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02
102
그래봤자 부문주와 천절수 사백이면 충분할 줄 알았는데.
아니다. 절대 아니다. 문주의 말대로 상조문의 모든 힘을 기울여도 승부를 점칠 수 없다. 상조문의 존망이 걸린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거렸지 않은가.
무풍곡에 부는 바람을 맞고 있자니 모골이 송연했다.
왠지 섬뜩하고, 머리칼이 곤두서고…….
죽음의 기운이 스며 있는 바람을 맞고 있는 느낌이었다.
단지 팔귀당천지관만 보았다면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을 게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찾는 사람이 정말 똑똑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런 일이야말로 책사의 가치를 증명해 준다.
팔귀당천지관만이 아니다. 마야를 따르는 무리는 단지 네, 다섯에 불과한 줄 알았는데 지금은 몇 명이나 되는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들은 발자국도 남기지 않았다. 지나간 것은 분명한데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면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다.
싸움이 벌어진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흩어지지 않고 있는 횟가루가 아니었다면, 흔적을 찾아내는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지 않았다면 자신 또한 그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을 게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마당에서도 삶보다 자신들의 존재감을 먼저 지우려는 사람들이 중원에 몇 명이나 되랴.
살수다!
그것도 대단히 뛰어난 초절정 살수들이다.
상조문에서는 그들이 누구인지 어떻게 마야를 따르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싸워서는 안 된다. 싸우면 도륙당한다. 비록 상조문의 명성이 남무림을 쩌렁 울리고 있지만 무공 연원을 전혀 모르는 초고수와 싸워서는 승산이 없다.
다른 문파와 공조해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직접 부딪치는 일만은 피해야 한다.
문주는 지금 어디쯤 가고 있을까.
사잔, 칠형, 십시…… 패배를 모르던 무골들은 죽음이 머리 위에 드리워졌다는 사실을 꿈엔들 생각이나 할까.
기가 막힐 노릇이다.
상조문은 잔인함만큼이나 폭넓은 정보력으로 유명했다.
장의사들의 발길은 중원 곳곳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또한 그들이 머문 곳이면 으레 수많은 사람들이 문상객이란 이름으로 들끓는다.
그들은 애도한다. 취하고, 횡설수설한다. 고인이 살아생전에 행했던 일들은 빠지지 않는 안주거리고, 가족이 아니면 알지 못하는 치부까지 꺼내놓기도 한다.
이 모든 정보가 상조문으로 모여들어 막대한 힘이 되었다.
한데 모순되게도 가장 폭넓고 빠른 정보망을 지녔다는 상조문이 자신들의 목숨이 걸린 일에는 까막눈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보를 물어다 주는 사람들 태반이 무림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서 현업에 종사하는 것이지 상조문의 일원이 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다.
그런 사람들이 보고 듣는 정보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특히 이번처럼 벌어진 일에 대해서 실체를 파악하고 보고하는 사안에는 차라리 보고를 받지 않는 것이 나을 만큼 무지를 드러낸다.
상조문의 정보망에는 허점이 있었다. 한데도 즉시 사실 파악을 하지 않은 것은 안일함 때문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여태까지 아무 일이 없었고, 상조문이 나서서 해결되지 않은 일도 없었고, 누가 건드려 오지도 않았고…….
“안 돼…… 싸우더라도 시간을 두고…….”
망연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조위는 얼음 굴에 들어선 것 같은 냉기를 느끼는 순간 모든 생각을 중지했다.
그는 무인이다. 머리만 뛰어난 책사가 아니라 손속 또한 매섭기 이를 데 없는 무인이다.
“누구신가?”
나직하게 말했다.
텅 빈 허공에 흘리는 말이지만 상대가 듣기에는 충분한 음성이다.
“이천사두 조위. 왼손으로 전개하는 좌수검(左手劍)이 하늘에 맞닿았다고 하여 일천(一天), 오른손에서 쏟아지는 열 자루의 유엽비도가 하늘을 찌른다고 하여 이천(二天), 스스로 뱀대가리라고 칭하나 타인이 뱀대가리라고 부르면 즉각 살수를 전개하는 사두(蛇頭). 이천사두. 흔치 않은 무명이야.”
한 자, 한 자 귀에 똑똑히 틀어박히는 낭랑한 음성이었다.
조위의 눈빛이 암울해졌다.
상대는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데, 어디에 있는지 형체를 파악할 수 없었다. 하나 당황하지는 않았다. 상대가 강하다고 느껴지면 느껴질수록 더욱 침착하고 냉정해졌다.
“계속 숨어서 혀만 나불거릴 텐가? 할 일 없어서 남의 명호나 풀어대는 건 아닐 테고…… 용건이 있어서 오기는 왔는데 앞에 나설 수는 없다, 이건가?”
슈욱!
상대는 말이 아니라 검으로 말해왔다. 느닷없이 발밑에서 검이 튀어나와 앗차! 할 사이도 주지 않고 정강이를 베어냈다.
