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00
100
옛날의 금연화 같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하나 지금의 금연화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다.
“혈유 덕분이지. 그 자식, 신법으로는 따를 자가 없잖아. 절혼, 일령, 다담…… 빠른 사람은 많아도 따라붙는 재간은 혈유를 따를 수 없을 거야.”
“그렇군요. 혈유도 오셨군요.”
“대답 안 했어. 죽고 싶어?”
“죽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요.”
“죽고 싶지는 않다. 죽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
“네.”
“좋아. 그럼 가지.”
수검이 벌떡 일어섰다.
“네?”
“죽지 않고 죽이면 되잖아. 난 쉬면서 갈 테니까, 죽지 않을 머리나 짜보라고.”
수검은 대답도 듣지 않고 먼저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2
“헤헤! 오랜만이야?”
혈유가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꾹 찌른 후 사라졌다.
‘오랜만이에요.’
금연화는 속으로 말했다.
멀리 산 위에서 동경이 햇볕에 반사되는 것 같은 빛이 발산되었다.
‘두 개. 고루쌍마의 겸도.’
벌써 자신까지 다섯 명이 되었다.
금연화는 헤어졌던 사람들이 모두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래 이들은 복수를 원하지 않았다. 소립파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든 하지만 따로 떨어져 있는 지금은 조용히 있기를 원했다.
지금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잘 고수해 왔다.
한데 목숨을 바쳐서라도 보호해야 할 사람이 움직이고 있으니 어쩌겠는가.
그렇다고 싫은 표정은 짓지 않는다.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는 듯 마음을 가볍게 해준다.
이들이 어떻게 마인인가.
“기가 막히지, 글쎄. 아직까지 마인들이 숨을 쉬고 있다니 말이 돼? 그런 놈들은 닭 모가지 비틀듯이 모가지를 비틀어서 죽여야 돼.”
사람들 입에서 들은 소리다.
마도, 수검, 혈유…… 이들이 그렇게 죽을 만한 일을 저질렀나?
“비켜요! 비켜! 안 비키는 사람 다쳐도 몰라요! 비켜!”
뒤에서 태산이 떠나갈 것 같은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철탑거추?’
그 또한 음성만 들어도 알 사람이다.
뒤를 돌아보자 과연 황소처럼 큰 철탑거추가 작은 마차를 부지런히 몰며 다가왔다.
건장한 말 두 마리가 끄는 이두마차다.
그런데 말들이 불쌍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타.”
수검이 낮게 말했다.
금연화는 말뜻을 안다. 이제는 눈빛만 봐도 뜻을 알 수 있다.
철탑거추는 두 사람을 모르는 듯 비키라는 소리만 빽빽 내지르며 마차를 몰았다.
쉬익! 쉬익!
수검은 오른쪽 문으로, 금연화는 왼쪽 문으로, 마차가 스쳐 지나갈 때 지극히 은밀히 스며들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에요.”
마도는 여전히 팔짱을 끼고, 팔짱 사이에 도 한 자루를 품은 채 앉아 있었다.
마도는 늘 이런 모습이다.
“상조문을 어디까지 칠 생각이지?”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어요.”
“그럼 통구로 국한하면.”
“저 혼자 할 생각이었으니까…… 얼마나 할 수 있겠어요? 하는 데까지 하는 거죠.”
“전멸로 가닥을 잡지.”
“네?”
마도의 말은 금연화조차도 뜻밖이었다.
“마야와 부딪치려고 가는 자들이야. 우리 손에서 끊어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추혼단과 제삼무신가 자식들이 가만있을까?”
수검이 말했다.
“내부 정리가 될 때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일단은 움직이지 말라는 명을 받았을 테니 안심해도 좋을 거고요.”
대답은 금연화가 했다.
“상조문을 친 다음에도 우린 마야와 합류하면 안 돼. 가능한…… 마야가 편안하게 길을 갈 수 있도록.”
