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51
제51화 – 내가 모시겠소.
“사부를 부르자.”
놀라서 딸꾹질이 나왔다.
“뭐요?”
“사부를 부르자고.”
“…….”
“사부가 오면 제아무리 그 여자라도 함부로 못 할 거야.”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이리가 무섭다고 늑대를 불러들이는 격이 아닌가. 재수 없는 늙은이를 상대할 바에야 차라리 무후가 나았다.
“그럴 순 없소.”
“왜?”
“몰라서 묻소?”
“알면 왜 물어?”
“운공에 들어야 하니 간단히 말하겠소. 당신 사부는 나를 지키려 들기는커녕 손을 보려 할 거요. 게다가…….”
“그렇지 않아. 내가 막을 테니까. 사부는 나한테 맡겨. 나만 믿으라고.”
안진이 앙증맞은 주먹을 쥐어 보였다. 듬직한 구석이라고는 참새 눈물만큼도 없었다.
“여하간 당신 사부를 부르는 건 꿈도 꾸지 마시오.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테니까.”
“그럼 어쩌려는 거야?”
“말했잖소? 무후와 결판을 짓겠다고.”
“그러다 횡액을 당하면?”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쇼.”
“그러지 말고…….”
“이미 결심했다니까. 그러니 그만 가쇼. 당신이 계속 그런 상태로 있는 한 당신을 돌볼 여력은 없소.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찰 테니.”
“그럴 순 없어. 죽이 되건 밥이 되건 너하고 같이 있을 거야.”
하아, 이런 찰거머리 같으니.
심호흡으로 짜증을 다스린 후 물었다.
“대체 왜 그렇게 억지를 부리는 거요?”
“누가 할 소릴.”
“정 나를 따라다닐 양이면 집중수행을 잠시 중단하든가.”
“그건 안 돼. 아예 안 했으면 모를까 하다가 끊을 순 없어. 그러면 안 하느니만 못하니까. 앞으로 최소한 열흘은 더 해야 해.”
나는 안진을 응시했다. 안진이 아미를 찌푸렸다.
“왜 그래? 징그럽게. 너, 혹시 나한테 흑심을…….”
“장담컨대 집중수행을 백날 해봐도 아무 소용없을 거요.”
“흥, 네가 집중수행에 대해 뭘 안다고?”
“그걸로 뭘 얻는지는 모르지만 나 자신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소. 당신은 이제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나를 따라잡을 수 없소.”
“아직 여름이 오려면 멀었는데 벌써 더위 먹었어? 웬 헛소리야.”
“전날 운양호에서 내가 얼마나 늘었는지 보았잖소?”
“그래, 앞으로 보름 동안 실컷 기고만장해 봐. 집중수행이 끝나면 납작하게 눌러줄 테니까.”
“나는 그날보다 더욱 강해졌소. 그날의 나를 십 초에 제압할 수 있을 만큼.”
“거짓말.”
자시가 지났고 머리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졌지만 나는 운공에 드는 대신 안진을 설득하기로 했다. 말이 아니라 힘으로.
백 번 떠드는 것보다 한 번 보여주는 게 훨씬 효과가 있을 터였다.
“당장 재대결을 하는 게 어떻겠소?”
“싫어. 아직 준비가 덜 됐어.”
“그러지 말고 가볍게 손을 섞어 봅시다. 십 초를 주겠소. 나는 방어만 할 테니 마음껏 공격해보구려. 그런 연후 삼 초 내에 당신을 잡아보리다.”
안진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보자 보자 하니까 막 나가네. 솔직히 그날 네가 나를 이긴 건 운이잖아. 내가 한 달을 잡은 건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려는 신중함의 발로였어. 내가 방심만 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뭔 혀가 그리 기오? 그냥 합시다. 아니, 그냥 하면 재미가 없으니 내기를 합시다.”
“무슨 내기?”
“내가 말한 대로 되면 당신이 내 뜻에 따르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당신 뜻에 따르기로. 어떻소?”
안진이 잠시 침묵했다. 머릿속으로 주판알을 튕기는 모양이었다.
“흥, 좋아. 십 초라고 했지? 후회하지 마. 사정 안 봐줄 테니까.”
“바라는 바요.”
안진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웃음으로 응수했다.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단애 밑에 이삼백 평가량의 자그마한 평지가 있었다. 야심한 시각인데다 주변이 험지라 인적이 없었다.
나는 안진과 오륙 장을 격하고 서서 뒷짐을 졌다.
“언제라도 시작하구려.”
