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33
133
이럴 때 하는 말이 있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
가장 기본에 속하는 일을 등한시했다. 강금산을 정확히 파악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옆에 두었고, 버리려고 했다.
강금산을 알아야 한다. 속속들이.
‘감나무 밑에서 입 벌리고 있는 사람처럼 운이 따라준다면 나에게도 기연이 닿겠다는 심정으로 들어섰는데… 강금산을 정확히 파악하면 막연한 바람만은 아닐지도…….’
서군봉은 급히 뒤따라 들어갔다.
2
발걸음이 천근만근 무겁다.
주위에 깔린 어둠은 만공심안도 무용지물로 만든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만공심안을 펼칠 기력조차 남지 않았다.
모든 게 귀찮다. 이대로 풀썩 주저앉아 푹 쉬고 싶다.
흑침무의 공격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신이 물 먹인 솜처럼 무거웠지만 별것 아니라고 간과했다.
지금은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겠다.
생혈침이라고 불리는 우모침은 가랑비에 옷 적시듯 기력을 야금야금 갉아먹었다.
핏줄기 좀 뿜어져 나오는 것? 우습다. 멸신구관에 들어와서 겨우 핏물 몇 가닥 때문에 걸음이 막혀서야 되는가.
정녕 신경 쓰기에는 너무도 미미한 상처다.
아니다. 미치겠다. 이제는 또로록, 톡! 하고 핏방울이 떨어지면 살덩이가 서너 말쯤 떨어져 나가는 듯한 착각이 든다. 머리가 징징 울리고 눈앞이 샛노랗게 변한다.
“하아아아아…….”
언뜻 들으면 긴 숨처럼 여겨지는 소리를 울려냈다.
세상에는 다양한 소리가 존재한다.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는 소리도 있고, 울적하게 만드는 소리도 있다. 어떤 소리는 들을수록 기운이 나고, 어떤 소리는 단 한 번 듣는 것도 역겹다.
소리는 각양각색의 성격을 지닌 채 존재한다.
소리란 무엇인가? 울림이다. 자연의 소리, 사람의 음성…… 어떤 형태의 소리든 부딪침이 일어나 진동을 만들고, 허공을 타고 날아든 진동이 청각을 울릴 때 소리란 것을 듣게 된다.
한데 인간의 청각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
인간은 일정한 음역(音域)에서 형성된 진동음만 듣는다. 너무 큰 소리나 너무 작은 소리는 듣지 못한다. 코끼리가 십 리 밖에 있는 동족을 부를 때 내는 소리는 인간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음역보다 낮기 때문이다.
소립파 역시 인간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단지 아주 조금 더 넓은 음역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들을 수 있으니 말도 한다.
목청이 크거나 작다는 문제가 아니다. 청각을 자극할 수 있는 진동음을 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다.
진동음이 높던 낮던 청각을 자극하지 않을 때, 소리는 존재하나 인간은 듣지 못한다.
소립파는 그런 영역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소립파의 말에는 이름이 있다.
어떤 소리는 마령음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또 어떤 소리는 적멸주라고 불린다.
이번에 발출한 소리는 마령음으로, 의미 없는 소리 속에 무수한 진동이 내포되어 있다.
터억! 파앗! 쏴아아아……!
진동음은 석벽을 골고루 때렸다. 가까운 곳부터 먼 곳까지, 손이 닿는 곳과 닿지 않는 곳에, 소리가 퍼져 나갈 수 있는 모든 공간에 부딪치면 반사음을 만들어냈다.
‘막혔다!’
막다른 길을 접한 절망감은 몸에 남아 있던 마지막 기력까지 빼앗아갔다.
도저히 버티고 서 있을 수가 없어서 석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남은 거리는 겨우 십여 장에 불과하다. 지금 기력으로는 천 리처럼 여겨지는 거리지만 거의 다 왔다는 기쁨을 누려도 좋으리라.
하나 막다른 곳이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
다행히도 석벽은 짓눌러 오지 않는다.
안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무신들이 뒤따라 들어서지 않았다면, 그들이 지고한 무공으로 버텨주지 않았다면 벌써 짓뭉개져 피떡이 되어 있을 것이다.
“하아아아……!”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 번 마령음을 토해내 봤다.
희망 같은 것은 품지도 않았는데 절망이 더욱 깊이 회오리쳤다.
역시 막혔다. 이번에는 조금 더 신중을 기해서 석벽의 두께까지 가늠해 봤는데 기대를 가질 만한 구석이 전혀 없다. 최소한 동혈이 뚫려져 있는데 눈가림식으로 입구만 막아놓은 곳은 없다.
기관이 설치되어 있음직한 곳도 없다.
반사되어 온 진동음에서는 희망을 찾지 못했다.
‘죽어라. 그만 버티고 죽어라. 자신 없으면 돌아가도 좋다. 난관을 뚫고 들어왔으니 돌아가기는 쉬울 것. 돌아가고 싶다면 가라. 하지만 앞으로 무공을 말하지는 마라. 자격 없다. 이제 겨우 일관(一關). 세상을 조롱한다는 무공으로 일관에서 빌빌거리는가.’
