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37
제37화 – 반갑소.
발단은 안진의 청이었다.
“여기서 시간을 때울 거면 운양호(雲揚號) 구경하러 가면 안 돼? 거기 낙조가 중원팔경 중 하나라던데.”
한가한 소리 하지 말라고 일축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다. 노광이 명단을 작성하고 의뢰인들을 모으고 사냥감들의 소재를 파악하는데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하루는 걸릴 터였다. 그때까지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느니 절경 감상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사실 마음이 동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는 열망이 깃든 안진의 눈에서 오래전 노인네에게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그 유명한 운양호 낙조를 보고 가자고 떼를 쓰던 어린 날의 나를 보았다. 노인네가 짐짓 그럴 여유가 없다며 들어주지 않았을 때 얼마나 실망했던가.
“그럽시다.”
내가 선뜻 허락하자 안진이 기뻐서 아이처럼 방방 뛰었다. 괜히 흐뭇했다.
우리는 따사로운 아침햇살을 받으며 운양호로 향했다.
한적하던 길은 대로로 접어들자 인파로 북적거렸다. 중원오대호의 하나인 운양호를 보러 도처에서 몰려든 상춘객들이었다.
나와 안진은 각양각색의 행인들에 섞여 느긋하게 걸어갔다. 버드나무가 끝없이 늘어진 길가의 경치도 장관이었거니와 낙조가 오려면 멀었으니 서두를 까닭이 없었다.
사고가 생긴 것은 해가 중천에 오르기 시작한 오시 무렵이었다. 살랑거리는 물결 소리가 호수가 멀지 않았음을 알리고 있었다.
이곳저곳의 길에서 합류한 군중에 막혀 굼벵이의 속도로 나아가고 있는데 별안간 위협적인 고함 소리가 들렸다.
“비켜! 썩 비켜!”
나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좌측으로 돌아갔다. 거기는 마차들만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 엄청난 사용료를 물어야 했기에 평범한 민초는 들어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금역(禁域)이기도 했다.
멀리서 달려오는 마차의 기세에 눌린 마차들이 부랴부랴 길을 터주었다. 선행하던 마차들을 제치고 질주해오던 마차가 어느 순간 요란한 말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인도에서 빠져나온 작은 그림자가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순간 갈등했다.
그 직전의 상황은 이러했다.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작은 아이가 돌연 제 어미의 손을 뿌리치고 마차들이 달리는 도로로 뛰쳐나갔다. 아마도 나비를 쫓으려다 무심코 그런 모양이었다.
내버려 두면 아이는 말발굽에 치여 짓이겨질 것이었다. 마차는 아직 멀었지만 속도를 보건대 눈 깜짝할 사이에 아이를 덮칠 게 틀림없었다.
***
불현듯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올렸다.
그날 이름 모를 야산을 지나던 중 나와 노인네는 무슨 일인지 어미와 떨어져 혼자 있던 새끼 노루를 노리는 늑대를 발견했다. 곧 사냥에 나선 늑대는 단숨에 새끼 노루의 목덜미를 물고는 수풀 너머로 유유히 사라졌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나에게 노인네가 물었다.
나는 반문했다.
노인네는 답을 주지 않고 한참 동안 침묵했다. 그러더니 또 물었다.
말문이 막힌 노인네가 억지를 썼다.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노인네가 뚱딴지같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그날의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화였으나 나는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늘 잔잔한 호수 같았던 노인네에 눈동자에 격랑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만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날 그의 눈에 파도를 일으킨 게 슬픔인지 노여움인지 나는 지금도 헷갈렸다.
***
노인네를 위해서가 아니라 습성 때문에 나는 아이에게 일어날 변고를 막고자 했다.
그러나 안진이 나보다 한발 빨랐다. 그리고 마차는 그녀보다 반 발 더 빨랐다.
휘이이잉!
