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43
143
혈유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마도, 수검, 시마도 당분간 머물 공간을 만들기 위해 나무도 잘라오고 풀도 베어 왔다.
멸신구관에 들어간 사람들이 언제 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나오는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소립파는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꼭 나온다.
예상되는 날짜는 대충 나흘 정도다.
나흘을 넘길 수도 있지만…… 아니, 천하제일의 함정이라는 멸신구관이니 틀림없이 넘길 게다. 하지만 나흘을 넘기면 곤란하다. 저주의 자오법신이 석신(石身), 돌 몸뚱이를 만든다는 날이 딱 나흘 남았다.
소립파는 나흘 안에 멸신구관의 기연을 얻어 자오법신에서 벗어나야 한다.
멸신구관의 기연을 얻었다면 끝이지 않은가. 기연까지 얻은 사람이 안 나올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나흘이다. 나흘 안에 소립파가 나와야 한다.
여인들, 그리고 마인들은 마음이 답답했지만 그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천멸도 살수들은 벌써 위치를 정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2
소립파는 고개를 저었다.
머릿속에 담겨 있는 무공들을 샅샅이 헤집어봐도 철로독을 뚫을 수 있는 무공은 떠오르지 않았다.
만약 유계의 주공이 육신만으로 제삼관을 뚫는다면 소립파가 보지도 듣지도 못했고, 생각하지도 못하는 가공할 무공이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이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무림 판도가 완전히 뒤바뀌는 중차대한 사건이다.
현 무림의 중심은 무신들인데, 무신들을 허수아비처럼 쓰러뜨릴 수 있는 절대강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라.
아비규환이 보인다. 시산혈해가 보인다.
물론 단순 비교밖에는 되지 않는다. 무공으로 철로독을 뚫을 수 있으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비교하는 것이니 싸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도 있다.
철로독을 뚫기 위해서는 강한 무공보다는 기공 쪽이 더 적합할 것 같고, 기공이란 사람을 격상시키는 쪽으로는 도움이 못 되는 경우가 많으니 비교 자체가 무리다.
“이제 불길이 가신 것 같군.”
진혜력의 음성이 귀를 울렸다.
참으로 더웠다. 닭에다 진흙을 바르고 불에 구우면 기름기가 쏙 빠진 맛있는 닭이 되는데, 꼭 찜닭이 된 느낌이었다.
지금도 덥기는 마찬가지다. 아주 푹푹 찐다. 땀이 빗물처럼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더워지는 것 같다. 도무지 불길이 가셨다고는 믿기 어렵다.
그래도 진혜력의 말이 맞을 것이다. 왜? 그는 무신이니까. 무신의 오감은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신의 영역으로 들어섰으니까.
“나가지. 조금도 더 못 있겠어.”
혈일뢰가 혀로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혜력의 일장이 무너진 입구를 가격했다.
퍽!
마른 흙이 우수수 떨어지며 뿌연 먼지를 일으켰다. 동시에 지금까지의 열기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열기가 살을 익힐 듯 밀어닥쳤다.
역시 무신이다. 염려하던 불길은 없었다. 석벽이 온통 검게 그을려 있지만 붉은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허허! 늘그막에 별일을 다 겪는군.”
진혜력이 굴에서 벗어나 돌바닥에 발을 디뎠다.
불길에 달궈진 돌바닥은 화로에서 금방 꺼낸 쇳덩이처럼 푹푹 찌는 열기를 내뿜었다.
진혜력 다음으로는 혈일뢰가, 그다음으로는 서군봉이 발을 디뎠다.
만사무불통지도 굴을 빠져나갔다. 그때,
퍼억!
소립파의 등에서 둔탁한 타격음이 터졌다. 소립파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충격이다.
소립파는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개구리처럼 나뒹굴었다.
강금산이 천천히 걸어나왔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눈에 불길을 이글거리면서.
다행히 더 이상 발작하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한 게냐!”
요건 참 재미있는 말이다. 그러잖아도 강금산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궁금하던 터이다.
결과적으로 제이관이 제삼관을 무너뜨려 주었다. 하지만 불 그릇을 깨뜨린다는 발상은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실행 역시 죽음을 각오한 결단이 필요하다.
평소의 강금산에게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발상이요, 결단이었다.
한데 강금산이 소립파를 추궁하고 있다. 무슨 짓을 했냐고? 그렇다면 강금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소립파가 무엇인가를 했다는 뜻이다.
강금산의 한마디는 몇 가지 일을 유추할 수 있게 해줬다.
“창피한 줄 알아야지.”
소립파는 뜻밖의 말을 했다.
“뭐라고? 무슨 소리냐!”
“무슨 짓을 한 거냐는 말은…….”
소립파가 일어서서 옷을 툭툭 털었다.
“본인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슨 짓인가를 당했다는 말. 무인이 할 말은 아니지.”
“뭐라고!”
“창피한 줄 안다면 그런 말은 속에 꾹 눌러놔.”
“이 자식이!”
