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2
12
“허억…….”
누군가의 입에서 거친 숨이 쏟아져 나왔다.
“정지!”
노인이 급하게 소리친 것도 바로 그때다.
소립파는 고함 소리를 듣자마자 움직임을 멈췄다.
“계집아! 마음을 편하게 먹어! 자, 눈을 감고 따라 해봐. 침상에 누웠다 생각하고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 쯧! 무공을 익힌 년이 왜 이 모양이야! 아무렴 평생 이런 곳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안달이냐! 자, 마음이 편히 가라앉았으면 운기도 한 번 해주고.”
거친 숨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여인들은 동굴이 안겨주는 공포를 처음으로 체험했다. 무인도 피해갈 수 없는 심마(心魔)를 너무도 손쉽게 이끌어낸다. 조금이라도 공포를 느낀다면 답답한 마음은 절박함으로 바뀔 것이고, 끝마무리는 발광으로 이어질 게다.
“출발!”
노인이 외쳤다.
한 시진은 족히 지난 것 같은데 숨 막히는 암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쉬고 기는 일이 반복되었다.
누군가 호흡이 거칠어졌다 싶으면 어김없이 노인의 고함이 들려왔다. 무시하는 듯한 말투, 때때로 욕설도 섞여 있기는 했지만 마음을 북돋워 주는 말도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소립파가 멈췄다.
이번에는 노인이 고함치지도 않았고, 숨이 가쁜 사람도 없다.
“암벽을 타야 돼. 한 명만 실수해도 모두 곤란해진다는 점을 잊지 마. 되도록 밑은 쳐다보지 말고. 천 길 낭떠러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암벽? 동굴에 무슨 암벽이…….’
한결같이 같은 생각을 했다. 하나 정작 소립파가 머물렀던 자리에 도착한 사람들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기가 질리고 말았다.
길을 반듯하게 닦아놨는데, 누군가 길 한복판을 파헤쳐 놓은 것 같은 형국이다.
암굴의 중간 부분이 듬뿍 패여 나갔다.
낭떠러지 맞은편에 조그만 암굴이 보인다. 그곳까지 가려면 작은 굴에서 나와 옆 벽면을 타고 이동하는 방법밖에 없다.
밑은 끝이 보이지 않는 암공(暗空).
소립파는 벌써 암벽을 타고 있다.
몸을 묶은 줄의 간격이 반 장밖에 되지 않아서 암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절혼마녀가 움직여야만 나아갈 수 있다.
절혼마녀는 안광을 높여 암벽을 살폈다.
소립파는 자신이 붙잡았던 곳을 비수로 긁어서 표시해 놓았다. 가지고 있는 것은 달랑 횃불 하나뿐이지만, 그 정도의 불빛만으로도 식별이 용이하다.
‘북검문과 부딪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절혼마녀는 암굴에서 나와 암벽에 달라붙었다.
***
이름 없는 야산에 이십여 명쯤 되는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족적이 여기서 끊겼습니다.”
“굴인가?”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울렸다.
벼락이 머리를 때려도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음성이다. 개구리를 만난 독사가 쇳소리를 낼 때처럼 냉정하면서도 잔혹한 면이 묻어 나온다. 누구든 이런 음성을 접하게 되면 ‘용서’라는 말을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입구는 좁아도 일 장 정도만 들어가면 상당히 넓습니다.”
“추적을 중단한 이유는?”
“천연 동굴이지만 미로진(迷路陣)을 펼친 것보다 난해합니다. 동굴을 잘 아는 자가 있어야 합니다.”
순간이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쒜엑!’ 하고 흐르더니 보고자의 복부를 강타했다.
퍼억!
몸뚱이가 들썩일 정도로 강한 타격.
보고자는 복부를 움켜잡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맞은 이유를 대봐.”
“추…… 추적은 선(線)입니다. 한쪽 끝을 잡았으면 따라가기만 하면 됩니다. 미로는 결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보고자는 아픔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했다.
