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42
142
제7장 탈리군(脫離群) ― 무리로부터 떨어져 나가다
1
흑살마녀는 예정된 수순대로 객(客)들을 초옥에서 몰아냈다.
“모두 꺼져! 지지고 볶든 말든 내 앞에만 얼쩡거리지 마!”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 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금지로 설정된 영역을 휘젓고 돌아다니며 걸리는 사람마다 마구 두들겨 팼다.
“미쳤군, 미쳤어.”
“여기 아니면 있을 데가 없나.”
호채마가 동요하기 시작했다.
호채마에게 흑살마녀의 영역은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지나 다름없었다. 안심하고 잠을 푹 잘 수 있는 곳이라고나 할까? 한데 성지의 주인이 광분하여 날뛰니 더 머무를 재간이 없었다.
호채마는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물러났다.
“자, 나도 쉴 만큼 쉬었고…… 이젠 내 갈 길을 찾아가야겠어. 약속은 지켰지?”
흑살마녀의 영역을 벗어나자마자 흑조편복이 떨어져 나갔다.
“무슨 소리야? 무슨 약속?”
천멸도주가 흑살마녀의 초옥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 채 무의식적으로 물었다.
“양식을 대주겠단 약속. 난 지켰다.”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가 약속을 지켰으니 이제 소립파가 약속을 지킬 차례다. 그는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암습할 계획을 세울 것이고, 소립파는 어떤 경우든 세 번은 용서해야 한다.
흑조편복…… 가까이에 있어서 벗이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결국 본연의 길은 이것이었다.
“마야는 약속을 했는지 몰라도 나는 아냐. 내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좋아.”
천멸도주의 음성에 한기가 맺혔다.
“아니, 아니. 그건 약속이 틀려. 마야의 약속에는 호채마의 움직임도 포함되어 있어. 내가 그대들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그대들이 내게 검을 들이대면 약속 위반이야. 클클클! 약속 같은 거야 언제든 깰 수 있겠지만 마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걸?”
“…….”
천멸도주는 차라리 입을 다물었다.
서로 죽이고 죽여야 할 사이가 되면 말을 섞기가 귀찮아진다.
“갈 사람은 빨리 가. 우린 어디 머물 곳을 찾아야겠지?”
“안내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음성이 들려왔다.
주림이다. 호채마 중에서 백인수처럼 밀림을 잘 아는 사람도 없다. 그들은 마야와 거의 동시에 밀림에 들어섰고, 지금까지 구석구석을 뒤지며 다녔다.
그가 안내한다는 곳은 한 사람이 능히 열 명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이리라.
“그럼 부탁해요.”
다담선자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주림에게가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호채마가 빠져나간 후, 흑살마녀는 침상에 누웠다. 그리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혈도를 찍었다.
다리부터 혈도를 찍으며 올라와 마지막으로 머리, 천령혈(天靈穴)을 눌렀다.
천면겁을 시전할 줄 아는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는다. 이론으로만 아는 사람까지 모두 합해도 다섯 명이 채 안 된다. 그중에 한 명이 흑살마녀다. 만사무불통지는 흑살마녀에게 천면겁이 있는 줄 알고 주문해 온 것이다.
천령혈에서 손을 뗀 흑살마녀는 반듯하게 누워 두 손을 배 위에 얹었다.
사르르 눈이 감겼다.
그녀는 이제 누군가가 나타나 천면겁을 풀어주기 전에는 깨어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흑살마녀를 보았다.
그녀가 기거하는 초옥은 은밀하지 못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관계로 은밀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 높은 나무 위에만 올라가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환히 보였다.
“가봐.”
육능자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쉬익!
그의 옆에 있던 복면인이 신형을 띄웠다.
그의 무공은 뛰어난 편이었다. 나무에서 나무로 잔나비처럼 날아다녔으나 옷자락 펄럭이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그는 서슴없이 초옥으로 들어가 흑살마녀의 앞에 섰다.
흑살마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깊은 잠이 든 듯 숨소리가 가늘었고, 체온도 정상인보다 한결 낮았다.
복면인은 육능자가 있는 곳으로 돌아서서 손으로 목을 그어 보였다.
“이상한데…….”
육능자는 또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가 판단한 호채마는 단결력이 상당히 강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도 깊었다. 마야를 위하는 일이라면 목숨도 기꺼이 버릴 것이라고 생각된다. 마도를 위한 일이 아니다. 오직 마야 한 사람만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런 그들이 흑살마녀를 버려두고 갔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가봐. 가서 검으로 심장을 찔러봐.”
“심장을요?”
“심장 몰라?”
“아니, 그럼 죽이라는 말씀…….”
“죽여.”
“알겠습니다.”
다른 복면인이 먼저 사내처럼 쾌속하게 짓쳐 나가 초옥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먼저 사내를 제치고 흑살마녀에게 다가섰다.