소립파는 석벽이 하는 말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석벽이 유계의 주공에게 하는 말이다.
주공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어떤 식으로 뚫고 나갈까?
뚫고 나가? 그렇다. 뚫고 나가야 한다. 방법은 오직 하나, 무식하게 파괴하며 나가야 한다.
멸신구관은 세상에서 가장 강한 힘, 가장 강한 파괴력을 보고 싶어 한다.
불행히도 소립파에게는 그런 힘이 없다. 다행스럽게도 뒤따라오는 무신들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다.
목숨을 빼앗으려고 살수를 전개한 사람들, 앞으로도 소용 가치가 떨어졌다 싶으면 언제든지 살수를 전개할 사람들, 지금은 그들이 필요하고 필요하니 부른다.
소립파에게 구원(舊怨) 같은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지금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를 몸이지 않은가. 멸신구관에서 기관장치에 죽든, 무신들에게 맞아 죽든, 저주의 자오법신에 무릎을 꿇든 죽는 것은 매일반이며 남은 시간도 그다지 많지 않다.
정말 시간이 별로 없다.
“목소리 정도는…… 들을 수 있을 거리…… 언제까지 안내만 받을 작정이오.”
음성이 쭉 이어지지 않고 중간 중간 마디가 끊겼다.
이를 악물고 참는 것이 이 정도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곳이었다면 벌써 쓰러지고도 남았다.
“헐헐! 일관이 끝난 겐가?”
만사무불통지가 넉살 좋게 웃으며 다가왔다.
그와 소립파 사이에 아무런 은원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허허! 우리가 세 명이라고 너무 부려먹는 것 아닌가. 쯧! 강남 사람들은 너무 게을러 터져서 탈이란 말이야.”
자의성검 석존무도 별다른 일이 없었던 듯 태연했다.
생각이 다른 세 무리는 이렇게 다시 만났다.
“삼원로께서 석벽을 받치고…… 휴우! 후웁! 그럼 저곳은 만사무불통지께서…… 후웁!”
소립파는 말하는 중간 중간 호흡곤란을 느끼고 긴 숨을 들이켰다. 몸 상태가 최악인 것도 숨기지 않았다.
무신들에게는 속일 필요가 없다. 속일 재간이 없다. 그들은 일견하는 것만으로도 상대의 상태를 정확히 꿰뚫어낸다. 그러니 숨기려고 노력하는 자체가 부질없다.
“허허허! 붕벽(崩壁). 기어이 힘을 쓰게 하는군. 일관은 편히 지나칠 줄 알았는데. 허허허!”
만사무불통지는 소립파의 말뜻을 대번에 알아챘다.
삼원로는 손을 뺄 여력이 없다. 소립파는 손가락 하나 깜짝할 수 없는 상태다.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은 만사무불통지뿐이다.
과연 그 혼자서 붕벽을 해낼 수 있을까?
무신을 너무 얕본 소린가? 그럴 수도 있다. 사실 무신과 유계의 주공은 우열을 가리지 못한다. 세간의 평가도 엇비슷한 정도라는 게 지배적이다.
조금 더 세상을 볼 줄 아는 무인은 명쾌하게 선을 긋기도 한다.
중원에는 무신이 일곱 명이나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진정한 무신은 두 명뿐이다.
북검문주와 남도문주.
그들이 진정한 무신이다. 그들만이 다른 무신들을 꺾을 수 있다.
유계의 주공은 북검문주나 남도문주와 겨뤄도 쉽게 패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추측일 뿐이다.
북검문 무신이든 남도문 무신이든 유계의 주공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다. 서로 공존하는 방식을 택한다면, 마인의 씨를 말려 버리겠다는 공언을 어기는 꼴이 된다.
무신들에게는 유계를 멸절시킬 의무가 있다.
하나 유계와 부딪친 적은 없다. 말만 무성했지 유계의 주공이란 자가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계란 마인들이 만들어낸 허구.
사방천마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렇게들 생각했다. 사방천마의 존재를 모르는 무인들은 아직도 그렇게 생각한다.
냉정하게 평가할 때, 북검문주나 남도문주라면 몰라도 삼원로나 만사무불통지가 혼자서 붕벽에 도전하는 것은 무리다.
“두께도 모르고, 강도도 모르고……. 그런데도 무조건 무너뜨려라.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에 손을 썼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이 웃을 텐데. 허허! 곤란하군, 곤란해.”
만사무불통지가 손바닥으로 석벽을 쓸어보며 말했다.
붕벽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제이관으로 들어서는 길을 얌전히 보여줄까? 아니면 좌우 석벽이 무너지고, 천장도 무너져 내리고…… 최악의 경우, 석벽에 화약 같은 것이라도 설치되어 있다면 무신이 아니라 무신 할아버지가 와도 살아남기 힘들다.
스스스스슷!
공기가 파랑을 일으키며 휘돌았다.
