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0
10
수묘인이 처음으로 절혼마녀에게 관심을 가졌다.
“당신? 호호호! 재미있네. 생각해 보니까 당신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본 것 같아. 호호호!”
절혼마녀는 정말 재미있다는 듯 간드러지게 웃었다.
수묘인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어.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인데, 당신과는 통하는 데가 있을 것 같더군. 우리가 동류(同流)라는 점에서. 이의 있나?”
“동류?”
“쓰레기통에 버려진 썩은 고기 조각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사람들. 비참한 인생들이지.”
“죽고 싶은가 보네.”
스스슷……!
절혼마녀의 오른손에 공력이 운집되었다.
‘동류’라는 말이 절혼마녀의 자존심을 자극했다. 쓰레기통도 뒤질 수 있는 인간들이라는 말이 그녀를 화나게 했다. 비수로 그녀의 가슴을 찌르는 말이었기에.
금연화는 다급히 절혼마녀의 옷소매를 단단히 움켜잡았다. 그리고 고갯짓으로 참으라는 뜻을 표시했다.
“쯧! 이름 정도는 물을 수 있는 관계 아니었나? 오늘 밤까지 치면 삼 일이나 같이 지낸 건데. 말하기 싫으면 관두지.”
절혼마녀는 부르르 치를 떨었다.
수묘인의 말 때문이 아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고기 조각도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은 그녀가 되새기고 싶지 않은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지만 치를 떨 정도는 아니다.
손에 공력을 주입하는 순간 지독한 살기가 피부를 베어왔다.
등 뒤다! 웅크린 채 누워 있는 노인!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위태로워 보이지만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게 만드는 살기는 분명히 노인이 뿜어내고 있다.
아니다. 아니다. 노인은 아무런 기운도 뿜어내지 않고 있다. 살기가 등 뒤에서 쏘아져 오는 줄 알았는데 사방에서 옭죄어온다.
말이 되는가! 강인데…… 물속에서 쏘아져 오는 것도 아니고 마치 땅 위에서 다수의 적을 상대로 싸우는 것과 같은 느낌이라니.
‘공령무지즉발(空靈無知卽發) 상태!’
공력의 운집이 최고조에 다다라 언제라도 초식을 뿜어낼 수 있는 상태다. 의식은 상관치 않는다. 본능적으로 공격과 방어를 할 수 있는 상태이며, 투(鬪)와 공(功)이 하나로 어울린 현상이다.
수묘인을 가격한다면, 그 순간 살기는 실체가 되어 들이닥칠 게다.
누군가? 수묘인인가, 노인인가.
살기를 뿜어낸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맞았어! 시마였어!’
“흥! 고인이셨군요. 그만 본색을 드러내시는 게 어때요, 시마?”
노인은 죽은 듯이 웅크린 채 말이 없었다. 아예 사람이 없는 것처럼 조용했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수묘인이 수레를 물길에 맡긴 채 벌렁 드러누웠다. 그 순간,
쉬익!
절혼마녀의 옥수가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등 뒤에 누워 있는 노인이 시마라고 해도, 공령무지즉발 상태여서 즉각적으로 반격을 가해온다고 해도 따라잡을 수 없는 빠름이었다. 더군다나 수묘인이 손가락 하나 간격도 되지 않는 곳에 누워버렸으니 절호의 기회였다.
살기가 실체로 변한다면 수묘인은 죽음을 맞이할 게다.
절혼마녀는 수묘인의 목을 움켜잡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한가닥 불안감은 떨쳐 버릴 수 없어서 누워 있는 노인을 예의 주시하며 말했다.
“당신, 시마 맞죠? 이 사람은 당신 제자고. 침묵은 안 돼요. 말해야 될 거예요.”
목을 잡은 손길에 힘이 실렸다.
그 순간, 수묘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귀여운 아기를 보는 듯 다정하다. 사랑스러운 여인을 보는 듯 밝다. 부모가 자식을 보는 듯 포근하다.
“예쁜 얼굴이군. 입술이 참 달콤할 것 같아. 술 냄새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겠어. 쓰레기 더미에 몸을 굴린 여자치고는 피부가 참 깨끗해. 미인의 첫째 조건은 세요설부(細腰雪膚)라더니, 이제야 그 말뜻을 알겠어.”
수묘인은 손가락을 들어 절혼마녀의 콧등을 살며시 쓸어내렸다.
“청순함과 요염함이 한데 묻어 나오는 여자는 위험해. 깊은 늪 같아서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워. 대체로 당신 같은 여자는 사내를 치맛자락에 휘감을 팔자라던데.”
단숨에 목뼈가 부러질 위험한 말인데도 수묘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
그런데 절혼마녀의 행동이 기이하다.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있다.
손아귀에 일 푼만 힘을 가해도 수묘인의 목뼈는 부러진다. 낙화향에서 불구가 된 사람들 중에는 목이 다쳐서 척추 장애를 일으킨 경우가 상당수이니 죽이거나 불구로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절혼마녀는 꽁꽁 얼어붙어 아무것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금연화도 현실을 망각했다.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이 순간 느낀 것은 수묘인의 웃음이 참으로 편안하다는 것과 자신의 마음이 물먹은 솜처럼 풀어진다는 것이다. 그때,
우르르릉……! 꽈앙!