왼쪽 발에서 끊어지는 것 같은 통증이 일었다.
‘살수! 대단한 살수다! 그럼 이자들이 마야를?’
조위는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검이 정강이를 베고 지나가는 순간, 그의 우수에 들려 있던 유엽비도 열 자루가 득달같이 날아갔다.
검이 솟구치고 살까지 베어내고 지나갔는 데도 종적을 잡아내지 못했다면 차라리 검을 버려야 한다.
상대의 위치를 알아냈다. 그리고 하늘조차도 관통시킨다는 유엽비도 열 자루라면 숨통을 끊어놓을 자신도 있었다. 한데,
슈욱! 푹! 푹푹푹……!
그가 던진 유엽비도는 단 한 자루도 피 맛을 보지 못한 채 땅바닥만 두들겼다.
‘설마 이 정도까지! 이런 살수라면…… 남도문…… 그래! 남도문에서 끌어들인 천멸도 살수들! 그들밖에 없어. 지상에서 가장 완벽한 살수들이라는…….’
슈욱!
눈앞에서 검이 솟구쳤다.
본능조차도 마비시킬 만큼 빠른 공격이다. 방어는 생각도 못할 만큼 완벽한 기회였고, 위치였다.
푹! 파앗!
검이 복부를 파고들어 등 뒤로 빠져나갔다.
조위는 복부에 박혀 흔들거리는 검을 쳐다보았다.
상대는 사라지고 없다. 복부를 찌른 순간 검을 놓아버리고 숨어버렸다. 조위가 서 있는 발밑으로.
“빌어먹을! 내 좌수검은 일절인데 써보지도 못하고…… 이봐, 마지막 한 수는 공정하게…….”
슈각!
이번에는 등 뒤였다.
어떻게 발밑으로 사라진 자가 등 뒤에서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조위는 척추가 베여져 풀썩 쓰러졌다.
붉은 피가 작은 웅덩이를 이뤘다.
조위의 몸에서 쏟아져 나온 피는 무풍곡을 짙은 혈향(血香)으로 감쌌다.
“후후후! 울고 싶은데 뺨 때린다고…… 상조문이 제 발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군.”
모습은 보이지 않고 음성만 들렸다.
“이로써 상조문은 사라지는군요.”
“상조문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파가 사라질 거야.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되었어.”
“……힘들지 않을까요?”
“힘들겠지. 아무리 도주님이라도 안 돼. 천멸도의 형제들도 살과 뼈로 이뤄진 인간. 한 손이 열 손을 당할 수는 없어.”
“…….”
“하하! 걱정되나?”
“그게 묘하군요. 걱정할 수도 없고, 하지 않을 수도 없고. 차라리 그냥 무너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 무너질 바에는 우리 손으로 끝내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있고.”
“건방진 소리.”
“…….”
“마야에게 달렸어. 마야가 힘을 써준다면 견뎌낼 수 있을 것이고, 지금처럼 혼수상태에만 빠져 있다면…… 견딜 수 없겠지.”
음성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단지 미풍보다도 더 가는 바람 소리가 살며시 울려왔을 뿐이다.
무풍곡은 언제나처럼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깊은 정적에 잠겨들었다.
2
통구에서 혈살미검 고충오를 비롯하여 천절수 사백이 단 한 명의 생존자도 없이 몰살당한 사실은 강남무림에 큰 충격을 던졌다.
인원수로만 따지면 상조문 총 전력 중 절반이 넘는다.
상조문의 대참패다.
이럴 경우, 누가 생각하더라도 상조문의 반격은 쉽게 예상된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살과 뼈를 베이고 말았으니 참고 넘길 수는 없지 않겠나.
상조문주가 문도 전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선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다.
“조위는?”
“아직…….”
똑같은 물음에 똑같은 대답이 이어졌다.
다른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문주가 원하고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조위가 가져온 선물에 따라서 싸움의 형태가 달라질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철검문(鐵劍門)에서 하씨 형제 일곱 명이 합류했습니다.”
“…….”
묵묵부답, 음풍잔검 고찬량은 산 위에 걸린 구름만 바라봤다.
한 팔을 거들겠다고 상조문에 합류한 명사들만 해도 칠십여 명이 넘어섰다.
그들은 마야의 만행에 분기탱천하여 달려왔다. 또 상조문이 나섰으니 체면 유지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몇몇 인사만 보내온 경우도 있다. 상조문주가 섭섭하지 않을 선에서.
어떤 자는 맨발로 뛰쳐나갈 만큼 반갑다. 어떤 자는 눈길조차 주고 싶지 않을 만큼 박대하고 싶다.
다른 때 같았으면 감정대로 행동했다. 본보기로 두어 명쯤 골라서 인간적인 모멸감을 안겨주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했다. 그래야 다른 자들이 알아서 기어드니까.
‘하늘이 흐리군. 비가 쏟아지겠어.’
