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4
14
시마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녹광을 거뒀다.
절혼마녀와 금연화, 일령도 소립파의 음성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무슨 놈의 음성이 가득 끌어올린 진기를 일시에 무력화시킨단 말인가. 전신에 가득 깃들어 있던 진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라니!
‘마령음(魔靈音)! 마령음이야!’
절혼마녀는 놀란 토끼눈이 되어 소립파를 멍하니 쳐다봤다.
시마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절혼마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함부로 손 놀리지 마라. 손모가지 부러져.”
2
소립파가 밧줄을 늘어뜨려 놓았기 때문에 빙벽을 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옷이며, 신발이며 빙벽에 닿는 것마다 쩍쩍 달라붙는 것이 귀찮았지만 그런 것에는 신경도 돌아가지 않았다.
‘정말 시마였어. 맙소사!’
‘시신 만 구에서 시기(屍氣)를 뽑아낸 다음, 동남(童男) 백 명에게서 순양지기(純陽之氣)를 흡수해야 완성된다는 녹혈마공. 놈이 시마라고 불린 것은 다 이유가 있었어. 녹혈마공을 수련하려고 그랬던 거야. 죽일 놈! 놈은 반드시 죽여야 돼.’
절혼마녀는 빙벽을 오를 때도, 올라선 후에도 시마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거기에 비하면 십여 장 높이의 빙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빙벽을 올라서 도달한 곳은 십여 명이 들어서면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의 작은 동혈. 빙동 천장 부근에 위치해 있어서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었다.
소립파는 암굴을 거쳐 올 때처럼 허리에 밧줄을 묶었다.
“방법은 알 테니까 두 번 말할 필요는 없겠지. 이건 가장 뒤에 오는 사람이 들도록 해.”
그는 발길로 여섯 개밖에 남지 않은 홰를 툭 걷어찼다.
기분이 이상하다. 묘하게도 버림받는 느낌이 든다.
“여기만 지나면 밖이다. 약 반나절 정도 걸릴 거고. 이번에는 전번처럼 심마가 들어도 계속 나아갈 테니 스스로들 알아서 해.”
“따라가지 않으면 줄이라도 끊고 갈 심산인가 보네? 그래서 시마와 네가 맨 앞에 선 거야?”
“맞았다. 그럴 생각이야. 대가는 받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도와주는 입장. 등 노림을 당하면서 같이 갈 이유는 없겠지. 이 암굴은 절벽으로 이어졌고, 절벽 밑이 바로 직강(直江)이다. 거기서부터는 알아서 가. 단문협까지 무사히 가기 바란다.”
소립파는 시마의 등을 툭 쳤다.
시마가 어린아이나 간신히 빠져나갈 것 같은 작은 암굴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 뒤를 바로 소립파가 뒤따랐다.
“맙소사! 직강…… 우리가 땅속으로 삼십 리나 왔단 말이야? 이렇게 큰 동굴이 있었는데 어떻게 몰랐지? 이런 동굴이 있다고 누구 소문이라도 들어본 사람 있어?”
“장산을…… 건너뛰었다니…….”
할 말이 없다. 무인들이 물샐틈없이 지키고 있는 권수를 빠져나오고, 평소에도 수백 명씩 상주하는 장산도 건너뛰고, 그리고 장산에서 이십 리나 떨어진 직강이라니.
땅 밑에 구불구불 이어진 동굴이 삼십 리에 걸쳐 존재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보나마나다. 별 미친 소리 다 들었다는 표정을 지을 게다.
절혼마녀와 금연화는 오래 생각할 틈이 없었다. 소립파와 연결된 밧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밧줄이 끊어졌어!’
소립파와 자신을 연결해 주고 있던 밧줄이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밧줄은 서로의 몸을 묶어놨기 때문에 앞에서 이동하면 아무리 속도를 조절한다고 해도 약간이나마 당겨지는 맛이 있다.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당겨지는 맛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이동해도 움직일 줄을 모른다.
금연화는 밧줄을 당겨봤다.
힘없이 끌려온다. 그리고 비수에 잘려진 끝 부분까지.
