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46
146
말도 안 되지만 가능하게 할 수가 있다.
약에 취하면 환상이 보인다. 구절환각초(九折幻覺草)를 바짝 말려 가루로 만들면 구절환각산(九折幻覺散)이 된다. 이를 흡입하면 머릿속에 그려놓은 상상이 현실로 변한다.
재미있는 약초이지만 산삼만큼이나 구하기가 어려워 말로만 전해지는 약초다.
‘마디 하나가 자라는 데 십 년. 구절이니 구십 년. 이곳에 뿌려진 정도라면 최소한 천 뿌리. 엄청나군.’
소립파는 발을 들어 신발을 보았다.
맞다. 신발에 뿌연 가루가 묻어 있다. 가루는 위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밑에서부터 피어났다. 걸음을 걸을 때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흡입하여 중독되어 갔다.
소립파는 걷기를 멈추고 앉았다.
구절환각초는 해독약이 없다. 시간이 흘러 중독이 풀어지기만 기다려야 한다.
좀 더 적극적인 방법으로는 펄펄 끓는 물속에 앉아 있는 방법이 있다. 뜨거운 열기는 피를 빠르게 돌게 만들며, 약효 또한 강성해지지만 지속력은 약화된다.
가아아아아……!
적멸주가 새어 나와 온몸을 감쌌다. 타인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 자신이 자신에게 쏘아낸 소리다. 이런 경우도 처음이지만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혈관이 급속하게 팽창되었다.
심장도 빠르게 뛰었다.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을 가슴에 대어보면 큰 북 울림이 새어 나왔다.
‘환상미로진이라니…….’
다시 생각해 봐도 정말 특이한 함정이다.
구절환각초는 독초가 아니다. 약초도 아니다. 단지 환상을 일으켜 현실을 망각시키는 마초(魔草)다.
작용도 특이하다.
구절환각초는 오로지 뇌에서만 작용한다. 뇌가 마비됐으니 중독 여부를 판단할 능력도 상실한다.
독에 중독되었다 싶으면 진기를 일으켜 밀어내거나 태울 텐데, 중독된 사실조차도 모르니 계속 당할 수밖에 없다. 뇌가 중독 여부를 판단했어도 밀어내거나 태울 독이 없으니 속수무책이다.
사고력이 절반쯤 상실되었다고 보면 맞다.
다음은 무엇인가? 구절환각초로는 생명을 빼앗을 수 없다. 목숨을 빼앗으려면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한다.
생각은 나중에…… 우선은 구절환각초의 중독에서 벗어나는 게 급선무다.
가아아아아……!
적멸주가 육신을 난타했다.
적멸주의 효능이 또 하나 발견되었다.
적멸주는 자체 면역력을 극도로 높여준다.
폭발로 찢긴 상처, 멍든 상처, 짓이겨진 상처…… 육신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던 상처들이 급속히 아물었다.
살고자 하는 욕망, 아프지 않고자 하는 욕심 등등 인간의 욕구 중에도 긍정적인 것이 있고, 부정이 아닌 긍정을 자극하면 극저음 본연의 힘이 사용된다.
몸을 일으켰다.
구절환각초가 깔려 있는 것을 알기에 호흡은 멈췄다.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환각산이 풀풀 피어나기 때문에 숨을 교체할 때는 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호흡했다.
복잡한 미로는 아니었다. 상상을 제거하고 현실 그대로 보면 약간 복잡하다는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유계의 주공을 죽일 수 있는 기관은 전혀 되지 못했다.
혈일뢰 울건평이 보였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운공조식에 몰두하는 모습이 이상 현상을 감지해 낸 듯싶다.
지나쳐 갔다.
서로 상관할 것이 없는 사람들, 적이 될 가능성이 절반쯤은 되는 사람들.
제일 먼저 들어온 서군봉의 뒷모습을 봤다. 미로를 돌아 어디론가 가는 중이다.
그녀는 아직 환각산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가 보는 미로는 어떤 것일까? 마음이 만들어낸 심상(心象)은 이길 수 없는 것인데,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입구를 부술 심성이라면 좋은 풍경은 아닐 것 같다.
몇 걸음 더 옮겼다.
앞은 막혔다. 좌나 우로 돌아가야 한다.
우측은 아니다. 우측에 인기척이 있다. 누군가가 헤매고 있다는 뜻으로, 길이 아니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좌측이다. 좌측으로…… 걸음이 뚝 멈췄다.
한 발만 더 내딛으면 좌측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적멸주로 굽이를 살펴봐도 나아갈 길은 오직 좌측뿐이다. 좌측만이 몇 굽이 정도 환히 열려 있다.
그런데 나아가기가 싫다. 왜? 모르겠다. 괜히 나아가기가 싫다.
가아아아……! 파아아앗!
적멸주를 다시 한 번 시전해 봤다. 만공심안도 활짝 열어 굽이를 살폈다.
아무 이상 없다. 지금까지 거쳐 온 길과 전혀 다를 바 없다. 하면 나아가지 싫은 마음은 뭐란 말인가.
