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41
제41화 – 어떻소?
“어서 오세요, 공자님. 아침부터 하루 종일 잠도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거짓말이 아닌 듯 티 하나 없던 흰자위가 벌겋게 충혈된 주근깨가 내 앞으로 조르르 달려왔다. 나는 그녀가 무사해서 안도했다.
“그는 안에 있소?”
“그라니요?”
“무영도수 말이오.”
“네?”
어리둥절해하는 주근깨를 보며 나는 질문을 바꿨다.
“양 관주는 어디 있소?”
“그들이 데려갔어요.”
“그들이라니?”
“정검문의 검사들이요.”
“언제?”
“어젯밤에요.”
“어디로 갔소?”
“몰라요. 그들이 관주님을 데려가면서 저희한테 공자님이 오시면 이곳에서 대기하도록 이르라고 했어요.”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을 오가던 이들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다들 고개를 숙이며 예를 차렸다.
나는 마차 문을 열고 안진을 불렀다.
“안 소저. 혼자 나올 수 있소?”
별 기대를 안 했는데 안진이 꾸물거리더니 행동이 굼뜬 노파처럼 어기적어기적 마차에서 내렸다. 주근깨가 호기심을 보였다.
“누구예요?”
“그냥 아는 사람이오. 내 일이 끝날 때까지 이이를 봐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소?”
“그럼요. 공자님 청이라고 하면 총관이 오늘 일을 빼줄 거예요. 제가 잘 돌봐줄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어머, 가여워라. 이렇게 어여쁜 아가씨가 어쩌다…….”
주근깨가 안진의 손을 잡으며 제 가슴에 갖다 대자 뭐가 좋은지 안진이 배시시 웃었다.
나는 마부의 노고를 치하한 후 유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러고는 자하옥관에서 떨어져 널찍한 공터로 갔다. 가능한 한 많은 군중을 끌어오기 위함이었다.
하나는 뜻대로 되고 다른 하나는 예상을 빗나갔다.
일다경도 지나지 않아 나를 보러 군중이 구름같이 모였지만 무영도수와 정검문의 검사들은 해가 지고 한참이 지났는데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고는 작전을 구상했다.
전날 무영도수의 신상 정보를 건네주며 양 관주는 그의 무공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특별히 첨가했다. 별호가 알리는 대로 그는 신법과 도공을 주특기로 삼았다. 너무나 빨라 그림자조차 남기지 않는다고 해서 무영(無影)이고 십자무련에서 칼을 쓰는 자들 중 으뜸이라 하여 도수(刀帥)였다.
나는 석진에게 애를 먹였던 팔보추혼을 떠올렸다.
무영도수는 그 뚱보 노인과 흡사한 방식으로 싸우지 않을까 싶었다. 팔보추혼의 수도(手刀)를 칼로 바꾸면 얼추 그림이 나왔다. 그렇다면 근접전보다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공방을 벌이는 편이 내게 이로울 터였다.
하지만 보법의 속도 면에서 무영도수가 뚱보 노인을 압도한다면 바짝 붙어서 접전을 펼치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무게가 일백 근에 달한다는 중도(重刀)는 초근접전에서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것이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어느 쪽이 현명한 방책인지 결론을 내리기 어려웠다. 결국 직접 손을 섞어봐야 알 수 있을 듯싶었다.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흐름을 탔는지 갑자기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보는 눈들이 많아야 청화도 커질 터였기에 나는 그들을 잡았다.
“오늘 어쩌면 십자무련의 총사인 무영도수와 일전을 치르게 될지도 모르겠소.”
이 말의 여파는 엄청났다. 공터를 떠나고 있던 이들이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그들 중 몇몇이 전한 소리를 듣고는 도처에서 인파가 몰려들었다. 일각도 지나지 않아 수천 군중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너른 공터를 가득 메웠다. 내가 선 공간의 넓이도 이십 평가량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비무가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나는 무영도수가 오면 군중을 이끌고 좀 더 널찍한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몇 시진이 지나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점차 초조해졌다.
대놓고 불평하지는 않았으나 군중 대부분이 오랜 기다림에 지쳐 노골적인 불만을 면상에 담았다. 그러다 어느 시점부터 장내를 벗어나는 이들이 속출했다.