순간, 금연화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이들은 절대 닭 모가지 비틀듯이 비틀어 죽일 사람들이 아니다. 뜨거운 우정을 지녔고, 서로의 마음을 보듬어 안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의구(誼口).’
금연화의 눈에 길가에 세워진 도판액(안내판)이 보였다.
의구라면…… 십여 리만 가면 통구다.
그때, 마차 문이 살짝 열리며 혈유가 불쑥 들어섰다.
“히유! 숨차다. 안녕! 아까 인사했지?”
“예, 인사 잘 받았어요. 오랜만이에요.”
“몇 명?”
마도가 불쑥 물었다.
“천절수(天切手) 사백. 정말 할 거야?”
‘천절수 사백.’
금연화는 혈유가 한 말을 다시 되뇌었다.
천절수가 칠백인 문파에서 사백을 내보냈다면, 마야의 제거를 얼마나 높게 생각하는지 말해준다.
“대두(大頭)는 누구야?”
“상조문 부문주 혈살미검(血殺美劍) 고충오(顧忠敖).”
“혈살미검…….”
“그자 손에 죽은 자만 이백이 넘는다는 소문이야.”
“약한 놈이야. 간사한 놈이지.”
“아는 자야?”
“아니, 명호가 그래. 혈살미검이 뭐야? 혈살이면 혈살이고 미검이면 미검이지. 놈은 혈살도 못 되고, 미검도 못 돼. 혈살도 되고 싶고 미검도 되고 싶은 놈이니까.”
“정말 할 거야? 천절수가 사백인데.”
“한다. 사백이니까 더 해야 돼. 우리가 하지 않으면 그 숫자가 마야에게 들이닥쳐.”
마도가 시원시원하게 말했다.
상조문은 통구를 점령했다.
그들은 점령군이 적지를 점령했을 때처럼 거침없이 행동했다.
남편과 함께 자는 아낙을 깨워 강간하고, 지나가는 사람을 괜히 시비 걸어 두들겨 패고, 주루에 있는 술과 음식은 모두 공짜였으며,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노예였다.
무법지대(無法地帶), 통구는 법이 존재치 않는 세상이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상조문도가 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짐을 꾸려 빠져나갔다. 무인들은 통구로 들어설 생각을 하지 않았고, 들어서더라도 가급적이면 상조문도 한두 명을 옆에 끼고 다녔다.
“죽여도 좋을 놈들이군. 이런 게 정도 세상이라면, 마도 세상으로 뒤집어 버리련다.”
마도는 혈염도를 꺼냈다.
무인, 그것도 도를 꺼내 들고 선 무인. 상조문도에게 이처럼 좋은 시빗거리는 없었다.
“이봐, 넌 뭐 하…… 끄윽!”
절대감각도, 혈염도. 하루에 한 명씩 죽여서 살과 뼈를 가르고 피가 튀는 느낌을 전달시켜 줘야 생명을 유지하는 악마의 도법. 사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의 피를 먹여서 키운 핏빛 도.
“백칠십삼 명의 피가 묻은 도다. 네놈들의 피는 숫자로 치지도 않으련다.”
“사, 살인! 살인이닷! 이봐! 이리로들 와봐!”
마도는 다른 자가 실컷 소리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목이 쉬어갈 무렵, 일도를 뻗어냈다.
슈각! 파앗!
붉은 피가 어둑어둑해져 가는 저녁노을과 뒤엉켰다.
고루쌍마는 몸을 드러내는 순간부터 단번에 주목을 받았다.
“하하! 피죽 한 그릇 못 먹고 자랐나. 어떻게 하면 저렇게 마를 수 있지? 이거야 원, 해골이 걸어다니는 것 같잖아. 야! 너희들! 보는 것만 해도 재수없으니까 안 보이는 대로 꺼져!”
“새끼들, 귀엽게 노네.”
“뭐? 지금 이 자식이 뭐라고…… 으악!”
