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61
제61화 – 열 배는 낫소.
오체투지 하지 않고 서 있는 이들은 안진과 주근깨였다.
어인 일인지 주근깨는 의기양양한 표정이고 안진은 당혹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를 본 주근깨가 상황을 요약해서 알렸다.
“정말 끝내주는 언니예요, 공자님.”
나는 안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허리께까지 치렁치렁 내려오는 가발을 썼고 얼굴도 변했기 때문이었다. 눈썹 모양이 달라졌고 쥐라도 잡아먹은 듯 입술은 시뻘겠다. 백분으로 칠을 했는지 안색도 지나치게 하얬다. 평소 모습과 가장 큰 차이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삼을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투명한 나삼 속에는 기본적인 속곳밖에 없었다.
“어딜 보는 거야, 변태!”
양팔을 십자로 엇갈려 가슴을 가리며 안진이 소리를 질렀다. 맹세컨대 나는 나삼 안으로 보이는 앙증맞은 가리개와 그놈이 제 역할을 못 하고 반 이상 드러낸 수밀도를 본 게 아니었다. 하지만 부인하면 쓸데없는 입씨름이 벌어질 게 빤한지라 몸을 돌렸다.
“갑시다.”
“어딜?”
나는 답을 주지 않고 반사적으로 나를 잡으려는 안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저항할 줄 알았더니 그녀는 순순히 따라왔다. 주근깨도 뒤를 이을 태세이자 나는 그녀의 합류를 막았다.
“둘이 얘기하고 싶소.”
안진이 나를 거들었다.
“그래, 예월아. 나중에 보자.”
서운한 기색을 만면에 담았으나 주근깨는 안진의 뜻에 순응했다.
“알겠어요, 언니. 즐거운 시간 보내요.”
주근깨의 은근한 목소리에 분으로 덮인 안진의 허연 낯짝이 노을처럼 붉어졌다.
“그런 거 아냐, 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안진이 ‘호호홍’ 경망스러운 웃음을 뒤에 달았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한 대 쥐어박고 싶었다.
***
별채에 들러 안진에게 경장으로 갈아입도록 종용한 후 나는 조용한 대화를 위해 소운당으로 갔다.
다실 의자에 앉자마자 경위를 물었다.
“대체 뭔 짓이오?”
‘짓’이란 표현을 물고 늘어질 줄 알았는데 안진이 두 손바닥으로 제 턱을 받치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나, 예뻐?”
어리석은 대응임을 알았으나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징그럽소. 그거나 벗구려.”
새로 그린 안진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하지만 콧잔등엔 주름이 잡히지 않았다. 대체 백분을 얼마나 처바른 걸까.
“흥, 속으로는 좋으면서.”
하아, 절로 한숨이 나왔다.
“가발이나 벗으라니까.”
안진이 신경질적으로 가발을 뽑아버렸다. 그러자 바짝 엎드려있던 그녀의 단발이 삐쭉 솟아올랐다. 우스꽝스러운 몰골이 된 줄 모르고 안진이 작은 입술을 삐죽 늘리며 야릇한 미소를 머금었다.
“너, 아까 거기 있던 사내들이 내 자태에 홀린 걸 알고 질투 나서 그러는 거지, 선?”
또 한숨이 나왔다. 이러다 제이(第二)의 양 관주가 될 판이었다.
“되도 않는 소리 그만하고 어찌 된 영문인지나 말해보쇼.”
별안간 안진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나, 계속 고민했어, 선. 그러다 아까 예월이한테 너와 처음 인연을 맺었던 사연을 듣고서 문득 결심했어.”
나를 빤히 바라보며 안진이 뜸을 들였다. 속 보이는 수작이었으나 시간을 낭비하기 싫어 장단을 맞춰주었다.
“뭘 고민하고 뭘 결심했다는 거요?”
“세사 개입 말이야. 엄밀하게는 개입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하는 게 맞겠지. 그 선을 넘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래도 관찰에 비하면 엄청난 파격이잖아. 사부가 알면 난리를 칠 테니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어. 하지만 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결론을 내렸어. 전통적인 방식만 고수하다가는 너를 따라잡을 수 없을 테니까.”
“분명히 말하지만 나는 이미 경고했소. 섣불리 흉내 내려다간…….”
안진이 내 말을 잘랐다.
“사부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염려 마. 설혹 사부한테 들통이 나더라도 전적으로 내 결단임을 알릴 테니까.”
하아, 그게 말처럼 간단한 게 아냐, 이 철딱서니야. 그 재수 없는 늙은이가 ‘허허, 그러냐?’하며 수긍할 턱이 없잖아?
