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28
128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행동은 없다는 데 있다.
세상에 고통을 참을 수 있는 무공 따위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필사적인 상황이라면 펼칠 수 있는 무공은 있다.
폭우 속에 서 있어도 몸에 빗방울 하나 맞지 않는다는 혼천망검(混天網劍)을 펼치면 단숨에 왕벌들의 숲을 뚫고 나갈 수 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혼천망검을 펼치기 위해서는 전신진기가 일시 고갈되는 현상을 겪어야 한다.
북검문의 세 늙은이는 절대 그 틈을 놓치지 않으리라.
자신처럼 무기지신이 되어서 천장에 달라붙어 있는 세 늙은이가 먼저 움직이지 않는 한 움직일 수 없다.
북검문 삼원로 역시 같은 생각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들도 혼천망검과 비슷한 벽공(壁功)을 지녔을 터이다. 한데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다른 두 명의 호위보다 만사무불통지의 기습이 더 효율적일 것이라 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물며 호위해 주는 사람도 없는 만사무불통지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움직일 수 없었다.
먼저 움직이는 자가 당하게 되는 묘한 형국인 것이다.
국면을 해결할 방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무기지신들이 달라붙어 있는 줄도 모르고 왕벌들만 잔뜩 경계하고 있는 두 연놈이 움직여 주면 된다.
호랑이 밑에 견자(犬子) 없다고 했는데, 그것도 모두 옛말.
천기수사의 딸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여자, 잔꾀만, 그것도 빤히 보이는 얕은 수만 남발하는 육신녀 서군봉과 역시 궁왕 강창도의 손톱도 따라가지 못하는 못난이 자식 유궁 강금산이 왕벌을 제거해 주면 된다.
연놈은 틀림없이 움직인다. 그것도 오래지 않아서.
연놈도 소립파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으니 마음이 조급해졌을 게다. 앞서 길을 나간다고 멸신구관의 기연을 만나는 것도 아닐진데, 흡사 손에 든 먹이를 빼앗긴 것 같은 심정이 되어 있으리라.
스윽!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서 미미한 기척이 감지되었다.
‘후후! 역시 고양이 새끼에 불과해.’
우우웅! 우웅……!
기척을 감지한 왕벌들이 웅웅거리며 위세를 떨쳤지만 서군봉과 강금산이 있는 곳까지는 날아오르지 않았다. 그때,
피유융……! 꽈앙!
만사무불통지의 눈앞에서 불이 번쩍 튀었다.
강금산이 북검문 삼원로를 공격하라고 준 화운린 섞인 철뢰를 사용한 것이다. 그것도 세상 그 어떤 것도 뚫을 수 있다는 은형시에 매달아서.
불길이 일어났다. 번개가 피어났고, 세상이 노란색으로 물들었다. 화살이 쏘아져 나가는 소리와 폭발음은 그 후에나 귓전을 울렸다.
고양이 새끼라고 해도 강창도에게 배운 솜씨이니 어느 정도 인정은 해줘야겠지.
쉬익!
만사무불통지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란 불꽃 사이로 파고들었다.
쉭! 쉭! 쉬익!
다른 곳에서도 움직임이 일었다.
정작 화살을 쏘아낸 서군봉과 강금산은 자신들의 발아래에서 무서운 암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른 채 불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겠지만, 무신들에게 철뢰의 폭발 정도는 잠시 고개를 돌리는 정도면 충분했다.
쒜엑! 쒜에엑!
만사무불통지는 뒷머리가 근질거렸다.
돌아볼 것도 없다. 기세만으로도 상대를 가늠하기에는 충분하다. 자의성검 석존무는 옆으로 빠져나가고, 혈일뢰 울건평과 통천서패 진혜력이 작심이라도 한 듯이 달라붙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예측했다.
만사무불통지는 장삼을 벗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담갔다.
불은 금방이라도 장삼을 집어삼킬 듯 활활 타올랐다.
이것이다. 보통 불이라면 멀쩡한 장삼만 태운 꼴이 된다. 하나 이 불길에는 화운린이 섞여 있다.
만사무불통지는 보지도 않고 등 뒤를 향해 불붙은 장삼을 휘둘렀다.
그가 정작 상대해야 할 자는 울건평이나 진혜력이 아니라 자의성검 석존무다.
울건평과 진혜력이 달라붙은 것은 석존무에게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울건평과 진혜력을 떨쳐 버리는 데 시간을 소비해서는 안 된다. 석존무에게 뒤져서도 안 된다. 그보다 한 발 앞서서 암굴 속으로 뛰쳐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설혹 이번 경우처럼 단지 몇 걸음 먼저 도착하는 것에 불과할지라도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일 먼저 눈으로 보아야 한다. 기회란 느긋한 사람에게는 절대 주어지지 않는다. 발 빠른 사람만이 없는 기회도 만들어낸다.
파파파파팟!
장삼에서 불똥이 떨어져 나갔다. 불붙은 기름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듯이 검은 그을음을 남기며 날아갔다.
