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10
110
그는 한 걸음 더 내딛으려고 했다. 그리고 그때서야 목에서 일어났던 소리가 무슨 소리였는지 깨달았다.
‘몸이 지옥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는데…… 그런 여자였는데……. 제길! 정말 지옥으로 잡아당기는군.’
그는 무무사에 중독되어 죽은 시신과 나란히 누웠다.
“컥!”
“크윽!”
무무사는 적아를 구분치 않고 죽음으로 이끌었다.
땅속에 두더지가 있는지 크게 꿈틀거렸고, 나무 뒤에서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백포인 한 명이 술 취한 듯 비틀거리다가 쓰러져 죽었다.
군웅들 중에서도 여럿 살상되었다.
누가 누구인지 분별할 사이도 없었다. 사람들이 모래에 중독되어 죽어가자 이천여 명에 이르는 군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우르르 물러서는 통에 대혼잡이 전개되었다.
“큭큭! 천멸도 살수도 실수할 때가 다 있군. 징그럽게 독한 놈인데 살기를 잡아내지 못했어.”
고루음마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입 닥쳐!”
어디선가 날아온 일갈이 고루음마의 입을 틀어막았다.
웅혼한 말투로 미루어 체구에서 철탑거추와 우위를 다투는 십팔밀막주 종청호였다.
웃을 일이 아니다. 죽은 백포인들은 천멸도 살수들에게는 피붙이나 다름없는 형제들이었다.
“킥킥! 웃음은 습관인데 어쩌라고. 그보다 누군가 수를 쓰기 시작한 모양인데, 그에 대한 대비책부터 세워야 하는 것 아냐?”
고루음마는 조금도 지지 않았다.
뛰어난 자도, 모자란 자도 아닌 평범한 자였다. 그 속에 살기를 감췄다. 감정을 속이는 부분에서는 최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해야 할 자였다.
백포인의 희생은 얼마나 될까?
숨어 있는 상태에서 당했고, 죽는 순간까지도 기척을 숨기도록 수련받았기 때문에 얼마나 희생되었는지는 움직여 봐야 안다.
고루음마는 비웃으려고 한 말이 아니라 속상해서 한 말이었다. 말투가 어눌해서 신경을 건드린다는 게 탈이지만.
종청호는 대꾸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그는 부지런히 움직이며 희생자 수습에 나서는 중이었다. 하찮은 말에 대꾸할 여력이 없었다.
얼마나 희생되었을까?
군웅들 중에는 십여 명 정도 죽었다.
관도 한복판에 죽은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지만 아무도 나서서 수습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곳에는 아직도 죽음의 모래가 깔려 있다. 허공에도 부유한다.
관도는 죽음의 장소가 된 것이다.
천멸도주와 금연화는 숙의 끝에 마차를 버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관도로 지나갈 수 없으니 당연히 마차를 버려야 하겠지만, 그렇게 되면 마야가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만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서 마야가 멀리 갈 수 있도록 해주자 하는 것이 두 여인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땅속에 숨어서 나오지 않던 언장은마가 부득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관도 옆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갔다.
마차가 빙 돌아서 갈 수 있게끔 주변 땅을 약간만 고르면 되는 일이었다. 한데,
“어!”
나무를 베려던 손길이 우뚝 멈춰졌다.
“뭐가 있어?”
먼저의 전례가 있던 터라 마도와 수검이 재빨리 달려와 언장은마를 보호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저기 이상한 놈들이 있는데. 하! 냄새로 보니 하나는 계집이고…… 이런 빌어먹을 연놈들! 여기서 그 짓을 하고 있었잖아! 저 연놈들은 귀도 없는 거야? 사람들이 죽어나가는데 그 짓을 하게 생겼어!”
마도와 수검은 언장은마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때,
쉬익!
날카로운 바람 소리와 함께 고루쌍마가 내려섰다.
“비켜! 풀숲에 숨은 놈들에게는 이게 제격이야.”
고루쌍마는 겸도를 쳐들어 보이며 히죽 웃었다.
그러나 굳이 겸도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고루쌍마가 산기슭 구석진 곳을 찾아갔을 때, 그들은 너무도 희한한 광경에 넋 놓고 지켜보기만 했다.
“뭐야, 이것들!”
고루양마가 일부러 목청을 높였지만 구석진 곳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야! 안 떨어져!”
고루음마 역시 고함을 질렀다.
하나 고루쌍마의 표정으로 볼 때, 그들의 고함은 아무런 효험이 없는 모양이다.
수검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섰다.
고루쌍마의 고함으로 미루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짐작 가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설마 많은 군웅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또 방금 많은 사람들이 죽은 곳에서 그 일을 벌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허!”
수검도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정사를 벌이는 남녀.
정말 이런 인간들이 있기는 있었다. 뭇 군웅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는 철면피들이 존재했다.
“하악! 헉헉!”
“헉헉! 음……!”
남녀는 사람들이 모여들자 더욱 큰 쾌감을 느끼는 듯 비음 소리 또한 커져 갔다.