‘한 발만 더 디디면 죽는다.’
이건 차라리 공포였다.
소립파는 서 있는 자세 그대로 꼼짝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멸신구관에 들어와서 처음 겪는 게 너무 많다.
지금과 같은 현상도 그중 하나다. 자신의 내면에 숨겨진 또 다른 능력인가? 아니면 단순히 겁에 질린 것인가.
인간의 신체는 신비롭다. 인간의 정신은 더더욱 신비롭다. 어떤 사람도 육체를 전부 안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인간의 정신이 어떻다고 단정을 내리는 사람은 경망되기 그지없는 사람이다.
모든 인간은 같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러나 자라면서 특이한 능력이 생긴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갈려진다.
남 탓할 것 없다. 부러워할 것도 없다. 탁월한 능력은 끄집어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노력하고 노력하여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특이한 능력이 툭하고 떨어진다.
이번과 같은 경우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도로 발달된 직감이 형성되고 있다. 이를 개발시키면 사전에 위험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느낌은 상당히 심각하다. 지금까지 맞서온 전사관을 모두 합쳐도 중일관의 위험에는 비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가면 안 된다. 이것이 중일관의 정화!’
이제야 조금 설명이 된다.
굽이를 돌면 중일관의 정화가 나타난다. 이건 틀림없다.
사고력을 절반쯤 상실한 사람은 위험도 느끼지 못한 채 굽이를 돌 것이 틀림없다.
결과는 불 보듯 뻔하다. 중일관의 정화에 대항조차 변변히 하지 못하고 당하리라.
이것이 환상미로진인가? 구절환각산을 이용한 진법, 그리고 다가올 위험.
하나 나아가지 않을 도리도 없다. 어떻게든 나아가야 한다.
“후웁! 후웁! 후웁!”
숨을 조절해서 공포로 물든 가슴을 진정시켰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감쌌다. 어떤 함정이 기다릴지 모르지만 머리만은 보호해야 한다.
‘하나, 둘, 셋!’
누구와 호흡을 맞추는 것도 아니고 홀로 움직이는데 굳이 셋까지 셀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세었다. 공포로 물든 마음에 용기를 북돋워 줄 필요가 있었다.
소립파는 셋을 셈과 동시에 앞으로 뛰쳐 나갔다. 순간!
파앗! 스각! 싸아악……!
어찌 된 영문인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팔에서, 다리에서, 몸통에서, 등에서 극심한 통증이 치밀었다.
미처 명뇌인을 펼치기도 전,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뭐야!’
가위로 썰린 느낌이다. 쾌도가 스쳐 간 것 같다.
북천신검의 천광일섬이 빛보다 빠르다지만 이보다 빠르지는 않을 것 같다.
사각! 파아아앗! 퍼억!
상처는 끊임없이 생겼다. 녹광성초와 생혈침으로 단단해진 살갗이 종잇조각처럼 베여져 나갔다. 그리고 베여진 곳에서는 붉은 피가 샘처럼 솟구쳤다.
파파팟! 사악! 써걱!
숨 돌릴 틈도 없었다. 수십 명이 빙 둘러서서 마구 칼질을 해댈 때처럼 정신없이 베이고 또 베였다.
옆으로 한 발을 옮겼다.
한 발을 옮기는 데 상처가 무려 서른 군데도 넘게 생겼다. 일정 부위도 아니고 전신이 공격 대상이었다. 옆으로 움직였다고 달라진 것도 없다. 미지의 칼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베어왔다.
파파파파팟!
종아리가 큼지막하게 베어졌다. 허벅지도 갈라졌고, 무릎 인대도 끊어졌다.
“큭! 크윽!”
소립파는 단말마를 내지르며 풀썩 무릎을 꿇었다.
퍽퍽퍽! 써걱! 싸아악!
살을 갈라내는 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자신의 살이 아니라 소고기나 돼지고기가 썰리는 소리다.
‘미치겠군.’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못 된다. 어떻게든 이번 공격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떤 공격인지 궁금해해서는 안 된다. 그럴 정신이 있으면 피하는 데 써야 한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몸을 바닥에 뉘였다. 그리고 데굴데굴 굴렀다.
미지의 칼날은 눈이라도 달린 듯 정확하게 쫓아왔다.
갈라내고, 썰고, 베어내고…….
굽이를 돌고 숨 몇 번 몰아쉴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성한 곳이 없다. 혈인이라는 말은 진정 이럴 때 써야 하지 않을까?
이리 굴러도 보고 저리 굴러도 보았지만 상처는 수십 개씩 무더기로 생겨났다.
그래도 기었다.
초인적인 인내심? 아니다. 칼날이 백여 개쯤 몸을 훑고 지나간 후에야 간신히 명뇌인을 펼칠 수 있었다.
몸뚱이에 작열하는 칼날은 무 토막을 썰어대는 것과 같다.
마음대로 두들기라지.
