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3
13
“아니, 그건 천비대의 순수한 능력이야. 천비대도 적선서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아. 북검문이 북무림 태두가 된 이래로 적선서를 사용한 예는 두어 차례밖에 되지 않을 거야.”
“영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건 죄예요.”
“후후후! 그런가? 적선서라는 놈을 알면 그런 말을 못할걸? 적선서는 무척 빨라. 호랑이도, 독수리도 놈을 잡지 못해. 동물들 중에서 놈을 잡을 수 있는 놈은 없어.”
“쥐가요?”
“쥐가. 더군다나 놈은 무척 포악해. 거치적거리는 놈이 있으면 앞발 사이로 들어가서 배를 뚫어버려. 그리곤 내장을 갉아 먹지.”
“어멋!”
“인간의 경우에는 다리를 타고 올라와서 항문을 뚫어. 그야말로 순식간이라서 웬만한 무인은 그대로 당하고 말지. 도망칠 수도 없어. 신법 정도로는 감당할 수 없으니까.”
“여, 영물이 아니라 흉물이네요.”
“그래서 함부로 사용하지 않는 거야. 둥지 밖으로 나오면 반드시 내장을 갉아먹고 난 다음에야 잠잠해지니까. 만약 먹이를 놓치면 주인 내장을 파먹지. 이쪽이든 저쪽이든 한 명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어.”
“그, 그런 놈을…… 풀어놓을까요?”
“그럴 거야.”
“말도 안 돼요. 우리는 그만한 가치가 없는데.”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천비대가 판단할 문제 아닌가? 단문협을 철통같이 봉쇄할 정도라면 풀어놓을 것 같은데. 봉쇄가 풀린 후라면…… 이름이 뭐지?”
“이, 일령요. 일령이라고 불러요.”
“봉쇄가 풀린 후라면 일령 말대로 가치가 없을 테지만 지금은 가치가 있을 것 같아. 이게 내 판단이야.”
“그런 걸 어떻게 알죠? 천비대에 대해서도 우리보다 잘 알고.”
“북검문에 아는 사람이 있지.”
소립파는 속이 환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그러나 정말 뜻밖에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치 오누이가 대화하듯 자상한 마음씨가 뚝뚝 묻어 나왔다.
‘엉큼한 사람이네…… 어린애를 노리고 있었어.’
‘일령…… 너도 사랑받을 때가 됐구나.’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다른 생각을 했다.
야산 너구리 굴에서 시작된 동굴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만장굴(萬丈窟)이 따로 없는 듯 걷고 또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갑갑하기 이를 데 없는 암굴을 기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빌어먹을! 다 왔군. 이그! 늘그막에 이게 무슨 팔잔지.”
횃불에 작은 물구덩이가 비쳤다. 네다섯 명이 들어가서 목욕을 하면 딱 알맞을 크기다. 물빛은 맑다. 하나 얼마나 깊은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밧줄을 풀어. 물속에서는 누구도 도와줄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하고. 물웅덩이 밑에 암굴이 뚫려 있다. 잠수를 해서 빠져나가야 하는데, 일다경(一茶頃) 정도는 족히 소요돼. 자신 없으면 지금 말해.”
소립파는 다시 무뚝뚝한 사내가 되었다.
“그 정도도 참지 못할 줄 알았어? 생각처럼 무공이 약한 사람들은 아니야. 언제 동생 무공도 견식해 봤으면 좋겠는데. 수레에서 보여준 솜씨를 보면 무공도 뛰어날 거야.”
일령에게는 그렇게도 자상하던 소립파가 절혼마녀의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절혼마녀는 남몰래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처음이다. 사내에게 무시당한 것은. 동냥질을 할 때도, 술을 따를 때도 사내들이 침을 질질 흘렸는데.
‘오로지 일령에게만 관심있다, 이거네. 곁눈질을 안 한다는 건 큰 장점이야. 내 생각이 맞았어. 관심을 내게로 돌리기만 하면 되겠군. 그러나저러나 쉽진 않겠는데…….’
첨벙!