하늘에서 뇌성벽력이 터지며 장대 같은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한 날씨였다. 수묘인이 말한 것처럼 밤에 큰 비가 내릴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해도 오늘 중으로 비가 올 것이란 정도는 짐작했다.
쏟아지는 빗줄기가 심상치 않다. 강물이 들끓는 기름 솥처럼 파닥거리고, 묵직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렇지 않아도 방향을 잡을 수 없는 어둠을 더욱 어둡게 한다.
절혼마녀는 뇌성을 듣고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금연화도 몽롱하던 환상에서 급히 깨어났다.
“무, 무슨 짓을! 무슨 짓을 한 거냐!”
절혼마녀의 음성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방금 전 상황을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곤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사, 사술(邪術)!’
금연화도 잠시나마 넋이 나갔던 현상을 떠올리며 부르르 치를 떨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누군가가 검을 찔러왔다면…… 갓난아기에게조차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 않나. 무인이…… 무인이 이런 방심을 하다니.
“호, 혹시 화, 환희마소(歡喜魔笑)?”
금연화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환희마소, 이는 무공이 아니다. 한 여인의 웃음이다.
은은하게 살짝 지어낸 웃음은 삶과 죽음을 가장 확실하게 절감할 수 있는 곳, 전장(戰場)에서만 피어났다.
죽음이 안타까웠음인가. 이름도 용모도 알려지지 않은 여인은 전장을 찾아 떠돌았고, 죽음이 임박한 자들을 찾았다. 그리고 그들을 살며시 보듬어 안으며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환희마소다.
환희마소를 접한 병사는 세상에 대한 미련을 훌훌 떨쳐 버리고 안락한 죽음을 맞이했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형제도 잊었다. 처자식도 떠올리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도 망각했다.
환희마소는 이름 없는 병사를 순식간에 득도한 고승처럼 만들었고, 편안한 영면으로 이끌었다.
인위적으로 죽음을 앞당긴 건 아니다. 독을 사용한 것도, 무공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어미가 자식을 껴안듯이 보듬어 안으며 웃음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웃음의 종류는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다. 측음함도 아니고, 자랑스러움도 아니고, 인자함도 아니다. 꼭 꼬집어 말할 수 없는…… 굳이 말한다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신비스러운 웃음이다.
수십, 수백에 이르는 병사들이 목도했다. 그리고 그들의 입을 통해 ‘환희마소’라는 이름이 결정지어졌다.
죽은 자들이 기쁨을 느끼며 편안하게 떠나갔으니 ‘환희’다. 죽음으로 이끄는 미소이니 ‘마소’다.
그저 한 여인의 웃음.
까마득하게 먼 옛날,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미소.
현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환희마소라는 말조차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잠깐 피어났다가 사라져 버린 미소였기에.
금연화는 자신이 말했으면서도 고개를 내둘렀다.
‘환희마소라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환희마소를 떠올리다니. 그런 말을 왜 떠올렸을까? 수묘인의 웃음을 보는 순간 너무 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일까? 일시적이나마 세상에서 가져 볼 수 있는 안락함의 극치를 맛본 탓일까?
수묘인의 웃음과 환희마소를 연결 짓는 건 터무니없다. 안다. 그래도 환희마소밖에 떠오르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수묘인은 몸을 일으켰다.
다시 그의 널찍한 등이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었다.
깊은 침묵,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길 안내를 받는 것인가, 고의적으로 접근해 온 사람에게 이끌려 가는 것인가.
노인은 무인이다. 시마가 거의 확실하다. 절혼마녀가 접했던 살기는 시마 정도의 가공할 내력을 소유하지 않고는 뿜어낼 수 없다.
수묘인의 신비스러운 웃음도 마주치고 싶지 않다.
사술인지, 무공인지, 금연화의 말처럼 환희마소인지 모르지만 죽이고자 마음먹으면 누구든 죽일 수 있는 능력인 것만은 확실하다.
손발을 놀리거나 병장기를 부딪친 적은 없지만 두 사람은 틀림없이 무인이다.
무인이 왜 무공을 숨기고 숨어 사는 것일까? 천하디천한 수묘인이 되어 멸시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일까.
노인이 시마라면 이유가 된다.
무림이 북무림과 남무림으로 양분된 후, 정통무가로 인정받지 못하거나 사마인(邪魔人)으로 낙인찍힌 사람은 살아남지 못했다. 북무림, 남무림은 공히 서로에게 병기를 들이대기 전 내부 정리부터 시도했고, 와중에 흉신악살들은 모조리 소탕당했다.
몇몇 문파가 힘을 합쳐 악도들을 쫓는 것과 똘똘 뭉친 무림 전체가 힘을 합쳐 몰아치는 것은 차원이 달랐다. 초절정고수라서 손대지 못했던 마인, 미꾸라지처럼 잘 빠져나가는 악인…… 누구를 막론하고 무림 전체에 펼쳐진 치밀한 그물막을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살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지독한 인간 사냥이었다.
