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87
제87화 – 이토록 허망한 결말을 맞이할 줄이야.
나를 봐서가 아니라 노인의 외침 때문에 화들짝 놀란 음양마가 벼락같이 쌍검을 꺼내며 전투 태세를 갖췄다.
나는 그가 나를 일별하기도 전에 이미 지공을 발출했다. 짧은 거리가 아니었지만, 그리고 음양마도 하수가 아니었지만, 빛살의 속도로 날아간 두 줄기 지공은 정확하게 내가 겨냥했던 그의 양 무릎에 꽂혔다.
일시에 보행의 능력을 상실한 음양마가 황급히 구명을 청했다.
“살려주시오.”
나한테 한 말이 아니었다.
방금 소리를 질렀던 노인이 쓰러지는 음양마에게 쇄도하는 나를 막아섰다. 이미 그가 범상치 않은 고수임을 알았기에 나는 초장부터 전력을 쏟았다. 하지만 노인의 사지를 노리고 내 십지에서 뻗어나간 지풍들은 그의 손짓 한 번에 튕겨 나갔다.
내 지공에 실린 경력에 밀려 두어 걸음 물러났으나 노인은 큰 타격은 없는 듯했다. 이 한 차례의 공방으로 나는 노인의 무위가 건곤장에 비해 조금도 떨어지지 않음을 알았다. 어쩌면 그보다 반의반 뼘이라도 우위일지도 몰랐다.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능히 노인과 일전을 겨룰 수 있고 우세도 점할 수 있을 듯싶었으나 내외의 부상이 가볍지 않은 지금의 몸으로는 고전을 면치 못할 터였다.
설상가상으로 노인의 외침과 음양마의 고함이 마인들을 불러왔다. 멀리서 날아오는 수십 개의 인영을 일별하며 나는 오늘의 일진이 사나울 것을 예감했다.
마인들이 몰려오기 전에 등을 돌려 달아나는 게 현명한 처신임을 알았으나 나는 노인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음양마를 포기할 순 없었다. 그는 현 시점에서 최고의 제물이었다. 오늘 잡지 못하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터였다.
짐짓 맹렬하게 짓쳐 들며 지공들을 폭사했으나 나는 노인과 승부를 결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가 내 기세를 인정하고 물러서 주기만 하면 바로 음양마를 낚아채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튈 작정이었다.
그러나 내상의 악화까지 각오하고서 최대치의 선력을 지공에 담았건만 노인은 내 기대와는 반대로 대응했다. 퇴보를 밟거나 비켜서기는커녕 지공들을 정면으로 받아내며 내게 돌진한 것이었다.
나는 갈등했다.
한 번 더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싹싹하게 물러설 것인가.
내 선택은 전자였다. 역시 잡아놓은 월척을 코앞에 두고도 빈손으로 떠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그러기엔 월척이 너무 아까웠다.
하여 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로 했다.
***
일단 노인과는 전력을 다해 부딪칠 참이었다.
그리되면 양패구상은 필연지사였다. 부상의 정도를 예측하기는 어려웠지만 다리만은 어떻게든 보호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설사 노인을 운신불능으로 만든다고 해도 나만 손해였다. 경공을 펼칠 수 없으면 생존도 가망이 없었다.
노인을 무력화한 후에는 음양마를 손에 넣고 장내를 벗어나는 게 다음 수순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워야 했다. 선령은 촌각의 지체만 발생해도 이리로 쇄도하는 마인들의 그물에 걸릴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그리되면 전생을 결행하거나 마정을 깨뜨려야 할지도 몰랐다.
단단히 마음먹고서 승부수를 던지려는 순간 내 결의를 간파하고서 두려움을 느꼈는지 노인이 훌쩍 물러섰다. 그러고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다들 물러가라.”
후두두둑.
우박 쏟아지는 소리를 내며 땅에 떨어져 내리던 십수 명의 마인들이 노인의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물러가래도!”
노인이 역정을 내자 마인들은 주인에게 혼난 개처럼 목들을 움츠리더니 몸을 돌려 마을로 날아갔다. 경신의 수준으로 보건대 다들 상당한 고수들이었다.
나는 새삼스레 마원의 무서움을 절감했다.
한산은 여섯 대처에 속하지 않는 곳이었다. 그럼에도 전날 내가 고루시마를 잡았던 하동보다 막강한 전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만으로도 하동의 마인들 전체를 감당할 수 있을 터였다.
