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76
제76화 – 쓸데없는 짓을 했구려.
전날 밤 공주 인근의 보산에서 운공에 들었지만 워낙 체화해야 할 선력이 많았던지라 운공을 마쳤을 때는 벌써 해가 중천에 올라 있었다.
평소의 세 배 이상 소요되었지만 그래도 의식적으로 시간을 조절한 덕분에 그제와 어제에 비해서는 상당히 단축한 것이었다. 요 이틀 연속 나는 해가 질 때에서야 눈을 떴다.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온몸이 욱신거렸다. 이레 전 마인들과의 혈전에서 당한 외상은 아직 덜 아문 상태였다. 특히 오른쪽 어깨의 부상은 여전히 심각했다. 팔을 들어 올리기도 힘들 정도였다. 옆구리의 상처도 꽤 깊었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자기를 잊지 말라며 아우성을 쳤다.
그럼에도 나는 승리를 낙관했다.
건곤장은 개세팔천을 제외하면 천하의 누구도 우세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였지만 그의 십이 성 공력을 체험해 보았기에 자신 있었다. 현재의 내 선력은 그의 내력을 확실히 능가했다.
물론 내공의 우열만으로 승부가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었다. 경험이나 실전 감각, 그리고 기교 등도 중요한 요소이자 변수였다. 그리고 이들 방면에서는 전부 건곤장이 나보다 몇 수는 위였다.
그런데도 내가 승리를 자신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우리의 대결이 생사투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건곤장의 성품이었다. 그 두 개는 연결되어 있었다. 건곤장은 전력을 실은 내 파상공세에 밀린다 싶으면 싹싹하게 패배를 인정할 것이었다.
만약 그가 자존심을 내세워 죽기 살기로 나온다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할 문제였다.
나는 다만 그가 그러지 않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그 경우 솔직히 뾰족한 대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
나는 공주 바깥에서 시간을 때우지 않고 곧장 비무 장소로 예정한 북동(北洞) 광장으로 향했다.
고루시마 건으로 취득한 선력의 소화를 감안해 비무 시간을 유시(酉時:오후 5시~7시) 초로 잡았기에 한 시진 이상의 여유가 있었지만 미리 가서 군중의 수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들이 비무 전에 청화를 일으켜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얼마나 왔을까.
공주의 고층 전각들이 그리는 우둘투둘한 선이 지평선 위에 떠오르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렸다. 계획대로만 되면 오늘 나는 엄청난 폭식을 하게 될 터였다.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일시에 성장해 개세팔천에 보다 가까워지게 될 것이었다.
나는 당황했다.
너른 광장은 파한 장터마냥 한산했다. 일천 명가량의 군중이 모여 있긴 했으나 면적이 칠만 평에 달한다는 광장에 들어있는지라 썰렁하게 보였다.
아직 시간이 안 되어 그런 걸까. 다들 공주 저자에 머물며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를 기다리는 걸까.
그러면 좋겠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예상대로라면 해 뜨기 전부터 광장은 천하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로 미어터져야 했다. 그럼에도 예상했던 숫자의 백 분의 일도 안 되는 이들만 왔다는 건 뭔가 문제가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양가의 원로들이 어깃장을 부린 걸까. 자기들의 동의도 얻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들 안마당을 비무 장소로 공표한 것에 앙심을 품고 관전을 위해 불원천리 달려온 이들을 강제로 돌려보낸 걸까. 그래서 그들로도 함부로 대할 수 없거나 최소한의 예를 차려야 할 명사들만 남은 걸까.
뜻밖의 사태에 당황하고 실망하며 광장에 들어서는데 상상도 못 했던 인물이 나를 맞았다.
***
안 그래도 이상하긴 했다.
내 기대에는 발끝에도 못 미쳤지만 그래도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음에도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마치 뱀 소굴에 빠진 생쥐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군중 한가운데서 불쑥 솟아올라 기다란 포물선을 그리며 내게로 날아오는 인영을 보자마자 어째서 수천 군중이 침묵을 공유하고 있었는지 알아차렸다.
그는 거인이었다. 팔 척이 넘는 장신에 체구마저 거대했고 거기에 살집까지 두툼했다. 머리에 가죽만 뒤집어썼다면 곰이라고 해도 믿었을 터였다.
곰의 몸뚱이를 가지고 비호처럼 날아온 거한이 내 바로 앞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내 어깨에 큼직한 두 손을 얹었다. 나는 일만 근의 바윗덩어리에 짓눌린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네가 그 천룡이로구나. 내가 누군지 알겠느냐?”
