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29
129
무신들, 그들 때문에 흑침무를 향해 걸어간다.
잠시라도 멈추는 일은 없다. 걷는 속도도 늦추지 않는다.
자신은 만공심안이 있어서 흑침무를 볼 수 있다. 저들에게도 흑침무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있다면 흑침무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없다면 너무도 단순한 함정에 무릎 꿇으리라.
소립파 또한 방심하지 못한다.
다른 곳도 아니고 멸신구관에 설치된 흑침무다. 죽음의 흑침무가 될 것은 자명한 일. 머리까지 완전히 잠긴 상태에서 걷다가, 걸어가다가, 폐기 상태가 한계에 다다라 숨을 들이쉬고 마는 상황이 될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흑침무가 깔린 암굴이 반각 이상 이어진다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반각 이상? 이, 이런!’
소립파는 등에 소름이 쫙 끼쳤다.
흑침무는 반각 이상 이어진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를 죽음으로 안내하는 길이라면 그 정도 예상은 해야 한다.
이제 흑침무와의 거리는 불과 십여 보가 남았을 뿐이다.
거리를 턱이 잠겨 흑침무의 영향을 받기 시작할 때까지로 최대한 늘려도 십오륙 보에 불과하다.
그 안에 해결책을 찾아내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
걸음은 계속되고 있지만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귀식대법(龜息大法)이란 게 있다. 숨 한 모금으로 몇 시진이라도 버틸 수 있는 둔법(遁法)이다. 하지만 귀식대법을 펼치는 동안에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귀식대법은 내공이 있어야 펼칠 수 있다.
잠명술(蠶命術)이란 것도 있다. 누에가 고치 속에 틀어박히듯이 숨을 폐 속에 깊이 가두고 가늘고 길게 뽑아내는 토납법(吐納法)이다.
잠명술은 귀식대법에 비해 일 호흡 시간이 짧다는 단점이 있는 반면에 굼벵이처럼 느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움직일 수 있다는 장점도 지닌다.
그러면 뭐 하나. 이 역시 내공이 있어야 펼칠 수 있는 것을.
어느덧 발길은 흑침무를 밟았다.
아무 느낌도 주지 않는 흑침무이지만, 만공심안으로 뚜렷이 보고 있으니 개운치는 않다. 죽음의 사자가 발목을 붙잡은 것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어깨가 움찔거렸다.
발목이 완전히 잠기고, 정강이, 무릎, 허벅지……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발걸음인데 왜 이리 빠른가. 조금 천천히 걸을 수는 없는가.
흑침무가 가슴까지 차올랐지만 소립파는 아무 대책도 끄집어내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중원을 유랑하며 보았던 수만 가지의 절기들이 들어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만한 절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귀식대법이나 잠명술처럼 구명(求命)에만 급급한 절기는 몇 가지 떠오르지만 진기를 운용하지 못하는 소립파에게는 무용지물에 불과했다.
무신을 고려할 계제가 못 된다. 당장 자신의 목숨부터 부지해야 할 판이다. 정 대책이 떠오르지 않고 숨을 참지 못하겠거든 뒤돌아서 빠져나가야 한다.
흑침무가 입술에 닿았다. 코에도 닿고 이마에도 닿고, 머리까지 꿀꺽 삼켜 버렸다.
예상대로 만곡된 암굴이다.
머리끝까지 완전히 잠긴 다음에도 한참을 밑으로 내려갔다.
암굴은 폐기 상태가 한계에 다다라 조금씩 숨을 토해내기 시작할 무렵이 되어서야 내려가기를 멈추고 수평으로 된 길이 나타났다.
이제 결정해야 한다.
돌아갈 것인가, 이대로 나아갈 것인가.
돌아가는 길은 상향(上向)이다. 밑으로 내려오는 것과 위로 올라가는 것은 체력적인 차이가 있으니 숨도 더욱 가빠질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숨으로는 지금 당장 돌아서도 빠듯하다.
물론 나아간다면 필연코 죽음을 맞게 된다.
요행은 기대할 수 없다. 행운이나 기연 같은 것도 없다. 오직 죽음만을 노리고 만들어진 길이다.
만공심안을 더욱 넓게 펼쳐 등 뒤를 살폈다.
무신들은 따라오지 않는다. 흑침무에 신경을 쓰느라 그들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지 못했는데, 현재는 만공심안으로 볼 수 있는 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흑침무의 존재를 알아챘다.
단정해도 좋다. 그렇지 않다면 바짝 따라붙었을 사람들이다.
자신처럼 무작정 들어서지 않고 완벽하게 돌파할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할 테지.
흑침무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 숨을 얼마나 참아야 하는지…… 자신이 생각한 것은 그들도 생각할 것이고, 확실한 대비책이 세워진 연후에야 들어서리라.
흑침무 속에 잠긴 소립파는 당분간이지만 혼자만의 세상을 갖게 되었다.