무신에 버금가는 무공을 지닌 사람도 천면겁에 빠져들면 한낱 시신에 불과하다. 시신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는 정도야 누구라도 할 수 있다.
사내가 검을 뽑아 힘껏 심장을 찔렀다.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한 행동이다. 순간,
서억! 파앗!
한줄기 미풍이 부드럽게 스쳐 갔다. 하나 미풍은 곧 혈풍으로 변했다.
검을 든 팔이 싹둑 잘라지며 핏줄기를 뿜어냈다.
사내가 깜짝 놀랄 때, 느닷없이 심장에서 구멍이 뚫리며 핏물이 울컥울컥 쏟아졌다.
뒤에 물러서 있던 사내도 변괴를 면치 못했다.
그는 머리가 깨끗이 잘렸다.
비명도 지를 틈이 없었다. 언제 당했는지도 모르게 당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벌어진 일이다.
육능자는 두 사내가 죽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천멸도 살수들을 남겨두었군. 정말 대단해. 그렇지 않나?”
“…….”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천랑대는 지옥의 수련을 거친 자들인데 어린아이처럼 베어냈어. 보아하니 검이 날아오는 것도 보지 못한 모양인데…….”
“그만 하시죠.”
기분 나쁜 듯한 어투였다.
“쯧!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삼대주,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말해봐. 자네가 삼대를 모두 이끌고 저기로 들어간다면 흑살마녀를 빼내올 자신이 있는가?”
“없습니다.”
대답은 너무 순순히 나왔다.
“왜?”
육능자가 이유를 물었다.
“나 역시 공격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공격을 시도했다가는 적을 보기도 전에 절반 이상이 죽어나갈 겁니다. 승산도 없을뿐더러 무모한 공격입니다.”
육능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만 돌아가지. 눈앞에 먹이가 있어도 먹지를 못하는군. 조금 생각을 해봐야겠어. 그건 그렇고…… 저들은 어떻게 할 셈인가?”
육능자가 고갯짓으로 시신을 가리켰다.
“몰라서 묻는 겁니까, 자존심을 건드리는 겁니까?”
“아니, 아니. 난 천랑대 자존심이 하도 강해서 이럴 때는 어떻게 하나 알고 싶었을 뿐이야. 자존심 상했나?”
“우린 협조 관계입니다. 천랑대의 힘을 온전히 빌리고 싶다면 말 좀 가려서 하시는 게…….”
육능자가 말을 끊었다.
“허허! 동료가 죽었는데 시신 하나 꺼내오지 못하는 힘을 어디다 써먹겠다고. 밑 닦는 데나 써먹어볼까?”
“…….”
천랑대 삼대주는 침묵했다.
문 내에서 상하 관계는 절대적이다. 육능자는 천랑대주와 비등한 직위이니 그의 예하로 들어온 이상 명을 받아야 한다. 잠시 협조하는 관계라고 해도 끓는 물에 들어가라는 명령까지 받들어야 한다.
“쯧! 화공(火攻)도 안 될 것 같고…… 무슨 수로 먹이를 꺼내오나.”
육능자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걸어갔다.
흑살마녀의 행동을 주시하는 사람들은 또 있다. 천랑대의 꼬리를 밟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천멸도 살수들의 공격을 곱씹어가며 생각을 거듭했다.
“어떤 수를 쓴 거지? 모르겠어. 한 단계 더 발전한 것 같은데……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전과 달라졌어요.”
“그렇지? 그래, 잘못 보지 않았어.”
그들은 초옥 주변을 유심히 살폈다.
그들의 주 임무는 정보 수집이다. 추적도 전문이며, 납치 같은 것은 아침 식사처럼 가볍게 한다. 그렇기에 무공보다는 예리한 안목에 더 큰 자부심을 갖는다.
그들의 눈에 들어온 초옥은 범상치 않았다. 초옥 자체가 하나의 성이었고, 초옥 주변은 침범을 거부하는 요새였다.
육능자는 화공도 곤란하다고 했다. 정말 그렇다. 초옥 주변에는 불붙을 만한 것이 없다. 불화살로 공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초옥 지붕만 태울 뿐, 흙으로 만들어진 천장에서부터 막힌다.
살수들이 숨어 있을 곳은 전혀 없어 보인다.
자신들보고 초옥 주변에 숨으라고 하면 상당히 난감했을 게다.
천멸도 살수들은 숨었다. 몸을 드러내 공격을 하고 다시 숨었다. 그런데 도무지 찾아내지를 못하겠다. 사실은 창피한 일이지만 공격하는 순간도 보지 못했다.
배우고 싶다. 정말 뛰어난 은신술이지 않은가.
“들어가지 못하겠는데요.”
수하가 힘 잃은 음성으로 말했다.
나름대로는 최고의 전문가라고 자부하던 추혼단이, 남도문 삼첨(三尖) 중에 하나라는 추혼단이 너무도 무력해졌다. 자신감이고 자부심이고 다 날아가는 순간이다.
“빠지자. 이대로는 손도 못 대.”
