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72
제72화 – 그만!
스스로 혈맥을 터뜨렸는지 안진의 칠공에서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두 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안진이 작고 도톰한 입술로 검붉은 핏덩이와 더불어 절규를 쏟아냈다.
“절대로 선을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선을 죽이면 나도 죽어.”
재수 없는 늙은이의 안면에 경련이 일었다. 나도 전율했다. 내 상단전에 놀랍도록 강렬한 불꽃이 피어올랐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 사람이 두 번의 청화를 일으킬 수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이, 이, 이…….”
충격이 큰지 뒷말을 잇지 못하고 수염만 부들부들 떠는 늙은이에게 안진이 신들린 듯 후속타를 퍼부었다.
“사부는 선에게 편견을 갖고 있어. 선은 타고난 악마가 아냐. 도원의 누구보다도 순수하고 깊은 선심을 지닌 선인이라고. 나도 망가진 게 아냐. 그 반대야. 도원을 나올 때보다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단 한 달 만에.
그제 무림에서 칼의 황제라고 불리는 괴물의 제자와 한 판 했어. 선을 만난 지 딱 한 달째 되는 날이었어. 선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자극을 받아 미친 듯이 도력을 증진시키지 않았다면 나는 그 여자의 칼에 목이 날아갔을 거야. 진짜야.
더 중요한 걸 말해줄까? 나 자신도 믿기 어렵지만 나는 어느새 인세의 도리를 습득하고 천지의 이치도 윤곽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음양의 도까지 어렴풋하게나마 가늠할 수 있게 됐어. 선이 없었더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야. 그런데도 선에게 감사는 못 할망정 나를 망가뜨렸다는 누명을 씌우다니, 너무하잖아?
무엇보다 상선 어르신하고 선이 어떻게 될지 삼십 년은 지켜보기로 합의했다며? 아직 구 년이나 남았어. 상선 어르신이 돌아가셨다고 약속을 파기할 참이야? 나중에 그 어른을 어찌 보려고? 나는 사부를 이해할 수 없어. 평소 누구보다 자상하고 관대한 사부가 왜 선에 관해서만 그토록…….”
묵묵히 듣고만 있던 늙은이가 억눌린 음성을 뱉어냈다.
“그만해라.”
안진은 이번엔 늙은이의 명에 순종했다.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혼절했기 때문이었다.
내 심혼을 옭아맸던 기의 밧줄이 풀려나갔다. 갑자기 숨통이 트인 나는 허겁지겁 공기를 들이마셨다.
바닥에 축 늘어졌던 안진의 동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피범벅이 된 그녀를 안아 든 늙은이가 잡아먹을 듯 나를 노려보며 살벌한 안광을 발했다.
“너를 지켜볼 것이다.”
흥, 그러든지!
유치한 경고를 날린 늙은이가 나타날 때처럼 흐릿한 환영으로 화하더니 불이 꺼지듯 사라졌다.
대체 저건 무슨 신법일까. 노인네도 저런 건 구사하지 못했는데.
그 와중에도 나는 늙은이가 과시한 신묘한 도술에 샘이 나고 탐이 났다.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힘조차 없어 그냥 누워있었다.
도제의 압기에 당한 내상이 재수 없는 늙은이의 행패에 의해 악화되었다. 이래서는 당분간 십 할의 전력을 발하지 못할 터였다. 마원행을 심각하게 재고해야 할 판이었다.
나는 고민은 나중으로 미루었다. 지금은 그저 천공에 알알이 박힌 별들을 올려다보며 내 행운에, 그리고 안진에게 감사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이 은혜 잊지 않겠다, 철딱서니. 꼭 갚아주마.’
진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재수 없는 늙은이에 대한 관용을 포함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천지조화지경에 들면, 그래서 불살(不殺)의 금제에서 벗어나면, 제일 먼저 그 늙은이부터 염왕전에 처넣을 작정이었다. 그다음은 무후와 도제가 순서를 다투게 될 터였다.
***
동천에 샛별이 뜨고서야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간밤에 연이어 지독한 시련을 겪은 데다 아예 운공에도 들지 못해 심신이 모두 엉망이었다. 그러나 이제 일을 해야 할 때였다.
