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n Moorim Leveling RAW novel - Chapter 90
제90화 – 아버지!
나는 나만이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부터 물었다.
“당신들 중 누가 최강자요?”
용왕은 개세팔천 중 그 묶음에 속하는 다른 모든 이들과 손을 섞어본 유일한 인물이었다.
오래전에 이미 서열을 정리해두었을 터임에도 뜸을 들이더니 용왕이 빤한 답을 내놓았다.
“무력의 격차가 극미한 데다 서로 간에 상성이 있어 붙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만약 우리들 전부가 다른 전부와 한 차례씩 겨룬다면 물고 물리는 전적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실망스러운 답변이었다.
“그래도 객관적인 우열은 있잖소?”
일반적으로 창제와 밀왕은 상위권으로 인정받았고 빙왕과 무후는 약체로 분류되었다. 내가 그 점을 언급하자 용왕이 즉시 부정했다.
“터무니없는 소리다. 무후가 바닥이라니. 내가 보기엔 그 여자는 최소한 삼 등에는 올려야 한다. 어쩌면 그 여자야말로 우리 중 최강자일 수도 있다.”
나는 용왕의 아픈 데를 찔렀다.
“그건 당신이 그녀한테 고전했기 때문에 내리는 주관적인 평가가 아니오? 아무도 동의하지 않을 것 같소만. 무후는 지난 오십 년간 창제와 숱하게 붙었지만 한 번도…….”
용왕이 버럭 화를 내며 내 말을 잘랐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냐? 상성이 있다고. 창제는 물론 엄청나게 강하지만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위압감 따위는 없다. 반면 무후는……, 말을 말자. 평생 별의별 별종들을 만났지만 그 여자처럼 독하고 무서운 인간은 본 적이 없다.
무후가 매번 창제에게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들의 대결이 초수를 제한하는 비무이기 때문이다. 끝장 승부라면 창제의 숨이 먼저 끊어질 거라는 데 내 목을 걸어도 좋다. 무후도 무사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그녀가 간발의 차이라도 늦게 염왕을 보게 될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흠, 목까지 건다면 상당한 근거가 있겠군.
나는 충격적이었던 무후의 모습을 떠올렸다. 박박 밀어버린 머리 중앙에 난 함몰부위, 알몸을 문신처럼 덮었던 상처들, 잘리고 뭉개진 가슴들.
그리고 그 자그마한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던 가공스러운 패기(覇氣)를 상기하자 절로 전율이 일었다.
***
나는 개체팔천을 일일이 거론하며 그들 각각의 구체적인 특징과 전투 방식 등을 물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스스로 질문 공세를 중단했다. 용왕이 무성의한 답변으로 일관해서가 아니라 표현력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를테면 ‘검제의 검은 참으로 날카로웠지.’라던가 ‘빙왕의 장공은 내장까지 얼릴 만큼 차갑더구나.’ 같은 식이었다. 그런 설명으로는 도저히 그럴싸한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결국 천지조화지경에 이른 후 직접 확인하는 수밖엔 없을 터였다. 개세팔천 중 이미 다섯을 만나본바, 나 개인적으로는 역시 창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용왕은 그에게 위압감 따위는 없다고 했지만 내 눈엔 용왕 자신은 물론이고 검제와 도제도 그를 의식하는 게 확연히 보였다.
무후와 창제가 생사투를 벌인다면 무후가 이길 거라는 용왕의 주장도 동의하기 어려웠다. 전력을 다한 일백 초에서 열세를 보였다면 그 이후에는 더 불리해질 가능성이 컸다. 특별한 전기가 없다면 무후는 끝내 창제를 넘지 못할 것이었다.
물론 이것도 내 생각일 뿐이었다. 강호의 오래된 격언처럼 무인들 간의 진정한 우열은 쌍방 목을 내걸고 제대로 붙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었다.
***
해가 뜨고 한 시진가량 지났을 뿐인데 우리는 벌써 강바닥의 붉은 모래로 인해 자줏빛을 띤 대하를 건너고 있었다. 용왕은 세 시진 만에 삼천리나 남하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감회가 새로웠다. 중원의 남방 경계인 자하(紫河)는 십삼 년 전 노인네와 함께 닷새에 걸쳐 거슬러 올라갔던 추억의 장소였다. 당시 강 건너편을 가리키며 노인네는 그 울창한 숲 너머에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일러주었다.