금연화는 노인의 뒤를 따라 물웅덩이로 뛰어들었다. 순간 뼛골까지 저려 울리는 한기가 급습했다.
“헉!”
금연화는 자신도 모르게 헛바람을 토해냈다.
“으……! 지, 지독한 한수(寒水)…….”
물에 몸을 맡긴 게 잠시뿐인데 이까지 다다닥 부딪쳤다.
“정신 차리고 진기를 운용해.”
소립파가 말을 꺼낼 필요도 없었다. 금연화는 견딜 수 없는 한기에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차가워진다. 암굴 입구에 도착할 즈음에는 온몸이 얼음이 된 것처럼 느껴질 테고. 거기에 물의 압력까지 더해져서 손발을 놀리기가 힘들 거다. 지금까지 겪었던 일 중에서 최악의 상황을 떠올려. 조금은 도움이 될 거야.”
첨벙! 첨벙……!
자하령과 절혼마녀는 소립파의 말을 들으면서 웅덩이 속으로 뛰어들었다.
참으로 견뎌내기 힘든 한기다.
손발이 순식간에 마비되어 얼음 속에 갇힌 기분이다.
유영을 해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갔다.
소립파의 말이 맞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한기는 더욱 극성을 부렸고, 물의 압력은 황소 예닐곱 마리가 깔고 앉아 짓누르는 것 같다.
퍼억!
소립파보다 한 발 앞서서 물속으로 뛰어든 일령은 등에 일장을 가격당했다.
‘읍!’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을 여유도 없다.
등을 가격한 부드러운 힘은 그녀의 몸을 물속 깊숙이 밀어 넣었다.
천근추(千斤墜)를 매달아놓았나? 그녀보다 먼저 뛰어들었던 절혼마녀, 금연화를 순식간에 앞지른다. 그런 점을 느낄 겨를도 없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살이 딱딱한 암기처럼 느껴진다. 수십, 수백 개의 암기가 얼굴을, 전신을 마구 찢어내며 지나가는 것 같다.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훨씬 늦게 뛰어든 일령이 자신들보다 앞서 나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처음에는 일령의 무공이 이토록 놀라웠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나 물속으로 곤두박질치는 모습은 유영과는 거리가 멀었다. 누군가에게 강제로 떠밀려 추락하는 모양새다.
그녀들은 뒤를 쳐다봤다.
소립파가 한 마리 은어처럼 부드럽게, 쏜살같이 물살을 헤쳐 온다.
‘왜?’
절혼마녀는 몸을 뒤틀려고 했다. 지독히도 추운 물속에서 싸워본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슈욱!
어느새 물살을 헤치며 일수가 뻗쳐 온다.
소립파는 빨라도 너무 빨랐다. 아가미가 달려 있다고 해도, 두 팔 대신 지느러미를 달았다고 해도 이처럼 빠르지는 않을 게다.
퍼억!
몸을 돌리려던 절혼마녀는 옆구리를 강타당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뼈가 부러질 듯한 통증 대신 부드러운 힘이 밀려와 몸을 아래로 떨군다.
‘공격할 의사가 아니었잖아?’
절혼마녀는 진기를 보태 떨어지는 속도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금연화는 떨어지는 절혼마녀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안도의 표정을 봤다. 또 본 게 있다. 물고기가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듯한 동혈 입구에서 노인이 떨어지는 일령을 낚아채 굴속으로 밀어 넣는 모습을.
슈욱!
등 쪽으로 물의 압력이 한층 가중된다.
‘도대체 이 사람은…….’
퍼억!
금연화는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강맹한 힘에 떠밀려 추락했다. 그리고 노인의 손에 낚여 동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숨이 막힌다. 일다경 정도는 지식(止息)할 만한 무공을 갖췄는데, 숨이 막혀 전신이 뒤틀린다.
‘으읍……! 도저히 못 견디겠어.’
금연화는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가는 혈귀대주를 떠올렸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고 전신이 갈기갈기 찢겨 죽는 모습. 원한이 사무쳐 눈도 감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는 모습.
‘견뎌내야 해! 원한을…… 가가의 복수를 해야 돼!’