경신을 전개하기도 버거워 나는 걸어서 보양으로 갔다. 자하옥관에 당도했을 즈음엔 날이 환하게 밝아있었다.
육 층 전각 입구를 지키고 선 가인들에게 내 도착을 알리고 소운당으로 가니 양 관주는 이미 다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태평한 신색을 보고는 간밤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음을 알았다.
“일출 전후로 온다더니 좀 늦었네요? 오늘도 안 소저는 안 데려왔나요?”
나는 양 관주의 질문을 묵살하고 묻고 싶지 않은 걸 물었다.
“노모는 어디 있소?”
양 관주가 어리둥절해했다.
“석 대인 대신 그녀와 동행하게요?”
순간 울컥했다.
지난밤 내 면상에 침을 튀겨가며 찬사를 늘어놓던 한월노모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좀 더 살갑게 대할걸. 양 관주와의 독대를 핑계로 쫓아내지 말걸. 내 입지가 위태로웠을 때 아무 조건 없이 목숨을 걸고 내 편이 되어 싸워주기로 한 성의에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사를 표할걸.
툭하면 사내처럼 껄껄거리던 노모의 호방한 웃음이 떠오르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심중의 후회와 상심을 억누르며 나는 동문서답했다.
“어제 도제를 만났소. 고영산으로 찾아왔더군.”
양 관주가 귀신을 본 사람의 얼굴을 했다. 입술은 찢어질 것처럼 벌어지고 불거진 안구가 튀어나올 듯했다.
“그자가 왜…….”
말끝을 흐리더니 벌떡 일어난 양 관주가 부리나케 다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호화나찰들에게 한월노모의 소재를 알아보라고 지시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실로 돌아온 양 관주의 표정이 침통했다. 나처럼 한월노모에게 변고가 생겼음을, 그리고 그녀 자신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음을 추론했다는 뜻이었다.
양 관주가 아까 하다만 질문을 완성했다.
“그 악적이 왜 오 공자를 찾아갔나요?”
“나하고 안 소저를 죽일 작심으로 왔습디다.”
“그런데 어떻게 무사했지요? 안 소저는 괜찮나요?”
나는 양 관주에게 위기를 벗어난 과정을 들려주었다.
“멍청한 작자더군. 소심하기도 하고.”
양 관주는 내 감상에 맞장구를 치지 않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늘이 돌보셨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설마 그 악적이 여기까지 날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도봉이 어지간히 귀한 제자였나 봐요.”
나는 어쩌면 단순한 사제지간 이상의 관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목구멍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침묵하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양 관주가 전에 없이 표독한 안광을 분출했다.
“이제 오 공자에게도 그 악적을 징치해야 할 이유가 생겼네요?”
나는 안진을 흉내 내 꽉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임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양 관주가 준비한 자료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제법 두툼하긴 했지만 대부분이 지도였고 정작 중요한 핵심 마인들의 거처와 무력 수위에 대한 내용은 거의 없었다.
양 관주가 해명했다.
“마원의 사정을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요. 상운은 물론이고 사람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흑문조차 발을 들이지 못하는 험지니까. 그나마도 지리는 오래전의 기록들로 정리할 수 있었지만 마두들에 관해서는 외부에 알려진 자들만 추릴 수밖에 없었어요. 기실 그들이 생존해 있을지도 의문이에요. 내부 투쟁이 일상다반사인 곳이니. 아마 목록에 든 자들의 절반 이상은 이미 이승을 하직했을 거예요. 그들의 자리는 다른 마인들이 채웠을 테고요.”
내가 계속 침묵하자 양 관주가 조심스럽게 출정을 만류했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일대일(一對一)로 오 공자를 상대할 수 있을 마두들은 손에 꼽을 정도겠지만 그자들이 한 명씩 덤벼들 리 만무하잖아요? 자칫 떼로 달려든 악귀들에게 포위되기라도 하면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어요.”
