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25
125
강금산이 산불로 번지고 있는 화염지옥을 가리키며 말했다.
“천뢰는 왜 터뜨린 건데요? 원래 천뢰 같은 건 안 가지고 다녔잖아요. 천뢰뿐이면 말도 안 해요. 천뢰에 화운린을 섞는 것은 마인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왜 그랬어요?”
만사무불통지는 서군봉과 손잡는다고 했다. 삼원로를 죽이고 북검문주를 칠 것이며, 차기 북검문주는 서군봉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와 둘이서만 멸신구관에 들어야 하는데, 아주 잠깐만 삼원로를 묶어놓을 필요가 있다고 했다.
만사무불통지는 혼자서 들어갔다. 서군봉을 천뢰와 화운린에 고스란히 노출시켜 놓고 혼자만 멸신구관으로 뛰어들었다.
배신, 철저한 배신.
그런 걸 어찌 말하랴.
“개인적인 사정이오.”
서군봉은 망설이는 강금산의 표정에서 자신과 관계있는 일이란 걸 짐작했다.
강금산은 강한 자이지만 표정을 숨기는 데는 너무 약하다. 이용하기도 쉽다. 유궁 강금산 같은 자를 수족으로 부릴 수 있다면 일개 문파를 얻은 것과 진배없다.
그의 눈빛은 뜨겁다. 하나 표출을 못한다. 그는 간절하다. 하나 예의에 짓눌려 숨죽인다.
고름이 터질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상처를 내서 짜낼 것인가.
시간이 없다. 짜낼 수 있으면 짜내야 한다.
서군봉은 결심했다.
“그런데 왜 말을 올려요?”
“전에는…… 난 소저가 필요없고, 소저는 날 필요로 했으니까.”
“이제는요?”
서군봉의 말투는 도발적이었다. 여인을 많이 안아본 사내라면 당장 달려들어 안았을 만큼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요, 말이었다.
“도와주시오.”
“뭘요?”
“이백을 쳐야겠소.”
강금산의 말투가 건조해졌다. 입 안이 마르고 있다는 증거다. 심장이 쿵쿵 뛰고 있을 게다.
“진심이에요?”
활짝 웃는 웃음, 살짝 벌어진 입술,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는 교태.
강금산은 성큼성큼 다가가 서군봉 앞에 섰다.
그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고 잠시 머뭇거렸다. 그답지 않게.
그는 말을 하지 않았다.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앗! 하는 순간에 와락 껴안아 버린 것이다.
“소저를 사랑하게 되었소. 이 말이면 되겠소?”
서군봉은 안긴 채 가만히 있었다. 잠시 동안…… 하나, 둘, 셋! 그리고 손을 들어 강금산의 등을 감싸 안았다.
“제삼무신가로 못 돌아갈 거예요.”
“각오하고 있소.”
“나와도 맺어지지 못해요.”
“…….”
“난 욕심이 많아요. 북검문주가 될 생각이거든요. 그러자면 당신은 방해만 돼요. 당신이 아니라 당신 출신이…… 북검문주가 남도문 제삼무신가 아들하고 연분이 났다면…… 전 북검문주가 아니라 칠성군에서도 내려와야 해요.”
“됐소. 세상에는 그림자라는 것도 있으니.”
화르륵! 우르릉! 꽈앙! 화르를……!
불길은 무섭게 타올랐다.
나무도 타도, 돌도 타고, 땅도 타고, 물도 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불길에 휘감겼다.
“뜨거워요. 살이 익는 것 같아요.”
“안으로 들어가야겠군. 마야는 어쩌지?”
강금산의 말투는 또 달라졌다. 아주 편안한 말투다. 전처럼 경직되지도 않았고, 예의를 차리지도 않았다.
‘사내들이란…….’
“기전경타에 당했어요, 시전자가 아니면 풀 수 없는. 데리고 들어가 봐야 짐만 돼요. 멸신구관은 죽음의 함정인데 저런 짐까지 걸머메고 어떻게 헤쳐 나가요.”
“그렇다고 불에 태워 죽일 수야 있나.”
“그게 오히려 깨끗할 거예요. 벌레에 뜯어 먹히지도 않고.”
“어차피 죽을 사람이라면.”
강금산과 서군봉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시커먼 동공 속으로 뛰어들었다.
화운린을 맞은 나무는 활활 타올랐고, 타오른 불길은 옆 나무로 옮아갔다.
백 년 이래 남만 최대의 산불이 일어나고 있었다.
2
불길 한가운데 누워 있던 소립파의 손끝이 꿈틀거렸다.
움직임은 느리기는 했지만 조금씩 부위를 넓혀갔다.
팔을 내려 팔꿈치로 땅을 짚고 어깨를 드는 데까지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불행히도 그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온 세상을 집어삼킬 듯이 날름거리는 화마가 그에게도 몰아치고 있었다.
소립파는 손을 땅에 짚고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휴우!”