스슷! 파아앗!
울건평과 진혜력은 훌쩍 뒤로 물러섰다.
암굴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왕벌들이 타 죽는 냄새는 숨 몇 번 참아서 견뎌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밀납까지 녹아드니 암굴 전체가 꿀물과 불길로 가득했다.
석존무는 어느새 지면으로 내려와 다시 한 번 도약하고 있었다.
만사무불통지는 그를 향해 다시 한 번 장삼을 휘둘렀다. 암기를 쏘아내듯이 정확하게.
삼원로는 너무 방심했다. 두 명이 합공하면 만사무불통지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보통 때 같으면 그들의 생각이 맞다. 하나 사방에 화운린이 번져 있다는 것은 아주 큰 변수이다.
아니다. 변수가 될 수 없다. 무신 정도 되는 사람에게 이 정도 불길은 변수 축에 들지도 못한다. 상대가 무신만 아니라면, 만사무불통지만 아니라면.
불행히도 상대는 무신이다. 평소라면 웃어넘겼을 상황도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변수가 될 수 있다.
석존무는 부득불 옆으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그 틈을 비집고 만사무불통지가 쏘아 나갔다.
***
“어때요? 제 생각이 맞죠?”
서군봉은 장미꽃이 만개한 듯 활짝 웃었다.
“귀신같이.”
강금산은 혀를 내둘렀다.
그들과 무신들과의 격차는 상당하다. 강금산과 서군봉이 합공을 해도 무신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한다.
무신이라는 말 그대로 인간과 신의 차이다.
바닥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강금산은 화살을 꺼내 벽에 찔러 넣었다. 그리고 한쪽 손으로는 서군봉을 안은 채 대롱대롱 매달려 발밑을 살폈다.
“왕벌이에요.”
서군봉이 왕벌의 존재에 대해서 알려줬다.
그녀가 왕벌에 대해서 말해주기 전까지는 왕벌이란 것이 존재하는 줄도 몰랐다.
왕벌에 대해서 들은 후에도 벌이 무서우면 얼마나 무서우랴 하는 자만심을 떨치지 못했다.
“하! 왕벌이 도와줬네요. 왕벌 덕분에 무신들이 발목 잡혔어요. 호호호! 무신들도 어쩔 수 없네요.”
그제야 무신들이 무기지신이 되어 천장에 매달려 있는 것을 감지해 냈다.
이목으로, 기척으로 잡아낸 것은 아니다. 무기지신이 되어 매달려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무엇인가가 떨어져 내렸다.
쿵!
‘뭐야?’
궁금증은 한참이 지나서야 풀렸다.
커다란 비명 소리, 암굴이 무너져라 내지르는 절규, 소립파의 음성.
그가 죽지 않고 살아서 내려왔으며, 무식하게 떨어져 내리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도 정면으로 왕벌과 상대하고 있다.
세상에서 이처럼 무식한 놈이 또 있을까.
그때 서군봉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립파가 살아 있는 건 의외지만…… 저 사람의 목소리에 윤기가 배이기 시작했어요. 이건 고통을 이겨내고 있다는 증거죠.”
목소리에 윤기가 배여? 생기가 살아난다고 하면 될 것을 말도 참 맛깔스럽게 한다.
“맨몸으로 왕벌들의 공격을 받아내다니……. 마야, 저 사람이야말로 대단한 사람이네요. 여태까지 마야를 잘못 본 것 같아요. 호호호!”
불현듯 질투가 들끓었다.
꼭 짚어서 질투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텅 빈 듯한 느낌이 든 것은 확실하다.
“마야는 왕벌들의 공격을 뚫어낼 거예요. 그러면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알죠? 이 상황을 풀어헤칠 사람은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사람밖에 없다는 거요?”
“내가?”
“삼원로와 만사무불통지는 서로 견제하느라 먼저 움직이지 못해요. 우린 더더욱 움직일 수 없고. 이럴 경우에는 싸움을 붙여야죠. 은형시에… 철뢰는 가지고 있죠? 그걸로 싸움을 붙여요.”
말은 들었지만 설마 했다.
무신들이 서군봉의 의도대로 움직인다면 손도 안 대고 코를 푸는 격이 된다.
그리고 정말 그렇게 진행되었다. 소립파는 정말로 왕벌들의 공격을 이겨내고 암굴 저쪽으로 사라져 갔다. 무신들은 철뢰를 터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다.
그들 앞을 가로막는 건 없다. 태연자약하게 저들의 뒤를 쫓아가기만 하면 된다.
“모두들 한 치라도 앞서려고 눈에 불을 켜는군.”
뒤늦은 행보가 염려스럽지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어서 돌려 말했다.
“풋!”
서군봉은 웃었다.
웃음이 해맑다. 깊은 산골에서 맑은 계류(溪流)를 보았을 때처럼 살포시 손을 대보고 싶다.
“이곳이 어딘지 잊었어요?”