어찌 모르겠는가.
목전의 괴인은 인세에서 가장 큰 덩치를 가진 인간이자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덟 괴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용왕 백우(白羽).
남해 용궁의 주인이자 개세팔천 중 유일하게 다른 개세팔천 모두와 자웅을 결한 전력이 있는 괴걸이었다.
그는 새외사왕 중 중원 출입이 허용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중원에 우호적이라서가 아니라 막무가내로 들락날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를 막으려면 일후삼제가 나서야 할 터인데 그들 누구도 남방의 지배자와 척을 지려 하지 않았다.
그런 연유로 용왕이 나타나면 사람들은 자연재해가 닥쳤거니 하고 체념하는 실정이었다.
질문에 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당신은 남해의 제왕 아니오?”
내 말투에 놀랐는지 용왕이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작은 눈을 부릅뜨더니 별안간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핫,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다고 하더니, 과연! 마음에 든다, 아이야. 사내 배포가 이 정도는 되어야지.”
목소리가 천둥처럼 컸다. 청력을 폐쇄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작게 말하라고 하는 대신 다른 요구를 했다.
“손 좀 치워주쇼. 나를 찌그러뜨릴 작정이오?”
용왕이 뺨을 씰룩거렸다.
“오해했구나. 나는 너를 누르지 않았다.”
이 괴물은 자기가 얼마나 무거운지 모른단 말인가.
예전에 용왕과 친분이 생긴 이가 특수한 저울을 제작해 그를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 측정된 용왕의 몸무게는 무려 일천이백 근이었다.
성인 남자가 보통 일백 근 정도 나간다니 용왕은 보통 사람 열두 명을 합친 것만큼 무거운 것이었다. 그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니었다.
어쨌거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용왕은 선선히 내 어깨에 둔 손들을 거뒀다. 그러면서 내 정수리 위에 뜨거운 콧김을 뿜어냈다. 열 받은 건가?
그가 내 사업을 망친 원흉이라 여겨 불퉁스럽게 굴었던 나는 뒤늦게 긴장했다. 이 거인이 저 무지막지하게 큰 손으로 나를 후려치기라도 하면 나는 온몸이 으스러지며 십 리 밖으로 날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런 불상사를 예방하려면 내키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는 비위를 맞춰 주어야 했다. 그것은 굴종이 아니라 현명한 처신이었다.
“공공문의 문주이자 정의단의 단주인 오선이 용왕을 뵙소.”
내 인사에 용왕이 마치 박치기라도 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거렸다. 그러더니 내 면상에 침을 소낙비처럼 쏟아냈다.
“안다. 알다마다. 네 소문을 듣자마자 오천오백 리를 달려왔느니라. 무후의 개를 때려잡았다며? 그것만 해도 눈알이 튀어나오고도 남을 기사(奇事)인데 오늘은 그녀의 오른팔마저 꺾어버릴 참이라지? 만약 내 목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너를 인정할 것이다. 우리들을 능가하는 천룡으로 말이다.
그런데 대체 어떤 고인이 너 같은 아이를 길러냈더냐? 내 식견이 넓진 않으나 그래도 웬만한 문파는 다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데 공공문은 도통 금시초문이구나. 개천에서 용이 난다고 하나 실제로 그런 기변은 결코 생기지 않는다. 필히 개울물 아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못이 있을 터, 오늘 이렇게 만난 김에 네 원천의 실상을 확인해야겠다. 그러니 속 시원히 털어놔 보거라.”
두어 가지만 제외하면 딱히 비밀도 아니었기에 나는 기꺼이 선맥에 관해 용왕과 귀를 쫑긋 세우고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군중에게 알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온 두 줄기 인영 때문에 보류해야만 했다.
***
그들은 남녀이자 노소였다.
그리고 둘 다 내가 아는 이들이었다. 기묘하게도 하나는 전날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지금은 면상을 노출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전날엔 맨얼굴을 드러냈으나 지금은 면사를 쓰고 있었다. 그들은 도제-도봉 사제였다.
도제는 평범한 무사로 위장했던 보름 전과 달리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있었다. 눈과 입술이 다 가늘고 끝이 위로 휘어있어 야비하게 보이는 낯짝이 살짝 굳어있었다. 내가 아니라 용왕을 의식한 것이었다. 나와 용왕이 선 곳으로부터 삼십여 보나 떨어진 곳에 떨어져 내린 것도 그 때문이었으리라.