“하하! 이거야 원…….”
수검이 등을 돌렸다. 순간,
슈각! 쒜에엑……!
병기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 겸도가 빛을 뿜었다.
수검은 급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 보았다. 두 남녀를 향해 거침없이 짓쳐 가는 고루쌍마와 피리처럼 생긴 죽통(竹筒)으로 고루쌍마를 겨누고 있는 두 남녀를.
“피햇!”
수검은 급히 외쳤지만 이미 늦었다.
고루쌍마는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은 피할 수 있지만 그렇게 되면 죽통의 각도로 미루어 보아 수검이 당한다.
써걱! 푹!
고루음마의 겸도가 사내의 배를 뚫고 들어가 등 뒤로 삐져나왔다. 또 삐져나온 부분이 여인의 배를 꿰뚫고 들어갔다.
고루양마의 겸도는 날갯짓을 두 번 했다. 한 번은 사내의 이마를 향해 날았고, 또 한 번은 여인의 심장을 찍었다.
“쌍마!”
수검이 고함을 내지르며 급히 달려갔다.
고루쌍마는 손을 내밀어 수검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또 독이야. 독침. 음! 벌써 심장이…….”
“야, 양마.”
“음마.”
고루쌍마는 서로를 쳐다보며 손을 잡았다.
“사랑…… 쑥스럽지만.”
“큭큭! 나도…….”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고루쌍마의 죽음은 그동안 생사고락을 같이해 온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중에는 금연화도 포함되었다.
처음 고루쌍마를 보았을 때 해골이 걸어다니는 것 같아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들이 배를 저어주었고, 장강을 넘기도 했는데. 둘이 늘 티격태격하면서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고루쌍마는 죽어서도 지인들의 손길을 거부했다.
누구도 감히 그들의 시신을 만지지 못했다.
피부는 벌써 푸르뎅뎅하게 변색되었고, 칠공에서는 검붉은 선혈이 쏟아져 나오고 있으며, 수천 마리의 뱀이 우글거릴 때처럼 비릿한 냄새를 풍겼다.
“독조림! 이 새끼들을!”
철탑거추가 커다란 쇠망치를 들어 애꿎은 나무를 두들겨 댔다.
쾅! 쾅! 쾅……!
그가 한 번씩 망치질을 할 때마다 아름드리 거목이 뚝뚝 허리가 분질러져 넘어갔다.
“묻어주긴 해야죠. 이대로 버릴 수는 없어요.”
“버릴 수밖에. 죽으면 끝이야. 묻어주나 안 묻어주나 저들에게는 마찬가지야.”
허공에서 들리는 여인의 음성, 천멸도주다.
그녀의 말은 야박하다. 그렇다고 대꾸할 말도 없다.
지금 이 자리에는 천멸도 살수들도 죽었다. 그들 역시 독에 중독되어 죽었다. 천멸도 살수들은 죽은 자리에다가 그가 생전에 사용했던 검을 꽂아주는 것으로 애도를 마쳤다.
천멸도주의 입장에서는 고루쌍마의 죽음보다 천멸도 살수들의 죽음이 더 애통할 것이다.
“빌어먹을! 강하다고 그리 매정하게 말하지 마쇼!”
철탑거추가 분기를 참지 못하고 망치질을 계속했다.
쉭! 쒜엑!
그의 분노는 광기에 가까웠다. 그때,
“조심해!”
누군가 급히 소리쳤다. 누가 누구에게 보낸 경고인가?
퍽! 퍽퍽퍽……!
철탑거추는 등이 따끔거리면서 자르르 울려오자 독에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 따끔거리는 것으로 끝났지 않은가. 아무 느낌도 없지 않은가!
“어떤 쥐새끼가…….”
처음 소리는 천둥소리보다 컸으나 마지막 소리는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변했다.
느낌이 이상하다. 피 속에 무엇인가가 있는 모양이다. 팔, 다리, 등…… 마구 휘젓고 다니는데…… 피가 이토록 빨리 뛰었나? 숨 한 번 들이킬 사이에 전신을 휘도나?
철탑거추는 돌아서서 암격을 가한 자를 찾았지만 그는 이미 요절난 후였다.
백포로 전신을 감싼 여인이 죽어 있는 군웅들 중 한 명의 머리를 발로 으스러뜨려 다시 죽였다.
또 한 놈도 있다. 그놈도 죽었던 놈인데, 벌떡 일어나 앉기는 했지만 목젖을 겨누고 있는 검 때문에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
‘이 새끼들!’
철탑거추는 고함을 내질렀다.
응? 이상하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아! 혀가 타 들어가는 것 같다. 온몸이 불덩이 속에 빠진 듯 뜨거워진다.
철탑거추는 비로소 자신의 운명을 예감했다.
“마…… 마도…… 마도…… 마도의…… 자유…… 부활…… 꼭!”
그는 쇠망치에 육중한 몸을 의지하며 나오지 않는 음성을 쥐어짰다.
“그만 가, 새끼야!”
