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22
122
고통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간다. 고통이 한 번씩 찾아올 때마다 뇌는 극심한 충격을 받는다.
“정말 전 도움이 안 될까요?”
이것도 어제저녁에 끝난 이야기다.
멸신구관에 같이 들어가서 하다못해 물을 떠다 주는 일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남아 있으란다.
“남아 있어.”
역시 같은 말이 나왔다.
“들어가면 언제쯤 나올지도 모르죠?”
어제저녁에는 대답을 듣지 못했다. 대답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건 누가 모를까. 그래도 기대한 것은 빨리 나올 테니까 걱정 말라는 위안거리 말인데, 바보 같은 사람이 그 정도 융통성도 없다.
어제 못한 것을 오늘 해달라는 것도 우습다.
한데 오늘은 기대하지도 않은 말을 해줬다.
“최선을 다할게.”
다담선자는 몸을 돌려 와락 그를 껴안았다.
대범하려고 했는데, 예전에는 대범했는데… 그를 완벽하게 믿었기에 죽음 앞에서도 웃을 수 있었는데, 지금도 믿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됐어, 이 말이면 됐어. 이 말이면…….’
남만 사람들에게 ‘마 마’는 죽음의 땅으로 인식되어 있다.
아무도 마마에 접근하지 못한다. 남자든, 여자든, 노인이든, 어린아이든 마마에 들어섰다가 살아난 자는 없다.
마마에는 죽음의 신이 산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아는 건 아무것도 없다. 죽음의 신을 본 사람은 모두 죽어버렸으니 아무 말도 못해준다.
남만인들은 죽음의 신을 ‘보 홍 휴야’라고 부른다.
먼 옛날부터 오늘날까지 죽음의 땅에 대한 공포는 쭉 이어져 왔다.
사실이 그랬다.
흑살마녀는 마마에 들어서는 사람을 모조리 죽였다.
남만인, 중원인 가리지 않았다. 남녀노소의 구분도 없었다. 사람의 탈을 썼으면 모두 죽였다.
마마는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땅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하나 여기에도 예외는 존재했다.
극소수의 몇몇 사람들은 ‘마 마’가 인위적으로 손대진 땅이라는 걸 안다. 그리고 그들의 무공은 흑살마녀도 어찌해 볼 수 없을 정도로 지고하다.
그들을 죽이려고 했다면…… 어쩌면 죽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어쩌면 흑살마녀가 죽었을지도 모른다. 흑살마녀의 무공도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흑살마녀는 그들, 무신이라고 불리는 몇몇 사람만 출입을 허용했다.
그들도 흑살마녀의 존재를 알았지만 강과 바다처럼 흑살마녀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현재까지 중원인들 중에서 마마의 존재나 위치를 아는 사람은 단 몇 명밖에 안 된다. 그리고 그들 정도의 무공을 지니지 않았다면 마마를 밟을 자격이 없다.
무신들은 일 년에도 몇 번씩 마마를 찾았다.
그들은 마마를 이 잡듯이 뒤지고 또 뒤졌다. 하나 멸신구관은 수줍기 이를 데 없어서 모습을 비쳐 주지 않았다.
오늘처럼 ‘마 마’가 개방되다시피 하여 수백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마마에 발자국을 찍을 줄 누가 알았으랴.
흑살마녀는 예전 같았으면 벌써 죽였을 사람들 사이를 걸었다.
무신들을 따라온 사람들이라 내버려 두었다. 또한 마야가 멸신구관에 들어서려는 마당에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사사삭! 사사삭……!
무인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흑살마녀를 에워쌌다.
공격은 가해오지 않았다.
공격하지 말라는 명을 단단히 받았으리라.
이 땅에서는 그래야 한다. 아무도 임의로 피를 흘려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흑살마녀뿐이다.
이들 중에는 흑살마녀라는 무명을 들어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처음 듣는 무명일 게다. 이미 오래전에, 그들의 할아버지 세대에 잠깐 등장했던 사람이기에 기억 속에 새겨지지도 않았다.
복면을 한 무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흑살마녀를 쳐다봤다.
이들은 북검문도일까, 남도문도일까?
북검문도든 남도문도든 모두 같은 복면을 했다. 검은 복면에 옷도 검은 옷으로 통일시켰다.
무신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복면을 하지 않았지만 마마에 들어설 자격이 없는 사람들은 북검문, 남도문 가리지 않고 복면을 했다.
옆에 걷고 있는 자가 북검문 무인일지도 모른다. 앞에 등을 보이고 있는 자는 남도문 무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임무는 오직 하나다.
혹여 일어날지도 모를 불의의 사태를 몸뚱이로 가로막는 것이다.
멸신구관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 모든 준비를 갖춰야 한다.
석문을 열고 들어가는 곳이라고 가정해 보자. 소립파가 석문을 열고 들어간 다음에 바로 문이 닫혀 버리면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지 않겠나.
