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48
제48화 – 핏덩이를 상대로 헛손질만 하다니.
우리 삼인조는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저자를 지나갔다.
물론 절대다수의 시선은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에 나는 여유롭게 걸음을 옮겼다.
양천도 그런 경험이 많은지 주눅이 들거나 어색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무명소졸이 된 자신의 상태를 즐기고 있는 느낌이었다. 부채는 물론이고 단봉도 바지춤에 감췄으니 아무리 눈썰미가 좋은 이라도 그가 십전공자임을 상상도 못 할 터였다.
내게 안긴 안진은 당연히 누가 보건 말건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나는 그 애물단지를 양천에게 떠넘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손만 대도 질색팔색을 하는지라 어쩔 수 없이 내가 맡아야 했다.
강호 고수와의 신성한 대결을 앞두고 해롱거리는 여자를 안고 가는 한심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으나 그녀의 걸음걸이로 가면 해 질 녘에야 장원에 이를 수 있을 터이니 달리 방도가 없었다.
칠만 평이 넘는 면적을 자랑하는 장원답게 대문도 광대했다.
마차 열 대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도 통과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내가 저자에서부터 몰고 온 수천 군중은 활짝 열린 문에 들어설 수가 없었다. 구룡장의 무사들이 입장을 차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초청장을 소지했거나 신분을 나타내는 명패를 가진 이들만 골라서 들여보냈다.
나는 대문 밖으로 나를 마중 나온 구룡장의 총관에게 나를 따라온 이들을 안으로 들일 것을 요구했다. 흉포한 늑대 같은 면상의 소유자임에도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살랑거리던 총관은 난색을 표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며 내게 양해를 구하고는 장원으로 달려들어 갔다.
잠시 후 숨을 헐떡이며 다시 튀어나온 총관이 출입을 통제하던 무사들에게 내 뒤에 대기하고 있던 군중을 대흥전 경내로 이끌 것을 명령했다. 군중이 열화와 같은 함성으로 구룡장의 조치를 반겼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청화를 피워 올리는 데는 실패했다. 관전이 가능해진 게 내 덕분임을 모르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나는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모두에게 들리도록 총관에게 큰 소리로 말할 것을.
대흥전은 팔 층 전각이었다.
그 앞은 광장이었는데 꽤 넓었으나 내가 끌고 간 군중이 들어차자 여유 공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비무에 앞서 군자도를 비롯한 구룡장의 수뇌부와 인사를 나눴다. 다들 어중이떠중이들을 장원에 들이도록 한 내 처사에 불만을 품은 게 역력했으나 대놓고 내색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렇게 절대천룡이 오셨으니 본장의 용들은 토룡으로 전락하겠구려.”
군자도가 중후한 인상만큼이나 묵직한 목소리로 자조했다. 나를 둘러싼 그의 의형제들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아무리 농이라도 자신들을 지렁이라고 부르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아홉 마리 용들이 모인 장원이라곤 하나 기실 군자도를 제외하면 하나 같이 별 볼 일 없는 쭉정이들이었다. 초절정 극상에 육박하는 무위의 강자를 보유하고도 구룡장이 중추십삼파에 들지 못한 이유였다.
나하고 말 한마디라도 더 섞으려고 애쓰는 쭉정이들에게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 진도를 나갔다.
“아직 정오가 되려면 멀었지만 바로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군자도는 흔쾌히 내 제안을 수용했다.
“허허, 그럽시다. 빈전(賓殿)에서 여독을 풀라고 권할 참이었소만 하수가 고수의 사정을 봐주는 것도 우스운 노릇이니 그대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나는 군자도가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를 곱게 다루기로 했다.
***
비무 개시에 앞서 나는 군중의 호응을 유도했다.
그들이 발산하는 열기가 내 상단전에서 청색의 운무를 일으켰다. 그러나 불꽃을 피우지는 못했다. 군자도가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나, 현장은 오늘 강호의 동도들 앞에서 당금 무림 최고의 초신성인 절대천룡의 신공절학을 체험하고자 하오. 우선 부족한 나에게 이런 영광스러운 기회를 허락한 절대천룡에게 감사를 표하는 바이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터이니 성에 차지 않더라도 다들 너그러이 봐 주시구려들.”