이만한 강자가 강호엔 전혀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어찌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인들이 퇴각하는 것을 지켜보며 나는 호시탐탐 음양마를 낚아챌 기회를 노렸다. 졸개들을 돌려보낸 노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내 목적 달성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음양마 앞에 버티고 서서 내 포획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와 눈싸움을 하며 신경전을 벌이던 노인이 황당한 행동을 했다.
“얘기 좀 하자꾸나. 따라오거라.”
내 응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노인이 몸을 날렸다. 마을이 아니라 내가 왔던 절벽 쪽으로. 음양마를 그대로 둔 채.
이게 웬 떡이지.
나는 냉큼 내 제물을 챙겼다. 음양마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그의 혈도를 봉한 내가 그를 어깨에 둘러메자 벌써 십여 장이나 나아갔던 노인이 경신을 중단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뭐 하는 게냐?”
“이자는 내 거요.”
“뭐라?”
“이자를 내주지 않으면 대화에 응하지 않을 거요.”
노인의 눈에 기광이 번득였다. 나는 그가 분기를 표출하면 불문곡직 달아날 작심이었다. 제물을 수중에 넣었으니 그와 싸울 까닭이 없었다.
내 ‘부친’에 대해 알고 있음이 틀림없는 노인과 말을 섞어보고 싶었으나 성과와 안전이 우선이었다.
다행히 노인은 못마땅하다는 표정만 지었을 뿐 음양마를 놓아줄 것을 강요하지 않고 다시 신형을 공중으로 띄웠다. 나는 기꺼이 그를 쫓았다.
***
노인은 반 식경 전 내가 올라왔던 낭떠러지 끝에 가서 섰다. 나는 그에게서 이삼 장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까이 와라.”
노인의 말을 묵살할까 하다가 응해주었다. 어깨에 음양마를 두른 채 그에게 다가가자 노인이 또 다른 요구를 했다.
“내려놓아라.”
“싫소.”
“그자를 잡아가는 건 반대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자는 외인이니 지금부터 너와 나눌 얘기를 듣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말귀를 알아들었다. 하지만 음양마를 내려놓지는 않고 들쳐 맨 상태에서 수혈을 찍었다. 혹시 몰라 단전도 깨뜨렸다. 공력을 상실했으니 이제 음양마는 죽었다 깨어나도 해혈(解穴)할 수 없을 터였다.
“됐소?”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으나 노인은 더 이상 음양마를 내려놓도록 종용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너는 마종의 후예일 테지?”
나는 반문했다.
“내 아버지를 아시오? 아니, 그 전에 내가 그이의 아들임을 어떻게 알아보았소?”
불필요한 질문이었다. 나는 노인이 어떤 답을 줄지 알고 있었다.
그래도 확인을 해두어야 했다. 노인이 내 속에 깃든 마정(魔精)을 감지하고서 부친과 연관 지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인의 대답은 예상 대로였다.
“어떻게 몰라보겠느냐? 그와 똑같이 생겼는데.”
노인네는 내 부모에 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하지만 나는 그를 괴롭히고 괴롭힌 끝에 몇 가지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들 중 하나가 부모의 외양이었다.
노인네에 따르면 나는 부친의 판박이였다. 내가 열다섯 살이 된 이후로는 볼 때마다 신기하다고 때때로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어린 시절 가장 궁금했던 점이 풀렸다고 여겼다. 부모가 쌍둥이였다니 내 모친도 나와 생김새가 같을 터였다. 하지만 노인네가 내 결론에 초를 쳤다. 모친과 부친은 닮은 구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모친의 얼굴에 대해 묘사했지만 눈은 눈이고 코는 코이며 입은 입이라는 수준인지라 차라리 안 듣는 게 나았다. 모친의 모습은 여전히 상상의 영역에 있었다.
***
내 신분을 확인한 노인이 본격적으로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마종은 대체 어디에 있느냐? 마후(魔后)도 같이 있을 테지? 금방 천마신공을 완성할 거라 해놓고 어째서 이십 년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인 게냐? 네 무공을 보니 당시 현시했던 마공 말고 새로운 무공을 창안한 듯한데……, 아니 그보다 너는 어째서 마기가 그토록 흐릿한 게냐? 그러고도 어찌 그리 강한 게냐? 혹시 벌써 극마지경(極魔之境)에 이른 것은 아닐 테지? 마종이 너를 보낸 것은…….”
나는 노인의 말을 끊었다.