소립파는 강금산을 흘깃 쳐다본 후, 제삼관을 향해 걸어갔다.
“호호호! 한 방 먹었네요.”
서군봉이 강금산의 어깨를 툭 쳤다.
“상처는 괜찮아요?”
“괜찮소. 내 내공은 양강(陽剛)이라 열기가 도움을 주는데…… 훈증(熏蒸) 덕분에 한결 가볍소.”
“자연 요상이 된 셈이군요. 흑침무는 어때요?”
“…….”
흑침무는 아직도 폐에 남아 호흡을 곤란하게 한다.
서군봉은 마야가 스며든 제삼관을 쳐다봤다. 만사무불통지가 소립파의 뒤를 바짝 쫓고, 그 뒤로 삼원로가 들어가는 중이었다.
“우리도 가요.”
비가 그쳤다. 호수도 말랐다.
쇠도 녹인다는 철로독이지만 철화방진을 형성한 불길에는 당할 수 없는지 깨끗이 말라 있었다.
“이건 음빙곤석(陰氷坤石)이군. 동굴 전체가 음빙곤석이야. 이것만 내다 팔아도 만석꾼 소리는 듣겠는데!”
진혜력이 동굴 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교묘한 기관장치였다.
바닥에 떨어진 철로독은 항상 일정한 수위를 유지하게 설계되었다. 넘치는 독은 무수히 뚫려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가고, 빠져나간 독은 다시 돌아와 비가 되어 내린다.
음빙곤석은 철로독을 순한 양처럼 만들었다.
사천 당문도 음빙곤석을 시험해 봤을 것이다. 어쩌면 철로독을 담을 수 있는 용기까지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음빙곤석으로는 철로독을 실용화시킬 수 없다.
음빙곤석 한 줌을 얻으려면 산 하나는 파헤쳐야 한다. 웬만한 문파는 존폐가 걸릴 정도로 막대한 비용이 든다. 철로독을 대체할 만한 독이 없는 것도 아니다. 십대절독은 충분히 철로독을 대체한다.
사천당문은 음빙곤석을 이용하는 방도는 처음부터 배제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관은 어디쯤에서 시작되는가?”
정말 오랜만에 자의성검 석존무가 입을 열었다.
“귀먹었소? 나도 처음 오는 곳이라고 수십 번은 말한 것 같은데.”
“허허허! 수십 번은 아니고 서너 번은 들은 것 같네. 잊진 않았네. 직감력이 뛰어난 것 같아서 물어본 걸세.”
“창피한 줄 아시오.”
“허! 나도 그런 생각을 해야 하나?”
“무신 아니오. 유계의 주공보다 한 수 뒤진다고 인정을 하든가, 아니면 홀로 뚫고 나가든가. 하기는, 무신이라면서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공갈 협박이나 일삼는 누구보다는 나아 보이지만.”
“허! 허허허!”
석존무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마야가 말한 ‘누구’는 만사무불통지이다. 그가 소립파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지상에 남겨진 흑살마녀와 마야의 여인들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아니, 그런 뜻이었다.
무신이 할 짓은 못 되지만 제이관과 제삼관을 보았던 터라 일말의 안도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소립파는 웃음소리를 귓가로 흘려보냈다. 너무 큰 충격이 머리를 뒤흔들어서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곳은 죽음밖에 없어. 유계라고 특별한 무공이 있는 건 아니고…… 막연히 불안하다는 느낌으로 함정을 만들고 또 만든 거야. 아무것도 아냐. 여기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어.’
정신이 아득해지는 충격이다.
멸신구관에서 얻을 게 없다면 자오법신은 어떻게 되는가. 뼈가 부서지고 육신이 가루가 되어야만 되살아날 수 있다는 자오법신은 어떻게 고치는가.
죽음의 함정을 계속 뚫고 나갈 필요가 없다. 이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화살을 피해내도 남는 건 하나도 없고, 피해내지 못하면 죽는다.
우우우우! 우우우우우……!
소리를 사방으로 띄웠다.
틈이 벌어진 곳은 없는가. 제사관은 어디 있는가. 존재하는 것은 모두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터졌다.
“이게 마령음인가? 공포심이 자극되는 걸 보니 적멸주이지 싶기고 하고.”
혈일뢰 울건평이 어깨를 움찔움찔하며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석존무, 진혜력은 조용히 눈을 감고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음미하는 듯했다.
만사무불통지는 한 손을 들어 미간을 짚었다. 두 귀는 소리가 퍼져 나가는 곳, 반향되어 돌아오는 곳으로 돌려졌다.
무신들이 극고음을 듣기 시작했다.
강금산의 이지를 조종한 일이 호기심을 자극시킨 것 같다.
확실히 알아보고 싶다.
소립파는 소리를 뚝 멈췄다.
무신들도 행동을 멈췄다. 행동이라고 해봐야 집중할 때의 표정과 편안해하는 표정의 차이지만 주의 깊게 지켜봤기 때문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우우우……!
길게 극고음을 발출했다. 이번에는 사방이 아니라 한 방향으로만 쏘아냈다.