그럴 경우, 이들 복면인들은 몸뚱이라도 밀어 넣어 석벽이 닫히는 것을 막아야 한다. 돌을 끼워 막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꼭 죽으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없고, 몸밖에 쓸 것이 없다면 몸이라도 쓰라는 말이다.
이들이 필요없을지도 모른다.
필요하면 쓸 것이고, 필요없으면 대기시켜 놨다가 데려가면 그만이다. 데리고 오지 않아서 필요할 때 쓰지 못하는 것보다는 백번 낫지 않은가.
“흥!”
흑살마녀는 냉랭히 코웃음을 쳤다.
지난 세월 동안 몇 번 본 적이 있는 사람이 서 있다.
그는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키가 컸다. 몸도 근육으로 덮여 있어 단단했고, 얼굴도 상당히 준수했다.
이미 진갑을 넘긴 노인에게 준수하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으리라. 하나 빼어난 그의 모습은 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준수하다는 말을 꺼내게 만든다.
“어서 오시오.”
그는 가볍게 포권지례를 취했다.
복면인들 사이에 가벼운 동요가 일었다.
이 세상에서 무신인 자의성검(紫衣聖劍) 석존무(石存茂)의 포권지례를 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으랴.
더욱 가관인 것은 흑살마녀의 태도였다.
“흥! 늙었으면 얌전히 죽을 날만 기다릴 것이지.”
“허허! 그러게 말이외다. 세상사에 미련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욕심이란 것이 끝도 없는 것인지라. 허허허!”
자의성검 석존무는 성인(聖人)의 풍모까지 지녔다.
“세 놈 다 왔다며?”
세…… 놈? 무신들에게 놈?
흑살마녀의 내력을 알 리 없는 복면인들은 거듭된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까딱했으면 이런 노파에게 어떻게 그렇게 못생겼을 수도 있냐는 말을 할 뻔했지 않은가.
“허허허!”
자의성검은 웃기만 했다.
“마야가 오란다. 떨거지들은 모두 떼어놓고 세 놈만 오라니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마.”
자의성검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난 간다. 나머지 두 놈에게는 네가 전해. 난 분명히 다 전했다.”
흑살마녀는 등을 내주며 거침없이 걸어갔다.
복면인들이 썰물처럼 갈라져 길을 열어주었다.
흑살마녀가 다녀간 후, 무신 삼 인은 자리를 같이했다.
백발백염에 성인의 기품을 지닌 사람이 자의성검 석존무다.
검은 무명옷을 입고 머리에 검은 건을 쓴 사람은 혈일뢰(血一雷) 울건평(鬱建平)이며, 뚱뚱한 몸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대머리 노인이 통천서패(通天栖覇) 진혜력(陳慧力)이다.
이들의 기도는 모두 달랐다.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이 의아할 정도로 각기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석존무는 밝은 광명을 택했고, 울건평은 어두침침한 음지를 택했으며, 진혜력은 세상을 오시하며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인상을 풍겼다.
이들이 북천신검 양학산과 함께 오늘날의 북검문을 탄생시킨 삼원로다.
남도문은 세 무신이 각기 일가를 이뤘으며, 남도문의 운영에도 깊숙이 간여하고 있다.
이들은 달랐다. 북검문 운영은 철저히 북검문주에게 일임했다.
거처도 따로 두어서 북검문도들과의 접촉도 가급적이면 줄이려고 애썼다.
호랑이는 한 산에 한 마리면 족하다. 한 산에 호랑이가 네 마리나 있으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한다. 현재는 어떤 방법으로든 미봉시킬 수 있겠지만 세월이 지나면 반드시 곪아터져서 파벌이 형성된다.
세 사람은 북검문주를 위해서 일신의 영광을 포기했다.
직책 또한 모두 사양하고 원로라는 호칭만 받아들였다.
그들은 거처에 숨어 무공 수련에만 매진했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고 시험하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살아가는 존재 이유다.
옛날에도 이들은 무신이었다. 하면 무공에 매진한 지금은 어떤 경지에 올라 있을까.
“드디어 들어갈 날이 온 것 같네.”
석존무가 온화한 표정으로 말했다.
“네 생각은 어떠냐?”
혈일뢰 울건평이 쩍쩍 갈라지는 음성으로 한구석에 조용히 시립해 있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중년인은 이미 생각해 놓은 듯 즉시 답했다.
“흑살마녀나 마야는 계략을 세우는 인물이 아닙니다. 그들의 의도는 순수합니다. 초대는 받으시되, 이번 초대에는 만사무불통지도 포함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의 음성은 무척 공손했다.
“그렇겠지.”
통천서패 진혜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만사무불통지는…….”
“조심해라, 이거냐?”
“조심을 넘어서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번 기회에 반드시 원로 어르신들을 제거할 욕심이 있지 않을까……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이번 초대에는 저도 포함시켜 주셨으면 합니다.”
중년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머리를 올려 비녀를 꽂은 후, 남은 머리는 뒤로 축 늘어뜨린 것이 특이해 보이는 사람이다.