“거리는 얼마나 벌어졌지?”
“족히 하루는.”
“좁혀라. 오늘 중으로 반나절 거리까지 좁혀.”
“적선서 사용을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오늘 중! 반나절 거리로 좁히겠습니다!”
보고자가 자신있게 대답했다.
“인적 사항 파악은?”
“자하부에서는 자하일봉(紫霞一鳳) 금연화와 자하령 중 여덟 명이 나섰습니다. 조력자로는 절혼마녀. 절혼마녀의 빈자리는 자하령 두 명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다른 자가 대답했다.
“절혼마녀. 운이 다했군.”
음성 속에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온다. 당사자가 이런 말을 들었다면 사망 선고로 여겨도 좋을 살기다.
“그밖에 금연화가 자하부를 떠날 명목으로 끌어들인 수묘인이 두 명 있습니다.”
“후후! 혈귀대주를 대신한 자가 겨우 수묘인이던가. 자하일봉 금연화. 뜻밖이군. 우리 이목을 단숨에 하루 거리나 벌려놓을 줄은 몰랐어. 생쥐에게 발등을 물린 기분이 이럴 거야.”
“보고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
“수묘인들에 대한 자료가 전혀 없습니다. 이십대 초반의 청년과 칠순쯤 되는 노인이라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혈귀대주가 묻히기 전날 수묘인이 된 놈들입니다. 혈귀대가 전멸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을 때입니다. 냄새가 납니다.”
“전날?”
“수묘인들 중에서 그놈들을 아는 놈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출신지는 고사하고 그놈들 얼굴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더욱 냄새가 나는 건, 그들을 고용한 수묘총감(守墓摠監)이 행방불명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행방불명된 날짜는 그놈들을 고용한 날.”
“수묘총감을 수색해야겠군.”
“인원을 붙여놨습니다. 죽어서 땅에 묻혔어도 찾아낼 수 있습니다.”
“언제까지?”
“사나흘이면 충분합니다.”
“이틀 준다. 사흘째 되는 날, 일조(一組)가 꽁무니를 따라붙을 거야. 그때까지 보고를 마쳐.”
“알겠습니다!”
쉬익!
바람 소리가 일었다. 보고를 듣던 자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
동굴은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는 곳이다.
입이 쩍 벌어질 만큼 기막힌 절경이 펼쳐지는가 하면 순식간에 지옥으로 이끌 위험도 도사린다.
동굴에는 호수도 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수렁도 있고, 어디에서 흘러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모를 물줄기도 있다.
여인들은 소립파의 움직임에 하나의 원칙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숨을 돌릴 수 있는 평지에서는 쉬고,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이동한다. 다음 쉴 곳과의 거리가 짧으면 천천히 암굴을 헤쳐 나가고, 멀면 바삐 움직인다.
동굴의 요소요소를 머릿속에 환히 꿰고 있다는 반증이다.
“휴우! 앞으로 얼마나 더 가야 돼?”
절혼마녀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들이 쉬고 있는 곳은 지금까지처럼 종유석의 아름다움이 한껏 묻어나는 곳이다.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진 광경이고, 피곤함이 겹쳐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라리 벌목장에서 하루종일 도끼질을 하라고 해도 이보다는 편할 것 같다. 채석부가 되어 돌을 날랐으면 날랐지 캄캄한 암굴 속에서 발버둥 치는 짓만은 못하겠다.
얼마 동안이나 암굴을 기었는지 모르지만 상상외로 힘들었다.
“앞으로 이틀 더. 오늘은 여기서 잔다.”
“자, 자? 그럼 하루종일 두더지가 됐다는 말이잖아.”
“휴우! 이틀 더 두더지가 되어야 한다잖아요.”
절혼마녀의 말을 금연화가 받아주었다.
