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35
135
그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됐으면 싶은 심정에서 빨리 온다고 왔지만 늦어버렸다.
사방천마 중 북방천마를 일장에 때려 죽인 무신들과 함께 사지로 들어갔으니 다시 본다는 기약도 없다.
그래도 남은 사람들이 있기에 간다. 그녀들과 합류하여 마야를 기다리기 위해서. 마야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농으로라도 거기까지는 생각하기 싫다.
살수들은 살수들의 냄새를 유독 잘 맡는다.
종청호가 걸음을 멈췄다. 그전에 어둠 속에서 따르던 살수들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저벅! 저벅! 저벅!
천멸도주는 오연히 서서 당당하게 걸어오는 자들을 쳐다봤다.
때에 찌들어 검게 변한 백포를 전신에 둘렀다. 눈동자가 살쾡이처럼 빛난다. 육신은 힘껏 재워진 화살 같아서 당장이라도 폭발을 일으킬 것 같다.
앞서 오던 자가 금연화를 쳐다봤다.
번쩍!
눈에서 불길이 솟구친다.
수검, 마도, 혈유…… 백포인은 한 명, 한 명 뚫어지게 직시하며 걸었다.
“제길! 눈깔 한 번 더럽게 뜨네. 누군 성질 없나.”
혈유가 발작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수검이 지그시 잡아 눌렀다.
“조용히 해라. 아픈 사람이야.”
‘아픈 사람…….’
금연화는 수검이 한 말을 되뇌었다.
천멸도 살수들은 나병에 걸렸다. 환자이며 아픈 사람이 맞다. 하나 그들 앞에서 아픈 사람 운운했다가는 칼부림당하기 십상이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이니까.
수검은 다른 의미로 말했다.
마음이 아픈 사람.
백인수, 백 명을 데리고 갔다가 아흔두 명이 죽고 단 여덟 명만 데리고 돌아왔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나.
어느 조직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천멸도의 경우에는 수하 한 명, 한 명이 모두 친형제나 다름없다. 서로의 아픔과 애환을 잘 알기에 혈족 이상의 끈끈함을 지닌다.
주림…… 그의 심장은 아흔두 조각으로 찢어졌다.
그중 몇 조각은 금연화가 찢어놓았다. 마야의 여인들이 검으로 새겨놓았다. 또 몇 조각은 얼굴을 보며 웃고 떠들던 천멸도 살수들이 만들었다.
통곡을 해도 시원치 않을 아픔이다.
주림과 여덟 명뿐인 백인수는 천멸도주 앞에 이르자 한쪽 무릎을 꿇고 예를 올렸다.
“남도문으로부터 탈롱(脫籠)을 얻어냈기에 돌아왔습니다.”
주림의 음성이 은은하게 떨렸다.
“탈…… 롱…….”
“네. 확실히 탈롱입니다.”
주림의 품속에는 남도문으로부터 받은 밀지가 들어 있었다.
마야를 호위하라, 남만까지 호위한 후에는 천멸도로 돌아가도 좋다는 남도문의 명이 담긴 밀지다.
주림은 밀지를 꺼내놓지 않았다.
그것은 남도문으로부터 받은 것, 이제 천멸도로 돌아왔지만 남도문에서 있었던 일은 함구하는 것이 살수의 기본이다. 밀지도 그런 부분들 속에 하나다.
“수고했어.”
천멸도주의 음성이 탁하게 갈라져 나왔다. 눈빛은 냉정했지만 입술을 파르르 떨렸다.
“죄송합니다. 겨우 이 정도만 건사했습니다.”
“한 명이라도……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명을 내려주십시오!”
주림은 돌아오자마자 천멸도 살수로 돌아갔다.
천멸도주는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명을 내렸다.
“십팔밀막이 앞으로 나가. 팔십일전혼은 좌우로 갈라지고, 백인수가 뒤를 맡아.”
“복명(復命)!”
주림이 힘있게 명을 받들었다.
스스슷! 스스스슷! 파파파파……!
잠시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살랑거렸다. 흙먼지가 풀썩거렸다.
우습게도 천멸도 살수들의 위치 이동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오십여 명이 이르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움직였지만 어느 한 사람도 기척을 흘리지 않았다.
“허! 정말 곤란한 사람들이야.”
흑조편복이 혀를 끌끌 찼다.
초라하지만 시원해 보이는 초옥에 도착한 것은 태양이 기승을 부리는 정오 무렵이었다.
다담선자는 항상 그랬듯이 단아한 모습으로 수를 놓고 있었다.
절혼마녀와 일령은 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무공 수련 중이었는지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언니!”
“동생!”
절혼마녀와 일령은 한달음에 달려와 금연화와 천멸도주의 손을 잡았다.
다담선자도 반겼다. 자수를 놓고 일어서서 방긋 웃었다.
“저건 정말 더럽게 얄밉단 말이야. 개똥 같은 곳을 뚫고 왔는데 맨발로 뛰쳐나오지는 못할망정 웃기만 해?”
천멸도주가 다담선자를 흘겨보며 말했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벼락같은 호통이 터져 나왔다.
