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15
115
세 여인의 얼굴에 화색이 깃들기 시작했다.
절망 속에서 발견한 희망이다. 어둠 속에서 찾은 밝음이다. 설혹 가짜 희망이고 가짜 밝음일지라도 힘 잃고 늘어진 자신들을 부축해 일으키기는 충분하다.
“이대로 가다가 저녁때 즈음…… 해질녘 즈음 되면 가장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요. 잠자리를 찾는 척하면서요.”
“그래.”
절혼마녀의 대답도 상쾌했다.
남만의 모기는 중원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면 새끼손가락만 한 것이 갈대처럼 큰 대롱을 푹 박고는 피를 쭉쭉 빨아먹는다.
한두 마리가 달려드는 것도 아니다. 잠깐 한눈을 팔면 어느새 달려들어 피를 빨고 있다.
야밤에 바깥을 서성거리는 것은 내 피를 모두 빨아먹으라고 보시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쑥불을 활활 태워 쑥 냄새가 몸에 배이도록 하면 조금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러자니 매운 연기 때문에 연신 기침이 터진다.
“쿨룩! 쿨룩! 어휴! 여긴 왜 이렇게 더워. 지금도 이런데 한 여름에는…… 어휴!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밀림이라는 곳에서 맞이하는 밤은 괴로웠다.
“이곳에서 사는 사람도 있어.”
“그러니까 대단하다는 거죠. 어휴, 이런 데서 어떻게 사는지. 나 같으면 하루도 못 살 것 같은데.”
일령은 줄줄 흘러내리는 땀을 옷소매로 쓱 문질러 닦았다.
일령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땀에 흠뻑 젖어 얼굴이고 몸이고 물기가 줄줄 흘러내렸다. 거기에 연기까지 묻어서 얼굴 꼴이 말이 아니다.
“이 더운데 언니는 안에서 뭐 하는 거지?”
“쉿!”
절혼마녀가 급히 일령의 입을 막았다.
농담을 할지라도 다담선자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말하지 말아야 한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고 하지 않던가. 경계해야 할 자들이 승부를 점칠 수 없는 자들이니 특히 조심해야 한다.
“가끔 보면…… 언니는 날 너무 무시하는 것 같아. 나도 다 느낄 수 있는데.”
“그래도!”
이번에는 매섭게 눈을 치켜떴다.
일령이 하는 말을 안다. 경계하는 자들은 근처에 있지 않다. 분명 눈을 번쩍이며 감시하겠지만 근처에는 없다. 그들 역시 사람인지라 밀림의 고통스러운 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처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한데도 이토록 입막음을 단단히 하는 것은 이로 인해 만에 하나 있을 기회가 사라질까 봐 두려워서다.
다담선자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그녀의 계획대로 움직여서 거머리들을 떼어낼 수도 있고, 되잡힐 수도 있다. 하지만 완전히 떼내어야만 시마의 다음 움직임이 시작되리란 건 직감으로 안다.
시마는 쑥불 곁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다.
‘늙으면 삭신이 쑤셔서’라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코를 골아댔다.
다담선자가 무엇을 하는지 가장 궁금한 사람이 시마이련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잠을 청했다.
이것이 경륜인가? 이것이 연륜인가? 마음이 조급해서라도 잠을 잘 수 없는데.
시마처럼 잠을 청하지는 못하지만 입단속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절혼마녀 자신은 깨닫고 있는 것을 일령은 모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연륜이었군.’
다담선자는 간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는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서 나왔다.
“준비는?”
“끝났어요.”
“그럼 가자. 어디로 갈까?”
“밀림으로요.”
모두들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당연히 배를 타고 이동할 줄 알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길을 돌이켜 보면 자신들은 배를 이용했고, 뒤따르는 자들은 강변으로 뒤쫓아왔다. 배를 반대쪽 강에 대기만 해도 추적자들이 배를 구해 강을 건너는 시간 동안은 버는 셈이다.
이러한 이득을 버리고 똑같은 입장에서 출발하려고 하니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다.
“신 깜 언 아인 다 띠엡 언 껀.”
다담선자가 느닷없이 하룻밤 거처를 빌려준 여인에게 이상한 말을 했다.
“쭉 렌 등 마이 만.”
여인도 웃으면서 다담선자의 손을 잡았다.
“신 땀 비엣.”
다담선자는 그 말을 끝으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일령이 쪼르르 달려와 다담선자 곁에 섰다.
“언니, 언니 이곳 말을 아는 거예요?”
“아니.”
“그럼 아까 그 말은 뭔데?”
“눈치로 몇 마디 배웠어.”
“하룻밤 새?”
“응.”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믿지 않아도 할 수 없고. 자, 이거나 받아.”
다담선자는 품에 안고 있던 보따리를 일령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다담선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밤새 많은 일을 한 것 같다. 그중에 하나가 주변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고, 말도 통하지 않는 아낙을 통해서 몇 가지 알아낸 게 있는 듯하다.
“저쪽으로 가.”
다담선자는 밀림 깊숙이 파고들어 갔다.
“후욱! 후욱……!”