그녀들은 이제야 노인이 한 말의 뜻을 명확하게 깨달았다. 뇌옥에는 갈망정 두 번 다시 들어가고 싶지 않은 곳이라던 말의 뜻을.
그러나 지옥만 있는 것은 아니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이곳에서 잔다고 생각하니 주변 경물이 새로이 눈에 들어온다.
아름다운 종유석, 석순.
졸졸졸 흐르는 개울은 투명할 정도로 맑다.
소립파는 쌀을 씻었다.
밥을 지을 모양. 기껏해야 건포나 씹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사라졌던 노인이 잘 마른 장작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나뭇가지 같은 것들을 주은 것이 아니라 장작을 쪼개놓은 땔감이다.
이들은 동굴을 알고 있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으며, 무슨 목적에서인지 약간의 준비도 해놓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정체가 궁금해지는 자들이다.
잠시 후, 그들은 빙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방금 지은 따뜻한 쌀밥이 식욕을 당긴다. 육포를 물에 불리고 양념장을 칠한 후에 장작불에 구은 고기도 입에 쩍쩍 달라붙는다.
“천비대 그놈들, 신까지는 못 돼도 발 빠른 놈들인 것만은 확실해. 경사(經絲)가 끊어졌어.”
노인이 밥을 먹으며 말했다.
“언제?”
“방금 전에. 하루 거리야.”
“적선서(赤線鼠)를 잊었군.”
“쳇! 반나절 거리.”
“한 가지 변수가 있는데…… 통하지 않으면 정말 반나절 거리가 될 것이고.”
소립파와 노인은 알지 못할 소리를 주고받았다.
내용만은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인이 동굴에 들어선 후 경사를 설치했으며, 수시로 실을 당겨본 것 같다. 누군가 뒤따라온 사람이 있으면 알 수 있도록.
경사가 끊어졌다는 것은 누군가가 들어왔다는 말이다.
노인은 확실하게 천비대라는 말을 했다.
추적이 시작되었다. 천비대가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적선서라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서(鼠)라는 말이 붙어 있으니 쥐일 것 같고…… 적선서라는 쥐를 사용하면 반나절 만에 마주치게 된다.
“우, 우리…… 바로 움직여야 되는 것 아냐?”
금연화가 불안한 심정에 말을 꺼냈다.
소립파와 노인은 주고받을 말이 없다는 듯 밥만 먹었다.
절혼마녀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말라는 건 알고 있는데. 하지만 불안한 우리 심정도 이해해 주면 안 될까?”
‘언니가?’
금연화는 절혼마녀를 흘깃 쳐다봤다.
절혼마녀의 음성이 변했다. 원래가 나긋한 음성을 지녔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나긋하다. 무엇보다 소립파를 쳐다보는 눈길이 경계보다는 다정함에 치우쳐 있다.
‘이 남자를 얻기로 결심을 굳힌 거야. 시마와 연관있으니 앞날이 순탄치 않을 텐데…… 풋! 내 발등에 떨어진 불도 끄지 못하는 판에 앞날까지 걱정하고 있다니.’
“쯧! 이래서 죽음을 모르는 자는, 특히 여자는 골칫덩어리라니까.”
노인이 중얼거렸다.
소립파는 밥알 한 톨까지 싹싹 긁어 먹었다. 그런 후에 절혼마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걱정 말고 잠이나 푹 자둬.”
제5장 비득상(比得上) ― 비교해서 이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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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암굴로 기어 들어갈 생각을 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기어가는 자체는 어렵지 않다. 때로는 힘을 쓰기도 하지만 무공을 수련할 때의 고단함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정작 힘든 것은 답답함이다. 손발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구속이 피곤함을 배로 증대시킨다.
소립파가 물었다.
“유영에 자신없는 사람은 말해.”
“동굴에서 웬 유영?”
절혼마녀가 짐짓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요염함 속에 귀여움이 묻어난다. 사내라면 꼭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절로 일어날 만큼 유혹적이다.