무신도, 세상도…… 저주의 자오법신까지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 숨을 완전히 토해내기까지는 일다경(一茶頃)이라는 시간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그 시간만큼 철저하게 그만의 것이다.
소립파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어.’
역지사지(易地思之), 유계의 주공이라면 어떤 방식으로 흑침무를 통과했을까?
분명한 것은 전사관과 중일관으로는 주공을 막아낼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후사관은 앞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함정을 만들었다.
죽음의 길도 될 수 있고, 기연도 될 수 있는 묘한 함정.
소립파는 딱 하나의 사실에만 생각을 집중했다.
유계의 주공이라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까?
‘근본적으로 숨을 쉬지 않는다면 가능해. 숨을 쉬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는 인간이라면…… 이 세상에 그런 무공이 있나? 있어. 있다고 봐야 해.’
무공이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기에 무공을 보는 눈을 기르기 위해서는 말도 안 되는 경우조차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력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소립파는 많은 훈련을 쌓아왔다.
그는 숨을 쉬지 않는 무공이 존재한다는 데 동의했고, 유계의 주공이 그런 무공을 수련했을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그가 할 수 있다면 자신도 할 수 있다. 왜? 마야니까. 마(魔)의 하늘은 그의 것이 아니라 마야의 것이니까.
‘시간이 필요해.’
무공을 창안할 시간이 없다. 일견후즉파라는 그이지만, 그것도 기본적인 무공의 골격은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말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한 줌의 공기다. 폐 속에 집어넣을 맑은 공기. 그것도 아주 급박하다.
폐가 찢어질 것 같다. 혈관은 툭툭 불거져 나오고, 어둠 속이라 보이지는 않지만 얼굴색도 발갛게 물들어져 있으리라.
숨 한 모금에 삶과 죽음이 갈리는 입장이니 어찌 태만하랴.
순간, 번개처럼 머릿속을 휘젓는 생각 하나.
“후후후!”
소립파는 모든 긴장을 풀고 얕은 웃음을 흘렸다.
숨도 조금 교환했다. 물론 탁기가 뱉어지는 대신 흑침무가 고스란히 빨려 들어왔다.
어차피 죽을 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주의 자오법신을 풀지 않으면 내일이 될지 모레가 될지 모르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흑침무는 저주의 자오법신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지니고 죽음으로 이끈다. 자오법신이 음양이기의 부조화, 상극의 극대화에서 발생한 기상(氣傷)이라면 흑침무는 칼에 심장을 찔리는 것처럼 직접적으로 육신에 해를 가한다.
육신의 손상을 치료하는 것과 기의 흐름을 고치는 것은 전혀 다른 치료법을 요한다.
소립파는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멸신구관을 찾아들었지만 자오법신을 고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오법신을 고치기 위해서는 육신이 갈가리 찢기고, 뼈가 분쇄되는 아픔을 겪어야 한다고 했다.
원론적인 말이다. 신체의 체형을 완전히 탈바꿈시키는 환골탈태(換骨奪胎)를 말하는 것인데, 그런 것이 있다면 지금까지 내공 한 줌 끌어올리지 못하는 몸으로 살아왔겠는가.
환상에 불과하겠지만 자오법신을 고칠 수 있다는 유일한 장소가 이곳이기에 들렀을 뿐이다. 또한 유계의 주공을 죽음으로 이끌기 위한 곳이니 마야의 무덤으로써는 썩 괜찮다는 생각도 했다.
지금에 와서 흑침무에 연연할 이유가 무엇인가.
자오법신을 고치는 것도 기적, 흑침무를 떨쳐 내는 것도 기적.
세상이 온통 기적으로 뒤덮어야 살아날 운명이라면 차라리 죽음 속에 육신을 내동댕이치고 둥둥 떠다니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흑침무는 반드시 죽음으로 이끌지만 당장 절명시키지는 않는다.
일어섰다. 앉아서 생각할 이유가 없다.
가자, 숨을 최대한 아끼면서.
***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와 가소롭다는 비웃음이 얽힌 박투(搏鬪)도 시커먼 운무 앞에서는 뚝 멈췄다.
“허허허! 고약하군. 흑침무라니.”
자의성검 석존무가 웃음을 흘렸으나 심사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흑침무는 당대 제일의 무공 대가라는 그들에게도 난관이었다.
“하하하! 그럴듯해. 이제야 멸신구관다운 면모를 보게 되는군. 아마도 이것이 제일관문이겠지? 제일관문치고는 싱거운 면이 없지 않으나 흑침무를 이만큼이나 모으려면…… 하하! 성의를 감안해서 흔쾌히 뚫어주지. 하하하!”
통천서패 진혜력이 통쾌한 듯 웃어젖혔다.
“그렇게 가벼이 생각할 일이 아니지. 문제는 늙은 여우야. 흑침무 속에서 늙은 여우가 공격해 온다면 어찌할 텐가?”
“…….”
울건평의 물음에 진혜력은 대답하지 못했다.