구르고 또 굴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바깥에서 들어왔으니 안으로 들어가면 된다. 중일관은 끝나게 되어 있다. 중일관이 끝난 후에도 살아 있을지, 살아 있으면 움직일 수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의 행동이다.
등이 찍혔다. 가슴도 맞았다.
복부가 갈라지고, 갈비뼈가 베어졌다.
구르는 동작은 기는 동작으로 바뀌었다.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끌어당겼다.
명뇌인으로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 해도 힘을 잃어가는 육신까지 조절할 수는 없었다.
파팟! 파팟!
등에서 허리로, 허리에서 허벅지로,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베어지는 부위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끝났어. 이겼어.’
지독히 암울한 통로였지만 기어이 견뎌냈다.
눈으로 확인한 건 아니다. 만공심안을 펼칠 기력도 없다. 적멸주나 마령음 역시 못하겠다. 숨쉬기조차 힘든 판에 무엇을 하랴.
그래도 끝났다는 건 느껴진다.
파앗!
중일관은 마지막까지 본분을 다하겠다는 듯 발바닥을 베어냈다.
이젠 정말 끝났다.
움직이지 못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나 공격도 끊겼다.
‘이겨냈어…….’
정신을 잃었다.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제9장 채두호(彩頭好) ― 징조가 좋다
1
옛날, 오귀궁(五鬼宮)에는 다섯 귀신이 살았다.
기관진식에 달통한 논귀(論鬼), 화약 귀신인 뇌귀(雷鬼), 암기술이라면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던 암귀(暗鬼), 독에 미친 독귀(毒鬼), 그리고 잡귀(雜鬼)가 그들이다.
그들이 활약할 당시에 논귀, 뇌귀, 암귀, 독귀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무림에는 이미 네 귀신이 자신하는 절기들로 명성을 쌓은 문파들이 있었고, 네 귀신은 그들 문파를 찾아 무너뜨림으로써 최고수라는 명성을 얻어냈다.
하지만 잡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것저것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해서 잡귀라는 별호를 얻었지만 그를 대표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딱히 대답할 만한 것이 없었으니 참으로 괴이한 인물이다.
무림인들은 잡귀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잡귀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몇 사람이 있다면, 네 귀신뿐이었다.
네 귀신 중 어느 한 사람을 붙잡고 잡귀의 능력이 어느 정도냐고 물으면 오귀의 일원으로 조금도 손색없다는 대답을 듣곤 했다.
그럼 무엇을 그리 잘하느냐 물으면 모든 걸 잘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잡귀의 진가는 비밀에 가려진 채 오귀궁의 몰락과 함께 사라졌다.
잡귀가 심취한 여러 가지 중 하나가 영매술(靈媒術)이다.
무당이 신에 들린 현상을 분석하고자 연구를 시작했지만, 중도에서 내용이 변질되어 그만의 영매술이 탄생하게 되었다.
영매술이라고 해서 무당이 하는 것처럼 귀신에 쓰인다거나 귀신의 말을 전하는 그런 류의 영매술이 아니라 철저히 무인의 입장에서 정신을 분석한 것이다.
잡귀는 무의식이 육신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냈고,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이 잡귀의 영매술이다.
동물은 몸 상태에 따라서 외부의 생물과 동물을 끌어들이기도 하고 내뱉기도 한다.
상처가 생겨 곪은 곳에는 파리가 들끓는다. 땀을 흘리면 병균을 불러들이고, 극단적으로 죽은 사람의 몸에는 구더기가 들끓는다.
잡귀는 정신의 힘으로 이러한 몸 상태를 만드는 것에 집중했고, 완성된 정신의 힘을 영매술이라고 일컬었다.
이는 소립파의 명뇌인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명뇌인이 신경을 차단하여 고통을 망각시키는 심학(心學)이라면, 영매술은 오장육부의 활동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해서 원하는 몸을 만든다는 게 다르다.
소립파는 정신을 놓기 전에 별다를 것이 없기도 하고, 특별할 수도 있는 영매술을 펼쳤다.
정신을 잃었어도 장기는 활발하게 움직이며 원하는 물질을 내놨다.
체액(體液)이 평소보다 수십 배는 많이 흘러나와 상처를 도포했다. 몸 안에서는 면역이 극대화되어 스며들어 온 병균을 죽였다.
그의 몸은 퉁퉁 부어올랐다. 하루 이틀쯤 지나야 생길 고름이 일다경 만에 생겼다.
몸은 자신의 상처를 안다. 자체적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정확히 파악해 냈다.
중일관에서 생긴 상처는 치명적이랄 수 있다.
명의의 치료를 받으며 일 년쯤 정양해도 정상으로 돌아올지 의문스럽다.
이럴 때 조절된 무의식은 몸 자체를 계곡으로 만든다.
계곡은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산꼭대기에서 생긴 물은 계곡으로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산에서 계곡으로 모인다.
몸은 주위에 도움을 청한다.
바위에게, 흙에게, 벌레들에게…… 몸에서 뿜어져 나온 채액은 냄새를 풍겨 벌레를 꼬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