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54
제54화 – 할 얘기라는 게 뭐요?
사사삭.
나를 앞선 바람이 울창한 대나무 숲을 훑고 지나며 내 도래를 기별했다.
죽림 너머 마당가에 백염백발의 노인이 나와 있었다. 비록 하얗게 세긴 했으나 머리카락이며 수염이며 풍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노인의 나이가 아흔이 넘었음을 감안하면 축복받은 풍모였다.
죽림을 막 빠져나온 내게로 다가서며 노인이 마치 나를 안으려는 듯 양팔을 좌우로 넓게 벌렸다.
“어서 오시게. 드디어 무림의 새로운 영웅을 친견하게 되었구먼. 반갑네. 나는 강유택이라고 하네.”
나는 노인의 오륙 보 앞에 멈췄다.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오.”
내 말투가 거슬리지 않는지 노인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알고 있네. 보양에 출현한 젊디젊은 용이 사막의 미친 칼을 꺾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은 이후 줄곧 보기를 앙망했다네. 실은 전날 내가 직접 자네를 보러 그곳에 가려고 했는데 문상이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접었다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만나게 되는구먼. 진심으로 반가우이.”
맥이 풀렸다. 노인의 환대가 진심인지 아닌지는 몰랐지만 위압감이라고는 나비 무게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느슨해진 정신을 다시 조였다. 노인은 나에게 전생이냐, 마인으로의 전환이냐를 강요할 수 있는 강자였다. 그런 이를 대함에 있어 긴장이 풀어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용건으로 직행했다.
“무후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노인장에게 자격을 검증받아야 한다기에 왔소만.”
내 딱딱한 언행에도 노인은 부드러운 태도를 견지했다.
“그렇긴 하나 요식적인 행위에 불과하네. 자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주군을 뵐 수 있네. 내가 막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이렇게 싱겁다니. 당연히 내 무력을 시험하겠다고 나설 줄 알았는데.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노인이 돌연 미소를 거두고 진중한 낯빛을 드리웠다.
“물론 나는 자네와 한바탕 어울려볼 생각일세. 주군과 무관하게 무인으로서의 궁금증을 해소할 참이라네. 또 하나, 방금 자네와 주군의 만남을 막을 까닭이 없다고 했으나 내 개인적인 입장은 그 만남에 반대일세.”
뭐 하자는 거지?
머리를 굴린들 답이 나올 성싶지 않았기에 직설적으로 물었다.
“내가 무후를 보지 못하도록 방해할 거란 뜻이오?”
“허허, 내 말을 곡해했구먼. 자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주군을 뵐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다만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걸세. 왜냐하면 주군을 만나면 자네 목숨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일세. 솔직히 자네가 어째서 여기로 온 건지 이해하기 어렵구먼. 지금이라도 본련을 떠났으면 싶네. 자네를 쫓기야 하겠지만 주군이 친히 나서지 않는 이상 추포는 불가능할 걸세. 총수에 이어 무상까지 물리친 초신성을 누가 잡을 수 있겠는가. 나는 설령 명을 받더라도 시늉만 할 걸세.”
기시감이 들었다. 흡사 양천과 재회했을 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어째서 일면식도 없는 내 걱정을 해 주는 거요?”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노인이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가슴이 편안해지는 인자한 미소였다.
“자네가 진정한 협사이자 지극한 선인(善人)이기 때문일세. 오죽하면 이름마저 선이 아닌가.”
찔렸다. 내 협행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천지조화지경에 이르기 위해 백만 명의 목숨을 취해야 했다면 서슴지 않고 그랬을 것이었다. 선이라는 이름도 나 자신은 불만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상궤에서 벗어난 자네의 무력과 무한한 잠재력일세. 이제 약관을 지난 걸로 알고 있는데 그 나이에 어떻게 그런 무위에 이르렀단 말인가. 광마도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총수에 이르러서는 기절초풍했다네. 그런데 무상까지 날려버리다니. 어젯밤에 그 얘기를 듣고는 몇 번이나 허벅지를 꼬집으며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했다네.”
노인의 목소리에 점점 열기가 담겼다.