자오법신의 통증을 겪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너졌을 게다.
기전경타는 도끼로 내리찍는 듯한 통증을 안겨주었지만 자오법신의 통증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이었다.
경혈에 대한 타격도 자오법신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통 사람이 맞았다면 몸이 마비되고도 남았을 타격이지만 자오법신에 찌들어 버린 육신은 또 한 번의 자오법신 정도로밖에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혈이 마비될 리가 없다.
혈일뢰는 마야가 무엇 때문에 멸신구관을 찾는지 망각했단 말인가.
망각하지는 않았다. 자오법신이라는 것에 시달리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자오법신이 어떻게 해서 발생하는 것이며, 고통이 어떤지를 모른다.
혈일뢰는 큰 실수를 했다.
“휴우!”
물이 흐르는 고목에 등을 기댄 후에야 첫 번째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몸을 일으켜 동공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 아무리 불길이 드세더라도 들어가기 전에 할 일이 있다.
몸에 꿀을 바르는 일이다.
소립파는 발밑에 떨어져 있는 보따리를 열어 꿀 항아리를 꺼냈다.
꿀을 바르느냐, 바르지 않느냐에 따라서 전혀 다른 장소로 이동하게 된다.
소립파가 나무를 보며 긴장한 것은 시커먼 동공 속으로 들어가는 게 무서워서가 아니라 꿀을 바른 후에 일어날 일이 염려되어서였다.
꿀은 원래 여섯 명 분을 준비했다.
마지막에 서군봉이 끼어들었지만 그녀와 삼원로가 나누는 말을 엿들었기에 같이 떠날 줄 알고 있었다.
꿀은 넉넉해도 너무 넉넉하다.
꿀단지를 들어 머리 위에서부터 쏟아 부었다.
끈끈한 진액이 주르륵 흘러내려 온몸 곳곳을 물들였다.
그는 꿀을 바른 후에도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화마를 쳐다보니 오히려 인간들보다 깨끗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정신을 놓은 적이 없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누워 있기는 했지만 주위에서 일어나는 배반을 또렷이 들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욕심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 세상을 사는 보람은 무엇인가. 욕심에 이끌려 끝없이 쫓고 쫓기다가 끝내 욕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죽는 것이 인생인가.
“휴우!”
두 번째 한숨을 내뱉은 그는 몸을 굴려 고목 속으로 뛰어들었다.
휘이잉……! 슈우욱……!
동공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지저에서 몰아친 바람이 회오리를 형성하며 위로 솟구쳤다.
소립파는 손발을 좌우로 쫙 벌려 양쪽 벽에 대고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꿀은 왜 바르라고 했을까?
그가 알고 있는 것은 여기까지다.
삼원로에게는 마지막 하나, 꿀 이야기를 뺐지만 멸신구관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이었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한 시진? 두 시진? 손발에 쥐가 났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허리에 오랫동안 힘을 줘서인지 뻐근한 통증이 밀려온다.
“후웁!”
길게 숨을 들이쉰 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앞서 간 사람들은 절정무인들이니 이 정도는 쉽게 내려갔을 게다. 하지만 소립파는 그렇지 못하다. 진기란 것을 운용하지 못하며, 무공 또한 머릿속에만 담겨 있다.
그가 지닌 능력들도 인간들에게만 통용될 뿐, 자연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자연은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그가 자연의 말을 들어야 한다.
또 얼마나 내려왔을까?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니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날이 어두워져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너무 아래로 내려와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소립파는 한 발을 더 내리려다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순간이지만 등줄기에서 소름이 쫙 끼쳤다.
동공은 밑으로 내려갈수록 커지고 있다. 팔과 다리를 벌려 좌우의 벽을 짚는 방법이 한계에 부딪친 것이다.
이제는 어떻게 한다?
소립파는 내려가지도 못하고 올라가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위로 올라가자니 힘이 받쳐 주지를 않고, 밑으로 내려가자니 갈 방법이 없다. 두 눈 찔끔 감고 뛰어내리는 수는 있지만 자살하려면 무슨 방법인들 못 쓸까.
이 순간 마야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 갓 입문하여 권각술이 무엇인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꼬마와 다를 바 없었다.
결단은 상당히 빨랐다.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위로는 절대 못 올라간다. 어느 정도는 올라가겠지만 힘이 빠져서 입구까지 간다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아래로는 갈 수 있다. 두 발을 오므리고 두 팔을 거둬들이면 된다.
무공을 사용할 수 있다면…….
이곳은 유계의 주공을 상대하기 위한 곳이다. 이 정도 난관은 난관 축에도 못 낀다. 실례로 먼저 내려간 사람들은 기척도 없다. 벌써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녹광성초가 뼈까지 단단하게 만들면 좋을 텐데, 아쉽군.”
소립파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녹광성초 덕분에 피부는 철갑처럼 단단해졌지만 뼈까지 단단해지지는 않았다.