추혼단주 부위량이 철수를 명했다.
흑살마녀의 호법을 서는 사람들은 황전륜을 필두로 한 팔십일전혼 스물두 명이다.
황전륜이 흑살마녀의 곁에 머문다. 그가 일초식을 전개하여 두 사내를 죽였다.
그를 제외한 스물두 명은 초옥 밖에서 진을 쳤다.
세 명이 가장 안쪽에서 삼재진(三才陣)을 폈고, 네 명이 삼재진 밖에서 동서남북 사상진(四象陣)을 전개했다. 사상진 밖에는 오행진(五行陣)이 있으며, 오행진 밖에는 육합진(六合陣)이 존재한다. 그리고 초옥을 관통하며 칠성진(七星陣)이 전개된다.
들줄날줄처럼 얽히고설킨 진은 무질서해 보이나 질서정연한 진이며, 전개하기 복잡해 보이나 실상은 너무 간단하다.
거기에 언장은마가 파놓은 땅굴이 그들의 능력을 배가시켰다.
초옥 주변에는 수십 개의 호(壕)가 파여 있다. 호와 호를 연결하는 지하 통로도 구축되었다.
언장은마는 황전륜과 함께 남았다.
노출된 호는 순식간에 메워질 것이며, 또 다른 호가 생겨나리라. 문제가 있는 통로는 곧바로 보완될 게다. 천멸도 살수들이 나아가고 물러서는 다리 역할을 충실히 해줄 것이다.
이는 예전에 마야가 천멸도주에게 충언해 준 방법이었다.
땅 위에서 충분히 숨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땅속까지 제공한다면 무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말은 쉽다. 하지만 천멸도 살수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지둔술이라면 두더지도 능가해야 한다. 섣불리 어설픈 지둔술을 사용했다가는 오히려 해가 된다.
언장은마는 마야의 말을 시험할 수 있는 탁월한 고수다. 중원 천하에서 그처럼 지둔술에 달통한 고수를 찾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니, 그가 못해낸다면 마야의 말은 거짓말이 된다.
언장은마는 해냈다.
북검문 천랑대, 남도문 추혼단 무인들이 눈뜬장님이 되었다. 중원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 중에 한 명인 육능자의 머리까지 딱딱한 돌로 만들었다.
육능자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물러났으니 언장은마와 천멸도 살수들의 결합은 대성공이다.
이는 또 다른 가능성까지 제공한다.
엄밀히 말하면 천멸도 살수들은 무공의 깊이가 다르다. 백인수와 팔십일전혼이 비등하고, 십팔밀막검과 북검문에 있는 십겁룡이 비슷하다. 그리고 십팔밀막검은 백인수보다 월등하다.
언장은마와 십팔밀막검이 만나면 어떻게 될까?
천하에 못 죽이는 자가 없으리라. 배짱을 좀 키운다면 무신에게도 시험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 갔소?”
황전륜이 흑살마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는 공기로 냄새를 맡는다.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뭇 인간들의 냄새가 배여 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갖 냄새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지금은 흙냄새가 더 진하다.
“몇 명은 남아 있지.”
땅속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언장은마의 지둔술은 마야의 손을 거치며 완벽해졌다.
그중에 하나가 땅의 울림을 듣는 것이다. 울림을 들음으로써 땅 위에서 벌어지는 일을 짐작해 낸다.
동물의 움직임이 다르고, 인간의 움직임이 다르며, 어린아이의 움직임과 노파의 움직임이 다르다.
이 모든 움직임을 구분해 내야 한다.
언장은마는 마령음의 도움을 받았다. 음률과 함께 들려오는 미세한 울림을 파악해 내는 데 성공했다.
그 후부터 언장은마는 땅 위로 올라서는 일이 드물었다.
“그 능력으로 멸신구관에도 들어가 볼 수 없소?”
“따라갈 수 있으면 따라갔지.”
무신의 뒤를 밟는다는 건 꿈도 꾸지 못한다.
북방천마가 당하는 모습을 보지 않았나. 북방천마 같은 고수도 단 일 수에 나가떨어졌는데 무슨 수로 뒤를 밟는단 말인가.
“오늘은 이것으로 그칠 모양인데, 시간 있을 때 쉬어두쇼.”
“그러지.”
황전륜과 언장은마의 대화마저 끊어졌다.
주림이 안내한 곳은 동굴이었다. 동굴이라기보다는 바위와 바위가 엇대어져서 간신히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곳이다.
천멸도주는 만족했다.
사계(四界)가 한눈에 들어온다. 반면에 동굴은 움푹 파인 곳이라서 행동이 노출되지 않는다.
경계하기 딱 좋다.
당분간 기거하기에도 불편함이 없어 보인다.
결국은 노숙(露宿)이지만 약간만 다듬으면 편한 잠자리가 만들어질 것 같다. 이만하면 노숙이라도 최상의 안식처다.
“가만있어. 이런 건 내가 잘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