만사무불통지의 고개가 돌려진다. 삼원로의 귀가 쫑긋거려진다.
더 시험해 볼 것도 없다. 이들은 확실히 극고음을 탐지해 내기 시작했다.
소립파는 소리를 멈췄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이건 수련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야 한다. 소리를 내는 것 따로, 듣는 것 따로가 아니다. 소리를 낼 수 있어야 들을 수 있다. 또한 들을 수 있다면 낼 수도 있다.
무신들은 소리를 내지는 못하는데 듣기는 한다.
숨이 몇 호흡 흘렀을 때, 소립파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힘들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누구도 듣지 못한 소리라서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잠시 놀랐는데…… 생각해 보니 들을 수 있는 무공이 수십 가지나 된다.
내공이 깊어질수록 기감 또한 예민해진다.
무신 정도 된다면 꽃가루가 떨어지는 것까지도 감지해 낼 것이다. 하물며 육신 전체를 뒤흔드는 소리 진동인데 감지해 내지 못할까. 특별히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을 때라서 더 빨리 탐지되었을 게다.
“흥미롭군. 놀라워.”
석존무의 눈에 광채가 어렸다.
무신이 진심으로 호기심을 드러냈다는 건 그들이 욕심을 낼 만큼 탐나는 무공이란 뜻이다. 실은 능력이지만.
“성대가 특별히 발달하거나 고의로 손상시키지 않는 한 발출할 수 없는 소리인 것 같은데……. 자네는 어느 쪽인가?”
만사무불통지가 물어왔다.
“창피한 줄 아쇼.”
“허! 이건 말만 했다 하면 그 소리니…… 괜찮네. 삼인행(三人行) 필유아사(必有我師)라고 하지 않던가. 세 사람만 걸어도 스승이 있다고 했는데 우린 몇 명인가? 배울 건 배워야지.”
만사무불통지는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제사관이 궁금하지 않소?”
“…….”
모두 함구한 채 소립파를 쳐다봤다.
“난 힘이 없어서…… 이곳 좀 밀어주시오.”
소립파가 음빙곤석을 가리켰다.
다른 곳과 전혀 다른 것이 없어 보이는 벽이다. 밀어달라는 말은 위, 아래, 좌우에 갈라질 틈이 있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살펴봐도 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혈일뢰가 불쑥 나서서 음빙곤석에 두 손을 댔다.
“끄응!”
힘을 쓰자 혈일뢰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전 내력을 쏟아 붓는 중이다.
쿵! 그긍! 그그그그……!
처음에는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질 때처럼 둔중한 소리가 들리더니 꿈쩍도 하지 않던 음빙곤석이 서서히 뒤로 밀려났다.
그그그그……! 쿵!
드디어 석문이 열렸다.
“후웁! 열렸군.”
혈일뢰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진기를 조절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그는 소립파를 쳐다봤다.
“안 들어가나?”
소립파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곳이 제사관이오.”
“그러니 들…… 안에 뭐가 있지?”
혈일뢰가 제사관과 소립파를 번갈아 쳐다봤다.
함정 하나하나가 지독하지 않은 것이 없다. 제사관은 어떤 곳일까? 어떤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까.
혈일뢰도 선뜻 들어설 수 없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소.”
소립파는 눈으로 본 듯이 말했다.
사실이다. 눈으로 본 것은 아니지만 소리로 보았다.
텅 빈 공간이다. 사각으로 된 방으로 혈일뢰가 밀어낸 석문이 유일한 출입구다. 석문을 제외하고는 들어오고 나갈 수 있는 곳이 없다.
공간은 또 있다. 석실 위쪽과 아래쪽에서 텅 빈 공간을 두들길 때만 들을 수 있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수직으로 뚫린 통로에 석실이 들어서 있다.
뚜벅! 뚜벅!
소립파는 제사관을 향해 걸었다.
“이곳 역시 죽음밖에 없소.”
삶과 죽음을 초월한 듯 담담한 음성이다.
“안으로 들어가서 석문을 닫으면, 즉시 죽음이 일어나지. 어떤 죽음이냐…….”
소립파는 혈일뢰가 열어놓은 석문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죽음이죠?”
서군봉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꽝!”
“꽝?”
“이 석실은 밧줄 하나에 매달려 있는데…….”
뒷말을 듣지 않아도 짐작된다. 맙소사!
“줄이 끊어지면서 마찰이 일어나고, 마찰은 도화선에 불을 붙일 것이고…… 이 석실은 밑으로 떨어지면서 꽝!”
화약까지 매설되어 있단다.
제이관, 제삼관처럼 활로가 전혀 없는 죽음의 함정이다.
“간단히 피할 수 있는 함정이군요.”
서군봉이 살포시 웃었다.
“우리에게는 은형시가 있어요. 은형시로 석문을 쏴서 다시 잡아당기는 거예요, 안에서 민 것처럼. 그럼 함정이 작동될 거고…… 우린 결과를 지켜보면서 건너면 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