밑으로 낙하하여 맨몸으로 바닥에 부딪친다면 분골쇄신(粉骨碎身)을 면치 못하리라.
두 손을 거뒀다. 두 발도 오므렸다.
쒜에에에엑!
몸뚱이는 한참을 떨어져 내렸다.
도대체 높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이렇게 깊숙이 묻어놓은 이유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퍼뜩 스쳐 간다 싶은 순간, 무엇인가가 눈앞으로 훅! 하고 다가왔다.
‘어! 이게…….’
미처 반응도 하기 전이다. 앗차! 하는 느낌은 있었지만 어떻게 손을 써볼 도리는 없었다.
꽈앙!
순간, 눈앞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세상이 한순간에 노랗게 물들더니 암흑으로 변했다.
“으음……!”
뱃속에서부터 신음 소리가 우러나왔건만 소립파 자신은 아무것도 의식하지 못했다.
“음……! 으음!”
몇 번인가 몸까지 뒤척였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이 돌아왔다.
‘살았군.’
제일 먼저 든 느낌이다.
두 번째로 찾아온 것은 감각이다. 온몸이 욱신거린다. 뼈란 뼈는 모두 부러진 것 같다. 뱃속에 있는 장기들은 모두 터져 버렸고, 혈관마저도 가닥가닥 끊어진 것 같다.
감각을 느끼자 신음 소리마저 멎었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이 살았지 않은가.
피부는 두말할 것도 없이 녹광성초 덕을 봤다. 장기와 뼈마디는 모순되게도 자오법신 덕분에 무사하다. 뇌의 신경까지 손상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몰아치는 자오법신은 알게 모르게 그의 육체를 강골로 변화시키고 있었다.
“끄응!”
바닥에 손을 짚고 힘겹게 일어섰다. 그리고 그 순간, 그는 몸에 꿀을 바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냈다.
‘벌!’
분명히 벌이다. 몸 주위를 웽웽거리면서 날아다니는 것은 크기가 엄지손가락만 한 왕벌이다.
‘왕벌을 만나라고 몸에 꿀을…… 허!’
자신이 생각해도 기가 막힌다. 왕벌의 침은 코끼리조차 펄쩍 뛸 만큼 아프다. 독은 없지만 쏘이는 순간 반쯤 미쳐 버릴 것처럼 아파서 남만인들은 말벌보다도 무서워한다.
왱! 왜애앵……!
떨어진 충격이 너무 커서 벌 소리를 잘 듣지 못했다.
한 마리…… 처음에는 한 마리인 줄 알았다. 한데 한 마리가 아니다. 귓전에 울리는 소리는…… 맙소사! 온통 벌 천지다. 바닥 전체가 벌집인 것 같다.
소립파는 먼저 눈부터 감았다.
될 수 있는 한 호흡도 감추고 움직임을 최소화했다.
왕벌들의 날갯짓 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몇 마리는 꿀을 가져간다. 몇 마리는 위협을 느꼈는지 침으로 피부를 톡톡 건드린다.
‘제발 그냥 가거라. 제발!’
생각은 그렇게 했지만 꿀을 만난 벌들인데 그냥 갈 리가 있는가.
다른 생각을 해야 했다.
녹광성초가 왕벌의 침까지 막아줄까?
흑발마녀의 피부는 도검도 침범치 못했다. 자신도 그와 같은 시술을 받았으니 왕벌의 침쯤이야.
우습다. 마도의 하늘이라는 사람이 겨우 벌 따위가 무서워 숨을 죽이고 있다니.
다른 사람들은 이곳을 어떻게 통과했을까?
무신이라고 해도 왕벌이 쏘아대는 통증은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또 한 번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대로 왕벌의 눈치를 보며 살금살금 기어가느냐, 아니면 벌떡 일어나 냅다 달리느냐.
달린다? 어디로 달리나?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데.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 그에게는 만공심안이 있어서 눈을 감고도 사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한데 지금은 모든 능력을 상실한 사람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천천히 움직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데도 왕벌들의 눈치를 살폈다.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토록 염려하던 자오법신이 기어이 일어났다.
벌써 자시다. 그럼 바닥에 떨어져서 깨어나기까지 반나절은 지났다는 소리다.
“끄으윽! 끄윽!”
왕벌들의 눈치를 살필 겨를이 없었다. 자오법신의 고통은 주변의 모든 상황을 무시하게 만들었다.
그는 두 손을 모아 가슴에 얹고 마구 뒹굴었다.
웨에에엥! 웨에엥!
벌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가 되쏘아져 갔다.
“끄으윽! 어헉!”
소립파는 연신 비명을 질렀다.
자오법신의 고통에 왕벌들의 공격까지 받으니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고통을 감쇄시키는 내공심법을 안다. 일시적이지만 전신을 마비시키는 기공도 안다.
알면 뭐 하는가. 시전하지 못하는데.
“아아아아아악……!”
소립파는 있는 힘껏, 목청껏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