“자네는 살아있어야 하네. 살아서 얼마만큼 성장할지 우리 모두에게 보여주어야 하네. 이전에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주군 같은 괴물들은 다시 나오지 않으리라 확신했거늘 우물 안 개구리의 좁은 소견이었네.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퇴물이지만 자네가 어디까지 커 갈는지 보고 싶구먼. 그래서 주군과의 만남을 피하길 바라는 걸세. 무림에 몸을 담고 있는 한 결국엔 조우하게 될 터이지만 지금은 때가 아닌 것 같으이. 자네에겐 말일세.”
“그럼에도 내가 굳이 무후를 보고자 한다면 어쩔 테요?”
“말했잖은가? 자네의 원대로 될 거라고. 그런데 무작정 사지에 뛰어들지는 않았을 터, 뭔가 복안이 있을 테지?”
“그런 것 없소.”
“허어, 그렇다면 운에 운명을 맡길 참인가? 자네는 무림의 역사를 통틀어 자네 나이 때의 누구보다 강할 터이나 세상을 알려면 아직 더 살아봐야 할 듯싶으이. 늙은이의 기우라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주군이 자네를…….”
말끝을 흐리더니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잡설이 길었구먼. 어련히 알아서 할 터인데. 그저 주어진 역할만 하면 그뿐, 더 이상 주제넘은 객소리는 하지 않음세.”
“노인장의 호의는 고맙게 받겠소.”
“부디 무사하길 비네.”
나도 그러길 바랐다. 간절히.
대화로 검증을 가름하는가 싶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내게서 떨어져 마당 저편으로 가더니 노인이 손바닥이 보이게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알고 있을 테지만 내 장기는 장공이라네. 내가 상수라 자인해서가 아니라 자네가 손님이니 먼저 출수하게나.”
마당은 나와 노인 같은 강자들이 겨루기엔 너무 좁았다. 그러나 노인은 장소를 옮길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노인의 의도를 존중한 나는 그에게 포권을 취했다.
“한 수 배우겠소.”
“내가 할 소릴세.”
“그럼 가겠소.”
선공을 알린 나는 노인에게 쇄도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그를 향해 두 줄기의 지풍을 쏘아냈다. 노인의 장심에서 나온 뭉근한 바람이 물방울을 빨아들이는 솜처럼 내 지풍들을 흡수했다. 간단한 공방으로써 격식을 차린 우리는 본격적으로 어울리기 시작했다.
***
노인은 버거운 상대였다.
그는 섰던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장공만으로 내 파상공세를 차단했다. 나는 마당 전체를 좌우로 오가며 끊임없이 그를 두드렸지만 그의 퇴보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십 초쯤 경과한 후 선령을 동원한 나는 노인이 두른 장막에서 얇은 부분을 찾아내 그곳에 화력을 집중했다. 최대치의 선력을 실은 수십 줄기의 지풍이 잇달아 그 지점에 꽂혔다. 하지만 노인을 휘청거리게 만들었을 뿐 그를 물러서게 하는 데는 실패했다.
신속하게 약점을 보강한 노인이 처음으로 공세로 나왔다. 꽈배기처럼 이리 꼬이고 저리 꼬인 장공들이 노인과 나 사이의 공간을 장악하며 나를 몰아붙였다. 기방만으로는 방어가 안 될 것임을 알았지만 워낙 범위가 넓은지라 피할 곳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죽림으로 파고들었다. 그러자 가공할 경력을 담은 폭풍이 거짓말처럼 대나무 벽 바로 앞에서 뚝 멈췄다.
확연한 열세였으나 이대로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 허공으로 도약한 나는 공중에서 맹폭을 가했다. 노인이 쌍장을 휘두르자 그의 주위로 반구 형태의 방어막이 생겨났다. 내가 쏟아낸 소낙비는 그 우산을 뚫지 못했다. 반면 노인의 손바닥에서 나온 웅혼한 바람은 나를 거침없이 천공으로 밀어 올렸다. 인간 폭죽이 된 나는 구름 가까이 올라가고서야 상승을 멈췄다.
정점에 이른 내가 하강하자 노인이 기막을 거두고 마당 중앙으로 걸어갔다. 나는 그의 십 보 전면에 떨어져 내렸다.