등에서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끝도 없는 길, 앞도 보이지 않는 나무 군락,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뱀, 옷까지 뚫고 피를 빨아먹는 모기…….
푹푹 찌는 더위는 말 못할 고통을 안겨주었지만 그보다 길을 잃은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더욱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쉬었다가 가.”
다담선자는 걸음을 멈춘 곳에서 나무 기둥에 등을 대고 쉬었다.
길도 없는 곳을 헤쳐 오자니 여간 고역스럽지 않다. 중원과 달라서 풀도 크고 억세다. 풀잎에 스치면 검에 베인 것처럼 살이 갈라지기도 한다.
아니, 그런 점들은 참을 수 있다. 이곳은 어찌 된 것이 곤충들도 훨씬 크고 징그럽다. 거미만 해도 손바닥만 한 것부터 오색찬란하여 독기가 지르르 흐르는 놈까지 수십 종은 본 것 같다.
다리가 아프다고 땅에 털썩 주저앉는 것도 겁난다.
개미 떼가 동물 뼈에 가득 달라붙어 있는 광경을 본 후에는 앉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다.
“오 장에서 이십 장. 맞죠?”
다담선자가 모두에게 동의를 구했다.
가장 가까운 추적자는 오 장 정도 떨어져 있고, 가장 멀리 있는 자는 이십 장 거리에 있다. 천멸도 살수들이 가까이 있으며, 사방천마는 맨 뒤다.
“맞는 것 같아.”
“오 장에서 십오 장. 쯧! 쉬지도 않고 쫓아오는구먼.”
“쉴 자리를 찾는 거겠죠.”
“이런 곳에서 쉴 곳이 어디 있다고. 다 거기가 거기지. 아무 곳에나 엉덩이 붙이는 게 조금이라도 더 쉬는 길이야.”
이때부터다. 다담선자가 말은 하지 않고 입만 벙긋거리며 두 손으로 연신 수화(手話)를 쏟아냈다.
일행 중에 수화를 아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손 모양과 입 모양을 유심히 관찰했다.
‘말도 안 돼!’
절혼마녀는 정녕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담선자의 방법은 터무니없다. 하나 자신의 마음은 뱃속에만 담아둘 뿐, 입을 열어 의견을 말할 수 없다. 그러려면 무엇 하러 수화까지 동원했겠는가.
‘따라갈 수밖에 없네.’
어차피 거머리를 떼어내는 일은 다담선자에게 맡겼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따르는 수밖에는 없었다.
다담선자는 산 위를 향해 걸었다.
그녀 역시 방향을 잃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알 턱이 없다. 무작정 밀림 속으로 들어왔고, 아무 곳이나 무턱대고 걸었다.
한 가지 뼈대는 있다. 높은 곳을 찾는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산으로 올라간다.
원주민 같으면 산으로 올라가는 길을 쉽게 찾겠지만 다담선자에게는 고행의 길이었다.
두 손과 두 발을 이용해야만 오를 수 있는 급경사가 나왔다. 세월에 삭아서 바짝 주의하지 않으면 주르륵 미끄러지는 큰 바위도 지났다. 엉겁결에 가시나무를 손으로 잡은 적도 있다.
“휴우!”
드디어 산이라 불릴 만한 곳에 올라섰다.
주위에서 최고봉은 아니지만 얼추 어깨를 나란히 하는 산이다.
“언니!”
일령이 불안스러워하며 급히 다가와 보따리를 건넸다.
“방법이 이것밖에 없어. 난 된다고 믿어.”
다담선자는 보따리를 풀어 긴 덩굴 줄기 하나씩을 나눠 주었다.
“이게 정말 될까?”
시마까지도 미심쩍어 했다.
다담선자는 대답 대신 자신이 손수 덩굴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시범을 보여주었다.
“지게를 지듯이 이렇게 등에 메면 돼요.”
“그건 알겠는데…… 정말 되겠어?”
절혼마녀까지. 모두 불가능을 생각하고 있다.
“신법이 배는 빨라질 거예요.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속도일 테고, 이곳은 나무가 많으니까 부딪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돼요. 어디로 가게 될지는 몰라요. 무작정 달려갈 거예요. 그러니까 흩어지면 못 찾아요. 서로 바짝 붙어서 따라오도록 최선을 다해줘요.”
다담선자는 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저것!”
“어멋!”
곳곳에서 짧은 경악성이 새어 나왔다.
행동으로 대신한 사람도 있다.
파앙! 파아앙……!
사방천마는 무서운 속도로 뒤쫓기 시작했다.
“예상은 했지만 저 정도일 줄은 몰랐네. 휴우! 난 사방천마의 일 초도 받아낼 수 없겠어요.”
“후후! 내게까지 숨길 필요가 있을까? 손을 잡자면서? 천기수사의 밀학(密學)은 북검문주도 인정했다던데. 한낱 유계의 종놈들에게 당한다면 큰 실망이야.”
“저건 어떻게 하죠? 솔직히 난 따라갈 수 없겠어요.”
“내 신법도 마찬가지지.”