흑침무는 벗어날 자신이 있다. 하나 그러자면 외기(外氣)를 차단하고 내기(內氣)를 아주 고요하게 운용해야 한다. 싸움을 할 때처럼 강성하게 일으키면서 외기를 차단하는 것은 어렵다.
만사무불통지에게 그만한 능력이 있을까?
분심공(分心功)을 쓰면 가능할 것도 같은데, 만사무부통지가 분심공까지 수련했을까?
진혜력은 벌써 흑침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만사무불통지는 흑침무를 보고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고 뛰어들었다.
그가 흑침무를 보지 못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에게는 광안혜력(光眼慧力)이라는 절공이 있어서 개미의 움직임까지 꿰뚫어 본다.
문득 자의성검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향로를 받치는 것은 세 다리, 하지만 인간은 두 다리. 두 다리로는 향로를 받치지 못하고, 인간이 세 다리라면 우스운 꼴. 세 다리든 두 다리든 하늘이 최상의 형태로 만들어주신 것.”
말을 마친 자의성검이 먼저 흑침무 속으로 들어섰다.
울건평과 진혜력도 자의성검의 뒤를 쫓았다.
그렇다. 흑침무 속에서는 만사무불통지도 함부로 망동하지 못한다.
평소 무공의 절반도 사용할 수 없는 곳이 흑침무 속이라지만, 삼원로 중에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는 그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호흡 한 모금조차 들이키지 않고 삼원로를 죽일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리되면 그도 끝장이다.
흑침무 속에서는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어도 공격하지 못한다. 또 공격해 오면 어떤가. 아니다. 오히려 이쪽에서 공격할 판이지 않은가. 만사무불통지를 죽일 수 있다면 세 명 중 한 명 정도는 명을 달리해도 괜찮지 않은가.
삼원로가 떠난 자리, 서군봉과 강금산은 핏기 잃은 얼굴로 어둠 속을 응시했다.
“보여요?”
“……아니.”
“저도 안 보여요.”
서군봉의 음성에는 짙은 낙담이 깔려 있었다.
삼원로는 일부러 목청을 높여 흑침무의 존재를 알려줬다.
그들은 서군봉이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뜻은 다를지 모르지만 같은 북검문도다. 삼원로 정도 되는 사람들을 문도라고 칭하기에는 어색한 감이 있지만 한솥밥을 먹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알아서 돌아가라는 경고일 수도 있다.
생각을 해주려고 해도 흑침무 같은 경우는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다. 찰나 만에 수련할 수 있는 무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니, 돌아가라고 말해주는 것이 최선이다.
“방법이…… 없을까?”
마음이 답답한지 강금산이 먼저 말을 꺼냈다.
서군봉은 고개만 살래살래 흔들었다.
흑침무를 통과하는 방법이 있을 리 없다.
무공을 배우면서 누가 이런 경우까지 생각하겠는가. 특이한 절공을 수련한 만사무불통지나 삼원로가 기이한 사람들이다.
“하기는…… 말해주지 않았으면 흑침무가 깔려 있다는 것도 모를 뻔했으니.”
두 사람은 멸신구관 중 첫 번째 난관에서 발목을 붙들렸다.
“이곳은 입구과 출구가 다를 거예요. 즉, 흑침무를 통과하지 않은 한은 앞서 간 사람들을 볼 수 없어요.”
서군봉은 말을 하면서도 생각은 마야를 향했다.
삼원로나 만사무불통지는 자타가 공인하는 무신들이니 특이한 절공을 수련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마야는 다르다. 그는 무슨 능력이 있어서 거침없이 흑침무 속을 걸어 들어갔나.
마야에게 특이한 능력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마야가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왕벌들이 공격해 왔을 때 벌써 무너졌다.
마야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그를 잘못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를 버리고 강금산을 택한 것이 최악의 수였는지도…… 마인과 어울릴 수 없는 노릇이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지만……
“그만 돌아가지.”
그러나 정작 말을 한 강금산도 미련을 떨칠 수 없는지 쉽게 발길을 돌리지 못했다.
서군봉은 강금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흑침무를 견뎌낼 수 있는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귀식대법이면…… 귀식대법이면 견딜 수 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어.’
“절 믿어요?”
한참 만에 서군봉이 뜬금없이 말했다.
“후후후!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 이숙을 치자고 했지? 그것으로 대답이 될 것 같은데.”
“절 위해 죽어달라고 하면 죽어줄 수 있나요? 그건 무리겠죠?”
“후후후! 아직은 그만한 인연이 아니지 싶어.”
‘역시 단순해.’
서군봉의 얼굴에 실망스런 기색이 어렸다. 하지만 사위가 워낙 캄캄해서 강금산은 아무 표정도 읽지 못했다.
상대가 죽어달라고 하면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봐야 한다. 거절이든 승낙이든 말을 하는 것은 그다음이다. 생각없는 자들이 내키는 대로 불쑥불쑥 말을 꺼내곤 하는데, 강금산이 전형적인 경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