“잠깐! 잠깐만!”
금연화는 급히 소리 지르며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녀의 몸을 묶은 밧줄이 절혼마녀에게 연결되어 있다. 또 절혼마녀는 일령과 연결되어 있고.
금연화는 비수를 꺼내 밧줄을 잘라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암굴을 기어 나왔다.
소립파와 그녀 사이의 간격은 반 장에 지나지 않았다. 땅에서라면 두어 걸음이면 옷깃을 잡을 수 있는 거리다. 한데 그녀는 암굴을 빠져나오는 데 무려 반각이란 시간을 허비했고, 소립파와 시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갈라지는 곳이 없는 외길이니까 줄을 끊고 간 거야.’
절벽 밑에서 휘몰아쳐 온 바람이 옷깃을 스치며 지나갔다.
발밑으로 소 젖같이 희뿌연 강물이 흘러간다. 소립파가 말한 직강이다. 직강 너머로는 드넓은 논이 펼쳐져 있고, 이십여 호쯤 되는 민가가 보인다.
소립파와 시마는 보이지 않는다. 사방이 환히 내려다보이는데 두 사람의 모습만 감쪽같이 증발해 버렸다.
신법이 절륜하다고 해도 그사이에 사라질 수는 없을 텐데, 어떤 방법으로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새를 타고 날아갔나, 유영 솜씨가 탁월하니 직강에 뛰어들어 잠수를 하고 있을까.
“갔군.”
바로 뒤따라온 절혼마녀가 중얼거렸다.
“마공을 들켰으니 도망갈 수밖에 없었겠죠. 그런데 이상해요. 우릴 죽일 생각도 없었으면서…… 뭐라고 했죠? 녹혈마공? 녹혈마공을 펼친 이유가 뭘까요? 정체가 바로 드러날 텐데. 지금까지 잘 숨겨오다가 말예요.”
“그게 마공이잖아. 의지와는 상관없이 외부 타격에 즉시 반응하는 것. 의지로 제어할 수 있다면 정공, 마공 구분을 왜 하겠어.”
두 여인은 일령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이제 어떡하죠? 혼인 핑계를 댔는데 사내가 없어졌으니 핑계 댈 말도 없어졌네요.”
“이제 사내는 소용없게 됐어. 동생도 천비대가 적선서라는 흉물까지 동원시켰다는 말을 들었잖아. 우릴 죽일 생각이야. 마주치기만 하면 다짜고짜 죽이려고 들걸?”
“풋! 우리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니 고맙네요. 그 사람이 죽은 장소에 찾아가는 것만으로 이러니…… 그 사람이 허투루 살다 간 것 아닌 것 같아요.”
“우울한 이야기는 그만 해. 그러잖아도 기분이 어수선한데. 정말 심란해. 시마 같은 자는 상종 못할 인간인데…… 막상 떠나고 보니 아주 이상해. 이럴 때는 술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내려가요. 저기 민가가 있으니 술을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저도 한 잔 마시고 싶었던 참인데 잘됐네요.”
일령은 높은 나무에 올라가 사주 경계에 임했다.
다행히 넓게 펼쳐진 논 한복판에 형성된 마을이라서 접근하는 자는 쉽게 발견해 낼 수 있다. 하나 이런 점 역시 천비대에게는 무용지물일 것이다.
소립파가 말한 대로 천비대가 적선서라는 흉물을 풀어놓았다면 조만간 꼬리가 잡힐 것은 자명한 일. 무인을 만나지 않고 단문협까지 간다는 생각은 포기했다.
어쩌면 그보다 더한 것, 생명까지도 포기해야 할지 모른다. 소립파의 말대로라면 적선서는 일행 중 한 명을 반드시 죽일 것이고, 한 명을 죽인다 함은 일행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한낱 미물 따위에 당할 리야 있겠나 싶으면서도 불안한 심정은 지우지 못했다.
“날 원망하고 싶어?”
절혼마녀가 큰 사발에 술을 가득 담아 꿀꺽꿀꺽 마시며 말했다.
