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21
121
“으음……!”
역시 서군봉의 예감이 맞았다.
멸신구관은 무림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아니다. 무림은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뒤집힌 것은 무신들뿐이다. 평소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무신들이 멸신구관이라고 하니까 벌 떼처럼 기어나왔다.
‘이 정도 비중이었단 말이지. 멸신구관…….’
점점 욕심이 생겼다.
“멸신구관에 들고자 왔느냐?”
“네.”
“당돌한 아이군. 천기수사가 시켰느냐?”
“이가야(二家爺) 같으시면 딸을 북검문으로 보내시겠어요?”
“이가야…… 듣기 싫은 말이군. 주의하거라.”
농담인 줄 알았다. 한데 만사무불통지의 얼굴을 보니 진지하다. 결코 농담이 아니다.
이가야라는 말이 듣기 싫다는 것은 제이무신가 가주라는 말을 듣기 싫다는 뜻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제일무신가 가주가 되고 싶다는 말로도 생각된다.
물어볼 수는 없다. 이런 사람은 그런 말에 절대 시인하지 않는다. 은근히 의중을 비치며 상대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란다. 일이 잘되면 좋고, 못 되도 손해 볼 건 없고. 못 되면 당연히 내칠 테고, 잘돼도 버리기 쉽고.
한데 만사무불통지는 서군봉의 의중을 찔렀다.
“난 혼신을 다해 남무림을 일으켰다. 남무림의 절반은 내 것이나 다름없지. 그러데 이가야라…… 성이 차겠느냐?”
‘종잡을 수가 없어.’
모든 말을 믿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다. 적당한 선에서 받아들이고 버려야 하는데, 그 선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여기 남만에, 아니, ‘마 마’에 북검문 삼원로가 왔더구나.”
“네에?”
“난 그들 중 적어도 두 명 정도는 이 땅에 묻으려고 한다.”
‘뭐야, 이 늙은이 정신병자 아냐? 그래서? 나보고 우리 존장들을 죽이겠다는데 어쩌라고? 지금 도와달라는 거야? 미친 늙은이.’
“남도문과 북검문의 힘의 균형이 너무 팽팽해서 탈이야. 딱 절반이라고 해야 하나? 어느 한쪽도 기울지 않아. 그러니 그 조심성 많은 토끼들이 굴에서 나오지 않지.”
점입가경(漸入佳境)이라는 말이 있다. 가면 갈수록 경관이 빼어나다는 뜻인데, 이거야말로 흥미진진하지 않나. 아무리 당사자가 무신이라고 해도 북검문주와 남도문주를 토끼에 비유하다니. 토끼라는 말에는 못마땅하다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겁쟁이라는 경멸도 포함되어 있다.
“힘의 균형을 깨지면 토끼는 늑대로 변하지. 당장 잡아먹으려고 할 거야. 들어라. 이 땅의 무인들이 더 이상 쓸데없이 죽어가서는 안 되지 않겠니? 이렇게 의미없이 소모적인 싸움을 지속하기에는 세월이 너무 짧게 느껴지는구나.”
“남도문이 붕괴되는 것도 한 방법이죠.”
“넌 천기수사의 딸, 엄밀히 말하면 적이지만 지금은 적이 아니라 같은 지자(智者)로 만나는 것이야. 삼뇌는 흘러간 물이지만 너는 새로운 물이기에 새 물의 뜻을 알고 싶어서 부른 게야. 널 처음 보지만 삼뇌를 능가하겠기에 마음까지 터놓았거늘…… 쯧쯧!”
만사무불통지는 혓바람을 찼다.
왠지 미안해진다. 그는 마음을 열고 말하는데 옹졸하게 혼자만 북검문의 안위에 너무 연연한 것 같다. 대승적인 차원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넓은 관점에서 남도문과 북검문을 봐야 하는 게 아닐까? 만사무불통지의 말대로 의미없는 싸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무어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서군봉은 남몰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만사무불통지에게 당한다. 처음 삼원로 중 두 명을 죽인다고 했을 때는 미친 늙은이라고 했다. 하나 바로 뒤, 몇 마디 듣자마자 어쩌면 그것이 최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말 위험한 늙은이다.
“그래, 네게는 너무 무리한 주제인지도 모르겠구나. 허허! 그럼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넌 멸신구관이 어떤 곳이라고 생각하느냐?”
“유계의 주공을 죽이기 위한 함정 정도로 알고 있어요. 뭔가 있을 것 같은데 말해주는 사람이 없더군요.”
“멸신구관은 전사관(前四關), 후사관(後四關), 중일관(重一關)으로 이루어졌다.”
만사무불통지의 입에서 너무도 쉽게 멸신구관의 실체가 말해졌다.
서군봉은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그토록 알고 싶던 멸신구관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다.
“전사관은 쓸데없는 함정덩어리지. 쇠붙이가 날아오고 불이 솟구치고 돌덩이가 굴러오고. 아주 귀찮은 곳이야.”
‘뭐야? 들어가 본 거야? 마치 들어가 본 사람처럼 말하잖아?’