얼굴은 말랐고, 눈빛은 형형하다.
사람들은 그를 삼뇌 중 육능자(六能子)라 부른다.
삼원로는 잠시 생각했다. 하나 이내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건 안 되겠다. 널 데려가면 도숭부가 다른 자를 데려와도 할 말이 없게 돼. 그렇게 되면 시끄럽기도 하려니와 살상도 많아져. 이번 일은 조용히 끝내는 게 좋겠어.”
육능자는 허리를 숙여 보임으로써 존명의 뜻을 알렸다.
“이따 점심이나 먹고 천천히 갑시다. 자네는 그동안 만사무불통지가 벌일 일을 추측해 보고. 무리한 주문인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육능자는 공손했다.
만사무불통지 도숭부는 향긋한 술까지 준비해 놓고 기다렸다.
“허허! 내게 먼저 오셔야지 저쪽 늙은이들에게 먼저 가셨더구먼. 섭섭하기도 하고…….”
“젊은 놈이 애늙은이 흉내 내지 마. 어디서 늙은이 흉내야, 흉내는.”
“입은 더 거칠어졌네. 자자, 술이나 한잔…….”
“네놈 머리 잘 쓰는 것 알아. 네놈과 몇 마디만 더 말을 주고받으면 나까지 말려들 테고. 퉤! 술도 기분 좋게 마셔야지, 앞에서 머리 돌아가는 소리를 내는데 술맛이 나나.”
“허허허! 모사에게는 몽둥이가 약이라는 속담을 오늘 실감하는구려. 과연 무지하게 힘으로 몰아치는 데는 대책이 없어요. 허허허!”
“용건은 알지? 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떨거지들은 떼어놓고 와. 시끄러운 건 질색이니까.”
흑살마녀는 용건만 말하고는 바로 돌아섰다.
2
다담선자는 곤혹스러웠다.
느닷없이 불쑥 찾아온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털썩 무릎부터 꿇었다.
“왜 이래요?”
“마야를 만나게 해줘요.”
“왜요?”
“멸신구관에 들어간다고 들었어요.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요.”
“뭐요?”
“제발요.”
여인의 표정은 간절했다. 또한 그 표정은 싫지만 볼 수밖에 없었던 표정이기도 하다. 절혼마녀가 저런 표정을 했었고, 지금은 일령도 하고 있다.
‘또 한 여자…… 그래서 따라왔나.’
불쑥 나타나 상조문의 습격 사실을 알려주고 사라진 여자, 먼먼 길을 오는 동안 줄기차게 뒤를 쫓아오던 여자.
그녀의 뜻이 멸신구관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마야에게 있었나.
“미안해요. 만나게 해줄 수 없어요.”
“뻔뻔한 줄은 알아요. 하지만…… 흑!”
서군봉은 설움이 듬뿍 담긴 울음을 터뜨렸다.
“이러지 말아요. 그 사람은 멸신구관에 들어가야 해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알잖아요. 새로운 인연은 마음을 번잡스럽게 할 수 있으니 그러는 거예요. 정 만나고 싶으면 나중에. 나중에 마야가 멸신구관을 나오면, 그때 만나요. 그때는 내가 만나게 해줄 게요.”
서군봉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그녀는 흐느낌을 속으로 삼키며 말했다.
“기다릴래요. 저도 기다릴래요. 들어가는 모습도 보고, 나오는 모습도 볼래요. 흑!”
소립파는 정오의 고통을 이 악물고 버텨냈다. 흑살마녀는 머리맡에 앉아 포근한 음성으로 자장가를 불렀다.
그사이, 삼원로가 도착했지만 당장은 소립파를 만날 수 없었다.
“미시(未時)는 되어야 깨어나요. 그때까지 기다리셔야겠어요.”
“우린 신경 쓰지 마시게. 어차피 불청객 아닌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삼원로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바깥에서도 환히 보이는 집을 이곳저곳 살펴보는가 하면, 흑살마녀가 따놓은 과일도 한마디 양해 없이 먹었다.
“흥! 너무하네. 자기네 집도 아니면서.”
일령이 한마디 쏘아댔지만 그들은 듣지 못한 것처럼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서군봉은 삼원로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행동 특성은 너무도 잘 안다.
먹을 것이 있으면 먹고, 쉬고 싶으면 쉬고…… 북검문 운영에는 관여치 않는 대신 그들이 누리는 것은 거침없는 자유였다. 그들에게 규율이라거나 예의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삼원로는 집 안을 뒤지는 것에 흥미를 잃었는지 나무 그늘로 가서 더위를 식혔다.
그때를 기다렸다.
서군봉은 향긋하게 끓여놓은 차를 들고 삼원로에게 갔다.
“여기 와 있었더냐?”
자의성검 석존무가 편안한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찾아가 뵀어야 하지만…… 그보다는 여기 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삼원로만 들을 수 있는 작은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