“어차피 같이 갈 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정말 동생은 거짓말을 못하네. 표정에 다 드러나. 내가 시마만 공격하지 않았어도 그들이 도주하는 일은 없었을 거야. 목적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모르지만, 최소한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지는 않았겠지.”
“술 한 잔 더 줘요.”
“그만둬. 얼굴 빨개졌어.”
“한 잔만 더 마실래요.”
“죽을 때는 자하부주의 따님답게 죽어야 하지 않겠어? 나 같은 마녀처럼 술에 취해 흐느적거리다 죽으면 꼴사나워.”
절혼마녀는 사발 잔이 양에 차지 않는지 독을 들어 들이부었다.
콸콸콸……!
술이 반쯤은 입속으로 흘러들어 가고, 절반가량은 입가로 흘러 옷을 적셨다.
“이봐요! 술 좀 더 내올래요? 셈은 넉넉히 해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내와요!”
순박해 보이는 중년 사내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들을 얌전히 맞이했다. 물을 달라면 물을 떠다 주었고, 술을 달라니 집에서 담근 것이 있다며 땅에서 캐내 주었다.
잠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단순한 생활밖에 모르는 전형적인 농사꾼이다.
중년 사내가 다가와 술독을 치우며 말했다.
“술은 이제 없는뎁쇼.”
“셈은 넉넉하게 해준다니까. 지금 줘요?”
“천비대는 신이다.”
쉬익!
농사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절혼마녀의 옥수는 농사꾼의 목을 움켜잡았다.
“캑캑!”
중년 사내는 숨이 막히는지 오만 가지 인상을 쓰며 괴로워했다.
“네놈은 누구냐!”
또 말투가 변했다. 정이 담뿍 담긴 눈동자였는데, 지금은 오로지 살기밖에 드러나지 않는다.
“소, 소인은 그분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죠.”
“그분? 그분이 누구야!”
“소, 소립파라고 하면 아실 거라고…… 캑캑! 이, 이 손 좀…….”
절혼마녀는 손을 놨다.
“소립파가 여길 들러서 말을 전하라고 했단 말예요?”
변온 동물보다도 더 변화가 심한 여인, 그녀가 절혼마녀다.
“마을에 집은 많지만 앉아서 사방을 환히 볼 수 있는 곳은 저희 집뿐이니 이리 오실 거라고.”
“하! 여우가 따로 없네. 사내가 여우면 듬직한 맛이 없는데. 또 뭐라고 했어요?”
“들어오시면 제일 먼저 술을 찾을 테니 술을 준비해 놓으라고. 저희가 담근 게 있다고 말씀드렸더니 딱 한 독만 드리라고.”
“호호호!”
절혼마녀는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사람, 무심한 척하면서 날 상세히 관찰했네. 이만하면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안다고 할 수 있겠어.”
“죄송하게 됐어요. 아까 하던 말씀, 마저 해주세요.”
금연화가 빨갛게 물든 양 볼을 두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이 정도면 술 배를 채웠을 테니 그만 움직이시라고. 천비대와 벌어진 거리는 하루 반. 단문협으로 바로 가지 말고 배를 타고 직강을 따라가다가 적혈구(邦穴口)에서 장강(長江)을 건너시라고.”
“장강을?”
“천비대의 추적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남무림으로 가란 말을…… 보는 사람마다 죽이려고 달려들 텐데.”
금연화는 어이가 없는지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래도 천비대의 추적은 뿌리칠 수 있어.”
절혼마녀가 일어서며 말했다. 일어서는 행동으로 그녀의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지금에 와서는 달리 행동할 방도도 없지만.
“다른 말은 없었나요?”
중년 사내는 급히 말했다.
“천비대를 완전히 떨구지는 못한다는 말씀과…… 적혈구에서 배를 탈 때쯤이면 하루 반에서 반각 차이로 좁혀질 것이라고…….”
“반각? 그런 셈법은 어디서 나온 거지? 반각이면 잡힐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
“정오에 출발하면 반각 정도 여유가 남으실 거라고…….”
“뭐예요!”
절혼마녀는 술이 확 깼다.
