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08
108
아니, 다른 생각이 있어도 그것만은 아버지이기 이전에 무신인 궁왕의 자존심이니 떠받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명령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다.
아버지는 정말 형의 복수를 포기한 것인가? 형의 영혼이 이승을 떠돌고 있는데 언제까지 마야가 활개치고 다니도록 내버려 둘 셈인가.
강금산은 빈 활을 들어 힘껏 당겼다가 놓았다.
투웅! 패에엥!
강궁에서 튕겨져 나온 소리가 허공을 찔렀다.
이 활에 화살을 재워야 하는데. 마야의 심장을 향해 쏘아야 하는데.
투웅! 패앵! 투웅! 패애앵……!
분노를 담은 활줄이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 그때,
“상조문이 몰살당했습니다.”
허공 어딘가에서 싸늘한 음성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야! 상조문이!”
“…….”
“뭐야? 또 마야야?”
“그렇습니다. 상조문주를 비롯하여 천절수 칠백까지. 요행히 살아남은 자도 없습니다. 전원 몰살입니다.”
유궁 강금산은 으스러져라 활을 움켜잡았다.
이건 남도문의 치욕이다. 세상이 말세라 해도 마인이 이토록 활개를 치고 다닐 수는 없다.
“대응은?”
“부위량이 나설 것 같습니다.”
싸늘한 음성의 주인은 문밖 출입을 통제당한 강금산에게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세세히 말해주었다.
“추혼단주가? 확실한가?”
“위로부터 명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확실해 보입니다.”
“흠……!”
강금산은 긴 숨을 내쉬었다.
추혼단주 부위량이라면 마야를 잡기 위해 같이 손을 잡은 적이 있다. 머리도 좋고, 무공도 쓸 만하다. 무엇보다 상황 판단이 명확하고 결단력이 뛰어나 추혼단주로서 썩 어울린다고 봤다.
강금산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를 악물고는 지필묵을 꺼내 서신을 적어 내려갔다.
“지금 즉시 이 편지를 추혼단주에게 전해.”
“그러죠.”
싸늘한 음성의 주인은 대답만 할 뿐 편지를 가져가지 않았다. 그가 행동에 옮기는 것은 강금산이 자리를 뜬 후가 될 것이다.
강금산은 그때까지도 손에 쥐고 있던 활을 던져 버렸다.
이제 수련용 활은 질렸다. 실전용 활을 사용할 때가 됐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가 벽에 걸려 있는 강궁을 꺼내 힘껏 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빼애액! 투아앙!
소리부터가 다르다. 강궁의 울음이 방 안 공기를 뒤흔든다.
화살도 보통 화살보다 배는 길고 두꺼운 철전(鐵箭)을 가져간다.
전통(箭筒)에 꽂혀 있는 게 여덟 개이니 그만하면 충분하다. 괜히 더 가져간다고 전고(箭庫)에 들렀다가 괜한 소리가 아버지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는 날에는 족쇄가 채워질지도 모른다.
‘마야, 기다려라.’
강금산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2
상조문의 몰락 소식을 듣고 제일 먼저 자리를 떨쳐 일어선 곳은 독조림이었다.
사천당문이 존재하는 남무림에서 독으로 일가를 이루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마찬가지다. 독의 세계에서만큼은 대통합을 이루겠다는 것이 사천당문의 대명(大命)이니 문파명에 ‘독(毒)’이라는 글자를 집어넣었다는 자체가 사천당문과의 대립을 의미한다.
흡수되거나, 소멸되거나, 존재하거나.
독조림은 존재했다.
하루에도 수십 개의 문파가 생기는 반면 또 그만큼의 문파가 사라지는 곳이 무림이다. 사람들이 가장 손쉽게 접하는 병기가 검인만큼 검으로 일어서는 문파가 가장 많다. 하나 어느 문파치고 독을 사용하지 않는 문파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만치 약자에게 독이란 유혹적인 마물이다.
힘들이지 않고, 안위를 보장받으며 적을 죽일 수 있으니 이보다 뛰어난 병기가 어디 있으랴.
무인이 아니더라도 독은 많이 사용된다. 살상 도구가 아니라 치료를 목적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 가지 불문율은 독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사천당문의 개입을 의식해야 한다는 거다. 독살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볼 것도 없이 개입하며, 시시비비를 가려 엄단하는 권한까지 가지고 있으니 독에 관한 한 사천당문은 지존이나 다름없다.
독조림은 그런 배경하에서 독을 키웠고, 성장했으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무서움을 알 수 있다.
사천당문이 작심하면 멸문시킬 수 있으나, 사천당문 역시 막대한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문파.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날카롭게 곤두세우고 호랑이 앞을 거니는 무모한 자들.
남무림이 인식하는 독조림은 아집과 오기로 똘똘 뭉친 이단아들의 집단이었다.
독조림은 북검문의 신성(新星)인 혈귀대 몰살에 참여했다.
그들은 영악하기로 소문난 혈귀대원들을 감쪽같이 중독시켰다.