말을 하던 자는 눈앞에서 뭐가 번쩍이는 순간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비명을 토해냈다.
언제 잘렸는지 팔 하나가 바닥에 떨어져 펄떡인다.
“이, 이…….”
상조문도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비로소 해골 사내들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들의 눈빛에서 쏟아지는 살광이 지옥의 불길처럼 여겨졌다. 눈길이 몸에 닿을 때마다 수천 마리의 갈가마귀가 달려들어 쪼아대는 것 같다.
“사, 살려…….”
상조문도는 자신도 모르게 애원을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랬듯이, 다른 상조문도들이 그렇듯이 해골 사내의 낫도 용서가 없었다.
쉬익!
공기를 가르는 차가운 바람은 목 밑을 스쳐 지나갔다.
철탑거추 역시 고루쌍마만큼이나 눈길을 잡아끌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람한 덩치 덕분에 시비는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시비를 걸었다.
“새끼들, 많이 처먹었냐? 네놈들이 다 처먹으니까 내가 먹을 게 없잖아.”
“존성대명이……?”
“이거 뭐야? 닭이야, 오리야?”
철탑거추는 상 위에 버려진 닭 뼈를 주워 들었다.
그의 덩치만큼이나 손도 커서 닭 뼈가 이쑤시개처럼 작아 보였다.
“다, 닭.”
“자식, 먹으려면 싹싹 발라먹어야지. 많이 남겼군. 마저 먹어.”
“다 발라 먹었는…….”
“먹으라면 먹어!”
“뭐야, 지금 시비 거는…… 으아악!”
그의 비명 소리는 유독 컸다.
닭 뼈가 생으로 이마를 찢고 들어와 뇌리에 박히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저, 저놈! 저놈 죽엿!”
“하하하! 하하하하!”
철탑거추는 통쾌하게 웃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성명병기인 쇠망치를 꺼내 들었다.
빠악! 빠아악!
그의 팔이 움직일 때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피보다는 뇌수가 더 많이 튀었다.
살육을 저지르는 사람은 단 여섯 명이다.
마도, 수검, 혈유, 철탑거추, 고루쌍마.
사백 대 여섯 명의 싸움이니 한 사람이 예순다섯 명을 맞아 싸워야 한다.
싸움은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하였지만 통구가 발칵 뒤집히면서부터 양상이 조금씩 변했다.
싸움의 주도권은 여전히 여섯 명이 가졌다. 하나 상조문에도 고수가 있었고, 그들은 처음처럼 쉽게 끝나지는 않았다.
혈유는 서른 명인가 서른다섯 명인가를 죽인 다음에 고수라 불릴 만한 자를 만났다.
“그만 설쳐.”
“이걸 어쩌나. 싫은데?”
“가공할 빠름. 시커먼 묵검. 언젠가 들은 적이 있어. 원숭이처럼 생긴 놈이 더럽게 빠르다고. 빠름만 가지고 따진다면 중원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던데?”
“원숭이?”
“높여준 말이야. 원래는 쥐새끼였어.”
그는 검을 어깨 높이로 들어 수평으로 뉘었다.
“나도 들은 말이 있는데 들어볼래?”
“아니. 난 사람 말만 들어.”
“햐! 이거 내가 말에서 밀리네.”
“검에서도 밀려.”
“그럼 보자고.”
혈유는 달려들었다.
상대의 검법을 안다.
상조문에는 수십 가지의 검법이 존재하지만 진정한 검법이라면 딱 하나뿐이다.
염왕검법(閻王劍法).
초대 상조문주가 상조문을 일으킬 수 있었던 기본 바탕이다.
당시의 염왕검법은 무적이었으며, 가장 긴 상처를 만들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어깨에서 파고들어 간 검이 복부를 지나 허벅지로 나온다. 옆구리로 들어간 검은 복부에서 빙글 돌아 원을 그린 후, 다른 쪽 옆구리로 빠져나온다.
