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38
제38화 – 조심하시오.
그것은 노인네의 눈이었다.
투명하리만치 맑으면서도 한없이 깊은 눈.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과 일백 년의 정진으로 일군 지혜를 동시에 담은 눈.
나를 아꼈던 눈. 내가 사랑했던 눈.
어떻게 저 사내가 그 눈을 갖고 있단 말인가.
내가 요염한 미녀에게 홀린 얼뜨기처럼 넋을 잃고 바라보자 양천의 눈빛에 의아함이 서렸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나는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오.”
내 소개를 들은 양천이 그림 같은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여의공자였구려. 실은 오늘 용봉회가 끝난 후 보양으로 가서 귀하를 만나볼까 하던 참이었소. 그런데 여기서 보는구려. 아무래도 우리는 인연이 있는 것 같소.”
양천의 너스레를 한 귀로 흘리며 나는 그의 좌우에 늘어선 남녀들을 훑어보았다. 하나같이 때깔들이 좋았다.
아까 안진에게 검을 부리려고 했던 여자도 구석 자리에 서 있었다. 여자는 내 눈길이 닿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내게 손목과 무릎이 부러진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용봉회는 오대세가 후예들의 모임이었다.
나는 이미 그들을 본 적이 있었다. 십삼 년 전 진양호에서였다. 당시 노인네는 호수에 띄운 호화로운 배 위에서 시끌벅적한 유흥을 즐기고 있던 자들을 가리켜 정파 무림의 동량들이라고 일러주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정파의 미래가 암울할 것임을 예감했다. 다들 겉만 번지르르할 뿐 출중한 기재를 갖춘 자는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나로서는 그들이 당연한 권리인 양 드러내는 오만함이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면면은 다 바뀌었지만 오늘의 ‘용봉’들도 별반 다르지 않을 듯싶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지 않은가.
오다가 시비가 붙었던 청년과 여자는 광마도의 아들은 물론이고 초승달 눈썹의 원수였던 창진무관의 교두만도 못했다. 다른 이들도 대동소이할 터였다.
그러나 어디든 예외는 있는 법이었다. 양천이었다. 그는 한 눈에도 특별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가히 군계일학이었다.
나는 양천의 말을 받아주었다.
“나를 왜 찾아오려고 한 거요?”
양천은 에둘러 가지 않았다.
“내게서 거추장스러운 허울을 벗겨준 이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더구려. 아울러 기회가 허락된다면 강호를 진동시킨 무위를 직접 견식하고 싶었소.”
결국 나와 무력을 견주고 승리를 쟁취해서는 무림 최고 초신성의 자리를 되찾고자 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무슨 자신감이지? 양천이 꺾은 자들 중 최강으로 평가받는 황산일마(黃山一魔) 소영강(蘇永崗)의 무위는 높게 쳐줘도 초절정 중하(中下)에 불과했다. 내 상대였던 광마도와는 두 수 이상의 차이가 났다.
나는 양천의 비무 청을 수락하지 않을 작심이었다.
그가 나와 손을 섞기엔 부족한 상대라서가 아니라 구미가 당기지 않아서였다. 아무 이득도 없는 싸움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이러한 판단을 수정해야 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양천의 언사에 담긴 함의를 이해한 군중이 흥분으로 달아올랐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운양호 낙조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구경거리가 펼쳐지는 셈이었다. 역사적인 대결을 직관한 설은 자자손손 내려보낼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양천과 어울려주기로 한 건 군중의 심사를 헤아려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기대감의 열기가 내 상단전에 청화를 일으킨 게 마음을 바꿔 먹은 진짜 이유였다.
이런 게 가능했다니! 마치 도라지를 캐려다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횡재한 기분이었다.
***
“그렇다면 보양까지 갈 필요 없이 오늘 조우한 김에 체험해 보시지.”
내 말에 숨죽인 채 나와 양천을 지켜보던 군중이 크게 반색했다. 입을 열 수 있었다면 환호작약했을 터였다.
뜻밖에도 양천이 뜨겁게 달아오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고맙소. 하지만 귀하에게 배움을 청하는 건 다음으로 미루는 게 좋겠구려.”
