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37
137
셋째, 삼원로가 중첩수를 풀고 떠나갔다.
온몸을 짓누르는 고통은 석벽 때문이다. 석벽 사이에 끼어서 마른 오징어가 되기 일보직전이다.
넷째…… 믿기 힘들지만 육신만으로 석벽의 압력을 견뎌내고 있다.
석벽이 바짝 밀착되어 있다. 하나 녹광성초 덕분에 살이 찢어지는 사태는 모면했다. 뼈가 부러졌다. 하지만 음양의 두 기운 덕분에 가닥가닥 부러지는 불행은 면했다.
자오법신으로 위치를 바꾼 음양의 두 기운이 철벽처럼 뼈를 감싸준 덕분이다.
그렇다. 육신의 힘만으로 석벽에 대항할 수 있었던 것은 음양의 기운이 강성한 탓이다. 소립파 자신이 제어할 수는 없지만 생존에 직결해서는 역시 도움을 주고 있다.
석벽의 압력은 고통만 준 것이 아니다. 고통과 더불어서 치료도 병행해 주었다.
갈고리처럼 끝이 벌어져 살 속에 박힌 우모침, 끝없이 생혈을 뽑아내던 생혈침이 비틀리고 뭉텅거려져 제 기능을 잃어버렸다. 외부에서 밀어오는 강력한 힘과 내부에 일어난 반탄력이 우모침을 망가뜨린 것이다.
몸에 박힌 쇠가 구부러지고 꺾였다.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수백 개가 더욱 깊이 살 속에 틀어박혔다.
엄청난 고통이 일었을 게다. 하늘이 노랗게 물들었으리라.
자오법신이 아니었다면 이런 방법은 결단코 생각지 못했다. 고통을 즐기는 자가 아니라면 생각할 수도 없었다.
덕분에 그의 피부에는 정말로 쇠가 박혔다. 쇠를 얇게 펴서 피부 속에 이식시켜 놓은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이것이 어떤 효과가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부작용이 있을지도 예측하지 못한다. 지금은 단지 생혈이 빠져나가지 않는 것만 고마울 뿐이다.
또 다른 치료도 있었다.
음양의 두 기운과 석벽의 압력이 충돌하면서 묵직한 진동을 일으켰고, 진동은 폐 속에 틀어박힌 흑침무를 밀어냈다.
코로, 입으로…….
아교처럼 달라붙어 영원히 떨어지지 않는다던 흑침무가 말끔히 떨어져 나갔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충돌이 일으킨 진동 때문만은 아니다.
왕벌은 적을 공격하고자 침을 박아댔지만, 굵은 침은 피부를 뚫어 안과 밖을 연결하는 통로를 만들어주었다.
겉 피부에 녹아 있던 녹광성초가 속살로 스며들었다.
거기에다가 소립파는 왕벌의 꿀을 전신에 뒤집어썼다. 통로를 뚫고 나오는 과정이었지만, 꿀 역시 녹광성초처럼 속살로 스며들었다.
녹광성초와 꿀은 속살에만 머문 것이 아니다. 용해되어 물의 형태로 변한 약수(藥水)는 오장육부에까지 깊숙이 침투했다.
그의 피부는 물개 가죽처럼 반들거리며, 철갑처럼 단단하다.
피부만 그런 줄 알았다. 아니다. 오장육부 또한 질기면서도 탄력이 있다.
폐에 달라붙은 흑침무는 떼어낼 수 없지만, 소립파의 경우에는 처음부터 달라붙지 못하고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을 뿐이라서 쉽게 밀어낼 수 있었다.
모든 상황을 알고 나니 급할 것이 없어졌다.
자신의 몸은 작은 바윗덩이다.
석벽이 밀어버릴 수 없는 작고 단단한 바위다.
육신의 근골로 무신 세 명이 펼치는 중첩수와 비교하겠다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 게다.
그런 일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
흑살마녀가 녹광성초의 힘을 빌어서 무림을 뒤집어놨다더니만……
‘먼저 체력을 되찾고…….’
쉬면 된다. 쉬면서 고통이 크게 일어나는 부분만 제어하면 된다. 그러자면 미지의 내공심법부터 완성시켜야 한다.
‘뇌에서 일어나 육신을 지배하니 뇌천력(腦天力).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힘이 아니라 육신만을 제어할 뿐이니 암력(暗力). 진기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으로 이루어지니 염력(念力)…… 고통을 망각시키니…… 아냐. 육신이 천참만륙(千斬萬戮) 짓이겨져도 밝은 신지를 유지할 수 있으니 명뇌인(明腦引). 명뇌인이 좋겠어.’
무명심법이 드디어 이름이 붙여졌다.
철포삼(鐵布衫), 금종조는 어린아이 수준으로 여길 만한 철벽신체가 겉을 보호한다.
안심할 수는 없다.
만사무불통지가 선보인 현현장 같은 절기는 겉은 내버려 둔 채 속을 으스러뜨린다.
오장육부에도 녹광성초가 깃들어져 있으니 안심해도 좋으리라. 단지 속은 겉과 달라서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약간 불안할 뿐.
고통은 명뇌인으로 잠재운다.