수검의 눈에 핏빛 혈기가 비쳤다. 꽉 움켜쥔 주먹에서는 손가락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가 핏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큭큭! 큭큭큭!”
철탑거추는 몸을 뉘였다.
2
방심이 실수를, 실수가 또 다른 방심을 불러왔다.
죽지 않아도 될 사람들이 죽었다. 죽어도 억울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상대와 싸우기라도 했다면 원이나 없을 텐데. 조금만 주의했으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단을 막지 못했다.
“마차를 지켜요!”
금연화의 음성은 한이 절절이 배인 음성처럼 차가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마야를 지켜야 돼요. 여기서 이대로 무너지면 죽은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요.”
“그러지. 내가 조금만 빨랐어도 죽지 않았을 것을.”
언장은마는 슬픈 마음을 억눌렀다. 마음에서 괴로움이 일어나면 손과 발에 쏟아 부어 더욱 빠른 속도로 길을 닦았다.
반 시진 후, 관도 옆에는 마차 하나가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소로가 생겼다.
그 시간, 천멸도주는 생포한 자를 심문했다.
“독조림인 줄 안다.”
“사, 살려만 주시면…….”
“직책은?”
“처, 청수당주(淸手堂主)입니다.”
다음 질문은 하지 않았다. 대신 전신을 친친 동여매고 있던 백포를 풀기 시작했다. 손가락부터 조금씩.
“헉!”
이제 겨우 손 하나가 드러났을 뿐인데 사내는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뿐만이 아니라 금연화도 놀랐다. 마도도, 수검도…… 모두 놀랐다. 천멸도 살수들이 나병 환자들이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직접 보는 모습은 또 달랐다.
“이 병에는 두 종류가 있어. 양성과 음성. 양성은 전염이 되고, 음성은 전염되지 않아. 난 어떨 것 같아?”
천멸도주가 들어 보인 손에서는 누런 진물이 흘러내렸다. 손가락도 중지는 통째로 빠진 상태였고, 약지는 손가락 끝마디 하나가 흐물흐물거렸다.
“야, 양성.”
천멸도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휴우! 그, 그럼 음성.”
사내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하나 이번에도 천멸도주의 고갯짓은 가로저어졌고, 사내의 표정은 금방 흑빛으로 변했다.
“그, 그럼?”
“이런 건 악성이라고 해.”
“아, 악…….”
사내는 말을 하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혹여 입속으로 나균이 들어오지 않을까 염려하는 듯했다.
우습지 않은가. 곧 죽을지도 모르면서 나균에 전염되는 것을 염려하다니.
“다 말해. 아는 것 전부 다. 그럼 팔 하나만 빼놓고 보내주지.”
“저, 정말이십니까?”
“…….”
사내는 천멸도주의 표정을 살펴본 후 어쩔 수 없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독조림의 조직 구조를 비롯하여 현재 매복이 어디에 깔려 있는지까지 독조림에 관한 모든 것이 구구절절 새어 나왔다.
“이게 전부입니다. 정말입니다.”
금연화도 사내의 말을 전부 들었다.
한데 한 가지 미심쩍은 일이 있다. 철탑거추는 두 사내의 암격을 받고 죽었다. 무무사에 중독되어 죽은 척했던 사내들에게 맥없이 당하고 말았다.
연후, 한 사내는 재빨리 일어나 도주하려고 했다. 천멸도주에게 잡혀 머리가 짓눌려 죽은 것은 결과이고, 그전에 살길을 찾으려는 과정이 있었다.
이 사내는 한결 느렸다.
철탑거추를 암격하기까지는 똑같았는데, 먼저 사내보다 몸놀림이 훨씬 느렸다.
그는 앞 사내가 머리를 짓눌러 죽은 다음에야 상반신을 일으켰으니 사로잡힌 것이 당연하다.
철탑거추를 둘이 암격할 필요가 있었을까? 첫 번째 의문이다.
암격을 가한 후 왜 빨리 일어서지 않았나. 두 번째 의문이다.
천멸도 살수들 같은 사람에게는 죽는 것보다 사로잡히는 것이 더 큰 고통이다. 생포되는 순간 왜 자진하지 않았나. 사로잡히면 살길이 있다고 믿은 건가? 아니면 목숨에 대한 애착이 그토록 심했던 건가?
세 번째 의문이다.
금연화는 의문을 캐물으려고 했다.
한데 그녀가 막 입을 열어 물어보려는 순간 송곳처럼 날카로운 안광이 쏘아져 왔다. 너무 날카로워서 진짜 송곳으로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멸도주의 안광이다.
“약속대로 놓아준다. 한 팔만 놓고 가.”
천멸도주는 풀었던 백포를 다시 감기 시작했다.
“가, 감사…… 정말 감사합니다. 에잇!”
사내는 떨어져 있는 장검을 주워 서슴없이 자신의 한 팔을 잘라냈다. 그리고 재빨리 신형을 일으켜 도주했다.
“똑똑한 여자라고 들었는데 개뿔이…….”
사내가 사라지자마자 천멸도주는 금연화를 쏘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