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1
11
“아예 만나지 않으면 좋겠어. 그럴 수 있어?”
금연화가 어색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북검문 무인들과 충돌이 생기면 가장 먼저 죽어나가리라 생각했던 사람들인데, 이제는 오히려 부탁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무시하는 말투를 꺼낼 수가 없었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 만나게 되면 어떻게 할 거지?”
“일단은 계획대로 뚫고 나가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단문협에는 가셔야 되겠다, 이거군.”
“싸움이 벌어지면 빠져도 좋아.”
수묘인이 등을 돌려 쳐다봤다.
한참 동안…… 뚫어지게…… 눈에서 불길이 솟구치는 듯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숨을 죽였다.
수많은 무인들을 보아왔지만 단연코 이토록 강렬한 눈빛을 접한 적이 없다. 명가의 후인들도, 명성이 자자한 고수들도 이처럼 맹수 같은 눈빛을 토해내지는 못했다.
온몸이 발가벗겨진 느낌이다. 눈빛이 옷을 뚫고 들어와 몸 구석구석을 쳐다보는 것 같다.
“죽음을 아나?”
“풋!”
절혼마녀가 피식 웃었다.
순간, 수묘인이 비수를 꺼내 든다 싶더니 자신의 왼 팔목에 푹 찔러 넣었다.
핏물이 빗줄기처럼 쏟아져 내린다.
수묘인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비수를 끌어 올렸다.
쯔읏! 부우욱……!
살이 찢어지며 더욱 많은 피를 쏟아낸다. 그래도 수묘인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단번에 그어지는 고통도 참기 힘들다. 피부만 찢어져도 아픈데, 수묘인처럼 비수가 관통되도록 찔러 넣은 상태에서 끌어 올리면 고문도 지독한 고문이 된다.
신음? 일절 없다. 표정 변화? 살점 한 올 떨리지 않는다.
팔목 중간 부분에서부터 팔꿈치 가까이까지, 정성을 들이듯 천천히…… 아주 천천히 갈라졌다.
“다시 묻지. 죽음을 아나?”
이번에는 절혼마녀도 웃지 못했다.
비수로 팔목을 찌르는 정도는 할 수 있다. 수묘인처럼 그어 올릴 수도 있다. 하나 안색을 변화시키지 않을 자신은 없다. 표정이 문제가 아니다. 마음이 문제다. 마음에서 고통을 느낀다면 아무리 무표정하다고 해도 가식에 지나지 않는다.
“우습군. 죽음도 모르면서 죽음의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다니.”
금연화는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이다. 자신들이 이승에 발을 딛고 있다면, 이들은 저승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육신이란 혼을 담기 위한 껍데기일 뿐이다.
이들에게는 죽음이 존재치 않는다.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껍데기를 던져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자신들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단문협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가? 흉수를 알아내서 뭘 어쩌자는 것인가. 결국은 복수를 해야 할 것이고, 그러자면 남도문, 북검문 할 것 없이 마구 휘젓고 다녀야 한다.
목숨이 여벌로 서너 개쯤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하물며 한낱 추적을 피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꼴이라니. 이러고도 복수를 말할 수 있는가.
“좋…… 은 충고였어. 고맙다고 해야겠지? 권수를 무사히 건너게 해준 것도 고맙고. 좋아,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만 가봐. 아무래도 우린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
금연화는 주먹을 꽉 움켜잡았다.
‘처음부터 이래야 했어.’
수묘인은 가지 않았다.
“조건은 두 가지다. 자잘한 질문은 삼갈 것. 대답하기 귀찮으니까. 둘째, 너희의 목숨은 내가 갖는다.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살라면 살아야 하지. 받아들일 수 있나?”
“좋아.”
금연화가 머뭇거리는 사이, 절혼마녀가 먼저 말했다.
“대가는 추후 요구한다. 가능하면 무인을 만나지 않는 방향으로 하겠지만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까 장담은 못해. 가격은 단문협에 도착해서 청구한다. 터무니없는 가격이라고 시비 걸지 말도록.”