각오한 바였음에도 마음이 흔들렸다. 양 관주의 우려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간밤에 입은 내상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불안을 떨쳐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건곤장에게 호언했던 날짜는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다. 어떻게든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드물게 호감을 느꼈던 이에게 싱거운 인간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려면 하루빨리 선력을 증강시켜야 했다. 이대로 손가락이나 빨고 있을 수는 없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소.”
양 관주는 더 말리지 않았다. 나는 그녀와 몇 가지 ‘후속 조치’를 논의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
허파가 찢어질 것 같은 통증을 견디며 사천이백 리를 주파했다.
강행군을 거듭했지만 내상으로 인해 전속력을 발할 수 없었기에 마원의 동쪽 경계선인 태화강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하루가 끝나있었다.
첫날부터 염두에 두었던 일정에서 뒤처졌지만 자시를 알리는 신호가 왔기에 도강을 단념하고 강가의 갈대밭에서 운공에 들었다. 파괴와 치유가 되풀이되는 끔찍한 시간을 견딘 후 꼭두새벽에 눈을 뜬 나는 폭이 일백 장에 달하는 대하를 건넜다.
강 너머는 험준한 산맥의 연속이었다. 마원이라는 호칭이 붙었지만 악마들의 대지는 평야가 아니라 구 할이 산악지대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원은 좁은 땅이 아니었다. 마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일천 장 높이의 천마고원을 중심으로 사방 일천 리를 뻗은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 안에 대략 일만의 마인이 득시글댄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들의 폭정에 시달리는 민초의 수는 불명확했다. 혹자는 일백만 어림일 거라 추정했고 또 어떤 이는 천만도 넘을 거라 주장했다.
마원 도처에서 매일이다시피 학살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토록 많은 인구를 보유할 수 있는 건 무차별적인 결합과 출산에 기인했다. 마원의 민초들은 죄다 축생만도 못한 삶을 영위하는 노예들이었고 남녀를 불문하고 생식의 능력이 생긴 이후엔 아무하고나 붙어먹었다. 그러니 매년 수십만이 죽어 나가도 그만큼, 혹은 그 이상의 수를 충원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마원은 천륜과 인륜 따위는 개에게나 줘버린 인세의 지옥이었다.
내 첫 번째 목적지는 태화강에 인접한 오륜산맥 북단의 하동이었다.
하동은 마원의 여섯 대처(大處) 가운데 한 곳이었다. 마두들의 본거지인 천마고원에 곧장 쳐들어갈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현재의 상태로는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어 일단 하동에서 간을 볼 참이었다.
남북으로 칠백사십 리에 걸쳐 뻗은 대산맥은 세 시진 후에야 끝을 보여주었다. 해는 벌써 중천에 올라가 있었다.
산정에서 내려다본 하동은 손바닥만 했다. 일다경가량 운기조식을 취해 지친 육신에 활기를 불어넣은 나는 하산했다. 수백 리를 올라오는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이 산 중턱에서부터 바글바글했다.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그들의 몰골을 본 나는 충격을 받았다.
천 조각이라도 걸친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갈비뼈가 고스란히 드러날 정도로 깡말랐다.
노인은 고사하고 중년으로 보이는 이들조차 눈에 띄지 않았다. 마원에서는 스물만 넘겨도 장수하는 것이라는 괴담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은 그 나이가 오기 전에 대부분 굶어 죽거나 얼어 죽거나 맞아 죽는다고 했다.
나는 씁쓸했다.
내 부모의 본향이 이런 곳이었다니.
사람들의 행태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한쪽에서는 알몸의 남녀들이 남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칡넝쿨처럼 엉켜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그들이 주식으로 삼는다는 쥐들을 두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들 하던 행위를 일시에 멈추고 벌벌 떨었다. 산 아래에서 올라온 봉두난발의 괴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장공을 난사했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도망가지도 않고 제자리에서 괴인의 살수를 맞이했다. 순식간에 일백여 생목숨이 장공에 뭉개지고 터져나간 시체들로 화했다. 불과 두 호흡 만에 벌어진 참사였다.
황망함을 삼키며 나는 은신했던 나무에서 뛰쳐나갔다.
“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