이제 그의 입에서 비명을 토하게 만들 무공은 이 세상에 존재치 않으리라. 그의 몸을 가격할 무공은 숱하게 많으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만들 사람은 없으리라.
공격도 생각했다.
싸움을 하는 데 꼭 무공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도 싸움을 할 수 있다. 어쩌면 그게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환희마소가 있다. 적멸주가 있으며, 만공심안이 있다. 소리만으로 진기를 제어할 수 있는 마령음도 있다.
각기 명칭은 다르지만 그에게는 매한가지다. 사람이 듣지 못하는 영역에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소리로 진동을 일으키고 물체에 자극을 가할 수 있다는 것.
무수히 많은 악기(樂器)를 참조했다. 천둥소리, 파도 소리, 빗소리, 새소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를 가미했다.
공격에 가장 유용한 소리는 적멸주다.
소리로 파장을 일으켜 오욕칠정을 자극한다. 최면을 걸듯이 마음속에 저주를 심어놓는다.
적멸주에 걸린 사람은 가장 가벼운 증상으로 우울증을 드러낸다.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 같고,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죽는 것이 세상에 대한 반항처럼 생각되고……
아니다. 이건 너무 늦다. 일수지간(一手之間)에 죽고 사는 것이 갈리는 마당에 우울증 따위는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한다.
적멸주를 시도하려면 가장 강하게 걸어야 한다.
심장이 털컥 내려앉을 정도의 경악, 혈압이 터질 만큼의 분노, 너무 심하게 위축되어서 감히 눈길도 마주치지 못하게 만들던가.
평범한 무인이라면 가능하다. 하나 무신 정도 되는 무인들에게는 효과가 별로 없다. 무공이 높아질수록 정기신(精氣神)은 공고해진다. 태산이 무너져도 놀라지 않을 사람들이 그들이니 오욕칠정을 자극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최적의 공격 방법이 마령음으로 진기 운용을 방해하는 정도다.
수비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 환희마소를 사용한다.
환희마소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 인생을 살아온 방법에 따라서 어머니의 포근한 미소로도 보이고, 아내의 다정다감한 미소로도 보이며, 연인의 정겨운 미소로도 보인다.
냉혈한이 아닌 이상은 환희마소 앞에서 잠시나마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소립파는 석벽 사이에 끼여 여섯 시진을 보냈다.
시간을 가늠하기는 쉬웠다. 자오법신이 또 한 번 찾아왔고, 이번에는 완성된 명뇌인으로 느긋이 고통을 감상할 수 있었으니까.
자오법신이 완전히 가시기 전, 소립파는 몸을 일으켰다.
명뇌인을 완성하기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석벽이 밀어오는 힘과 내부 기혈이 완전히 탈바꿈되는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싶었으니까.
지금은 일어선다.
석벽을 밀어낼 힘이 없으니 피부가 벗겨지는 것을 감수하면서 비집고 나가야 한다.
뇌와 육신의 신경은 정상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되 고통을 느끼는 부분만 차단한 결과다.
“여기까지야. 지금부터는 나 혼자 간다.”
나직이 소리 내어 말했다.
사람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보기 싫다. 한시도 쉬지 않고 굴려대는 잔머리가 지겹다.
삼원로, 만사무불통지, 서군봉, 강금산.
그들 모두에게서 흥미를 잃었다. 몇몇 사람에게는 호감을 조금 가진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냉철한 눈으로 그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본다.
멸신구관을 통과하려면 같은 길을 갈 수밖에 없지만, 그들과 마주치는 경우는 없으리라.
쿵!
소립파가 힘겹게 만사무불통지가 뚫어놓은 석벽 안으로 들어서자 등 뒤에서 석벽이 굉음을 울리며 닫혔다.
그는 입술을 동그랗게 말았다, 휘파람이라고 불려는 듯이. 하나 그의 입에서는 아무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무음(無音)이다.
우우우우우……!
소리는 울려 나갔다. 인간의 청각에 잡히지 않는 높은 소리지만 소립파는 들을 수 있고, 토해낼 수 있다.
우우우우우……!
소리가 반향되어 왔다.
칼처럼 날카롭게 다가오는 소리도 있고, 완만하게 굴곡되어 돌아온 소리도 있다.
소리를 판단할 필요는 없다.
반향된 소리를 듣는 즉시 앞에 펼쳐진 광경이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였다.
만공심안의 능력이다.
우우우우우……!
다시 한 번 소리를 토해내 머릿속에 그려진 광경을 확인했다.
되돌아온 소리는 먼저와 똑같은 광경을 그려냈다.
‘이럴 수가!’
이제 다시는 놀랄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였지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놀라 몸까지 굳어졌다.
이런 일이!
2
동혈이다. 아주 큰 동혈이다. 방원 이십여 장은 족히 되는 광장이 펼쳐져 있다.
날카로운 창을 박아놓은 것 같은 종유석들, 죽순처럼 자라나는 석순, 그리고 땅과 하늘을 잇는 석주…….
의심이라고는 터럭만큼도 일어나지 않는 천연 동굴이다.