“이약도라는 말은 들어봤느냐?”
‘팔귀당천지관!’
“네, 들어봤어요. 팔귀당천지관으로 유명하죠.”
“이곳에 설치된 전사관은 팔귀당천지관보다도 못해. 허허허! 그런 걸 뭐 하러 만들었는지. 이걸 만든 자도 그 생각을 한 게야. 기관이나 함정은 날로 발전하는 것이라 최고란 게 있을 수 없어. 기관이라는 것이 지금은 하늘을 무너뜨릴 수 있어도 조그만 허점만 발견되면 무용지물로 변하는 건 다반사니까. 그래서 후사관이라는 게 나왔지.”
서군봉은 점점 이야기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신비한 야사(野史) 같다.
“후사관에는 영원히 변치 않을 진리를 담았지. 진리를 깨우치는 자만이 통과할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놨고. 바로 이것 때문에 모두들 미치는 거야. 절대진리 네 개가 무엇일까? 넌 뭐라고 생각하느냐?”
서군봉은 대답하지 못했다.
절대진리가 네 개밖에 안 될까. 수십, 수백 개도 넘는다. 이를 네 개로 간추리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후사관에 있는 절대진리는 하나를 얻을 때마다 현재 무공의 배가 된다고 하는데…… 허허허! 뜬구름 잡는 소리지만 흥미롭지 않을 수 없지.”
현재 무공을 배가시킨다면…… 하나를 통과하면 두 배가 되고, 둘을 통과하면 둘의 둘이니 네 배다. 셋을 통과하면 여덟 배, 넷을 통과하면 열여섯 배.
서군봉은 피식 웃었다.
이거야말로 말도 안 된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갓난아기를 집어넣으면 천하제일고수가 되어서 나온다는 말이 된다. 자신이 들어가면 나올 때는 단신으로 천하 무인들을 상대할 수 있다.
또 다른 생각도 든다.
만사무불통지의 말은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관문을 넘어서기도 무척 힘들 것이다. 아니, 불가능할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능력을 배가시켜야 걸음을 옮길 수 있다고 해보자. 누가 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
‘후사관에 뭐가 있는 거야?’
“허황된 소리로 들리겠지만 확인해 보지 않을 수도 없지. 특히 무공의 끝자락을 잡았다는 무신들의 경우에는 더욱 궁금한 거야.”
“마지막 중일관에는……?”
“부정(不正)이다.”
“네?”
“후사관의 진리를 부정한다고 들었다.”
“주화입마(走火入魔)!”
“후사관, 중일관…… 모두 주화입마를 노린 거지. 유계의 주공 같은 절대자는 쇠붙이로 죽일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거야. 절대자를 죽일 수 있는 건 절대자 자신뿐. 그래서 본인 스스로 자진하게 만드는 것이 멸신구관의 본뜻이란다.”
진정한 진리란 진리가 없다는 것이라고 했나?
본신의 능력을 열여섯 배나 튀겨준 진리를 부정할 수 있다면, 부정된다면 미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엿가락처럼 쭈욱 늘어난 능력이 폭발해 버릴지도 모른다.
말을 들으니 더욱 궁금하다. 본능적으로 위험도 감지되지만 호기심이 더욱 많이 작용한다.
“너를 만난 기념은 이 정도에서 마치지. 이제 가보거라.”
“네?”
“허허! 그럼 가야지, 여기서 살 생각을 했누.”
“아! 네.”
“지자란 자가 제 죽을 줄 모른다는 건 말이 안 돼. 머리란 자기 무공만 드러내야 하는 게야. 무공 이상으로 능력을 발휘하면 제 명에 못 죽지. 허허허! 명심하거라.”
“…….”
“허허허! 절대자는 한 명뿐이거늘…… 왜 이리 절대자가 많은고. 쯧쯧쯧!”
만사무불통지는 서군봉을 밀림 한가운데 버려두고 돌아갔다.
서군봉은 바로 움직이지 못하고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한바탕 큰 회오리가 휩쓸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북검문 삼원로가 왔다.
서군봉은 그들을 찾지 않았다.
그들과 만나면 자신의 몫은 없다. 그들은 멸신구관에 들어갈 수 있겠지만 자신은 남아서 망이나 봐주는 처지가 된다.
만사무불통지의 말이 거짓일지라도 멸신구관에는 꼭 들어가 봐야겠다. 그래야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
서군봉은 방법을 모색했다.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수립해야 한다.
세 여자와 사방천마를 충돌시킨다는 어린아이 돌팔매질이 아니라 진정한 계획을 짜야 한다.
만사무불통지가 왜 자신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삼원로에게 돌아가지 말고 독자적인 행동을 하라는 주문이다. 안다. 알지만 한다. 그리고 결과는 만사무불통지의 뜻대로가 아닌 자신의 뜻대로 이뤄질 것이다.
서군봉은 어깨를 펴고 걸었다.
사방천마는 몸을 움츠렸다.
그들이 세상을 오시한다고 하지만 무신들 앞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이거 이제 어떡하지?”
남방천마는 모든 게 못마땅했다.