“대가를 지불하기는 곤란할 거야. 수중에 가진 것이 몸밖에 없으니 몸을 원하면 몰라도. 더군다나 살아 있어도 곤란한데 죽을 공산이 더 크지 않겠어?”
이번에도 절혼마녀가 답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받아. 장산에서부터 단문협까지의 거리가 어느 정도나 될 것 같은가?”
생각을 지속할 수 없게 만드는 말.
“한 육백 리 정도?”
금연화는 얼떨결에 말했다. 어림짐작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는 될 것 같다.
“우린 팔백 리를 가야 돼. 정확히 말하면 팔백육십칠 리.”
‘어떻게 돌아가기에 이백 리씩이나 더 늘어난 거지? 팔백육십칠 리라니. 단 일 리의 오차도 없다는 건가? 그런 건 지도를 보고 계산해도 나올 수 없는 거잖아.’
“자하령은 모두 따라올 필요 없어. 지금부터는 은밀히 행동해야 하는데 다수가 움직여서 좋을 건 없지. 다행히도 저 여자들 얼굴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변복하고 단문협에 가 있으라고 해. 정 불안하면 한두 명만 남게 하고.”
수묘인은 일사천리로 말해 나갔다.
단지 자하부를 빠져나올 구실을 만들기 위해 장식품 삼아 끌어들인 수묘인.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얼굴조차 몰랐던 사내. 그런 자에게 모든 걸 맡기고 있다. 맡겨놓으면 단문협까지 아무 탈 없이 데려다 줄 것 같다. 그런 믿음이 확고하게 든다. 어떻게? 만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은 사내를…….
금연화는 피식 웃었다.
절혼마녀는 이틀이면 사내를 충분히 파악할 수 있다고 했다.
어림없는 말이다. 그 말에는 결코 동의하지 못한다. 첫인상과 사람 됨됨이가 다를 경우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사내를 많이 알고 있으니 쓸 만하다거나 쓰지 못할 인간이라는 정도는 판별할 수 있겠지만 목숨을 맡길 만큼 상세히 파악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지금, 잘 알지도 못하는 사내에게 여정의 모든 것을 의지하고 있으니 절혼마녀와 다를 바 무엇인가.
그렇다고 마냥 끌려 다닐 수는 없다. 만일의 경우라는 게 있으니 대비는 해두어야 한다.
“만일 저 사람들과 싸우게 된다면…… 언니는 누구와 싸울 거예요?”
“둘 다 녹록치 않아. 그래도 싸우게 되면 내가 시마를 맡을게. 자신은 없지만…… 그래도 마음에 둔 사내를 잡을 수는 없잖아.”
“풋!”
“웃겨? 남은 심각하게 이야기하는데.”
“언니 말이 생각나서요. 언니 같은 사람은 이틀이면 남자를 볼 줄 안다면서요?”
“저 사내가 괜찮은 건 사실이잖아.”
“언니 말을 믿었어요. 그래서 길 안내를 부탁했죠.”
“내 말?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언니가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과는 다를 거라고 했죠? 언니 눈을 믿어요.”
“그 말은 믿어도 돼. 저 사내는 적어도 자기 여자를 홍루에 팔아먹거나 하지는 않을 자야. 호호! 속을 알 수 있어야 치마폭에 휘감든가 하지. 돈에 목숨 거는 사람들은 아닌데.”
절혼마녀는 술병을 들어 들이켰다.
2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철퍽거리는 발걸음 소리만이 묵직하게 울려 나왔다.
걷는 사람은 다섯 명이다.
수묘인 말을 좇아서 자하령 중 일곱 명은 변복을 하고 다른 길로 떠나갔다. 세상에 얼굴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는 여자들이니 아무 탈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게다.
금연화 일행과 수묘인, 그리고 노인 사이에는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표면으로는 동행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잔뜩 경계하여 적대적인 관계로 돌아서는 애매모호한 상태였다.
어디를 얼마만큼 걸었을까? 대략 한 시진쯤 걸었다고 느껴질 즈음, 수묘인은 나지막한 야산으로 들어섰다.
수묘인…… 이제는 수묘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향도였다는 말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자는 소립파로 불려야 한다. 소립파라는 이름도 본명인지 가명인지 알 수 없지만.