군중은 우레와 같은 환호로 군자도의 겸허함에 화답했다.
나는 그의 말을 받아 일장 연설을 할 채비를 했다. 잘하면 비무가 시작되기 전에 청화를 일으킬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 겨를을 주지 않고 군자도가 대뜸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에 대한 호감이 싹 사라졌다.
군자도의 칼은 흉포했다. 그 방면으로 악명을 떨친 광마도와 비교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에게 군자도란 별호가 붙은 까닭은 상대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즉살하기 때문이었다.
이십 일 전이었다면 고전을 면치 못했을 터였다. 팔 단계에 올랐지만 광마도에게조차 초반엔 애를 먹지 않았던가. 군자도의 무력은 확실히 광마도를 능가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굳이 선령을 동원하지 않고도 여유롭게 군자도를 상대할 수 있었다. 요 보름 동안 내 선력이 크게 증강된 덕분이지만 그와 같은 칼잡이들에게 익숙해진 것도 한몫했다.
내가 딱히 도객들과 인연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무림에 몸담은 자들의 절반은 칼을 무기로 썼다. 나머지 중 삼 분의 이는 검을 병기로 삼았다. 무인들의 십중팔구는 도검을 부린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내가 도객들을 자주 만난 것도 당연지사였다.
각설하고 내 입장에서 군자도는 강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방만으로 능히 그의 도풍을 감당할 수 있었기에 위험한 상황에 처할 가능성은 전무에 가까웠다. 도강(刀剛)에 직격당하지만 않는다면 생채기조차 나지 않을 터였다.
군자도의 맹공을 받아주다 이십 초가 경과했을 시점부터 슬슬 지풍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가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도록 강도를 조절했다. 너무 압도적인 모습을 드러내면 곤란했다. 우위를 점하되 전력 차이가 크지 않음을 보여주어야 했다. 그래야 차후의 비무 행이 수월하게 풀릴 것이었다.
지공의 구사와 함께 형세를 뒤집은 나는 서서히 군자도를 압박했다. 내심 초수의 상한선으로 정했던 오십 초 어림에 그의 항서를 받아낼 작심이었다.
열세에 처했음에도 악착같이 버티던 군자도가 내 의중을 헤아린 듯 돌연 배전의 위력을 담은 칼바람을 날렸다. 나는 맞불을 놓지 않고 물러섰다. 굳이 결정타를 먹일 이유가 없었다. 모든 힘을 쏟아낸 군자도가 제풀에 쓰러지면 그걸로도 충분했다.
과연 무시무시한 폭풍을 일으킨 군자도의 칼이 일순지간 얌전해졌다. 하지만 내력이 소진되었음에도 군자도는 여전한 투지를 발산했다. 그의 선택을 돕기 위해 어깨에 지풍을 꽂으려던 나는 소름이 돋았다.
***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인지하기 전에 나는 고꾸라지듯 앞으로 엎드렸다. 그러자마자 섬뜩하고도 날카로운 기운이 내 등판을 스치고 지나갔다. 가만히 있었더라면 영락없이 목덜미를 내주었을 터였다.
예기치 않았던 암습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았다. 상당한 경력을 실은 무형무음의 암기(暗氣)가 잇달아 내 전신을 공략해왔다. 나는 미친 듯이 몸을 놀리며 암기의 소나기를 빗겨냈다. 중인의 눈에는 내가 마치 땅바닥에서 발버둥 치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본능이 경고성을 울리자마자 선령을 끌어올린 덕분에 아슬아슬하게 모든 공격들을 피해낸 나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암기를 날린 자를 찾았다. 그때 군자도는 내 바로 뒤에 있었다. 그가 등을 노리면 난처해질 터였지만 미지의 암습자를 대비하는 게 우선이었다.
다행히 군자도는 내 뒤통수를 칠 의사가 없는 모양이었다.
“왜 그러시오?”
군자도가 내 돌발행동의 이유를 물어왔다. 나는 그에게 답을 주지 않고 그와 의아한 표정들을 공유한 군중을 훑었다. 그러나 나를 암습한 자를 가려낼 수 없었다.