내가 첫 대결 때 그녀가 보인 행태를 재현하자 안진이 성난 소처럼 콧김을 뿜어냈다.
“본때를 보여줄 테다. 하지만 나는 비겁하게 그날 너처럼 기습은 하지 않을 거야.”
안진이 우수를 천천히 앞으로 내뻗었다. 그러자 그녀와 나 사이의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더니 강력한 무형지기가 내 가슴을 강타했다. 그러나 뒤로 나가떨어진 건 내가 아니라 그녀였다.
최대치의 선력으로 두른 기방의 반탄력에 튕겨 나간 안진이 비명을 내질렀다.
“괜찮소?”
벌떡 일어난 안진이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지도 않고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 말이오?”
“네 방패 말이야.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말했잖소? 내가 강해졌다고.”
“…….”
입을 다물고 납득할 수 없다는 심사를 담은 눈으로 나를 쏘아보던 안진이 양팔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뭐 하는 거요?”
“보면 몰라? 내상을 입었잖아.”
“내기는?”
“…….”
“내가 이긴 거요.”
“웃기지 마. 아직 구 초가 남았어.”
“그럼 마저 쓰시지.”
“싫어. 나중에 할 거야.”
“정말 그럴 거요?”
“그래. 이럴 거다. 어쩔래?”
하아, 애도 아니고.
안진이 타협책을 제시했다.
“자시가 지났잖아. 어서 운공이나 들어. 새벽에 깨면 다시 얘기하자.”
어르거나 달랜다고 통할 위인이 아니기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그런 이유보다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안진의 분위기가 부담스러워서였다.
강해진 만큼 고통도 커졌다.
무자비한 파괴와 복원을 반복하는 건곤기의 운용을 마친 나는 천지조화지경에 들 때까지 매일 이런 지옥 같은 극통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니 새삼스레 치가 떨렸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천상의 열매는 가시밭길 너머에 있는 것을. 따 먹으려면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눈을 뜨고 제일 먼저 시야에 들어온 건 안진의 코였다. 그녀는 허리를 구부려 내 면전에 자기 낯짝을 바짝 붙이고 있었다.
“뭐 하는 거요?”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몸을 쭉 편 안진이 밉살맞게 반문했다.
“내가 뭘?”
“어째서 나한테 얼굴을 들이대고 있는 거냐고?”
“갑자기 숨을 안 쉬길래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살펴본 거야.”
“……설마 나한테 입맞춤을 하려던 거요?”
“뭐? 너, 미쳤어?”
안진이 하도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사과해야 했다.
“오해였다면, 미안하오.”
“당연히 오해지.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아니 설령 미쳤다고 해도 너한테……, 말하다 보니 열 받네. 나를 뭐로 보고 이게…….”
나는 씩씩거리는 안진을 내버려 두고 몸을 돌렸다.
“야! 어디 가?”
“무후를 보러 간다지 않았소.”
“나는?”
대꾸하기 귀찮았지만 정리하기로 했다.
“당신을 지킬 여력이 없다지 않았소? 그러니 이제 갈라집시다. 정 나와 함께 있고 싶거든 집중수행을 보류하든가. 그 경우에도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는 없소.”
밤새 고민하고 결정을 내려두었던지 안진은 성큼 나를 따라나섰다. 동공의 초점을 유지한 상태로! 간밤의 짧은 공방전을 통해 집중수행을 해 봐야 내게 비빌 수 없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정말 같이 갈 거요?”
“너무 좋아하지 마. 네가 좋아서 그런 건 아니니까. 어디까지나 사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야.”
‘어련하겠소.’라는 조롱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내뱉지는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나는 혹을 떼는 데 실패했다.
***
무산을 내려왔을 때 먼동이 터왔다.
호기롭게 나를 쫓아왔지만 안진은 내내 죽상이었다. 명랑하고 맹랑한 평소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하도 침울해하기에 몇 번이나 위로의 말을 건네려다 말았다.
나는 그녀의 심사를 백분 이해했다. 비록 패하긴 했지만 모든 방면에서 실질적인 우위를 점했던 상대가 불과 십칠 일 만에 넘볼 수 없는 철벽이 되었다면 나라도 깊은 절망감에 빠졌을 터였다.
안진은 끊임없이 중얼거렸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못 들은 척하려다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지라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뭐가 말이오?”
기다렸다는 듯 안진이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속인들이 발하는 원초적인 감정들이 네 성장의 동력이야?”
“그렇소.”