위험한 구석이라고는 일점도 없는 대결이었지만, 그리고 이미 끝났지만 위기감이 엄습했다.
노인과의 격차는 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만약 노인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았더라면 상당한 부상을 입었을 터였다. 생사투였다면 전생을 도모하거나 마정을 깨뜨려야 할 처지에 몰렸을 것이었다.
세상은 끝도 없이 넓고 강자들은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다는 강호의 진부한 격언을 상기하려다 고개를 저었다.
노인 같은 강자는 결코 흔치 않았다. 그는 저마다 세상을 뒤엎는다는 여덟 개의 하늘을 제외하면 천하에서 가장 강한 무인일지도 몰랐다. 그와 견줄만한 이들은 더러 있을 수 있겠으나 그를 능가하는 자들은 개세팔천 말고는 없을 터였다. 그러니 실망하기엔 일렀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근래 획득한 선력으로 인해 하늘을 찌를 듯한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던 나는 실망감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인의 감상은 나와 다른 모양이었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에 충격의 심사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가 십이 성의 공력을 끌어올린 것은 주군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이십삼 년 전 이후 처음이었네. 아직도 벼락에 두드려 맞은 것처럼 전신이 얼얼하구먼.”
나를 놀리는 걸까. 하지만 노인의 표정과 음성엔 조롱기가 전혀 없었다.
“선인이라고 들었는데 선맥에 자네 같은 이가 또 있는가?”
‘그럴 리가 있소?’라고 반문하려는데 대나무 숲에서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당연하지. 선맥이 아니고 도가지만 도가와 선맥은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까…….”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안진의 말을 끊었다.
“밖에서 얌전히 기다리기로 하지 않았소?”
“그러려고 했는데 땅이 울리고 공기가 요동치잖아. 그런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나와 안진의 대화를 듣고 있던 노인이 끼어들었다.
“아가씨는 이 천룡의 배필이신가?”
안진이 배시시 웃더니 몸을 배배 꼬았다.
“어머, 다들 우리가 짝으로 보이는가 봐, 선.”
하아, 상대를 말아야지.
나는 안진을 무시하고 노인을 직시했다.
“이제 무후를 보러 가도 되겠소?”
“그러게나. 부디 옥체 보중하시게. 좀 더 성장한 자네와 다시 한번 손을 섞고 싶으이.”
“그럽시다. 다음엔 오늘과 다를 거요. 노인장을 쭉쭉 밀어낼 테니까.”
“언제쯤 그날이 오겠는가?”
나는 오른손의 검지를 치켜들었다. 노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허허, 그렇게나 빨리? 아무리 자네가 천하에 다시없을 기재라도 일 년 만에…….”
나는 노인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한 달!”
“…….”
“조만간 노인장에게 도전장을 보내겠소.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제대로 자웅을 가립시다. 그날 방금 한 말이 허언이 아님을 증명해 보이리다.”
노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어이가 없다는 걸까. 아니면 탄복한 걸까.
묵묵히 나를 바라보던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지키길 바라네. 하지만 그러려면 먼저 주군의 손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게 우선일 터. 자네를 믿겠네. 꼭 살아서 나오게나.”
“그럴 작정이오. 한 달 후에 봅시다.”
노인에게 작별을 고한 나는 오솔길로 들어갔다. 나를 졸졸 따라온 안진이 대나무 숲을 빠져나가기 전에 내 팔을 잡았다.
“할 얘기가 있어, 선.”
나는 안진의 손을 뿌리쳤다.
“화내지 마. 진동과 파동이 너무 강해 걱정돼서 가 본 거야. 가서도 그냥 지켜만 봤잖아?”
“애초에 오질 말았어야지. 그렇게 약속을 어길 참이면 더는 같이 다닐 수 없소.”
웬일인지 안진이 싹싹하게 꼬리를 내렸다.
“알겠어. 다시는 안 그럴게. 됐지?”
일 푼의 신뢰도 가지 않았으나 재삼재사 다짐을 받는다고 효력이 생길 리 만무하니 그냥 넘어갔다.
“할 얘기라는 게 뭐요?”
안진이 콧잔등에 잔뜩 주름을 잡았다. 그러고는 황당한 청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