관주와 주태에게 상운과 흑문을 동원해 진실을 알릴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에게 반한 여자들이 파리떼처럼 달라붙는 사태를 예방하고자 애초에 주근깨한테 써먹었던 핑계, 즉 ‘동자공(童子功)’을 해명에 덧붙였다.
하운은 나하고 사적인 친분을 쌓기 위해 안달복달했으나 나는 그에게 사담을 나눌 여지를 주지 않고 용건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남은 자가 하나도 없단 말이오?”
하운이 꾸중을 들은 하인처럼 고개를 떨궜다.
“면목이 없습니다. 하지만 공자께서 오늘 고흥을 찾을 거라는 소문을 내야 했는지라 그들이 달아나는 걸 막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렇더라도 분부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는 하운을 질책하지 않았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의 말마따나 미리 내 도래를 알렸으니 흑도의 악당들을 비롯해 제 발이 저린 자들이 줄행랑을 친 건 당연지사였다.
그렇더라도 못내 아쉬웠다. 고흥의 군중으로부터 부족한 청화를 채우긴 했으나 아직도 삼 푼이 모자랐다. 삼 푼이라고 하나 워낙 덩어리가 큰 탓에 적은 양이 아니었다.
아쉬워한다고 없던 떡이 생기는 건 아니기에 미련을 접은 나는 진도를 나갔다.
“적혈마옹은 여전히 거기에 있소?”
“오늘 정오경에 받은 전서구에는 그렇다고 합니다. 다음 소식은 아마도 자정 무렵에 올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꾸물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귀면수라의 예를 보건대 적혈마옹도 상당한 정보력을 갖고 있을 공산이 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하운에게 작별을 고했다.
“이만 가봐야겠소. 내 행사를 도와줘서 고맙소, 하 당주.”
하운이 감읍했다.
“미력하나마 여의공자의 협행에 힘을 보탤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만대의 영광으로 간직하겠습니다.”
나는 하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썩 마음에 드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이 정도의 치하를 아낄 까닭이 없었다.
뭔가 주저하는 기색이더니 하운이 괴상한 청을 했다.
“저어, 괜찮으시다면 가시기 전에 손 한 번 잡아 봐도 되겠습니까?”
뭔 소리야? 혹시 남색인가?
내가 미간을 모으자 하운이 제풀에 놀라 물러섰다.
“아, 아닙니다. 못 들은 걸로 해 주십시오.”
나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
발목의 부상도 덜 아물었거니와 자시에는 운공에 들어야 했기에 나는 하운이 내준 마차를 이용했다. 그편이 시간을 훨씬 단축할 수 있을 터였다.
목적지인 유성(柳城)은 고흥에서 동쪽으로 팔백 리 길이었다. 유성에는 강호십대악인의 일인이자 흡혈의 습성으로 악명 높은 적혈마옹 서태(徐泰)가 대장장이라는 뜻밖의 위장 신분으로 은신해 있었다.
적혈마옹의 무력은 초절정 중(中)으로 추정되었다. 석진과 엇비슷하거나 약간 떨어지는 수준이었다. 정상적인 대결이라면 쉬이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귀면수라에게 호되게 당할 뻔했던 나는 적을 경시하는 우를 되풀이하지 않을 작심이었다. 적혈마옹은 나를 대면하자마자 혈도를 찍히게 될 터였다. 팔다리도 부러지고.
가는 길은 평탄했다.
고흥에서 유성까지는 대로가 나 있는 데다 네 필의 준마를 부리는 마부의 솜씨가 워낙 훌륭해 야밤에도 질주를 계속할 수 있었다. 운공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유성 인근의 고촌에 당도해 있어서 깜짝 놀랐다. 아직 해가 뜨기도 전이었다.
고촌에는 상운의 문통(聞通)인 유성상단의 노광(盧光)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광은 칠십 줄의 노인이었다. 주태처럼 배가 불룩했고 턱살이 목젖까지 늘어져 있었다. 지렁이처럼 가느다란 눈 속에 든 누런 동공이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화려한 의복을 차려입고 있었으나 노광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게 저자세를 취했다. 그가 하도 굽실거리는 통에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노광이 나를 그렇게 대하는 데는 본디 비굴한 성정이라서가 아니라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얼마나 많은 고객이 모였는지 묻자마자 그가 땀을 줄줄 흘리며 느닷없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여의공자. 실은 그 악적이 간밤에 사라져버렸습니다.”
“뭐요?”
내 반사적인 질문에 노광이 엎어질 듯 자세를 낮추며 쩔쩔맸다.
“죄송합니다. 그를 감시하고 있었지만 저희로서는 붙잡을 방도가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아!
우려했던 사태였다. 적혈마옹은 귀면수라처럼 상당한 정보망을 깔아두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귀면수라를 처리한 건으로 어제 진종일 고흥이 떠들썩했으니 적혈마옹이 자기가 다음 목표물임을 알아채지 못했다면 더 이상한 일일 터였다. 전서구를 이용할 시엔 고흥에서 유성으로 소식이 전해지는 데 두 시진이면 충분했다.
“그자는 언제 사라졌소?”
“죄송합니다. 근거리에서 지켜볼 수는 없었던지라 그 악적이 도주한 정확한 시각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추격이 가능한지는 물으나 마나였다. 언제 내뺐는지도 모르는데 도주 방향이나 변장 상태 등을 알 턱이 없었다. 지금쯤 못 해도 일천 리는 달아났을 것이었다.
내일이면 안진을 멀찍이 떨궈놓으리라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는 맥이 풀렸다.
내 눈치를 보던 노광이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합니다.’를 읊조렸다. 그게 오히려 더 염장을 질렀다.
역정이 올라왔지만 나는 분풀이를 자제했다. 만고의 죄인처럼 구는 노광이 가여워서가 아니라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낸다고 도망친 사냥감이 스스로 돌아올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나는 최초의 질문을 되풀이했다.
“그건 그렇고 그자에게 원을 품은 이들은 얼마나 모였소?”
“총 오백육십사 명입니다.”
하이고, 아까워라.
절로 한탄이 나왔다.
일단 원사를 청취해 적화부터 챙길지를 두고 고민하다 포기했다. 이른 시일 내에 적절한 양의 청화를 일으키지 못하면 득보단 실이 될 공산이 컸다. 욕심을 부리다간 십중팔구 탈이 날 터였다.
아쉬움을 삼키며 노광을 위무했다.
“아무튼 수고 많았소. 그들에겐 사정을 설명하고 잘 돌려보내 주구려.”
푸르죽죽했던 노광의 안색이 풀렸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의공자.”
내가 노광에게 대인의 풍모를 보인 건 다른 속셈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혹시 내가 보양에서 어떤 행사를 했는지 알고 있소?”
상운의 문통답게 노광은 바로 말귀를 알아들었다.
“흑도의 악도들을 잡으실 생각이신지요?”
“그렇소.”
꿩 대신 닭이었다. 사실 적혈마옹은 그냥 꿩이 아니라 봉황이나 마찬가지였지만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유성은 보양 못지않은 대처이니 악종들도 넘쳐 날 터였다. 적혈마옹을 잡았을 시 거둘 성과에는 크게 못 미치겠지만 잘하면 일이백 건의 원사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노광이 내 기대에 부응했다.
“맡겨 주십시오.”
나는 의욕을 보이는 노인을 격려했다. 그러나 그도 나도 몰랐다. 예기치 않은 변수로 인해 이마저도 틀어질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