이를 악물었다. 흐뜨러지려는 진기를 억지로 붙잡았다.
슈욱!
뒤에서 무엇인가가 빠른 속도로 달려든다.
느낌은 있다. 하나 반응을 하지는 못한다. 몸 하나 추스르기도 벅찬 판에 다른 곳으로 신경을 돌릴 여유가 없다.
힘껏 발버둥 치는 금연화의 눈앞에 무엇인가가 불쑥 나타났다.
‘응? 이, 이건!’
금연화는 황급히 돼지 오줌보를 받으며 옆을 돌아봤다.
소립파…… 그가 돼지 오줌보를 건네고 있다. 옆을 보니 절혼마녀와 일령 모두 오줌보 하나씩을 들고 있다. 일령은 숨이 가빠졌는지 오줌보를 코와 입에 대고 단단히 잡고 있는 손아귀를 살짝 푼다.
뽀그륵……!
공기 방울이 눈꽃처럼 피어났다.
금연화는 급히 오줌보를 받았다. 그리고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 오줌보에 코를 들이댔다.
“헉헉! 으으……!”
노인이 모닥불을 피워놨지만 덜덜 떨리는 육신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갈수록 태산이라더니…… 물속 추위만으로도 이가 떨리는데 빙벽(氷壁)까지 나타났으니 기가 질렸다.
사방이 빙 둘러 빙벽이다. 바닥도 천장도 빙벽이다. 빠져나갈 곳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출구가 있다면 반쯤 혼이 빠지게 만든 물웅덩이뿐이다.
불기를 쪼인지 일다경쯤 지났나? 아니, 반각쯤 된 것 같은데.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여인들은 편안한 신색이 되었다.
“신기하네. 호광성(湖廣省)에 이런 동굴이 있는 것도 기문인데, 얼음덩어리가 존재하다니.”
절혼마녀가 빙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음성이 많이 가라앉았다.
다른 여인들처럼 절혼마녀도 소립파를 수묘인으로 보지 못했다. 수레에서 보여준 눈빛도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드는데, 물속에서 보여준 수공(水功)은 기가 질리게 만든다.
“그냥 절벽이야. 한기가 극심해서 얼음이 덮인 것뿐이지.”
“여기가 도대체 어딘데 오뉴월에 얼음덩어리가…….”
“…….”
또 말이 없다. 그래도 어딘가. 한 번은 대답해 주었으니.
“극음지지(極陰之地)라는 말은 들어보았지만 정말 이런 곳이 있는 줄은 몰랐어.”
금연화가 소립파를 쳐다보며 말했다.
소립파는 고개를 들어 힐끗 쳐다보았을 뿐, 다시 모닥불로 눈길을 돌렸다. 그리고 혼잣말을 하듯 조용히 말했다.
“여기는 사람 살 곳이 못 돼. 몸들 녹였으면 일어서.”
소립파는 허리에 밧줄을 감고 빙벽을 타기 시작했다.
퍽! 퍽! 퍽……!
양손에 든 비수로 빙벽을 찍을 때마다 그의 신형은 쑥쑥 위로 올라갔다.
“추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 같잖아? 내력이 무척 심후할 거야.”
절혼마녀가 중얼거렸다.
금연화도 같은 생각을 했다. 아니, 그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게다.
빙벽은 보기만 해도 춥다. 손을 갖다 대면 아교를 칠해놓은 듯 쩍쩍 달라붙는다.
그런 곳을 소립파는 아무렇지도 않게 올라가고 있다.
절혼마녀는 소립파를 쳐다보고 있는 노인의 어깨를 잡았다.
“몇 가지만 물어봐도 되겠어요?”
노인은 절혼마녀를 힐끔 쳐다본 후 다시 소립파에게 눈을 돌렸다. 그러나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기대를 충족시켰다.
“낄낄! 이제 정신을 차렸나 보네. 계집 입에서 존대가 나오는 걸 보니. 좋아, 기분이다. 말해봐.”
“우리에게 접근한 건가요?”
“접근? 계집들아,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 접근이야 너희가 했지, 우리가 했어?”