소립파가 토해낸 소리는 동굴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다 돌아왔다.
반향된 소리는 많은 정보를 안겨주었다.
동굴에 대한 정보가 제일 많다. 동굴에 어울리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들에 대한 정보도 물어다 주었다.
오래전에 앞서 나갔던 무신들이 멀리 가지 못하고 이곳에 있다. 동굴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동혈을 헤집고 다닌다. 구석구석…… 석순을 일일이 만져 보고, 종유석도 빠짐없이 건드리면서 매우 느린 속도로 동굴을 뒤지고 있다.
소립파가 있는 위치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반향된 소리가 알려주는 정보이니 틀림없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솔직히 무신들에게 신경을 쓸 여력이 조금치도 없다.
‘여긴 죽음의 땅!’
소립파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제이관이 시작되었다. 제일관과는 달라서 아마도 시작이자 끝이 될 것이다.
소립파는 동굴이면 반드시 있어야 할 박쥐의 흔적에 주목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과 같은 동굴이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박쥐가 서식한다.
이곳에는 박쥐가 없다. 지금뿐만이 아니라 이전에도 서식한 적이 없다. 박쥐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곳은 천연 동굴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조성된 동굴이다.
무엇 때문에, 왜, 이런 형태로?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자칭 기관진식(機關陣式)의 제일인자로 만참만살대진(萬斬萬殺大陣)으로 혈난을 일으킨 논귀(論鬼)의 눈은 피해가지 못한다.
철화방진(鐵火方陣)!
쥐를 쇠솥에 집어넣고 최대한 발버둥 치게 만든다. 뚜껑을 덮어 도주로를 완벽하게 차단한 후, 기름을 흘려 넣는다.
최후는 화(火)! 불을 피워 태워 죽인다.
삼원로와 만사무불통지의 무공이 천의무봉(天衣無縫)의 경지에 이르렀지만 소립파처럼 동굴의 형태를 한눈에 읽지 못하는 한 철화방진을 알아내기는 힘들다.
‘도주로를 찾아야 되는데…….’
소립파의 마음이 다급해졌다.
무신들이 일찍이 철화방진에 들었어도 화공(火攻)이 전개되지 않은 것은 뚜껑이 닫히지 않아서였다.
이제 뚜껑이 닫혔다.
소립파가 동굴에 들어서면서 막혀 버린 곳, 석벽이 뚜껑이다.
곧 기름이 흘러들 것이다. 그리고 어디선가 피어난 불꽃이 동굴을 화염지옥(火焰地獄)으로 만들 것이다.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지하였다.
그의 곁에는 항상 언장은마가 있었다. 언장은마는 땅속에 숨어 살았고, 소립파는 그의 무공과 도구들을 가다듬어 주었다. 단단한 암벽도 수월하게 파나갈 수 있도록.
언장은마가 사용하는 지둔술을 소립파처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입을 오무려 동그랗게 말은 다음, 정교한 소리를 내질렀다.
우우우우우……!
세상이 떠나가라 내지른 고함이다. 하나 서군봉과 강금산은 물론이고 무신들도 전혀 듣지 못했다. 그들은 아직 소립파의 존재조차도 감지하지 못했다.
텅! 텅텅! 텅……!
소리가 닿은 곳은 바닥이다. 두껍게 깔린 쇠 바닥이 특유의 쇳소리를 울려냈다.
흙을 덮고, 바위를 올려놓고, 석순과 석주를 심어놓았으되…… 바닥은 쇠로 이뤄졌다.
솥이다. 거대한 솥이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종유석도 거짓이다. 종유석을 뜯어내면 쇳덩이가 나타날 게다.
‘멸신구관이야, 구관. 관문이 아홉 개나 있어. 이 정도는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판단한 건데…… 어떻게 빠져나가, 어떻게?’
방법이 있다면 오직 하나, 무쇠 솥을 깨는 것뿐이다.
소립파에게 그만한 힘이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밉지만, 싫지만, 한시도 같이 있고 싶지 않지만…… 이번에도 무신들의 힘을 빌려야 하는가.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참으로 어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들은 전혀 어색하지 않은 듯 태연하게 행동했다.
지역적인 특성으로 가르면 만사무불통지와 강금산은 강남 무인이며, 삼원로와 서군봉은 강북 무인이다. 무림 배분으로 가르면 삼원로와 만사무불통지는 동배이며, 서군봉과 강금산은 후배다.
그러나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복잡해진다. 삼원로가 하나의 축이며, 만사무불통지가 반대 축에 있다. 그리고 서군봉과 강금산이 연합한 상태에서 한쪽 구석으로 밀려나 있다.
이들 관계는 강남, 강북을 떠나 삼파전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게다.
그들은 각기 급조한 횃불을 들고 동굴을 뒤지는 중이었다.
뚜벅! 뚜벅! 뚜벅!
보폭은 일정했고, 소리는 경쾌했다.
삼원로와 만사무불통지는 어둠 속에서 불쑥 나타난 소립파를 귀신 쳐다보듯 했다.
“후후후! 석벽 닫히는 소리를 듣고 완전히 으스러진 줄 알았는데. 후후후! 목숨이 질긴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