“동방, 네가 빠져. 넌 지금 이 길로 주공께 연락을 취해.”
서방천마가 반명령조로 말했다.
“왜 내가 빠져야 되는데?”
“여자니까. 그리고…… 이 일은 이제 우리 일이 아냐. 무신들이 나타나는 순간 우린 설 자리를 잃었어.”
“까짓 자식들! 우리가 연수합격하면 되지 않을까?”
남방천마의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북방, 마야를 잡아줘야겠다.”
“그러지.”
북방천마는 하얀 이를 드러냈다.
“지켜보다가 죽 쒀서 개주겠다 판단되면, 킥!”
서방천마가 손을 들어 목을 그었다.
“일이 이렇게 되는군. 후후! 그럼 그렇지.”
북방천마의 음성에는 실망이 배어 있었다.
“혹시 멸신구관에 들어가게 되지 않을까 기대한 거야?”
“약간.”
“솔직해서 좋군. 사실 나도 조금은 기대했어. 죽든 살든 그만한 곳이면 목숨 한 번 걸어볼 만하니까.”
천하제일인에 대한 욕망은 사방천마에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자신들의 본분을 깨달았다. 멸신구관은 그들과는 상관없는 장소였다.
“할 말들 없으면 시행하지. 북방, 또 보자.”
서방천마는 유독 북방천마에게만 인사를 했다.
어쩌면 북방천마와는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그가 마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무신들의 틈바귀를 비집고 들어가야 한다. 지금 당장 마야를 죽이는 것은 쉬우나, 무신들이 지키는 경우에는 지척에 있어도 검을 꽂지 못한다.
북방천마가 살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가 바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주공이 오는 것인데, 이 또한 여의치 않다.
“동방, 또 만나자.”
북방천마는 동방천마에게만 인사했다.
“만나게 될 거야, 우리는. 나 먼저 갈게.”
동방천마는 실웃음을 지어 보인 후, 먼저 신형을 뽑았다.
“뭐야?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야? 나만 가운데서 헛김 쐰 거야? 이런 빌어먹을! 그럼 그렇다고 말이나 해야지!”
남방천마가 투덜거렸다.
제9장 두저번(兜底翻) ― 모조리 뒤집다
1
소립파는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몸이 종잇장처럼 가벼워서 훨훨 날아갈 것 같다. 마음도 비온 뒤 맑은 하늘처럼 상쾌하다.
“잘 잤어요?”
“응.”
“처음 봐요.”
“뭘?”
“아침부터 웃는 모습요.”
“그런가?”
“거봐요. 내 말에 대꾸도 하잖아요. 여기서 자랐어요?”
“조금. 한 일 년?”
“그러고 보니 가가(哥哥)에 대해서 아는 게 너무 없어요. 몇 날 며칠이라도 질리지 않고 들을 수 있는데, 말해줄 용의 없어요?”
“몇 날 며칠도 필요없어. 반각이면 끝나. 뭐 말할 게 있어야지.”
“그렇죠?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확실히 변했어.’
혼절하기 전의 그와 혼절에서 깨어난 소립파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소립파는 언제나 무거웠다. 세상의 온갖 짐을 혼자 짊어지고 사는 사람처럼 고단해 보였다.
지금은 밝다. 그의 상쾌한 마음이 느껴진다. 말과 웃음도 많아지고, 어떤 여인들이 사내들에게서 종종 느낀다는 ‘귀엽다’는 말의 뜻도 알 것 같다.
소립파를 변화시킨 요인은 너무 쉽게 찾을 수 있다.
흑살마녀, 남만인들에게는 보 홍 휴야로 알려진 노파가 그의 나이를 열 살쯤 어리게 만들었다.
소립파는 휴야 앞에서는 말 잘 듣는 어린아이가 된다. 먹으라면 먹고, 씻으라면 씻고, 어처구니없게도 가끔 투정까지 부린다.
예전의 마야에게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싫지는 않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밝고 싱그럽게. 요원한 꿈인 줄은 알지만.
“오늘은 들어가야겠어.”
소립파가 불쑥 말을 꺼냈다.
순간, 모든 행동이 정지되었다.
소립파 옆에서 밀림의 일출을 감상하던 다담선자는 석상이 되었다. 아침밥을 짓느라 불씨를 살리던 일령도 불을 앞에 놓고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절혼마녀는 소립파의 등 뒤로 다가서려다가 갑자기 빈혈이라도 생긴 사람처럼 휘청거렸다.
멸신구관에 대해서는 이미 이야기를 들은 터다.
그녀들은 멸신구관에 대한 이야기를 믿었다. 각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무공이 배가된다는 말도 안 되는 말까지 믿었다. 그렇기에 관문을 통과하기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힘, 인간의 지혜, 인간의 의지로는 결코 통과할 수 없는 죽음이 관문이 멸신구관이다.
그렇다고 들어가겠다는 사람을 말릴 수도 없다. 자오법신, 자시와 오시가 돌아올 때마다 반복되는 고통은 차마 눈뜨고 지켜보기 어려울 만큼 처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