어느새 절혼마녀와 금연화의 얼굴은 하늘을 향했다.
“지금이 정오!”
“이런…… 진작 말했으면 술 먹을 시간도 아꼈을 텐데! 겨우 반각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면…… 배! 배를 어디서 구할 수 있죠?”
두 여인은 갑자기 다급해졌다.
“벌써 강에 준비를…… 헉!”
절혼마녀는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중년 사내를 낚아챘다. 그리고 그녀가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르기로 신법을 전개했다.
쉬익! 쉭! 쉭! 쉭……!
절혼마녀가 움직임에 따라서 금연화와 일령도 재빨리 뒤따랐다. 하지만 절혼마녀와의 간격은 점점 벌어지기만 할 뿐이다.
‘언니의 무공이 이 정도라니! 절혼마녀의 명성이 헛된 게 아니었어!’
준비된 배는 배 중에 가장 빠르다는 비조선(飛鳥船)이다.
좌우에 달린 두 단의 노는 버드나무처럼 날렵하게 생긴 비조선을 물고기로 만들어준다.
“수고했어요.”
절혼마녀는 전낭(錢囊)에서 잡히는 대로 돈을 꺼내 중년 사내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 배, 고마워요.”
“고마워요.”
금연화도 일령도 한마디씩 건넨 후에야 배를 탔다.
천비대의 이목을 벗어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한데 지금은 가능하게 느껴진다. 그 사람…… 소립파가 준비해 준 것이니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맞아떨어질 게다.
여인들은 노를 잡고 힘껏 젓기 시작했다.
스윽……! 스으윽……!
비조선은 손짓 한 번에 일이 장씩 쑥쑥 미끄러져 나갔다.
그녀들에게 지독한 고통을 안겨주었던 동혈이 가물거리더니 시야에서 사라졌다. 큰 도움을 주었던 마을도 보이지 않는다. 드넓은 논 대신 야트막한 야산들이 새로운 경관으로 나타난다.
금연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 꼭 귀신에 홀린 느낌이다.
“언니.”
“아무 말 말아.”
진기까지 북돋아 노를 젓던 절혼마녀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냐. 이건 이상해. 언니…….”
“소립파 이야기라면 그만둬.”
금연화는 입을 다물었다. 하나 한 번 이상하게 생각하자 수상쩍은 일들이 꼬리를 물었다.
암굴에서 소립파와 그녀와의 간격은 겨우 반 장. 그가 암굴을 잘 알고, 줄 끊어진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고 해도 겨우 십여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
그 짧은 순간에 소립파와 시마가 사라졌다.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농사꾼은 소립파가 다녀갔다고 했다. 그 말은 맞을 게다. 그럼 소립파와 시마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에 절벽을 내려가고, 강을 건넜고, 백여 장에 이르는 논을 가로질러 마을로 들어섰다는 말이 된다.
도대체가 말이 안 된다. 시마가 초절정 마두라고 해도 그만한 신법은 펼칠 수 없다. 그럴 만한 능력은 신밖에 펼칠 수 없다. 그들이 신인가?
좋다. 거기까지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비조선만은 이해할 수 없다. 어민이나 농사꾼은 비조선을 사용하지 않는다. 비조선은 군이나 무림문파에서만 사용한다.
그사이에 만들었나? 천하제일의 손재간을 지녔다고 해도 한두 시진은 소모해야 될 일이다.
‘풀어낼 수 없어.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그때 멀리서 회색 연기가 무럭무럭 솟아올랐다.
회색 연기 속에 검은 연기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서는 아무래도 큰 불이 일어난 것 같다.
“저기는…… 우리가 머물렀던 마을 아니어요?”
금연화는 일령의 말을 듣고야 연기를 보았다.
“천비대! 벌써……?”
금연화는 순박했던 농사꾼을 떠올렸다.
천비대는 흔적을 찾아냈을 게다. 마을에 들어가 농사꾼을 쥐 잡듯 닦달했을 게고, 배를 타고 떠난 사실도 알아냈을 것이다. 천비대에게 걸려서 입을 열지 않은 사람이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