‘비가 온 후라 족적이 뚜렷하게 남을 텐데 이렇게 가도 되나? 더군다나 산으로 들어선다는 것은…….’
마음 한편으로 불안감이 밀려들었지만 어차피 모든 걸 내맡긴 상태인지라 따라갈 수밖에 없다.
소립파는 야산으로 들어선 후에도 동네를 거닐 듯이 거침없이 나아갔다. 길도 없는 곳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을. 그렇게 반각 정도를 더 걸은 후 걸음을 멈추고 등짐을 내려놓았다.
주위에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 웬만한 곳이면 민가 한두 채 정도는 있기 마련인데, 민가는 고사하고 삶의 터전이 되는 논밭도 찾아볼 수 없다.
산에 자라는 나무도 잡목들뿐이다.
특이한 점을 찾아볼 수 없어서 밝은 대낮에 찾아오라고 해도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소립파는 등짐을 풀어 솜 뭉치를 꺼냈다.
“뇌옥은 갈망정 두 번 다시 들어가기 싫은 곳이건만…… 제길!”
노인이 투덜거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경계심이 치민다. 노인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혹여 근방에 마도 무리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자하부주와 원한이라도 있어서 복수라도 하겠다는 건가?
노인에 대한 염려는 한낱 기우에 그쳤다. 마음속으로 열을 헤아리기도 전에 어둠 저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이 걸어왔다. 손가락 두 개 굵기의 나무를 한 아름 안고.
노인과 소립파는 바삐 손을 놀려 무엇인가를 만들었다.
‘홰? 홰를 왜 이렇게 많이……?’
노인이 가져온 나뭇가지는 무려 삼십여 개.
소립파와 노인은 솜을 일일이 묶은 다음, 가죽 주머니에 들어 있던 기름을 찍어 홰를 만들었다.
“혹시…… 횃불을 켜려는 건 아니지?”
소립파는 홰를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고, 노인만 고개를 들어 힐끔 쳐다봤다.
“쯧! 요즘 젊은 것들은…… 영감탱이가 쭈그리고 앉아서 손을 놀리고 있으면 도와줄 생각은 않고 주둥이만 놀려 쌌네. 늘그막에 이게 뭔 꼬라진지.”
“그러게 젊어서 씨 좀 뿌려놓지. 그럼 손주 놈들 재롱이나 보고 있을 것 아니오.”
“씨야 엄청 뿌려놨지. 씨 뿌린 게 모두 자식이 됐으면 성(城) 하나는 차고 넘칠걸?”
소립파와 노인은 투탁투탁 농담을 주고받으면서도 부지런히 손을 놀렸다.
홰 삼십여 개는 눈 깜짝할 사이에 만들어졌다.
노인은 완성된 홰 중 절반가량을 들고 일어섰다. 그리고 대뜸 일령에게 덥석 안겨주었다.
“옜다, 선물이다. 다른 건 볼 것 없어. 횃불만 보고 부지런히 따라와. 앞에서 불을 끄면 너도 끄고, 켜면 너도 켜.”
겨우 다섯 명이 길을 가는데 앞뒤로 횃불을 켜? 이해할 수 없는 말.
일령은 얼떨결에 홰 한 무더기를 받아 들었다.
그동안 소립파는 긴 밧줄을 꺼내 자신의 허리에 꼭 묶었다.
“한 번만 말할 테니까 잘 듣도록. 이동하는 속도가 빠르니까 부지런히 따라와. 내가 디딘 곳만 딛고 잡은 곳만 잡도록. 자칫하면 우리 모두 한 무덤에 묻히는 수가 있으니까 정신 똑바로 차리고. 이 밧줄은 허리에 묶어. 느슨하게 묶지 말고 단단히. 서로 간의 간격은 반 장 정도면 되겠지.”
“도대체 뭘 하려는…….”
절혼마녀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을 꺼냈다. 하나 소립파는 대답은커녕 아예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내 조건 중 첫 번째가 질문을 하지 말라는 것이야.”