“내 입은 열 개가 아니오. 한 번에 하나씩만 합시다. 참, 그 전에 알아두어야 할 게 있소. 내 부모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오.”
“뭐라?”
굽은 허리를 쭉 편 노인이 살점이 붙어 있지 않아 생선 가시처럼 앙상한 손으로 내 팔뚝을 움켜쥐었다. 뼈가 바스러질 것 같아 나는 얼른 선력을 일으켰다.
“진정하시오.”
“누가……, 누가 그랬느냐? 개세팔천이라는 자들이었더냐? 그들 중 누구였더냐? 오래전에 창제란 자가 성지까지 올라와…….”
“일문일답하자고 했잖소? 내 부모를 죽인 자들은 그들이 아니오.”
“그럼 누구였더냐?”
“선맥과 도가에서 나온 이인(異人)들이었소.”
“뭐라? 그치들은 세상과 등지고 사는 족속이 아니더냐? 헌데 어째서 마종과 마후를 시해했더냐?”
“대대로 내려온 선조들의 유훈 때문이었답디다.”
“유훈이라니?”
“천마가 될 소지가 있는 마인을 때려잡으라고 했답디다.”
“흉수들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는 죽었고 다른 하나는 살아있으나 거처는 알지 못하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내거라.”
“그럴 거요. 하지만 만약 복수를 꿈꾸는 거라면 단념하는 게 좋을 거요. 노인장 같은 사람이 열 명 정도 더 있는 게 아니라면. 아니, 그걸로도 부족할 듯싶소. 그 늙은이는 괴물이니까.”
“…….”
“그렇다고 체념할 필요는 없소. 내가 처단할 터이니. 오래 걸리진 않을 거요. 길어야 일 년?”
“네가 일 년 이내에 나 같은 이 열을 감당할 만큼 강해질 거라는 말이더냐?”
“그렇소.”
노인은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이제 내가 물을 차례였다.
“내 부모에 관해 듣고 싶소.”
“무엇을 말이냐?”
“노인장이 알고 있는 전부.”
“나도 별로 아는 바가 없다. 잠깐 보았을 뿐이니.”
“무슨 소리요?”
“마종과 마후는 칠마류(七魔流)와 무관하게 출현했다.”
“마전에서 발굴해 천마고원에서 길러 낸 이들이 아니었단 말이오?”
“그렇다. 그들은 이십이 년 전 봄 갑자기 나타났다. 당시 천마고원을 장악하고 있던 분파는 우리 현마류(玄魔流)와 기마류(奇魔流)였다. 그날 새벽 성지인 적벽(赤壁)에서 형용할 수 없으리만치 강력한 마기가 일어 급히 달려가 보았더니 그들이 있었다.
현마와 나는 스스로를 마종과 마후라고 밝힌 그들의 자격을 검증하고자 했다. 충격적이게도 마종은 단 일초에 우리를 쓰러뜨렸다. 우리는 그를 마종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종과 마후는 천마신공을 완성해 마도천하를 이룰 거라며 우리에게 두 가지를 명했다. 하나는 인명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예들에게도 먹거리를 주라는 것이었다. 나와 기마는 그의 지시를 다른 오마(五魔)에게 전하고 충실히 집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곧 돌아온다던 마종은 오늘날까지 소식이 없었다. 나와 기마를 망상에 젖은 미치광이 취급하는 오마의 조롱과 핍박을 감내하며 그의 재림을 기다렸는데 이토록 허망한 결말을 맞이할 줄이야.”
나는 노인의 한탄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도중에 딴생각에 빠져들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해치지 말라니? 노예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니.
악마의 화신인 천마가 할 소리는 아니지 않은가.
이상한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부모가 그런 뜻을 가진 이들이었다면 노인네가 잡도리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였다. 노인네가 몰랐거나 목전의 노인이 잘못 알았거나.
이 노인은 일백 세도 넘어 보였으나 노망이 난 것 같지는 않으니 전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심히 궁금했다. 노인네는 그렇다 치고 재수 없는 늙은이는 어떨까. 그도 내 부모의 실상에 대해 알지 못했을까. 나더러 악마의 피를 이어받은 소귀 운운할 걸 보면 그랬을 듯싶지만 모를 일이었다.
어쨌거나 이십이 년 전 일어난 기사엔 노인네가 내게 알려준 것 말고 다른 사정이 있음에 틀림없었다. 재수 없는 늙은이에게 물어본들 답할 턱이 없으니 내막을 알아낼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아직도 참회동에 갇혀 있을 어머니를 만나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