혈귀대원들은 철사대에 가로막히고, 상조문에 뜯기고, 최종적으로는 궁왕의 화살에 절단났지만 서막은 독조림이 열었다.
그 후, 독조림은 일약 명문정파의 반열에 올라섰다.
독조림이 한 일은 미미하다 할 수 있지만 혈귀대가 절단난 영광은 고스란히 누렸다.
단지 혈귀대 몰살 사건에 가담했다고 해서 영광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이런 광영을 얻기 위해서는 남도문의 배려가 있어야 한다. 남도문이 싸움에 가담하라고 통보해 준 것은 독조림의 뒤를 봐주겠다는 뜻과도 같다.
즉, 독조림은 남도문으로부터 인정받은 문파가 된 것이다.
혈귀대 몰살 사건은 남무림 무인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던 독조림과 상조문을 급격하게 가까운 사이로 밀착시켰다.
혈귀대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처음 만났다.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만날 일이 없었을 문파들이다.
독을 만지는 사람들과 죽음을 다루는 사람들의 문파.
그들은 많은 공감대를 확인했고, 지금에 와서는 형제 이상으로 밀접한 관계였다.
상조문이 몰살했다. 상조문주가 죽었다.
독조림이 발칵 뒤집히는 것은 당연했다.
“독조림의 모든 독수(毒手)는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오는 보름까지 제이총단(第二總團)으로 집결하라!”
명이 떨어졌다.
한 사람의 독수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열 사람의 희생이 필요하다.
독을 채집하고, 성분을 분석하고, 실전에서 사용할 수 있게 개량시키고…… 마지막으로 병기 형태로 만들거나 환(丸) 혹은 산(散) 형태로 내놓는다.
독수는 미지의 사람들이 만들어준 독으로 용독술(用毒術)을 펼치게 된다.
이들의 역할은 누가 중요하다 중요하지 않다 할 수 없다.
모두 중요하며, 어느 한 사람이라도 무능하면 최고의 독수는 탄생하지 못한다.
독조림이 사천당문의 견제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조직 체계가 잘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독수를 끊임없이 배출할 수 있으며,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독을 선보이니 어찌 가볍게 볼 수 있겠나.
조직 체계는 그렇다 해도 싸움을 하는 사람은 독수뿐이다.
사천당문 같은 경우에는 독수가 채집도 하고, 용독도 하지만 독조림같이 성장 단계에 있는 문파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들이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독수만 따로 양성하는 쪽을 택한다.
장구한 역사를 이어온 문파와 신흥 문파의 확실한 차이점이다.
남무림 곳곳에 흩어져 있던 독수들이 제이총단이 있는 화양(華讓)으로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상조문처럼 요란스럽지는 않았다.
그들은 두세 명, 많아야 네다섯 명이 한 조를 이뤄 움직였으며, 겉모습만 봐서는 무인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평범하게 행동했다.
보름까지 제이총단으로 모이라는 독조림주의 명이 은밀히 지시되었다면 무인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사실도 모를 뻔했다. 그냥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졌지?’ 하는 선에서 생각을 그치고 말았으리라.
“독조림에서 오셨수?”
국수를 파는 노파는 무척 허기진 듯 게걸스럽게 먹는 사내에게 물었다.
“독조림? 독조림이 뭐 하는 곳이오?”
사내는 정말 모르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어왔다.
노파는 그만두자는 듯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사내는 양손이 새까맣게 변색되어 독술을 연마한 흔적이 역력하다. 눈매는 살기로 번들거리고, 몸에서는 코를 탁 찌르는 묘한 냄새도 풍긴다.
분명히 독조림 문도다. 하나 아니라고 한다.
독조림 문도들이 전부 이런 식이다. 증거가 뚜렷해도 아니라고 한다. 이건 뭐냐고 물으면 그럴듯한 변명을 늘어놓는다.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그런 변명을.
“먼 길을 오신 것 같수. 허기진 것 같은데 이것 한 그릇 더 드슈. 돈은 안 받을 테니까 걱정 말고. 참! 독조림 문도를 만나면 꼭 전해주슈. 그 인간백정 놈을 꼭 잡아서 죽여주십사 하고 말이우.”
“인간백정이 누구요?”
“아! 그 마야인가 뭐시긴가 하는 놈 말이우. 상조문을 떼거리로 죽인 놈인데 모르는 척은 하지 마슈. 독조림 문도를 만나면 꼭 전해주는 거유.”
“걱정 마쇼. 꼭 전해주리다.”
국수를 파는 노파만 이런 것이 아니었다.
화양 사람들은, 아니, 남무림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마야를 반기지 않았다.
상조문은 싫든 좋든 간에 남무림 사람이다. 그들이 존경하는 남도문에서 인정한 문파다. 한데 한낱 마인이 남도문 사람을 죽였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그 선에서 멈췄다.
시시비비는 누가 남무림 사람들을 죽였느냐에 고정되었을 뿐, 사건의 시작에 대해서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남무림 사람을 죽인 자, 마야. 고로 남무림 무인들이 반드시 죽여야 할 자, 마야.