“이것들은 뭐야! 뭐가 이렇게 한 무더기나 들어왔어! 어휴! 냄새. 이거 문둥이들 아냐! 이것들아, 썩 꺼지지 못해!”
문둥이?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종청호의 신형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하나 그는 곧 실 끊어진 연처럼 힘을 잃고 뚝 떨어져 내렸다.
퍼억! 퍽!
육신을 강타하는 둔탁한 소리는 나중에야 들렸다.
“하아!”
천멸도주의 입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녀의 투지가 불붙기 시작한 거다.
종청호는 쾌속하게 쏘아져 나갔고, 원숭이처럼 생긴 괴인과 일장을 교환했다.
종청호의 일권은 정확히 원숭이의 복부에 꽂혔다. 원숭이의 일장도 종청호를 가격했다. 종청호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도 가슴 부위인 것 같다.
양쪽이 같은 순간에 가격했건만 승패는 확연히 갈라졌다.
믿기 힘들지만 힘 하나는 항우장사인 종청호가 밀린 것이다. 내력만으로 놓고 볼 때는 천멸도 최고 고수인 종청호가 원숭이에게 가격당해 혼절한 것이다.
믿을 수 있는가!
“야! 이 문둥이들아! 썩 나가지 못해!”
원숭이는 기고만장하여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스스스슷!
천멸도 살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때,
“인사드려. 무명은 흑살마녀. 마야에게는…… 음! 그게 설명하기 곤란하지만 어머니 같은 관계인가 봐.”
천멸도주와 살수들의 움직임이 뚝 얼어붙었다.
2
흑살마녀의 초옥은 암암리에 금지(禁地)로 인식되었다.
무신 석존무에게 포권지례를 받았다는 사실로 해서 그녀의 위상은 수직 상승했다.
무공도 무신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무신과 견줄 수 있는 정도까지는 될 것이라는 게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무신과 손속을 맞댈 사람이 누가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흑살마녀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점보다 실질적인 문제도 있었다. 바로 흑살마녀의 불같은 성질이 매번 문제를 일으켰다.
무신들은 체면 때문에라도 무공을 함부로 선보이지 않는다.
흑살마녀는 달랐다. 그녀는 초옥 가까이에 접근하는 자들은 이유 불문하고 두들겨 팼다. 누구냐, 왜 왔느냐는 간단한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불문곡직 손부터 뻗어 나왔다.
생으로 맞을 수는 없으니 반격은 했는데……
내공이 통하지 않고, 도검이 통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에게 공포를 안겨준 무공도 흑살마녀에게는 어린아이 장난에 불과했다. 그러니 무슨 수로 상대할 수 있을까.
실수로, 호기심에, 또는 호승심에 초옥으로 근접했던 무인들은 팔다리가 부러져서 내동댕이쳐졌다.
호채마가 초옥으로 들어갔다는 말도 빠르게 번졌다.
흑살마녀만 해도 골치 아픈 마녀인데, 이제는 호채마까지 가세했다니 정말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사람들은 원숭이처럼 생긴 노파가 어슬렁거리는 구역에는 일절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그곳에 한 사람이 들어섰다.
밝은 대낮인 데도 붉은 초롱을 들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가 흑살마녀의 영역에 들어섰다.
흑살마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없는 가운데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가 살을 익힌다.
그는 대단히 조심스러웠다. 물이 가득 든 항아리를 안고 가는 사람처럼 초롱에 온 정신을 쏟아 부었다.
쉬익! 척!
검 한 자루가 나무에서 불쑥 튀어나와 목을 겨눴다.
사람은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검을 든 팔과 검만 보였는데,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 움직임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그가 걷다가 검에 닿은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흐, 흑살마녀에게…… 마, 만사무불통지님의 저, 전갈…….”
그는 무공을 모르는 자였다. 무형 중에 뻗쳐 나온 살기를 접한 것만으로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스읏!
검이 있었나? 사람이 있었나?
그를 위협하던 검은 사라지고 없었다.
흑살마녀는 그늘진 곳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다.
초롱을 든 사내는 흑살마녀 앞까지 왔지만 감히 깨울 용기가 나지 않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마냥 기다렸다.
“말해.”
흑살마녀가 졸면서 말했다.
“네, 네. 마, 만사무불통지님의 저, 전갈…… 마야를 보호해 주시겠다고…….”
사내는 말끝을 흐렸다.
“흥! 보호?”
흑살마녀는 코웃음 쳤다.
“대가는 조금만 받으시겠다고…… 멸신구관에서 나올 때까지 천면겁(千眠劫)을 해주십사…….”
“흥! 그럴 줄 알았어. 그놈의 새끼는 대가리를 한시도 놀리지 않는단 말이야.”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천면겁에 해당…….”
사내는 말을 중간에서 끊었다.
끝까지 말할 수 없었다. 사지가 부들부들 떨려서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노파의 몰골은 별 볼일 없었다. 난쟁이처럼 작은 키에 원숭이 몰골을 대하는 순간 너무 우습고 가소로워서 그녀가 흑살마녀라는 점도 잊어버릴 뻔했다.