노인이 시마라면 숨어 살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자하부를 떠날 명분으로 막대한 돈까지 들여가며 고용된 사람들의 범주는 벗어났다는 것이다.
우르릉! 꽈앙! 쏴아아아……!
천둥번개는 제 세상을 만난 듯 요동쳤고, 빗줄기는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쏟아졌다.
얼마나 흘러왔을까? 어디쯤이나 될까?
차디찬 빗줄기에 손마디가 굳어갈 무렵, 수묘인이 말고삐를 움켜잡았다.
“야핫!”
수묘인의 입에서 작은 소리가 새어 나옴과 동시에 비루먹은 말이 힘차게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가고 있다.
넓이가 얼마나 되는지…… 세상이 온통 물바다라서 비쩍 마른 말이 과연 강안까지 도착이나 할까 싶다.
절혼마녀는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한시도 입에서 떼지 않던 술도 마시지 않았고, 수묘인이나 노인을 탐색하던 눈길도 거둬 버렸다.
그녀는 나무가 되었다.
생각도 하지 않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이리저리 휩쓸리기만 할 뿐 대응을 하지 못하는 넋 잃은 여인이다.
금연화도 입을 열지 않았다.
모래톱을 일 장 정도 남겨놨을 때 수묘인은 비루먹은 말을 풀어주었다.
“이놈, 그동안 정들었는데 이제 그만 헤어질 때가 됐구나. 다음에는 부디 좋은 주인을 만나서 살이나 피둥피둥 찌거라.”
비루먹은 말은 큰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대뜸 모래톱에 올라 강안을 따라 걸어갔다.
“잠 귀신, 그만 일어나지.”
숨소리가 흘러나오지 않아서 살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던 노인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끄응! 말하는 싸가지 하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노인을 공경하는 마음은 터럭만큼도 찾을 수 없다니까.”
놀라운 일이다. 기식(氣息)이 엄연했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히 털어버리고 일어선다. 하기는 시마라면 기식 정도는 얼마든지 감출 수 있었을 테지.
수묘인과 노인은 그녀들의 생각은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짐을 챙겼다.
풀고, 정리하고, 짐 보따리에 챙겨 넣고…… 망설임없이 버릴 것과 챙길 것을 구분하는 행동으로 미루어 이번과 같은 상황을 한두 번 겪어본 솜씨가 아니다.
“이 비는 내일 아침까지 퍼붓다가 그칠 거야. 여기서부터는 숨어 다닐 곳도 없고. 그러니 우리는 날이 밝기 전에 족적(足跡)을 지울 수 있는 곳까지 가야 해. 그만들 일어서.”
수묘인이 큼지막한 등짐을 지고 일어섰다.
‘이대로는 동행할 수 없어.’
생각은 금연화가 했지만 절혼마녀도 같은 생각일 것 같다.
“잠깐 이야기 좀 해.”
수묘인은 모래톱에 한 발을 디딘 상태다. 노인은 절혼마녀가 먼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은 그 상태로 멈춰 섰다.
“당신과 이분. 무인인 것 알아.”
“…….”
“시마 맞죠?”
“…….”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벙어리가 됐다.
“무인이라도 좋고 시마라도 좋아. 무슨 말이든 할 말이 있을 텐데?”
수묘인이 말했다.
“강을 건넜으니 약속대로 낙화향 동방은 내 거야.”
그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움직였다. 두 발이 모두 모래톱에 올려졌다. 그리고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단문협!”
금연화가 급히 말했다.
“단문협까지 길 안내를 부탁해.”
“뜻밖이군. 이쯤에서 갈라지자는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북검 무인들을 만나지 않고는 권수를 건널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건넜어. 아무도 만나지 않고. 단문협까지도…… 부탁해.”
금연화는 진심이었다.
노인이 시마라고 해도 상관없다. 수묘인이 시마 제자라도 관계없다. 북무림의 지배자인 북검문과 부딪쳐야 하는 입장이라면 마인이든 살인자든 행동을 같이 해줄 사람이 필요하다. 그런 뜻에서 결코 정당하다고 할 수 없는 절혼마녀까지 끌어들였다.
이들이 절혼마녀 이상 가는 고수라면 더욱 힘이 된다.
금연화에게 행동해야 할 중심은 하나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문협에 간다. 배신자를 찾아서…….
시마가 무공을 드러내지 않았다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거의 확실하다. 하지 않았다. 정체도 모르는 자들과 동행할 수는 없으니까.
노인이 시마라면 더더욱 끌어들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금연화는 절혼마녀와 생각이 달랐다. 절혼마녀는 마도인을 배척하지만, 금연화도 그랬지만…… 자하부까지 등진 마당에 망설일 것이 없어졌다.
이들은 가만히 있다가 왜 무공을 드러냈을까?
갈팡질팡하는 마음을 눈치채고 자신들을 꽉 잡으라는 신호는 아니었을까?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는데.”
수묘인의 음성은 요란한 천둥번개 소리를 뚫고 똑똑히 들려왔다.
“가격이 달라. 무인과 만나도 되는 거라면 싸게 해줄 수 있지만, 아예 만나지 않는 것은 비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