나는 한번 가보자고 졸라대다가 독물이 바글거리고 삼복더위가 일 년 내내 지속된다는 노인네의 말에 떼쓰기를 멈췄다. 칠점홍두사에게 물려 죽을 고비를 넘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던 데다 더운 건 질색이었기 때문이었다.
노인네와의 즐거웠던 기억을 되새길 겨를도 주지 않고 순식간에 자하를 지난 용왕은 삼사백 리에 걸쳐 펼쳐져 있다는 밀림으로 들어섰다. 수림의 바다는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 용왕이 워낙 빠른 탓에 한 시진도 안 돼 뒤로 멀어져갔다.
나는 혀를 내둘렀다. 속도도 속도지만 촌각의 휴식도 없이 네다섯 시진을 비행하는 공력에는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천지조화지경에 들어 신선이 되면 이런 괴물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문상의 말처럼 기껏해야 이들과 같은 수준이 되는 게 아닐까.
나는 부정적인 전망을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하지만 내 의식의 심층에서는 긁어낼 수 없었다.
***
이국적인 풍광들을 흘려보내기를 몇 시진, 드디어 바다가 시야에 들어왔다.
망망대해 한가운데 떠 있다고 알려진 용궁은 그토록 유명함에도 아무도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했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었다. 혹자는 용궁이 배처럼 바다 위를 이동한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밀물 때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 바람에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라고 했다.
지난 일천 년간 용궁을 찾아간 이들은 강가의 모래알처럼 많았으나 중원으로 귀환한 이는 전무했다. 이 때문에 용궁에 관해 온갖 흉흉한 괴담이 떠돌았고 언젠가부터 용궁은 사지(死地)와 동의어로 쓰였다.
그런 연유로 용궁은 서역의 밀궁과 더불어 천하이대금역(天下二大禁域)으로 꼽혔다.
바다에 두 개의 태양이 떠 있었다. 아니, 물에 반쯤 잠겨있었다.
하나는 진짜 태양이었고 다른 하나는 일광을 받아 황금빛으로 물든 반구(半球)였다. 손톱 크기였던 반구는 점점 커지더니 가까이 갔을 때는 좀 과장을 보태 태산만 해졌다.
반구 정상에 내려앉은 용왕이 발을 굴렀다. 그러자 나와 그가 선 곳이 그대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내려가더니 바닥이 이번엔 수평으로 움직였다. 저절로 이동하는 바닥이라니 너무나 신기했다.
놀라움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통로의 끝에 투명한 벽이 있었는데 그 너머에 형형색색의 물고기들이 떼 지어 유영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우리는 바닷속에 들어온 것이었다.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며 대처 구경을 하는 촌뜨기 흉내를 내자 용왕이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어떠냐? 북해의 빙궁(氷宮)이 천하제일비처(天下第一秘處)라 불린다지만 본궁에겐 어림도 없다. 꽤 그럴듯하긴 해도 그래봤자 얼음덩어리 아니더냐. 그에 비해 본궁은 그야말로 신비함 자체이니라. 안팎이 다 말이다. 안 그러냐?”
빙궁을 본 적이 없으니 선뜻 동조하긴 어려웠다. 그러나 용왕의 말마따나 빙궁이 이만한 비경을 보유했을 성싶지는 않았다.
“자, 가자. 내 딸아이를 소개해주마.”
용왕이 우측의 복도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팔 척을 훌쩍 넘는 그가 지나가기엔 천장이 다소 낮아 보였으나 폭은 꽤 넓었다. 그의 뒤가 아니라 옆으로 따라붙으며 물었다.
“사람들은 왜 안 보이오?”
궁주가 돌아왔으면 신민들이 나와서 환영하는 게 보통이 아닌가. 하도 뻔질나게 중원을 드나들어서 다들 신경도 쓰지 않게 된 건가.
가벼운 질문이었으나 면상에 심각한 표정을 드리운 용왕이 걸음을 멈췄다.
“본궁은 원래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외인을 들이지 않는다. 혼인을 위해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올 때지. 그 사람은 반드시…….”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용왕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반드시 뭐요?”
“아니다. 너는 오직 한 가지만 명심하면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딸아이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거다. 알겠느냐?”
뭔가 서늘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그러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 거요?”
용왕은 제 할 말만 했다.
“하나 더 일러두마. 내 딸아이에겐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하는 종자들을 극도로 싫어한다. 내 말을 허투루 듣지 마라. 네가 허언을 내뱉는 순간 그 아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갈 게다. 그리되면…….”