흐린 하늘도 좋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조그마한 하늘의 변화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주고, 세상사를 한 발쯤 뒤로 물러서서 지켜보게 해줄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조위가 돌아오지 않는 한은 싸움을 하지 않을 심산이니 급할 게 없었다.
사람들은 서둔다. 마야가 코앞에 있으니 당장 달려가자고 한다. 그런 점은 상조문 문도보다는 외인(外人)이 더 심하다. 상조문 문도들은 숨죽이고 있는 반면에 외인들은 꾸무럭거리고 있는 상조문을 오히려 질책하고 나선다.
성격이 괄괄한 몇몇 인사는 문주를 보겠다고 찾아왔다. 이제야 몸에 병기를 붙이기 시작한 풋내기들은 금방이라도 피를 볼 듯이 으르렁거린다.
고찬량은 그들에게서 멀찌감치 물러나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을 닫았다.
‘늦어. 돌아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늦고 있어. 이런 일로 심기를 불편케 할 사람이 아닌데…….’
불같이 성질을 낼 사안이다. 탁자나 의자 몇 개쯤은 부서지고도 남았다.
지금은 차분하다. 조위가 왜 늦는지 궁금하지도 않다. 단지 늦고 있다는 사실만 자각된다. 그래도 굳이 심사가 어느 정도 불편하냐고 묻는다면 마음이 조금 묵직하다는 정도라고 말해줄 수 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잔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모여든 군웅들을 대접하기도 하고, 마야의 동태를 관찰하기도 하고, 주변 지형지물의 장단점을 파악하기도 한다.
그들은 바쁘다. 공격 시점부터, 공격 형태, 공격하기에 최적합한 장소까지 하나씩 계획을 수립해 나간다.
“마야는 여전히 마차 밖을 나서지 않고 있습니다. 의식을 잃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듯싶습니다. 시마와 세 여자는 각기 맡은 곳이 있는지 여간해서는 위치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진을 펼친 듯싶은데…… 그래서 진법의 명사를 초빙해 놓았습니다.”
금륜도겁 구효동의 입술이 참새 입처럼 지저귄다.
수하 된 도리를 다하느라 보고는 하지만 듣지 않고 있다는 사실쯤은 짐작하고 있을 게다.
“저…… 문주님.”
“…….”
“오늘이 조위와 만나기로 한 마지막 날입니다.”
“벌써…… 그렇게 됐나?”
칠 일이라는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갔다.
“마야 꽁무니만 따라다닌 게 벌써 이틀째입니다. 몇몇 위인들이 왜 공격을 하지 않냐고, 상조문이 겁을 집어먹은 게 아니냐고 나불거리기에 치도곤을 쳐놨습니다만…….”
예상대로 마야는 이틀 전에 따라잡았다. 아직도 사오 리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지만 마음만 먹으면 단숨에 따라잡을 수 있다.
군웅들이라고 그 정도를 모를 리 없다. 그들의 눈썰미는 당사자인 상조문이나 마야보다도 더 정확할 수 있다. 그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여유있게 즐기며 보기만 하면 되니까.
마야를 칠 수 있는 데도 치지 않는 건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날개를 달아놓는 격이었다.
싸움도 하기 전에 꼬리를 내렸다.
상조문주는 마야의 일갈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후퇴할 명분을 찾기에 부심한다.
마야가 호랑이라면 상조문주는 고양이이다.
숱한 소문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문도들도 내색은 하지 않지만 못내 못마땅한 것만은 사실이리라.
“그래, 수고했어.”
“…….”
듣고 싶은 것은 이 말이 아닌가? 금륜도겁 구효동의 눈가에 혈기(血氣)가 비쳤다.
“오늘 저녁은 특별히…….”
구효동의 미소는 소름 끼친다. 웃으면서 살인을 하는 것이 버릇이 되어 이제는 살인을 하지 않고 웃어도 섬뜩한 소름이 돋는다.
구효동의 입가에 잔미소가 매달렸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을 들었으니 웃지 않고 베기겠는가.
“술도 주고…….”
“알겠습니다!”
구효동이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잠시 후, 와아! 하는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웬일일까? 함성이 다르게 들린다. 다른 때 같으면 승냥이들이 살을 물어뜯기 전에 내지르는 표호로 들렸는데, 지금은 겁없는 풋내기들의 한심한 소란으로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오늘 저녁쯤 소나기가 쏟아지겠어.’
후둑! 후둑! 후두둑!
고찬량의 예견처럼 날이 어두워질 무렵부터 빗방울이 쏟아졌다.
굵은 빗방울이다. 술시(戌時) 즈음에는 거센 바람까지 동반하여 장막을 찢어발길 듯 뒤흔들었다.
드높았던 함성은 빗소리에 묻혀 잦아들었다. 하나 큰 잔치는 멎었어도 장막 곳곳에서 구수한 음식 냄새와 향긋한 주향(酒香), 껄껄거리는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면 쉽게 끝날 술자리는 아닌 것 같다.
“계집들이 천하일색이라는데 죽이지는 말자고.”
“천하일색이면? 네 입에 들어갈 수나 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