그러나 내가 조바심이 난 건 이런 상황 때문이 아니었다. 해시(亥時:오후 9시~11시)를 알리는 종이 울린 지 한참이 지났다. 자시가 임박했다는 뜻이었다. 이대로는 무영도수가 와도 문제고 오지 않아도 문제였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나는 운공에 들 장소를 찾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주근깨에게 맡겨두었던 안진을 부르려고 하자마자 멀리서 두 줄기의 인영이 날렵한 경공을 선보이며 공터로 쇄도해왔다.
둘 다 안면이 있었다. 그들은 전날 창천검이 대동하고 왔던 정검문의 중견검사들이었다. 십위에 속해있거나 호법들일 터였다.
둘 중 땅딸막한 자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총수께서 기다리고 계신다. 따라와라.”
내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두 검사가 동시에 몸을 돌리더니 경신을 전개했다. 나는 그들을 쫓지 않고 주근깨에게로 갔다. 땅딸보 검사가 멀리서 나를 닦달했다.
“뭐 하는 게냐? 어서 따르지 않고.”
땅딸보의 요구를 묵살하고 나는 주근깨에게서 안진을 넘겨받았다. 주근깨가 전장에 낭군을 떠나보내는 아낙 같은 표정을 지었다.
“조심하세요, 공자님.”
나는 눈물을 찔끔거리는 주근깨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러고는 안진을 안아 들고서 검사들에게 날아갔다. 내가 일부러 눈을 부라리자 땅딸보 검사가 감히 내 시선을 맞받지 못하고 가뜩이나 짧은 목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츠렸다.
***
낯익은 경로였다.
설마 했는데 검사들은 정말로 전날 광마도와 혈전을 벌였던 고영산으로 나를 이끌었다.
산등성이를 넘자 아래편 절곡에 개미 같은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나는 두 검사를 앞질러 그리로 내려갔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보다 뚜렷한 윤곽이 잡혔다. 열 명 언저리의 무리가 한 데 모여 있었고 인영 하나는 홀로 떨어져 있었다. 전자는 정검문 패거리일 터이고 후자는 무영도수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무영도수가 선 곳으로 달려가 그의 십여 보 전면에 섰다.
달빛을 받은 무영도수의 얼굴은 어딘가 귀기스러웠다. 딱히 인상이 험해서가 아니라 삐쩍 마른 체구에 비해 두부가 기형적으로 커서 그런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나를 응시하며 무영도수가 뜻밖의 일성을 토해냈다.
“그 계집은 뭐냐?”
나는 안진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서 있지 않고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나는 주근깨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답을 내놨다.
“그냥 아는 사람이오.”
좌측에서 귀에 익은 칼칼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지금 장난하는 게냐?”
무시할까 하다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직시했다. 든든한 우군이 있어서 기세가 올랐던지 창천검이 단단한 눈으로 내 눈길을 받아냈다.
“따로 맡길 이가 없어서 데리고 온 거요. 내 일과 무관한 여인이니 건드리지 말길 바라오. 혹시나 싶어 덧붙이는데 만약 이 여인에게 손을 댔다가 탈이 나면 댁들은 무사하지 못할 거요. 성질머리 더러운 무시무시한 노인네가 뒤에 도사리고 있거든.”
“우리를 협박하는 게냐?”
“뭐, 그렇게 생각하든지. 아무튼 경을 치르기 싫거들랑 내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게 좋을 거요. 그나저나 내 친인들은 어디 있소?”
“그 떨거지들을 걱정할 때가 아닐 텐데. 정녕 네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모른단 말이더냐?”
“모르긴. 뒷골목의 흑도마냥 애먼 이들을 인질로 잡고서 사람을 부른 후 떼거지로 핍박하는 자들을 상대하러…….”
“닥쳐라! 어느 안전이라고 주둥이를 함부로…….”
창천검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도중에 끊어야 했다. 무영도수가 손을 내저어 그의 말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손짓 한 번에 창천검을 벙어리로 만드는 위엄을 과시했지만 무영도수는 매의 눈으로 나를 노려볼 뿐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협상을 시작하려는 찰나 입을 열었다.
“듣던 대로 무림의 존장에 대한 예의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종자로구나.”
“나는 오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공공문의 당대 문주요. 배분으로 따지면 당금 무림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소. 그러니 내가 경어를 쓰지 않은 건 무례한 처사가 아니오.”
“공공문은 선맥의 일파라고 들었다. 무림과는 별개의 세상에서 노니는 이인들이니 배분을 따지는 게 우습지 않으냐? 그보다 선인들은 세사에 일절 관여치 않는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을 벌이는 게냐?”