한데 지금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수천 개의 화살이 몸통을 관통하는 느낌이다. 작두로 여물 베듯이 전신을 썰어대는 느낌이 든다.
“너도 대가리 굴리는 놈이냐?”
“소, 소인은…….”
“대가리 굴리는 놈, 맞지?”
“조, 조금 머리 좋다는 말은 듣고 살았…….”
“그건 뭐야? 뭐 하는 초롱이야?”
“소, 소인에게 손을 쓰시면 자, 자폭용으로…… 어르신께서도 이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안에 든 게 뭐야? 철뢰야? 너희 놈들은 철뢰를 잘 쓰던데, 그거야? 빌어먹을 놈들! 숲을 홀라당 태워먹어!”
흑살마녀에게서 살기가 무럭무럭 피어올랐다.
산불은 나흘 동안이나 지속되어 밀림을 검은 잿더미로 만들었다. 때마침 폭우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성난 불길이 남만 전체를 불사르고 있을 게다.
흑살마녀에게는 고향을 태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사내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입술도 새파랗게 물들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은 했다. 또 해야만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
“처, 철뢰 같은 것으로 어떻게 어르신을…… 이, 이놈은 철뢰의 수십 배 위력. 바, 방원 백여 장은 초, 초토화시킬 수 있을 것으로 화, 확신합니다.”
“흥!”
흑살마녀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코웃음부터 쳤다.
“그럼 노신의 몸뚱이가 얼마나 단단한지 확인해 볼 수 있겠네? 좌우지간 대가리 굴리는 놈들이란!”
“소, 소인만 거, 건드리지 않으시면…….”
사내는 안쓰러울 만큼 부들부들 떨었다.
흑살마녀는 사내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런 피라미를 죽여서 뭐 한단 말인가.
“이놈아, 호채마가 이곳에 들어온 건 며칠 전이야. 만사무불통지는 안 보고도 천 리 밖의 일을 알아내는 재주가 있다더냐! 뭐?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해당돼?”
“요, 용서를…… 소, 소인이 고, 공명심에 눈이 어두워…….”
“꺼져.”
사내는 황급히 몸을 돌려 사라졌다.
‘후후후!’
사내는 속으로 웃었다.
무신과 버금가는 무공이 있으면 뭐 하는가. 머리가 돌이면 갓난아기에게도 죽을 수 있는 것을.
사내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이제 호채마는 초옥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흑살마녀가 내쫓는데 떠나지 않을 재주가 없다.
다담선자를 비롯한 몇몇 여자도…… 내쳐진다.
천면겁이 무엇인가. 자신 스스로 혈도를 짚어 식물인간이 되는 것이다. 시전은 스스로 할 수 있지만 타인이 풀어주기 전에는 식물인간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천면겁은 원래부터 포로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서 탄생된 수법이니, 천면겁을 자신에게 스스로 펼치라는 것은 포로가 되라는 말과 다름없다.
식물인간이라고 해서 두려워할 것은 없다. 오랫동안 시전하면 혈관이 막히지만 며칠 상관으로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
흑살마녀는 천면겁을 시행할 것이다.
마야의 목숨이 만사무불통지의 손아귀에 잡혀 있는 한, 그녀는 선택이라는 것을 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까지 천면겁으로 몰아넣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떠나보내는 방법밖에 없다.
흑살마녀만 무너지면 다른 사람은 문제될 게 없다.
어디 멀리 갈 사람들도 아니다. 가만히 지켜보다가 만사무불통지가 나온 다음에 처리해도 충분하다.
흑살마녀는 마야를 인질로 잡음으로써 요리할 수 있고, 마야는 흑살마녀를 잡아둠으로써 부릴 수 있다.
흑살마녀와 마야는 서로에게 인질인 셈이다.
마녀의 영역을 벗어났다.
마녀는 알고 있을까? 그녀가 천면겁을 펼치지 않으면 마야도 부릴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함정 속으로 들어가 줘야 두 괴물을 모두 부릴 수 있다는걸.
그녀가 분노를 일으켜 일장에 쳐냈다면 개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제 벗어났다. 임무를 훌륭히 완수했다.
‘이런 일은 지겨워. 하지만 짜릿하기도 하단 말이야.’
사내는 손에 든 초롱을 보며 피식 웃었다.
초롱 속에는 먹물로 시커멓게 물들인 떡이 들어 있었다. 그 위에 등잔을 얹고 불을 피워놨다. 불길이 떨어지면 검은 떡에 달라붙는다는 걸 보여주는 게 목적이었다.
흑살마녀는 간단한 속임수도 간파하지 못했다.
원숭이 같은 늙은이, 멍청한 늙은이.
초롱은 끝까지 들고 가야 한다. 자신의 처소에 들어가 배꼽 잡고 웃을 때까지는 화약을 다룰 때처럼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 뒤따르는 사람은 항상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난데없이 들려온 소리가 사내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을 하게 만들다니! 남도문 야광에 지자들이 많다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