“그럼 우리에게 아무 목적도 없는 건가요?”
“좌우지간 계집들이란…… 잘해줘도 말썽이라니까. 집 받고 동행해 주면 되는 거지 뭐가 더 있어.”
“그 말씀…… 믿어도 되나요?”
“밴댕이 소갈딱지 같으니라고. 믿기 싫으면 관둬. 억지로 믿으라고 안 해.”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서로 마주 보았다.
금연화는 절혼마녀의 의도를 눈치채고 다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절혼마녀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는 이번과 같은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른다는 듯 다급히 물었다.
“어르신…… 시마 맞죠?”
“낄낄낄! 계집아, 제발 웃기지 좀 마라. 너흰 배알도 없냐? 시마라면 마두 중에 마두인데 어르신이 뭐야, 어르신이. 낄낄낄!”
노인은 허리까지 굽혀가며 한참을 웃어댔다.
“시마 아닌가요? 저도 무공을 수련했어요. 어르신 눈에는 들지 않겠지만 나름대로는 누구와도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요. 몸에서 냄새가 나요. 시신 썩는 냄새. 시마만이 풍길 수 있는 냄새죠.”
노인은 팔을 들어 코에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냄새?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뭔 냄새가 난다고 지랄이야, 지랄이. 송장 썩는 냄새가 난다고? 그럼 수묘인이 송장 만지지, 생사람 만지냐? 대답 끝! 오냐, 오냐 해줬더니 별 시러베 같은 소릴 다 듣네.”
“아뇨. 전 확인해야겠어요.”
절혼마녀는 말이 끝나자마자 진기가 주입된 옥수를 힘껏 떨쳤다.
혹여 애꿎은 노인이면 어쩔까 하는 생각은 지웠다. 골수까지 배인 냄새는 하루 이틀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시신을 파묻고 지키는 따위로는 절대 냄새가 배지 않는다.
노인은 시마다!
전력을 다한 일장은 정확하게 등 뒤 지양혈(至陽穴)을 가격했다.
퍼엉!
노인의 등에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하나,
“으음……!”
밀려난 사람은 오히려 절혼마녀다. 그녀는 오른손을 축 늘어뜨린 채 두 걸음이나 밀려나고 말았다. 반면에 노인은 처음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어쭈! 때려?”
노인이 뒤돌아섰다.
아! 전혀 다른 사람이다. 힘이 없어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던 노인은 사라졌다. 입가에 피만 흘리고 있으면 영락없이 저승에서 뛰쳐나온 악마다.
인상은 변한 것이 없다. 하나 두 눈에서 발산되는 녹광(綠光)은 노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귀기 서린 눈…… 악마! 저항을 용납지 않는 악마다!
“언니, 괜찮아?”
금연화가 재빨리 절혼마녀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무슨 놈의 등짝이 철판 같아. 손을 들어올리지 못하겠어. 뼈가 부러졌거나 신경이 상했겠지.”
절혼마녀는 노인을 노려보며 왼손으로 삭사를 꺼내 들었다.
차앙! 창!
금연화와 일령도 재빨리 검을 뽑았다.
“낄낄낄!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들. 한동안 숨죽이며 살았더니 이젠 거지 같은 계집년들까지 무시한단 말이지. 흐흐흐!”
노인의 눈가에 떠오른 녹광은 시간이 흐를수록 짙어져 갔다.
“노, 녹혈마공(綠血魔功)!”
절혼마녀가 놀라서 소리쳤다.
“으음! 녹혈마공. 빌어먹을 살인마 새끼. 오늘 내 저놈을 죽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다.”
절혼마녀의 말투가 극에서 극으로 변했다.
온화하고 나긋하던 동방주는 사라지고 악귀처럼 으르렁거리는 절혼마녀만 남았다.
그녀는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그때 한줄기 미풍이 스쳐 간다 싶더니 노인의 등 뒤로 소립파가 내려섰다.
“시마, 그만.”
소립파의 입에서 확실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놔둬. 내 저 계집애들 가랑이를 찢어놓지 않고는 직성이…….”
“시마.”
나직하지만 묵직한 음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