나는 감탄했다. 양 관주도 모르는 내용을 알고 있다니. 십자무련 내에 누군가 식견이 대단한 인물이 있다는 뜻이었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전통을 따르지 않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자 하는 이가 나오기 마련이오.”
“네가 그 별종이더냐?”
“별종이라기보다는 개척자라거나 선구자라고 해 둡시다.”
“……어쨌거나 네 행사는 선맥과는 무관한 것이렷다?”
“그렇소.”
“그 아이도 선인이더냐?”
“그렇지 않소. 이 여인은 도가 출신이오. 그 이상은 묻지 마시오. 이 여인에 대해 알려줄 수 있는 건 거기까지니까. 분명한 건 어찌어찌 나와 인연을 맺었지만 이번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요. 그러니 이 여인은 내버려 두시오. 방금 전에 저치들에게 주었던 경고는 결코 공갈이 아니오. 누구라도 이 여인을 잘못 건드리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거요.”
“…….”
“우리 문제나 얘기합시다. 나를, 그리고 내 친인들을 어쩔 참이오?”
묵묵부답하던 무영도수가 칼을 빼 드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나는 급전이 벌어지기 전에 준비했던 말을 쏟아냈다.
“할 말은 많으나 시시비비를 따지지는 않겠소. 하지만 적어도 내 친인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보장을 해줘야겠소. 그것이 불원천리 달려온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니겠소?”
“…….”
“또 한 가지. 나는 당신과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소. 우리 사이엔 어떤 원한도 없잖소? 그러니 이 대결의 초수를 오십으로 제한합시다. 그 안에 당신이 나를 쓰러뜨리면 처분에 맡기겠소. 그렇지 않고 오십 초가 지난 후에도 내가 온전하면 당신도 칼을 거두길 바라오. 물론 결과와 무관하게 내 친인들을 풀어줄 것을 확약받아야겠소. 그러지 않으면 나는 당신과 싸우지 않고 이 자리를 뜰 거요. 당신이 빠른 걸 알고 있지만 나를 잡기는 쉽지 않을 거요. 어떻소?”
“…….”
무영도수가 이렇게나 과묵한 위인이었던가. 양 관주가 알려준 정보엔 그런 성향이 들어있지 않았는데.
내 패를 받을 건지 말 건지 일언반구도 내뱉지 않던 무영도수가 갑자기 칼을 쥔 팔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엉뚱한 방향으로 내리쳤다. 나는 그의 뜻을 알아들었다.
내가 안진에게서 떨어지자 비로소 무영도수의 도풍이 나에게로 날아왔다. 전신에 기방을 두른 나는 십지에서 지풍을 쏘아내며 칼바람 속으로 뛰어들었다. 이로써 그와 나의 일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같은 도객이었으나 오절도나 광마도와는 차원이 달랐다.
무영도수가 일으킨 칼바람은 대번에 전권을 장악했다. 강기를 뿜어내지 않았음에도 강력하기 그지없었고 워낙 범위가 넓어 피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오십 초를 의식했던지 무영도수는 첫 수부터 강공으로 나왔다. 나도 처음부터 선령을 끌어올려 전력으로 대응했다.
칠팔 초의 공방전 만에 나는 확실히 알았다. 무영도수의 공력은 현재 내가 운용할 수 있는 선력보다 심후했다. 속도 또한 뚜렷하게 나보다 우위였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는 공수의 능수능란함이었다. 실전경험의 부족이라는 내 약점이 그에겐 압도적인 이점으로 작용했다.
그럼에도 무영도수는 나를 쉬이 잡지 못했다. 선령의 도움으로 도풍의 약한 고리를 찾아 활로를 연 데다 이따금 강력한 반격으로 그의 후속타를 미연에 방지했기 때문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양천에게 적잖은 빚을 졌다. 오전에 그와 치렀던 비무에서 그가 보였던 수법을 차용해보았는데 효과가 제법 쏠쏠했다. 내 목을 치려다 자기 팔을 내줄 우려가 있었기에 무영도수는 나를 궁지에 몰고도 번번이 결정타를 보류해야 했다.
어느 순간부터 무영도수의 공세가 거세졌다. 초수를 세어보진 않았으나 오십 초에 가까웠을 터였다.
이번만 잘 버티면 극적 타결의 가능성이 열리리라 기대한 순간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가공스러운 칼바람이 나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