도제는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용왕만 응시했다. 용왕은 작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일순지간 주위의 공기가 팽팽해졌다. 용왕이 바로 곁에서 발산하는 내기에 나는 질식할 것 같았다. 선력을 끌어올려 버티려는데 갑자기 압력이 누그러졌다.
내게 숨통을 틔워준 건 도봉이었다.
그녀가 면사를 걷고 진면목을 드러내자 용왕이 입을 떡 벌렸다. 하도 커서 어지간한 사람의 머리를 통째로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놀란 이들은 거인만이 아니었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던 군중에게서 수백 개의 탄성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십칠 일 전 우장평에서 절대미를 과시함으로써 천하제일미라는 별칭을 얻은 도봉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그녀는 나는 물론이고 용왕과 도제마저 뒷전으로 밀어내며 군중의 이목을 독점했다.
하지만 미모에 어울리지 않는 탁한 음성이 모두의 환상을 깨뜨렸다.
“그 여자는 안 왔나요?”
흠, 그래도 예를 차리는군. 그년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나저나 서른이 넘었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열여덟 어림인 것 같은데.
꼴깍.
침을 삼키며 나는 도봉의 질문에 답했다.
“그녀는 모용 소저와의 재대결에 대비해 모처에서 맹렬히 수련하고 있소.”
도봉이 아미를 찡그렸다. 하아, 심장이 철렁거릴 정도로 예뻤다. 하지만 분홍빛 입술에서 빠져나온 말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았다.
“흥, 노는 꼴이 귀여워 봐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설치는군. 그날 그년은 내 칼에 사지가 잘린 채 몸뚱이를 굴려 가며 돌아가야 할 거야. 오르막이 나오면 그럴 수도 없을 테니 죽을 둥 살 둥 발버둥 치다가 결국엔 짐승들에게 물어 뜯겨…….”
도봉은 말을 마무리 짓지 못했다. 그녀를 막은 건 내가 아니라 용왕이었다.
“호오, 어여쁘기 짝이 없는 아이가 말본새도 기특하도다. 내 팔십 평생 너처럼 완벽한 여아는 처음이구나. 부럽소, 도제.”
도제가 싸늘한 안광을 분출했다.
“눈독 들이지 마라, 용왕.”
“한 칠팔 년 못 본 동안 혓바닥이 거칠어졌군. 모처럼 만났는데 오랜만에 칼맛이나 볼까?”
용왕이 일전불사를 외치자 도제의 기운도 흉포해졌다.
나는 욕지기가 치밀었다. 이 노물들이 남의 잔칫상에 와서 웬 행패야. 하지만 그들을 뜯어말릴 능력이 없었기에 나는 방관했다. 기실 그들의 대결을 보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오히려 부추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두 괴물의 싸움을 말린 것은 도봉이었다.
“진정해요, 사부. 오늘의 주인공은 저이잖아요? 새카만 후배의 행사를 방해하면 남들이 욕할 거예요.”
도제가 못 이긴 척 흉흉한 내기를 갈무리했다. 그러자 용왕도 은근슬쩍 투기(鬪氣)를 거두었다.
도봉이 다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공치사를 하긴 싫지만 내게 감사해야 할 거예요.”
“무슨 소리요?”
“내가 어중이떠중이들을 쫓아버렸으니까. 그것들이 얼마나 거슬리는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날 들판에 버러지가 너무 많이 몰려온 바람에 제대로 칼을 부리지 못했잖아요. 공간이 넉넉했다면 그년은…….”
나는 도봉의 말을 잘랐다.
“당신이 나와 건곤장의 비무를 관전하러 온 이들을 내몰았단 말이오?”
“그래요. 직접 한 건 아니지만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양가의 늙다리들더러 그러라고 시켰으니까 전적으로 내 공이에요. 부정하진 않겠죠?”
하아, 이제 보니 저 여자가 원흉이었군.
나는 내 과업을 망친 도봉의 뺨을 광대뼈가 으깨지도록 후려갈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여자를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덜떨어진 사내가 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도제 때문이었다.
내가 욕구를 실행에 옮기려 든다면 내 손바닥이 그녀의 뺨에 닿기도 전에 도제의 칼이 먼저 내 목을 날릴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한마디 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쓸데없는 짓을 했구려.”
기대했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도봉이 봉황 같은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나는 그녀가 폭언을 쏟아 내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녀가 자중해서가 아니었다. 공중에서 빛살이 날아와 그녀의 면전에 꽂혔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