“당신 사부도 사부지만, 내가 일차적으로 걱정하는 건 안 소저요.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으면 꼴만 사나워질 뿐이나 자신에게 맞지 않는 길을 택하다간 천 길 낭떠러지로 추락할 수도 있소.”
“그래서 결단이라고 했잖아. 설령 그런 일이 벌어지더라도 내 책임이니까 너를 탓하진 않을 거야. 하지만 둘도 없는 도반으로서 부탁하건대 나에게도 네 비법을 알려줘. 그럴 거지?”
들어줄 수 없는 요구였다. 비법이라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전달이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선맥의 선인들은 망망대해에 뜬 섬들과 비슷했다.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서로와 동떨어진 채 오로지 자신만의 선정을 구축해야 했다. 나도 오 단계에 접어든 후부터는 노인네와 무관하게 독자적인 노선을 밟았다. 조언은 해줄 수 있지만 인도나 지도엔 본질적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그 점을 안진에게 주지시켰다. 예상한 바였던지 안진은 별반 실망하지 않았다.
“역시 그렇구나. 그럼 내가 알아서 할게. 두고 봐. 어떻게든 해 낼 테니. 너도 되는데 나라고 안 될 건 없겠지.”
안진의 호기와 달리 전망이 비관적이라 보았으나 나는 그녀를 격려했다.
“잘해 보쇼.”
빈정거림이 아니었지만 말투 때문인지 안진이 코를 찡그렸다.
“흥, 내가 조만간 너를 추월해도 놀라지나 마.”
***
나는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아까는 무슨 일이었소?”
“아, 그거. 예월이하고 얘기하다 결심했다고 했잖아?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바로 실행에 옮기고 싶었어. 마침 여기 우두머리가 마당을 지나가는 기색이기에 그 여자를 붙잡고 하루만 기녀 체험을 하게 해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흔쾌히 수락하더라고.
분장은 예월이가 도와줬어. 솜씨가 좋더라고. 동경으로 변한 내 모습을 보는데 어찌나 곱던지. 그래서 속세의 여자들이 다들 화장을 하나 봐. 아무튼 입은 것 같지도 않은 옷까지 걸치고서 옥관에 나갔더니 상천 모운상단의 귀빈들이 올 거라며 일급 이상들은 회랑에 대기하라는 거야. 그래서 여남은 여자들하고 같이 서 있는데 한참 후에 예닐곱 명의 중늙은이들이 온갖 거드름을 피우며 들어오더라고.”
더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발동이 걸린 안진이 허파에 숨을 채워 넣더니 다시 폭포수를 쏟아냈다.
“내 몸을 더듬는 눈길들이 역겨웠지만 어쩌나 보려고 가만히 있었어. 근데 그자들 중 하나가 나를 지목하지 뭐야. 예쁜 건 알아가지고. 그런데 더 웃긴 게 뭔 줄 알아? 턱살이 목젖까지 늘어진 뚱보가 헛기침을 하면서 눈살을 찌푸리자 나를 골랐던 쭉정이가 냉큼 허리를 접으면서 신품을 공 대인께 바칠 심산이었다고 하는 거야. 내가 물건이야 뭐야.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어. 그 뚱보가 뼈다귀를 본 개처럼 침을 질질 흘리며 나한테 다가오지 뭐야. 그러더니 대뜸 내 허리에 손을 감으려 드는 거야.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만지려 들고. 보는 눈들이 그렇게 많은데. 뭐, 주위에 아무도 없었어도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일장에 쳐 죽이고 싶었지만 도인이 되어서 그럴 순 없으니 자중했어. 하지만 내버려 두면 주제를 모를 것 같아서 가볍게 손을 썼어. 내가 슬쩍 물러난 후 팔을 벌리자 뚱보가 인상을 쓰더라. 그러다 바로 사색이 되어서는 바닥에 이마를 박더라고. 내가 복도 양편에 놓인 봉황들을 깨부쉈거든. 뚱보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비명을 지르며 엎드리고 난리가 났어. 예월이만 빼고.”
참으로 장하다, 철딱서니.
나는 내 감상을 목구멍에 가두었다.
사실 소동의 전말보다 더 궁금한 것이 있었다.
“예월 소저하고는 어떻게 된 거요? 씨근거리며 들어가는 양이 나는 둘이 한바탕할 줄 알았는데.”
“우리가 싸움닭이야? 싸우게. 다투기는커녕 얼마나 화기애애했다고.”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혹시 그녀에게 그 뚱보한테 써먹은 것하고 같은 수법을 쓴 거 아뇨?”
안진이 반문했다.
“그럼 안 돼?”
안진의 뻔뻔함에 말문이 막혔다.