독조림 문도들은 성스러운 싸움에 임하는 것처럼 마음을 묵직하게 가졌다.
독조림주 진로위(陳魯衛)는 성급하지 않다. 무식하지도 않다. 독을 사용하지만 잔인한 성품도 아니다. 그는 차분한 성격이다. 시서(詩書)를 즐기고 꽃을 기르며, 토론을 좋아한다.
상조문이 몰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신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즉각 깨달았다.
남도문이 혈귀대 사건으로 독조림을 튼튼한 반석 위에 올려놨다면, 이제는 아주 굳건한 기둥을 세울 차례다.
마야를 깨끗이 처리하기만 하면 독조림은 명실공히 사천당문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대 독문으로 자리매김할 게다.
서둘면 안 된다. 절대 안 된다. 서둘면 생각하기도 싫지만 상조문과 똑같은 꼴을 당한다.
그는 만천하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는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남무림 전체에 독조림의 의중을 알려서 명분을 얻고, 의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작업이니 빼놓을 수 없다. 상조문에 대한 의리도 지키는 셈이 되고 말이다.
두 번째, 반드시 빼놓을 수 없는 일 중에 하나가 실행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독조림 독수들이 모여든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진로위는 화양으로 집결시키는 문도를 독수로 한정시키지 않았다. 독수가 아닌 자들 중에서도 외양이 사납게 생긴 자들은 무조건 집결하라고 암암리에 명을 내렸다.
사람들을 질리게 만들어야 한다.
독조문이 모이니 이토록 무섭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용독술이란 반드시 무공이 높아야 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일반 범인들도 며칠만 수련시키면 간단한 용독술 정도는 펼칠 수 있다.
외양만으로는 어느 정도 용독술을 지녔는지 판단하기 힘들다는 특성을 지녔으니 그저 사람만 많으면 된다.
그들에게는 겸양의 덕을 내세우게 했다. 되도록 공손한 모습을 보이고, 무인의 냄새를 지울 것이며, 민초들과 섞이는 모습을 보여주라고 했다.
남무림 모든 사람들을 독조림 편으로 끌어당길 수 있는 호재가 아닌가.
세 번째가 문제다. 세 번째는 진짜로 싸워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섣불리 움직일 생각이 없다.
‘소수 정예로 쳐야 돼.’
진로위는 변복을 하고 화양 거리를 거닐며 자신의 문도들을 살폈다.
독수 냄새를 풍기지 않는 자, 사연이 있어 보이지만 의심스럽지 않은 자…… 그런 자가 어디에 있을까.
명검(名劍)은 너무 날카로워서 쉽게 드러난다. 둔검(鈍劍)은 잘 베이지 않으니 무용지물이다.
명검과 둔검 사이에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 적당히 날카로워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썼다 하면 살을 벨 줄 아는 자여야 한다.
‘흠! 좋아.’
한 명은 찾았다.
그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화양으로 집결하라는 명을 내렸는데, 화양에 와서 돈벌이를 하고 있으니 제법 사연이 있어 보인다.
독 냄새는 전혀 나지 않으나 왼손을 반쯤 오므린 상태에서 펴지 않고 있다는 것은 독조림 문도라는 뜻이며, 오므린 상태가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보아서 상당한 용독술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찾았고…….’
그는 어슬렁어슬렁 발걸음을 옮겼다.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돈을 벌어야 그녀를 하루라도 더 안을 수 있다.
천하를 질타하겠다는 웅심을 품고 독조림에 투신했으나 기껏 배운 것이라고는 암암리에 사람을 죽이는 잔재주뿐이다.
독조림에 더 있어야 하나?
어느 수준에 이르자 그는 더 이상 배울 것이 없었다.
그의 사부도 더 가르칠 것이 없으니 배운 것을 반복하고 또 반복 수련해서 완전히 몸에 붙이라고 했다. 썩을!
많은 독수들이 투전에 미친다.
술로 몸을 버리기도 한다.
그는 여자에 미쳤다. 미치고 싶어서 미친 것이 아니라 그녀를 보는 순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보지 않았다면 모르되, 두 눈으로 보아버렸고 뇌리에 틀어박힌 것을 어쩌랴.
그는 용채가 생길 때마다 그녀를 찾았고, 하룻밤 절정을 만끽했다.
한데 그놈의 짓거리가 또 골칫거리다.
어떻게 된 것이 그놈의 짓거리는 하면 할수록 더욱 극심한 갈증을 불러온다.
도둑질이란 걸 처음 해봤다. 강도짓도 처음 해보고, 장사란 것도 배우기 시작했다.
‘돌아가면 한 달은 끼고 살 거야.’
사람들 눈이 없는 곳에서는 강도로 돌변하고, 눈이 있는 곳에서는 장사를 하고. 기껏 잡동사니 몇 개 팔아봐야 몇 푼 남지도 않지만 안 하는 것보다는 나으니 하는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