“그러면 너는 세상을 돌아다니면 돌아다닐수록, 속인들과 얽히면 얽힐수록 더 강해지겠네?”
“그럴 거요.”
“…….”
“노파심에서 말하건대 이건 나한테만 특화된 방식이니 시도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섣불리 따라 하다간…….”
“흥, 누가 따라 한대? 나는 정통이 정도이자 왕도임을 증명해 보일 테야. 그리고 조금 앞서 나갔다고 으스대지 마. 지름길은 곧 사도(邪道)야. 사도는 끝이 좋을 수가 없어. 너는 분명히 조만간 탈이 날 거야. 절벽에서 굴러떨어질 거라고. 그러니 지금이라도 올바른 길로…….”
“됐소. 거기까지만 하쇼.”
웬일인지 안진은 언쟁을 중단하고 침묵에 들어갔다.
여하간 다행이었다. 그녀가 어설프게 내 흉내를 내려 들었으면 크게 곤란할 뻔했다. 재수 없는 늙은이가 묵과할 리가 없지 않은가.
***
이른 아침이지만 천하제일도 호원의 거리는 인파로 붐볐다.
화려한 복색의 귀인들과 아랫도리를 가리는 넝마만 간신히 걸친 거지들이 공존하는 길을 걷고 있노라니 십삼 년 전 노인네하고 들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세상 어느 곳보다 빈부 격차가 극명하게 느껴졌다.
해가 중천에 올라야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다른 도시의 거지들과 달리 해 뜰 녘부터 구걸에 나선 호원의 부지런한 거지들은 나와 안진에게 접근하려다 뒤로 물러섰다. 안진의 심각한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겁을 먹고 경계한 건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보다 정확하게는 내 옷이었다.
어제 낙일쾌검과의 일전에서 당한 외상으로 내 무복은 온통 검붉은 피로 얼룩져있었다. 그나마 흑의였기에 덜 도드라졌을 뿐이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거지들은 애당초 내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거지들 말고도 나를 주목한 이들은 많았다. 절대다수는 여자였다. 나를 절대천룡이 아니라 보기 드물게 잘생긴 사내로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나는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을지 궁금했다. 내 용모화는 이미 천하에 퍼졌을 터이고 정보조직의 인물들은 완벽하게 내 얼굴을 숙지했을 터였다. 호원엔 상운이나 흑문은 물론이고 십자무련 자체의 첩인들도 상당할 터이니 누구라도 내 정체를 알아차리는 건 시간문제였다.
허탈했다.
반 시진 이상 걸어 십자무련의 외성(外城)에 이르는 동안 어떤 소란도 벌어지지 않았다. 수많은 시선을 받았지만 내 별호를 속닥이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죽립을 쓸 것을 그랬나. 그랬으면 의심이라도 하지 않았을까.
뭔가 섭섭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구룡장의 대문보다 훨씬 더 큰 십자무련의 동문(東門)으로 향했다.
면적이 일백이십만 평에 달하는 십자무련엔 팔대문(八大門)과 십이중문(十二中門), 그리고 육십사소문(六十四小門)이 있었다. 원래는 중문이나 소문으로 들어가야 했으나 나는 공식적인 방문을 알리기 위해 대문을 택했다. 무림에서의 내 위상을 고려하면 건방진 행태는 아닐 터였다.
동문은 금은(金銀)의 깃발을 단 마차들이 무사통과하는 우문(右門)과 검문에 걸리는 마차들이 지나는 좌문(左門), 그리고 십자무련의 고위급들이 이용하는 별문(別門)으로 나뉘어 있었다.
별문으로 다가가자 십 수 명의 경비 무사들이 일제히 나와 안진에게 눈길을 모았다. 다들 정검문의 문지기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안광이 삼엄했다.
경비 무사들의 따가운 눈빛을 받으며 그들의 지척에 이른 나는 내 소개를 하려 했다. 그러나 별안간 별문에서 튀어나온 중년인이 방해했다. 그가 나타나자 경비 무사들이 허둥지둥 허리를 반으로 접으며 예를 차렸다. 꽤나 지위가 높은 모양이었다.
나는 양 관주에게서 건네받아 여러 차례 훑어본 강호인명록을 기억에서 뒤지며 중년인이 누군지 알아내려 애썼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마치 나를 보러 나왔다는 듯 내 쪽으로 똑바로 걸어온 중년인이 포권 대신 두 손을 포개더니 읍을 했다.
“어서 오시오, 오 공자. 문상(文相)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들어갑시다. 내가 모시겠소.”
어리둥절했다.
이건 무슨 상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