“단순한 유영이라 생각하지 말고 진기를 잘 활용해. 숨을 최대한 가둬놓고 아껴 쓰도록.”
소립파는 무뚝뚝했다.
“사람 말을 무시하는 버릇은 안 좋아. 묻고 대답하고. 그러면서 사귀는 것 아니겠어? 도와줄 수 있는데, 버릇 고칠 생각 없어?”
천변만화(千變萬化)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이번에는 자상한 누이처럼 포근한 말씨를 사용했다.
금연화는 실소를 머금었다.
‘이런 언니에게 넘어가지 않는 사내는 목석일 거야.’
아직 절혼마녀의 진면목을 모두 봤다고는 할 수 없다. 그녀도 동방주의 모습만 보아왔지, 절혼마녀의 모습을 본 적은 없다. 절혼마녀가 될 때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소립파의 모습도 새롭다.
공동묘지에서 처음 봤을 때는 싸움을 아는 파락호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하나 시간이 흐를수록 새로운 모습이 눈에 띈다. 사람을 강하게 이끌어본 적이 있는 수장(首長)의 모습이다. 그것도 인의(仁義)로 이끌었다기보다는 패도(覇道)로 이끌었을 가능성이 높다.
딱딱 부러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유를 달지 못하게 한다.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따르라는 투인데, 이런 말투는 사람을 다뤄본 사람이 아니면 쓰지 못한다.
그가 향도였다는 말도 믿기 어렵다. 어찌어찌해서 수묘인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몸을 숨기기 위한 은신책(隱身策)의 일환이었거나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지 먹고사는 목적으로 수묘인이 되지는 않았을 게다.
노인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각자의 몸에 밧줄을 묶게 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홰를 잘 싸서 등짐 속에 집어넣은 것과 노인이 맨 앞에 서고 소립파가 맨 뒤로 빠진 것이다.
준비가 끝난 것을 확인한 노인은 손에 횃불을 들고 개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적선서가 뭐예요?”
소립파 바로 앞에서 걷고 있던 일령이 물었다.
모두들 귀를 쫑긋 세웠다. 천비대에게 하루 거리를 반나절 거리로 줄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쥐. 말해주지 않아서 그렇지 궁금한 것은 사실이다.
절혼마녀는 생각했다.
‘대답해 줄 리 없어.’
금연화는 생각이 다른 쪽으로 치달렸다.
‘유영이라고 했어. 개울을 따라가고 있고. 조만간 유영을 할 곳이 나타날 거야. 자신없는 사람은 말하라고 했으니 그곳도 지옥이겠어.’
그녀 역시 소립파가 일령의 물음에 대답해 주리라는 기대는 아예 갖지 않았다.
그런데 소립파가 말했다.
“등에 붉은 줄이 나 있는 쥐지. 붉은 줄이 나 있는 곳은 털이 거칠고 길게 자라서 갈기처럼 위로 뻗쳐 있어. 보면 한눈에 알 수 있을 거야.”
뜻밖에도 자상한 음성이었다.
‘저 사람이!’
‘대답을……! 일령에게 관심이 있나?’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거의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일령은 아기처럼 순수한 얼굴을 지녔다. 그러면서도 몸매는 완벽하다 싶을 만큼 뛰어나다. 신분의 고하를 떠나서 한 여인으로 놓고 본다면 뭇 사내의 흠모를 받기에 충분한 여자다.
“특이한 쥐네요.”
“영물(靈物)이지. 십 리 밖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다는 놈이니. 적선서를 풀면 우리가 지나온 길을 단숨에 찾아낼 거야.”
“천비대에 그런 게 있는 줄 까맣게 몰랐네요.”
“열두 마리를 갖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게나 많이요? 휴우! 천비대가 추적해서 찾아내지 못한 자가 없다는 말을 믿지 않았는데, 이제는 믿을 수밖에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