격렬한 울음을 합창하며 말들이 앞발을 치켜들었다. 탁월한 용마술을 과시하며 아이의 코앞에서 마차를 세운 마부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미친 것들!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사람들 틈에서 빠져나온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 엉덩방아를 찧은 아이를 안고서는 후다닥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자리엔 안진만 남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나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갈등했음을 알았다. 결정을 내리기 전에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지만 결국 금제를 어기지 못하고 아이를 방치했음도. 그녀를 이해했지만 뭔가 찜찜했다.
급정거한 마차에서 짜증이 덕지덕지 묻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이냐?”
기세등등하던 마부가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응답했다.
“죄송합니다, 소주. 갑자기 미친 연놈들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그만.”
마차 문이 열리더니 남색 경장을 차려입은 묘령의 여자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에 이어 풍채가 늠름한 청년도 내렸다. 일견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멍하니 선 안진을 쏘아보며 여자가 말했다.
“멀쩡하게 생겨가지곤 미친 척을 해? 그래, 그렇게 뒈지고 싶으면 소원을 들어주지.”
여자가 요대에 감은 연검을 빼어 들 태세이자 청년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참구려, 연매. 굳이 저 계집의 더러운 피를 보검에 묻힐 까닭이 없잖소?”
여자를 말리며 청년이 연신 안진을 힐끔거렸다. 그의 눈에 노골적인 음욕이 번들거렸다.
안진은 아무리 후하게 쳐줘도 절세미녀와는 거리가 멀었지만 나름 개성적인 미모의 소유자였다. 늘씬하면서도 굴곡진 몸매도 제법 육감적이었다. 청년이 미소년 같은 여인에게 끌리는 취향이라면 그녀에게 혹했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안진을 향한 청년의 눈길이 마땅치 않았던지 여자가 쌍심지를 켰다.
“이거 놔요, 문 공자. 본보기를 보이지 않으면 여기 이 버러지들이 본가를 우습게 여길 거예요.”
청년이 대꾸하기 전에 도로로 나간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안진을 잡아당겼다.
“갑시다.”
뻣뻣하게 굳어있던 안진이 맥없이 끌려왔다. 나는 그녀의 심정을 헤아렸다. 부지불식간에 금기를 어긴 충격이 상당할 터였다. 거기에 더해 기껏 나서놓고는 최후의 순간 손을 놓았던 처사에 자괴감도 들었을 것이었다.
“거기 서라.”
청년이 안진을 데리고 행인들에게로 돌아가려는 나를 멈춰 세웠다. 그의 요구를 무시하려다 그러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청년이 내게 으름장을 놓았다.
“누구 맘대로 도망치려는 게냐. 썩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지 못할까. 그 전에 죽립부터 벗어라. 상판 좀 보자.”
소동이 일어나면 내일의 행사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었기에 나는 대충 수습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자가 끼어들었다.
“아서요, 문 공자. 저이가 그 유명한 신비공자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군중이 조용히 술렁거렸다.
청년이 코웃음 쳤다.
“흥, 죽립을 쓰고 다닌다고 다 신비공자라면 날개가 달린 파리들도 죄다 새라고 우기겠구려. 저 절름발이가 그자라면 나는 십전공자요.”
여자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호원정은 얼마 남지 않았어요. 양 공자가 근처에 있을지도 몰라요.”
청년이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여인의 엄포에 위축된 게 창피했던지 잠자코 있던 나에게 화풀이를 예고했다.
“갈(喝)! 아직도 그러고 있느냐? 살 기회를 주었음에도 스스로 걷어찼으니 본 공자를 원망하지 마라.”
단숨에 내게로 육박한 청년이 내 가슴팍에 주먹을 내질렀다. 범인이라면 즉사를 면치 못할 경력이 실린 일권이었다.
설령 청년의 손속에 살의가 담겨있지 않았더라도 그를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여기서 무위를 드러내는 게 어리석은 처사임을 모르지는 않았다. 청년과 여자가 내 별호를 언급했으니 실질적인 정체와 무관하게 무조건 신비공자가 운양호에 출현했다는 소문이 퍼질 터였다. 그 이름을 듣고서 유성의 흑도들이 얌전히 목을 빼고 기다려 줄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청년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로 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일천삼백 년간 면면히 내려온 무림의 철칙이었다. 무인들이 지배하는 세상에 나왔으니 그들의 법을 따라 줄 심산이었다.