불꽃에서 불길로 커져 가던 청화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나는 나를 실망시킨 양천을 조롱했다.
“기세 좋게 떠들더니 막상 나와 붙으려니까 간이 졸아붙은 모양이군. 이럴 거면 뭐 하러 그런 소리를 한 거요?”
내가 그들의 심사를 대변해주자 군중이 일제히 양천에게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엷은 쓴웃음을 짓긴 했으나 양천은 침착한 태도를 견지했다.
“나도 여기 모이신 분들처럼 귀하의 무공을 친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소. 더욱이 몸소 겪을 수 있다면 더없는 영광이오. 하지만 지금 귀하는 전력을 쏟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잖소? 비록 하잘것없는 실력이지만 부상을 입은 이를 상대로 무기를 들고 싶지는 않소. 그러니 귀하의 몸이 완전히 나으면 그때 연락해주길 바라오. 언제든 달려가리다.”
“어째서 내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하오?”
“걸음걸이가 불편한 걸 봤소. 다리에 문제가 있다는 뜻 아니겠소? 손목에 부목을 댄 붕대를 감은 걸 보니 오른손도 온전치 못한 모양이오만. 광마도와의 일전이 끝난 지 여드레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부상이 아물기엔 너무 이르긴 하오. 혹시 내상도 입지 않았소? 만약 그렇다면 무리해서는 안 되잖소? 나는 귀하가 회복할 때까지 기다리겠소.”
나는 양천의 눈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겁이 나서 발을 빼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정정당당한 승부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흠, 이거 꽤 멋진 친구가 아닌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호숫가에 적당한 바위가 보였다. 나는 바위 쪽으로 부상을 입은 오른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검지로 지풍을 발출했다. 이십 장 가까이 떨어져 있던 황소만 한 바위가 박살이 났다. 군중 가운데 성급한 이들 몇몇이 미리 토해낸 탄성은 우레와 같은 함성으로 바뀌었다. 호수에 면한 솔숲에서 쉬고 있던 새들이 난데없는 굉음에 놀라 푸드득 푸드득 소리를 내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나는 양천에게 시선을 돌렸다.
“조금 다치긴 했지만 보다시피 재주를 부리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소. 발에도 문제가 없음을 보여주어야겠소?”
양천에게 답을 할 겨를을 주지 않고 내가 수직으로 비상하자 군중이 열광적인 환호성을 천공으로 올려보냈다. 일부러 서서히 지상으로 하강한 나는 원래 자리에 착지했다.
“어떻소? 나는 준비가 됐소만?”
잠시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양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꺼이 가르침을 청하겠소.”
수천 군중이 한마음으로 그의 결정을 반기며 내 상단전에 푸른 불꽃의 향연을 일으켰다. 이렇게 해서 나는 기대 이상의 소득을 챙기게 되었다.
***
우리는 장소를 옮겼다.
사실 그 자리에서 해도 별 상관은 없었으나 청화를 갈무리할 시간이 필요했기에 나는 굳이 좀 더 넓은 곳으로 가자고 제안했다. 양천은 군소리 없이 수용했다.
아직도 상념의 늪에 빠져 있는 안진을 다독여가며 호숫가로 나아간 나는 그녀를 커다란 느티나무 옆에 세워두었다. 그러고는 거기서 꼼짝 말고 있으라고 이른 후 공터로 몸을 날렸다.
“여기가 좋겠소.”
양천은 오대세가의 떨거지들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군중을 뒤로 물렸다. 그가 정한 경계선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불평하자 양천이 해명을 겸해 경고했다.
“자칫 잘못하면 비무의 여파에 휩쓸려 심각한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이게 최소한의 안전거리이니 절대로 앞으로 나오면 안 됩니다.”
그것만으로는 안심이 안 됐는지 양천은 용봉회의 동료들에게 엄격한 통제를 부탁했다. 스무 명 남짓한 젊은 고수들이 칠팔 장 간격으로 늘어서서는 눈들을 부라리자 구시렁대던 이들은 찍소리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시간을 들여 꼼꼼하게 조치를 마친 양천이 비로소 내게로 다가왔다.
“기다려주어서 고맙소. 이제 시작합시다.”