너무 극미해서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움직임이라 느낌으로만 감지할 수 있다.
소립파와 삼원로는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을 잡아냈다.
우우우우웅……!
만사무불통지의 손바닥에 거대한 힘이 집중되었다.
공기를 무한대로 빨아들인 후에 단단한 덩어리로 응축시키는 듯한 환상마저 보였다.
“현현장(玄玄掌)…….”
석존무가 감탄한 듯 중얼거렸다.
만사무불통지의 무공을 알아본 사람은 또 있다. 소립파도 일수문(一秀門)의 현현장을 알아봤다. 세상의 모든 무공이 그의 머릿속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찌 알아보지 못하랴.
하나 이번은 다른 시각에서 현현장을 쳐다봤다.
일수문은 일인문파(一人門派)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극강의 존재였다.
문도는 없이 오직 문주만 존재한다. 문주가 머무는 곳이 문파의 근거지다.
일수문에는 일검(一劍), 일장(一掌), 일지(一指)가 존재했다.
그중 일장이 현현장이다.
현현장은 권각술의 모습을 띠지 않고 기사(氣射) 형태로 운용된다.
전신의 진기를 주위의 자연기(自然氣)에 동조시키는 것이 첫 번째 단계다. 농도가 다른 강물과 바닷물이 하나로 합쳐지듯이 성격이 다른 본신진기와 자연기를 뒤섞는 과정이다.
동조에 성공하면 본신진기와 자연기는 물이 물을 끌어당기듯 육신을 빠져나가기도 하고 들어오기도 한다.
현현장은 본신진기는 육신에 가둬두고, 자연기를 흠씬 흡수하여 단단하게 뭉쳐 놓는다.
이 순간, 손은 돌이 되고 육신은 금강불괴(金剛不壞)가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병기도 응축된 자연기로 둘러싸인 육신을 범하지는 못한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는 응축된 자연기를 쏘아내는 과정이다.
범인들에게는 존재 자체도 느껴지지 않는 기운을 모으고 뭉치고 쏘아내는 무공이니 가히 천하제일장공(天下第一掌功)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현재 일수문의 무공은 실전되었다.
일인문파의 최대 약점은 문주가 사망할 경우, 문파 또한 사라진다는 것이다. 천하를 떨쳐 울리던 무공도 완벽하게 소멸되어 버린다.
일수문의 문주가 후인을 남겨두지 않은 채 사라진 것으로 일수문은 멸문했다.
소립파도 일수문과 일수문의 무공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일검(一劍) 천지검(天地劍), 일장(一掌) 현현장(玄玄掌), 일지(一指) 통천지(通天指).
한 사람에게 한 문파의 힘을 얹어준 무공들, 들어보기는 했지만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파아아아앙!
양손에 달라붙어 있던 기운들이 일시에 쏘아져 나갔다.
공기가 갈라진다. 찢겨진다. 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짓이기며 뚫고 나가는 파괴다.
현현장에 격중당한 석벽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당연했다. 소립파처럼 선천적으로 기감이 발달한 사람이거나 무신들처럼 지고한 경지까지 내공을 쌓은 사람이 아니라면 만사무불통지가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붕벽을 한다면서 왜 가만히 있나. 자신이 없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일권이라도 내뻗는 시늉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
감지한 자에게는 정말 무지한 생각이지만, 감지하지 못한 자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다.
주위의 기운이 요동치는 것도, 기운이 움직이며 울려낸 소리도, 기운의 강함도…… 만사무불통지가 행한 모든 것이 감지한 사람들에게만 보인다.
“삼 척은 족히 되는군.”
혈일뢰 울건평이 자연기에 격중당한 석벽을 노려보며 말했다.
석벽은 석벽의 기능을 잃었다. 무너지지는 않았지만 단단함을 소실했다. 누구든 가볍게 주먹만 뻗어내면 삭은 모래처럼 우수수 무너져 내리리라.
놀라운 장공이다. 중원에서 가장 강한 장공 중에 하나임이 틀림없다.
소립파는 아주 잠깐 눈빛을 반짝였다.
현현장에는 치명적인 허점이 두 군데나 있다.
본신진기와 자연기가 동조되는 첫 번째 단계에서 몸 중앙,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을 잇는 선에 허점이 노출된다. 찰나에 불과하지만 본신진기가 양손에서 풀려 나가는 과정 동안 육신은 움직일 수 없고, 몸 중앙 부분은 껍데기만 존재하는 공동(空洞) 상태가 된다.
그 틈을 노리고 공격하는 사람이 있다면…… 치명타다.
두 번째 과정에서도 허점이 노출된다.
인간은 본신진기와 자연기를 동등하게 여기고 싶어 한다. 또 내공에 자신있는 사람은 본신진기를 우위에 두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동조 상태가 되면 인간이 얼마나 미약한 존재인지 절실히 깨닫게 되리라.
자연기에 동조된 본신진기는 엄청난 힘에 이끌려 순식간에 빨려 나간다.
기(氣)를 잃은, 기운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