“원래 말이 없는 편인가 보내. 내 이름을 물었지? 말해줄게. 이름은 없어. 어렸을 때는 거지라고 불렸고, 세상을 알 만한 나이가 되니까 취옥(翠玉)이라고 부르더라고. 지금은 낙화향 동방주야. 금 매 같은 경우는 절혼마녀라고 부르고. 이름 좀 지어줄 수 있어?”
소립파가 절혼마녀의 허리 묶음을 확인했다.
“필요없는 짓, 하지 마.”
“뭐?”
“적아(敵我)를 분간할 줄 알아야지. 내게 섭혼소(攝魂笑) 따위를 쓰면 어쩌자는 건가.”
절혼마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섭혼소를 알아보는 이 사내…… 도대체 누구인가.
소립파는 절혼마녀의 매듭을 확인한 후 금연화의 매듭을 확인하러 가면서 말했다.
“당신은 아주 매력있는 여자야. 그런 걸 쓰지 않아도 충분히 마음이 흔들려. 힘을 아껴놨다 나중에 써.”
절혼마녀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정말이지…… 재미있는 자를 만난 것 같아.’
소립파는 너무 비좁아서 여자의 몸으로도 안간힘을 써야 들어갈 수 있는 작은 구멍으로 기어 들어갔다.
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구리 굴이다.
“갈수록 태산이군. 우리가 쥐도 아니고. 이런 곳에서 몇 날 며칠을 같이 지낸다면 없는 정도 생기겠네.”
절혼마녀가 투덜거리며 소립파의 뒤를 좇았다.
그 뒤를 금연화가 따랐고, 그 뒤로는 홰를 한 움큼 안은 일령이, 맨 마지막으로 노인이 움직였다.
일 장 정도 기어갔을까? 굴이 갑자기 넓어졌다. 두 발로 딛고 일어설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은 굴이 나타난 것이다.
화악!
소립파가 횃불을 밝혔다.
일순 동굴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 세상에!”
“이, 이런 굴이……!”
여인들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들어서는 입구는 개구멍처럼 작았지만 일 장 안의 정경은 백여 명이 숙식을 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인위적인 손때가 전혀 묻지 않은 천연 동굴이다.
“아! 정말 아름다워요. 저 종유석들 좀 봐. 보석이 반짝거리는 것 같아.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 줄 몰랐네.”
이제 막 동굴에 들어선 일령이 감탄을 터뜨렸다.
“아름다워? 조금 있으면 아름답다는 감탄 대신에 곡소리가 나올걸. 제길! 어쩌다 이런 곳에 다시 들어왔는지.”
노인은 동굴에 들어와 본 경험이 있고, 나쁜 일을 겪었던 듯 이를 부드득 갈았다.
소립파도 심상치 않은 소리를 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신 바짝 차리도록. 여기는 미로(迷路)와 같아서 길을 잃으면 헤어 나오지 못해.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한단 말이야. 천비대가 여기까지 따라왔으면 좋겠군.”
“계집아, 뭐 해? 너도 불 켜야지. 아까 한 말 잊었어? 앞에서 불을 켜면 너도 켠다. 앞에서 끄면 너도 끈다. 이것만 확실하게 지켜.”
노인은 비수를 꺼내 양손에 움켜잡았다.
아름다운 광경은 금방 사라졌다.
소립파는 너구리 굴 같은 작은 구멍을 용케도 찾아냈고, 서슴없이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동굴 안쪽에 또 다른 동굴이 있단 말인가? 이런 식으로 단문협까지는 가지 않을 테고…… 어디선가 빠져나갈 텐데…… 어디까지 이어진 거야.’
작은 구멍으로 들어서기 전만 해도 생각이란 걸 했다. 그러나 엎드린 채로 간신히 헤집고 나가야 할 길을 반각 넘게 기고 난 다음에는 머릿속이 텅 비어버렸다.
횃불이 없었다면 무덤 속에 들어선 것으로 착각했으리라.
어둠은 참을 수 있다. 불빛이 약하지만 빛이 있으니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심장이 조이는 답답함만은 참을 수 없다. 금방이라도 동굴이 무너질 것 같고, 그러면 속수무책으로 묻힐 수밖에 없다는 공포감마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