양천의 무기는 부채와 봉이었다. 그는 그 이질적인 병기들을 양손에 번갈아 쥐며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전날 양 관주가 건네준 강호인명록에 적힌 정보로는 그랬다.
그러나 나와 삼십 보의 거리를 격하고 선 양천은 허리춤에 매달려있던 부채만 빼 들었을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어째서 등에 걸린 봉을 꺼내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무얼 부리건, 혹은 부리지 않건 전적으로 그의 소관이었다. 나는 그저 신속히 승리를 쟁취한 후 다시금 군중이 선사할 청화의 불길을 만끽하면 그만이었다.
차르릉.
양천이 부채를 펼치자 쇠사슬이 철판을 두드리는 것 같은 기음이 일었다. 귀에 거슬렸기에 나는 청각을 닫았다.
내가 왼팔을 앞으로 뻗은 채 가만히 있자 양천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럼 내가 선공하겠소. 조심하시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양천의 신형이 강궁에서 쏘아낸 화살처럼 엄청난 속도를 과시하며 내게로 육박해왔다.
캉!
기방을 두른 내 좌수와 그의 철선(鐵扇)이 충돌하며 본격적인 비무의 시작을 알렸다.
첫 번째 격돌과 이어진 오륙 초의 공방전에서 나는 양천의 무위가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두 단계는 위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손쉬운 승리가 어려울 것임도.
양 관주의 정보를 바탕으로 양천이 석진과 평수거나 기껏해야 반 뼘쯤 위일 거라 예단했던 나는 방심의 대가를 톡톡히 치를 뻔했다. 만약 그가 첫 수에 전력을 실었다면 팔이 부러졌을 터였다.
초수가 늘어남에 따라 양천의 부채에 실린 공력이 증가했다. 여섯 번째 공방에서는 최대치에 준하는 선력을 기방에 실어야 했다. 강기를 머금지 않았음에도 양천의 부채는 도강을 일으켰던 광마도의 칼보다 위협적이었다.
내가 퇴보를 밟지 않고 악착같이 제자리를 고수하며 맞불을 놓은 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물러서면 바로 주도권을 뺏기고 열세에 처할 거라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쌍방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하고도 치열한 육탄전이 이어졌다. 순식간에 이십여 초를 교환한 우리는 상대가 먼저 호흡을 재개하기를 기다리며 신경전을 벌였다. 누구라도 먼저 숨을 내쉬는 쪽은 속절없이 밀릴 터였다.
갈수록 오른 손목의 부상이 부담으로 작용했다. 기방으로 보호하고는 있으나 골절 부위가 어그러지고 있었다.
초근접전인데다 워낙 빠른 공방을 주고받았기에 지공을 펼칠 여유가 없다는 점도 악조건이었다. 양천은 현란한 선술을 현시하며 내가 지풍을 쏘아낼 기회를 원천 봉쇄했다. 정신없는 공방전의 와중에도 양천이 봉까지 꺼내 들었으면 어떤 양상이 펼쳐졌을지를 상상하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십중팔구 개전 초기에 수세에 몰렸을 터였다.
나는 세상은 넓고 강자는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강호의 오래된 격언이 진실임을 절감했다.
가볍게 몸이나 풀 하수로 여겼던 이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전력을 다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을 호적수였다.
안진과의 대결 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강렬한 호승심이 일었다. 그러나 심상을 채운 승리에 대한 욕심은 승부에 보탬이 되지 않고 화만 초래했다.
과욕으로 인해 일순지간 힘을 쏟아부은 나는 빈틈을 노출했다. 살벌한 공방전에도 불구하고 시종여일 냉정한 눈빛을 유지하고 있던 양천의 동공에 청광이 번득였다. 나는 내 실수를 그가 유인책으로 오판하기를 기대했지만 허망한 바람이었다. 어느새 접힌 그의 부채가 비수처럼 내 왼 어깨를 찔러왔다.
대응 방법은 두 가지였다. 몸을 비틀어 피하거나 기방으로 견뎌 내거나.
둘 다 미봉책이었다. 양천의 후속타에 대처할 수 없을 터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아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비상 국면이었다. 타개하려면 비상 수단을 동원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