“그럼 여기서 포기하는 건가요?”
“후후! 육신녀, 천기수사의 외동딸. 그대의 머리는 삼뇌와 버금간다는 걸 알아. 이미 머릿속에 계획이 차곡차곡 쌓여 있으면서 내게 묻는 건…… 날 시험하자는 건가?”
“맞아요. 시험이에요.”
육신녀 서군봉은 방긋 미소를 지었다.
푹푹 찌던 날씨에 마침 산바람이 불어오고 있을 때다. 그녀의 웃음이 산바람에 섞여 더욱 시원해 보인다.
서군봉은 강금산이 말은 하지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하자 피식 웃으며 얼굴을 돌렸다.
“재미없네. 시험은 그만두죠. 둘 중 하나만 골라요. 흑조편복을 고를래요, 천멸도 살수를 고를래요?”
“음……! 그 수가 있었군.”
살수들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추적술로 먹이를 찾아간다. 세상의 온갖 이치로도 흔적을 발견하지 못할 때는 본능의 이끌림에 육신을 맡긴다.
그들은 십이면 십, 백이면 백 모두 찾아낸다.
흑조편복은 살수계의 전설이라고 불린 자다. 천멸도 살수들은 능력의 한계를 모르는 자들이다.
이들이라면 감쪽같이 따돌리고 사라진 다담선자 일행을 찾아낼 수 있다.
강금산은 사방천마가 달려간 곳을 쳐다봤다.
그들은 이미 밀림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것 역시 그대에게 맡겨야겠군. 나의 모든 것을 그대에게 맡기지. 내 의지대로 움직일 때는 단 한 번. 활을 쏠 때. 난 그거면 족하니까.”
강금산은 ‘나의 모든 것을’이라는 말을 하면서 입 안에 침이 마른다는 소리가 어떤 현상인지 알았다. 그래서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군더더기로 덧붙였다.
서군봉은 쉽게 말했다.
“아무래도 흑조편복이 쉽겠어요.”
쒜에엑! 쒜에에엑……!
인간의 육신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속도가 나왔다.
이토록 빠른 속도는 처음 경험해 보는지라 육신이 버겁다고 비명을 지르는지도 모른다.
무풍곡에서 걷어온 밀삭을 이토록 요긴하게 쓸 줄은 아무도 몰랐다.
무풍곡을 가득 메웠던 밀삭, 무려 열세 겹이나 깔려 있던 그물, 살인무공을 익혔던 여덟 사내를 허공에 띄웠던 마물.
다담선자는 밀삭을 촘촘히 이었다.
그물 형태를 띠던 밀삭을 천의 형태로 만드는 것은 무척 고된 작업이었지만 밤을 새워 해냈다. 그리고 덩굴 줄기를 뼈대 삼아 날개를 만들었다.
밀삭은 꿀처럼 끈끈하다. 천의 형태가 되었어도 끈적거리는 성질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는 날갯짓을 할 때 부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한다. 헝겊 같으면 틈 사이로 공기가 빠져나가지만 밀삭은 끈끈함으로 연결되어 공기가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간이 새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날개를 달기는 했지만 새처럼 허공을 훨훨 날 수도 없다.
기본 바탕은 신법에 둔다. 신법을 전개하여 나무와 나무를 건너뛴다. 다행히 밀림인지라 나무는 얼마든지 있고, 어디로 건너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본래 신법으로 건너지 못할 간격도 날개의 도움을 받으면 건널 수 있다. 날개의 도움을 받으면 체공 시간도 늘어나고, 속도도 훨씬 빨라지며,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할 방향 전환이 가능해진다.
염려되는 것은 모두들 날개는 처음 달아본다는 거다.
조금 익숙해질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면 좋으련만 저들은 그럴 시간을 주지 않고 쫓아올 게다.
지금까지는 뒤만 쫓아왔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면 인질로 붙잡아놓고 길을 재촉할 수도 있다. 이쪽은 당연히 인질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불가불 일전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어떻게든 성공해야 한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사방천마의 신법은 경이로웠다. 그들은 수십 장의 거리를 단숨에 좁혀왔다. 서로 간에 그 상태로 속도를 유지했다면 일다경(一茶頃)도 되지 않아서 꼬리가 잡혔을 것이다.
삼십여 장을 단숨에 날아내려 왔을 즈음, 다담선자 일행은 날갯짓에 익숙해졌다. 경이로운 속도에도 적응해 갔다. 너무 빠른 속도에 쾌감까지 느꼈다.
사방천마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다.
일다경이 지났을 때, 사방천마는 추적을 포기하고 땅 위로 내려섰다.
“마야, 이놈!”
“마야가 아냐. 계집 수작이야. 계집을 주의했어야 하는데.”
“아이구, 골이야. 이게 무슨 망신이야, 망신이. 이제 저놈들을 어디 가서 잡나. 주공께는 뭐라고 말씀드리고. 아이구, 골이야.”
“계속 추적한다.”
서방천마가 남방천마의 거친 말을 막았다.
“뭐? 무슨 수로 저걸 쫓아. 아이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