“…….”
“멸신구관이에요. 전사관, 중일관, 후사관으로 이루어졌다는 멸신구관요. 우리가 바라는 것은 후사관에 있어요. 전사관이나 중일관은 그야말로 죽음의 함정밖에 없는 거예요. 바보예요? 죽음의 길인 줄 빤히 알면서 먼저 달려들게.”
서군봉은 대하면 대할수록 요물이다. 그녀의 말은 한 마디를 들을 때보다 두 마디를 들을 때가 더 무섭다. 말이 이어질수록, 입을 오물거릴수록 헤어날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되니까.
서군봉이 지금 한 말, 백번 타당하다.
전사관, 중일관은 유계의 주공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함정이니 무신들도 만만히 보지 못할 곳이다.
하지만…… 강금산은 서군봉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남도문도이기에, 만사무불통지와 같은 공기를 들이쉬었기에 볼 수 있는 것이다.
만사무불통지의 무서움, 그의 완벽함.
만사무불통지가 삼원로와 싸우면서까지 앞서 나가려고 할 때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대세를 좌우할 만한 것이 틀림없으리라.
강금산은 속내를 말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이제 그만 들어갈까?”
제2장 제일관(第一關) ― 첫 관문
1
어둠에 동화되어 있는 희뿌연 연기를 발견해 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소립파는 흔치 않은 사람 중에 한 명이다.
‘흑침무(黑沈霧)!’
말로만 들었을 뿐,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안개가 눈앞에 펼쳐져 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운무(雲霧)치고 흩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허공중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증발하여 사라지기도 한다.
흑침무는 흩어지지 않는다. 비중이 공기보다 무거워서 땅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길게 늘어진다. 중도에 웅덩이를 만나면 가득 채우고, 도랑을 만나도 채운다.
땅 밑으로, 지하 깊숙이 스며들기만 하는 것이 흑침무다.
흑침무가 소립파의 눈앞에서 살랑거린다.
땅이 활을 거꾸로 세워놓은 것처럼 만곡(彎曲)되어 있다는 뜻이다.
계속해서 걸어가다 보면 발끝부터 닿기 시작해서 정강이, 무릎, 허벅지, 배를 거치고…… 끝내는 머리까지 삼키고 말리라.
물처럼 감촉이 있다면 조심이라도 할 터이다. 밝은 대낮이었다면 대번에 주목을 끌었을 게다. 하지만 깜깜한 어둠 속이고 운무이기에, 그것도 축축하다거나 하는 감각적 느낌을 조금도 주지 않는 운무이기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만공심안이 아니었다면 곤란할 뻔했다.
흑침무는 그 자체로는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독성도 없다. 그러니 만지거나 몸에 닿아도 보통 운무를 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는 호흡으로 들이켰을 때 일어난다.
폐로 들어간 흑침무는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폐에 깊숙이 틀어박혀 바위처럼 자리 잡는다. 공기가 들어올 부분에 흑침무가 자리하고 있으니 호흡량이 급격하게 줄어든다. 많이 마시면 마실수록 호흡이 가빠지는 것은 필연이다.
조금 마셨다고 해서 안심할 것은 못 된다.
흑침무는 아래로 내려가려는 성질이 있어서 폐를 점점 밑으로 끌어내린다. 들이킨 양에 따라서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폐 기능이 약화되는 것도 정해진 수순이다.
무엇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때는 늦는다. 이상 징후를 느낄 즈음이면 벌써 폐의 삼 할 정도는 흑침무에게 점령당해 있을 터이다. 즉시 호흡을 닫아도 죽음을 면치 못할 치사량이다.
흑침무에 걸려들면 약이 없다. 내공의 높고 낮음도 상관없다. 폐를 떼어내고도 살 수 있는 인간이라면 몰라도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흑침무를 만나면 무조건 숨을 멈춰야 한다.
소립파는 걸음 속도를 멈추지 않고 흑침무를 향해 걸어갔다.
등 뒤에 따라붙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민활하고 강하다. 좁은 동혈에서 수십 차례에 걸쳐 육박전을 벌이면서도, 쉼없이 쫓고 쫓기면서도 조금치의 기척조차 흘려내지 않는다.
무신들…….
다른 길로 갔으리라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등 뒤에서 나타났다.
역시 그들이 갔던 길은 세월이 만들어낸 틈새였나? 잘못된 길인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 나왔나? 왕벌을 만나 수단을 강구하고, 귀를 찢어대던 폭음은 철뢰를 터뜨린 것인데……
무신들이 지나온 경로가 환히 눈에 그려졌다.
그는 무신들이 기를 감추고 머리 위에 매달려 있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공심안을 벗어나는 사물이 있으랴. 만공심안은 모든 것을 본다. 무신들이 지척에 있었다면 당연히 종적을 탐지해 냈을 것이다.
소립파의 만공심안에 대한 확신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진리처럼 확고했다.
이런 부분에서는 마야도 방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