더욱이 나에겐 눈을 맞으면 상대의 대가리를 부수고 이를 뽑히면 상대의 심장을 씹어 먹어야 직성이 풀린다는 마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실 본성의 요구에 따른다면 내게 주먹을 꽂은 청년을 갈가리 찢어발겨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성질 내키는 대로 했다가 평생의 적공이 물거품으로 화하면 손해 막심이 아닌가.
하여 나는 가볍게 응징하는 선에서 내 본성을 달래기로 했다.
자신의 주먹이 내 명치 반 치 앞에서 멈추자 청년이 의아해했다.
다음 순간 그 표정은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입으로는 비명을 토해냈다. 내가 그의 손목을 가차 없이 비틀었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앞으로 영원히 오른손을 쓰지 못할 것이었다.
나는 청년의 왼 무릎도 찍어 찼다. 다리가 꺾인 그가 방금 전의 세 배는 됨직한 큰 괴성을 내질렀다.
“끄아악!”
순식간에 발생한 청년의 변고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여자가 뒷걸음질 치며 마차로 돌아갔다. 나는 의리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그녀에게 청년을 내던졌다.
“친구를 데려가야지.”
여자가 허둥지둥 청년을 부축해서는 마차에 들어갔다. 정신 줄을 놓은 채 내 행사를 지켜보고 있던 마부가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그 와중에 고삐를 잡은 손들은 삭풍을 맞은 문풍지처럼 떨고 있었다.
“가 보슈.”
내 말에 마부가 뜬금없이 우렁찬 목소리로 호응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마차가 나와 안진이 선 곳을 빙 돌아 부리나케 멀어지자 군중이 참았던 숨들을 내쉬기 시작했다.
***
안진은 보기에 안쓰러울 정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내가 청년에게 손을 쓴 일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성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나는 운양호 유람을 계속하기로 했다. 둘레가 이천팔백 리에 달하는 대호 곳곳에 드리운 절경들을 돌아다니다 보면 침중해진 안진의 기분도 어느 정도 풀릴 것이었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랬다고 이왕 산통이 깨졌으니 시간을 들이더라도 낙조까지 감상할 참이었다. 바다 같은 호수가 하늘의 황혼을 담아 황금빛으로 물드는 광경은 천상에서나 볼 법한 기경이었다. 오늘은 구름도 적당히 깔려있으니 오래도록 잊지 못할 일몰을 안진의 기억에 새길 수 있을 터였다.
내 배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안진은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하고서 내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소동이 있고 난 뒤 사람들은 나와 그녀로부터 거리를 두었으나 달아나지는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행여나 나를 놓칠세라 열심히들 쫓아왔다.
한 식경 후 호반에 이르렀을 때는 내 뒤에 그림자처럼 붙은 군중이 수천에 달했다. 그들을 거대한 혹처럼 달고서 나는 호수의 전경을 볼 수 있는 언덕의 팔각정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둔덕에 이르기 전에 걸음을 멈추어야 했다. 정자에서 솟아 나온 수십 줄기의 인영이 내게로 날아왔기 때문이었다.
다들 상당한 수준의 경공을 선보이며 내 면전에 떨어져 내린 무리의 선두에 선 자는 빼어난 외양을 지닌 미남자였다.
초면이었으나 나는 그를 보자마자 누군지를 알았다.
십전공자(十全公子) 양천(梁天).
내가 등장하기 전까지 당금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로 자타가 공인하던 초신성이었다. 그는 개세팔천에 밀려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한 오대세가의 부흥을 이끌 거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정파 무림의 희망이기도 했다.
나를 직시하며 양천이 포권을 취했다.
“나는 공주 양가의 천이라고 하오. 근자에 온 대륙에 명성을 떨친 협객을 친견하게 되어 영광이오. 반갑소.”
양천의 눈을 본 나는 신음성을 흘릴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