선령을 유지한 채 청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그러고는 집중했다. 그러자 수천 개의 각기 다른 호흡들 중 유독 신경에 거슬리는 숨소리가 잡혔다. 나는 그리로 시선을 고정했다.
내 눈길을 받은 이는 사십 대 장한이었다.
찢어진 눈에 비틀린 입술이 야비한 인상을 주는 사내였다. 나는 등줄기가 서늘했다. 모를 땐 몰랐는데 알고 보니 한눈에 몰라본 게 이상할 만큼 유명한 인사였다.
하지만 나나 다른 이들이 바로 사내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건 사내가 약간의 위장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상징하는 특징은 콧등에 박힌 커다란 점이었다. 헌데 사내는 마치 주근깨가 화장으로 주근깨를 감쪽같이 가린 것처럼 백분 따위로 점을 덮은 모양이었다.
점이 사라진 사내는 외관상으로는 평범한 중년인에 불과했다. 실제 나이는 팔십에 가까움에도.
전날 양 관주가 보여준 용모화의 주인공을 직시하며 나는 그를 불러냈다.
“이리 나오시지.”
사내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었다.
“제법이구나. 총사가 총사답지 않게 허풍을 떤다고 여겼는데 진짜였어.”
사내를 뚫어져라 노려보던 군자도가 별안간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더듬거렸다.
“다, 다, 당신은 무, 무상?”
이미 내게 들통났기에 사내가 선선히 시인했다.
“오랜만일세, 현 장주. 오 년 만인가? 못 본 새 자네 칼이 많이 무뎌졌구먼. 핏덩이를 상대로 헛손질만 하다니.”
두 사람의 짧은 대화에 담긴 의미를 이해한 눈치 빠른 이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토해낸 별호를 듣고는 사내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비명을 질러대며 그로부터 떨어졌다. 공포와 소란은 삽시간에 군중 전체로 퍼졌다.
반의 반각도 지나지 않아 대흥전 경내를 가득 메웠던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내게 청화의 관전료를 치르지도 않고서!
***
사내는 낙일쾌검 전정(全正)이었다.
정(正)은 내 이름 선(善)만큼이나 그의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태어난 이후 단 한 번도 올바른 일을 해 본 적이 없는 위인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악독했고 교활했고 잔인했다. 같잖은 이유로 제 부모를 때려죽인 일화가 이미 유명하도록 널리 퍼져 있는 희대의 패륜아였다. 청출어람임을 증명한답시고 그에게 검공을 전수해준 스승들을 난도질한 것도 유명한 일화였다.
터무니없는 트집을 잡아 아무 죄도 없는 이들을 살육하거나 무작정 시비를 건 후 특정 방파 전체를 몰살시킨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의 검에 희생된 이들의 수만 수천에 달할 터였다.
악행으로 보나 무력으로 보나 고루시마와 더불어 천하십대악인의 수좌를 두고 다투어야 할 그가 버젓이 무림 명숙 행세를 하며 강호를 활개 치고 다닐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무후 덕분이었다.
그는 무후의 심복이었다. 무후가 그를 감싸고도니 그를 처단할 의사와 능력이 있는 극소수의 강자들은 단죄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무후의 충견이 된 후 낙일쾌검이 살인과 만행을 자제하게 된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
나는 전날 낙일쾌검이 나를 잡으러 나설 시 무영도수보다 빠져나갈 여지가 크다고 했던 양 관주의 판단에 동의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무영도수는 타협에 응할 가능성이 일 할에도 미치지 않을 테지만 낙일쾌검은 ‘자세를 바짝 낮추고’, ‘비위만 잘 맞추면’ 상황을 무마해 줄 거라 예측했다.
바로 그 조건이 문제였다. 그 얘기를 들었던 시점이었다면 모를까 오늘의 나는 점박이에게 굽실거릴 생각이 발톱에 낀 때만큼도 없었다.
꿀릴 게 없는데 뭐 하러 엎드린단 말인가. 더욱이 나에게 살의를 담은 암습을 시도한 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