나는 또 말끝을 흐리는 용왕을 노려보았다.
“그리되면, 어떻게 된다는 거요?”
내 시선을 피하던 용왕이 별안간 껄껄 웃었다.
“너를 믿는다. 너야말로 진정한 천년제일기재가 아니더냐? 분명히 내 딸아이도 좋아할 터. 아무렴 그렇고말고.”
내가 그의 여식의 눈에 들지 못하면 어떤 후과가 따르는지 거듭 물어보았지만 용왕은 끝내 답을 주지 않았다. 그걸로 충분한 답이 되었다.
***
열 평 남짓한 정방형의 방에는 탁자 하나와 의자 세 개뿐이었다. 의자 하나는 유독 컸다. 용왕이 동석할 거라는 뜻이었다.
휑뎅그렁한 공간에 나만 두고 나갔던 용왕은 한참 후에야 돌아왔다. 그가 대동한 여인을 본 나는 침을 삼켰다.
얼굴은 용모화에서 본 그대로였다. 다만 몸은 의외로 아담했다. 일견으로는 안진보다도 작을 듯싶었다. 용왕의 딸이기에 한월노모와 비슷한 체구에 체형일 거라 상상했던 터라 일순지간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내가 침을 삼킨 건 여인의 자그마한 몸집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고는 놀란 것이었다.
너무나 맑고 그윽한 눈.
아무리 뛰어난 화공이라도 그림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눈.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그런 눈을 가진 이들을 딱 두 명 보았다. 노인네와 양천이었다.
양천과 처음 조우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여인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내 눈길을 받은 여인의 볼에 홍조가 피었다. 시선도 살포시 내리깔았다.
이것도 예상 밖이었다. 용왕의 딸이 수줍음을 느끼다니. 그리고 저리도 다소곳하다니.
나는 그녀가 안진과 도봉 이상으로 천방지축이리라 예단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부친의 비호 아래 원하는 건 무엇이든 얻으며 자랐을 테니 얼마나 제멋대로이겠는가. 하지만 저 태도는 그와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속단하기엔 일렀다. 여자들이 얼마나 다변무쌍한 존재인지 알기에 나는 선입견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그렇더라도 저런 눈이라니. 어찌 호감을 품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와 여인이 자아내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던지 용왕이 파안대소했다.
“우하하하, 지상 최고의 재원(才媛)과 천하제일의 영재(英才)가 한자리에 모였으니 가히 역사적인 만남이로다. 자자, 어서들 앉으려무나. 허심탄회하게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자꾸나.”
용왕이 머뭇거리는 여인의 손을 잡고 내게로 이끌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먼저 소개부터 해야지. 인사들 나누려무나. 이 아이가 내 딸이다.”
나는 여인에게 포권했다.
“오선이라고 하오. 만나서 반갑소.”
여인은 가슴 앞으로 손을 들어 올려 손바닥을 붙이더니 고개를 살짝 숙였다.
“나는 아르에요. 중원의 이름으로는 백연(白延)이라고 해요.”
아르와 백연이라. 둘 다 근사한 이름이었다.
짝짝!
용왕이 느닷없이 손뼉을 쳤다. 그러자 귀청이 터질 듯한 굉음이 일었다. 청각이 예민한 나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다 내 반응을 보고는 용왕을 나무랐다.
“갑자기 박수를 치면 어떡해요, 아버지. 놀랐잖아요.”
뭐가 그리 좋은지 용왕이 싱글벙글했다.
“미안하다, 아르. 자, 이제 본격적으로 진도를 나가 볼까.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당장 결정하고 바로 거사를 치르자꾸나.”
거사? 무슨 거사? 설마 혼례는 아니겠지?
아니었다. 그보다 나빴다.
“내 특별히 소루를 내주마. 거기서 합방하면…….”
얼굴이 새빨개진 여인이 황급히 용왕의 말을 막았다.
“너무 앞서나가지 마세요, 아버지. 우선 저분 공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그럴 거 뭐 있느냐? 보아하니 저 녀석이 네 눈에…….”
“아버지!”
여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용왕이 웬일인지 움찔했다. 흠, 칼자루를 쥔 쪽은 아비가 아니라 딸이었군.
잘하면 용궁을 빠져나갈 수 있을 거란 예감에 긴장이 풀어진 나는 여인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순간 왠지 여인의 눈빛이 차가워진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