“걔를 겁박한 게 아냐. 대화의 편의를 위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미리 알려준 거지. 안 그러면 그 뚱보처럼 실수했을 거 아냐.”
“설마 그녀에게 손을 댄 건 아니겠지?”
“나를 뭐로 보고. 방에 들어가서 적당한 게 없나 찾아보니 요강밖에 없더라고. 그래도 놋쇠 요강이었으니까 그럭저럭 쓸 만했어. 내가 뚜껑을 구겨버리니까 걔 눈이 튀어나올 것 같더라. 그러더니 나더러 오 공자님과 동문이냐는 거야. 도가와 선맥은 한 식구나 진배없으니 그렇다고 했지.”
기분이 묘했다. 한 달여 전 주근깨와 초승달 눈썹을 처음 보았을 때 나를 의심하는 그녀들에게 나도 똑같은 무력시위를 하지 않았던가. 주근깨도 그날 일을 떠올렸으리라.
웬일인지 안진이 나에게 그윽한 눈길을 보냈다.
“글쎄 걔가 오해해서 미안하다며 사근사근하게 굴더니 나한테 너에 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거 있지. 인적 없는 협곡에 틀어박혀 맨날 도만 닦았다고 대충 얼버무리고는 나도 그 애한테 이것저것 물어봤어. 내가 너를 만나기 전에 어떤 행태를 보였는지. 그랬더니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더라.”
“…….”
“너, 그 애의 봉야를 물리쳤다며? 동자공이니 뭐니 얼토당토않은 핑계를 대면서. 왜 그랬어? 나만큼은 아니지만 꽤 아리땁잖아, 걔. 그냥 날름…….”
“아, 됐소. 날름은 무슨.”
“헤헤, 화내는 것도 귀엽네.”
“…….”
“알았어, 화내지 마. 안 놀릴게. 아무튼 나는 그 얘길 듣고는 안심이 됐어. 사내는 믿을 수 없는 종자들이라 믿고 있었는데 선이라면 믿어도…….”
“뭘 믿는다는 거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왜 자꾸 말을 끊어. 그리고 우리가 무슨 사이냐니? 몰라서 물어?”
더 말을 섞어봐야 입만 피곤해질 터이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야? 얘기하다 말고.”
“할 일이 태산이오. 그보다 빨리 얼굴이나 씻으쇼.”
“왜? 이러고 지낼 건데? 안 예뻐?”
무시할까 하다가 계속 저러고 다니면 내 눈만 버릴 터인지라 대꾸해주었다.
“맨얼굴이 열 배는 낫소.”
‘그나마’라는 말을 뺀 핀잔이었으나 칭찬으로 받아들인 안진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으이그, 바보.
***
안진에겐 할 일이 태산이라고 했으나 실상은 보양 외곽의 고영산에 가서 수련하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나는 딱히 수련할 것도 없어 내내 빈둥거렸다.
나와는 반대로 내가 맡긴 일을 처리하느라 양 관주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녀는 상운의 정보망과 역량을 총가동해 나와 함께 선정한 사냥터들의 사전 정비작업을 하고 있었다. 목록에 오른 도시가 열두 개에 달했기에 기본적인 준비를 마치는 데만 적어도 나흘은 걸릴 거라 했다.
나는 우선 보양에서 남서로 일천 리가량 떨어진 진원(眞源)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고흥과 유성이 그보다 가까웠으나 전날 이미 털었기에 두 곳 다 먹을 게 없었다.
금쪽같은 하루를 허비하며 조력자들의 귀환을 기다리던 차에 부정적인 소식이 잇달아 들어왔다.
첫 번째는 석진과 한월노모가 피신처인 파우치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양 관주는 그들이 임의로 그녀의 안배를 이탈해 잠적했으니 소재를 파악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라고 했다.
아쉬운 대로 양천만 데리고 출정할 참이었으나 이쪽도 문제가 생겼다. 그는 오지 않고 이제부터 무기한 폐관수련에 들 작정이니 앞으로 일절 연락하지 말라는 매정한 답신만 보내왔다.
내용을 찬찬히 곱씹어 본 나는 양천 본인이 쓴 게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여 직접 공주에 가서 그의 의사를 확인하기로 했다. 그가 없으면 과제를 수행하기 어려운 데다 그는 내 귀중한 시간을 할애할 가치가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평소보다 일찍 운공을 마친 나는 새벽에 보양을 출발했다.
공주까지는 정남 방면으로 이천팔백 리 길이니 도중에 안진의 신세를 지며 중단 없이 경공을 지속할 시 다섯 시진 이내에 당도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일이 잘 풀리면 해가 지기 전에 양천을 설득해 진원으로 직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