살을 파고든 검이 여유있게 긴 상처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상대의 병기를 제압해 놨기 때문이다. 상대의 손발을 묶어놓고 죽는다는 생각을 확실하게 되새김시킨 후에 죽이는 것이다.
쒜에엑!
생각했던 대로다. 빠르다! 몸이 빠른 게 아니라 검이 빠르다!
혈유의 검이 호선을 그리려는 순간, 어느새 튀어나온 검이 오른손을 베어왔다.
혈유는 진정으로 검을 부딪쳐 보고 싶었다. 하나 지금은 시간이 없다. 아직도 상조문도는 많이 남아 있고, 언제 또 이런 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슈웃!
병기는 묵검뿐만이 아니다. 검은 오른손에 들고 있고, 상대는 오른손을 노리고 달려들지만…… 혈유를 아는 사람은 오른손보다 왼손을 주의한다.
“크윽!”
사내가 화살 맞은 기러기처럼 맥없이 나가떨어졌다. 왼손에서 발출된 독수전(禿手箭)을 인중에 틀어박은 채.
혈살미검 고충오, 상조문 부문주.
그는 한 여인의 방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방바닥에 구멍이 뻥 뚫리면서 두더지처럼 생긴 자가 튀어나올 때는 조금 놀랐지만, 뒤이어 절세의 미녀가 나올 때는 기뻐서 죽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혈살인지 미검인지 알아보고 싶네요.”
여인은 쌍검을 꺼냈지만 들어올리지는 않고 축 늘어뜨렸다.
그때부터다. 여인은 가만히 서 있는데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저쪽으로…… 움직이려고 시도는 해봤지만 살을 에는 살기 때문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악!”
“아아악!”
밖에는 끊임없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름이 뭐냐?”
혈살미검 고충오는 이를 부드득 갈며 물었다.
이만한 고수라면 이미 명성이 나 있을 터인데,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 봐도 여인의 용모에 맞는 적합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단문협에 갔었나요?”
“흐흐흐! 혈귀대와는 무슨 관계냐?”
“죽을 사람은 궁금해할 필요가 없어요. 궁금증이란 건 산 사람 몫이거든요. 단문협에 갔었나요?”
혈살미검은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밖에서 들리는 비명 소리가 점점 잦아든다. 이는 싸움이 끝나가고 있다는 뜻이다. 한데도 자신에게 달려와 보고하는 자가 없다. 수하들이 당했다는 뜻이다.
여인은 강하다. 하지만 지금 치고 나가야 한다. 시간을 지체한다면 싸움을 끝낸 자들까지 가담할 테고, 그때는 정말 죽음밖에 없다.
“타앗!”
혈살미검은 우렁찬 고함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일검만 받으면.’
그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공격을 한 번만 막아낸 후, 봉창을 뚫고 달려나갈 참이었다. 한데,
슈아악!
검법에도 아름다움이 있다. 빠르다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강함과 부드러움이 절제라는 이름으로 섞여서 끊고 맺음을 표현해 줄 때 아름다움이 나타난다.
혈살미검은 진정한 미검 앞에 넋을 놓았다.
“이, 이게 무, 무슨 검…… 법?”
여인이 들고 있던 두 자루의 검 중 한 자루가 가슴 깊이 틀어박혔다.
“대답부터. 단문협에 갔었나요?”
“아, 안…… 갔…… 난…… 너무 약…… 해서…….”
혈살미검은 그가 듣고자 하던 대답은 듣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휴우! 이상하네요. 이런 사람이 어떻게 부문주가 됐죠?”
“상조문주의 친동생이거든. 크크! 상조문주, 눈깔 튀어나오겠네. 어떻게? 이리 갈 거야?”
언장은마가 방바닥에 뚫린 구멍을 가리켰다.
***
통구에 있던 상조문도 사백 명이 하룻밤 사이에 몰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다담선자는 가늘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휴우! 이제 정말 물러설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네. 조용히 가고 싶었는데.”
삼월, 봄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