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47
147
벌레는 고름을 갉아먹는 대신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타액이나 채액을 쏟아낸다.
바위, 나무, 흙, 풀…… 산천초목의 기운도 받아들인다. 무인들이 하듯이 진기를 운용하여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몸 자체가 땀구멍을 통해 흡수한다.
소립파는 엉금엉금 기었다.
영매술을 펼쳐 놓은 덕분에 상처가 많이 아물기는 했지만 지혈시키는 정도에 그쳤다. 그나마 영매술이 있기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과다출혈로 죽었을 게다.
금창약도 바르고, 붕대도 바르고…… 상처가 곪지 않게 주의하면서 정양을 해야 한다.
배부른 소리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나.
온 힘을 쥐어짜내 몸을 움직였다. 공격은 그쳤지만 안심할 수 없는 곳이다.
지혈된 상처가 터지며 붉은 피를 쏟아냈다. 더군다나 팔에도,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기어가는 것조차 용이하지 못했다.
너무 심하게 베였다. 근육은 많이 손상되었고, 힘줄도 성하지 않은 것 같다. 명뇌인을 펼치고 있어서 감지하지 못하지만 잘려져 나간 뼈도 있는 것 같다.
이래저래 사람 구실하기는 틀린 모양.
손끝에 석벽이 만져졌다.
드디어 중일관 함정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이 정도면 함정의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소립파는 다시 혼절했다.
시신이 꿈틀거렸다.
경련은 분명히 아니었다. 움직일 수 없는 근육까지 뒤틀리는 걸 보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맞다.
돌판에 올려진 고기처럼 펄쩍 뛰기도 했다.
“끄으으으으……!”
시신이 비명을 토해냈다.
죽은 사람마저 비명을 토해내게 만드는 아픔이란 어떤 것일까?
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입에서는 거품이 뿜어졌다. 코와 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시신은 뼈 없는 문어처럼 축 늘어졌다.
푸른 초원은 참으로 평화로웠다.
평생 집이란 것을 모르고 살았다.
동가숙서가식(東家宿西家食)이 몸에 배었다. 길을 가다 피곤하면 드러누워 잤고, 배고프면 아무것이나 먹었다. 벌레도 먹어봤고, 들풀도 먹었다. 헛간에서도 잤고, 논둑에서도 잤다.
그러면서 많은 것을 보았다. 더러운 세상사도 많이 보았지만, 수려한 풍경은 더 많이 보았다.
푸른 초원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단연 압도적이다.
이보다 아름다운 곳은 많았지만 이보다 평화로운 곳은 없었다.
따뜻한 날씨, 살랑대는 미풍(微風).
소립파는 두 팔을 벌리고 불어오는 바람을 실컷 만끽했다.
자유, 평화, 행복, 황홀…….
한데 초원 한쪽에서 상처 입은 호랑이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찢어지고 갈라진 상처가 멀리서도 뚜렷이 보인다. 붉은 피를 줄줄 흘리며 걷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다.
호랑이가 나타났으면 무서워야 당연한데, 안쓰럽다.
으헝!
느닷없이 뒤쪽에서 호랑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또 다른 호랑이가 나타났다.
이번 호랑이도 심한 상처를 입었다. 어디서 이토록 처참한 상처를 입었을까?
아직까지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용하다 싶을 정도다.
두 호랑이는 서로 상대 호랑이가 눈에 거슬리는지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적의는 곧 살기로 바뀌었다.
초원에 폭풍이 분다. 비바람이 천둥 번개를 몰고 온다. 장대비는 초원을 진흙탕으로 만들었다.
두 호랑이는 소립파를 가운데 두고 맴을 돌았다.
소립파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더니 두 호랑이 싸움에 산 먹이가 될 판이다.
으릉! 으르릉!
호랑이들은 끝없이 빙빙 돌았다.
가운데 서 있던 소립파도 긴장이 풀렸다.
호랑이들은 공포만 조성했지 싸울 것 같지 않다. 그럴 바에는 상처도 심한데 가만히 앉아 있을 것이지 움직이기는 왜 움직인단 말인가. 움직일수록 기력만 빠져나갈 텐데.
소립파는 두 호랑이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서 옆으로 한 걸음 떼어놓았다.
호랑이들이 반응하지 않는다면 완전히 빠져나갈 생각이다. 한데!
으헝! 으르릉! 으헝!
소립파의 움직임이 공격 신호라도 되는 양 두 호랑이는 거세게 달려들어 물어뜯고 할퀴어댔다.
쉭! 쉭! 퍽퍽! 퍽!
호랑이들은 붙었다가는 떨어지고, 떨어졌다가는 다시 붙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두 호랑이의 몸에는 새로운 상처가 늘어났다.
이러다가는 둘 다 죽고 만다.
우우우! 우우우우!
마령음을 토해냈다.
기실 마령음이나 적멸주는 인간보다는 동물들에게 더 잘 통한다. 인간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지만 동물들은 소리를 알아듣고 즉시 반응한다.
두 호랑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한 놈이 달려들어 목을 물려고 하자 다른 놈이 살짝 피하며 앞발로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두 호랑이의 싸움은 무공 고수들의 결전 못지않게 격렬했으며, 빠르고 위력있었다.
가아아아아!
적멸주도 썼다. 동물들에게는 적멸주보다 마령음이 더 효과적인데 어쩐 일로 마령음이 통하지 않는다.
적멸주도 소용없다.
호랑이 한 마리가 앞머리를 가격당해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하지만 그냥 당하지는 않았다. 일격을 맞는 순간에 앞발을 휘둘러 어깻죽지를 찢었다.
호랑이들은 죽기 살기로 싸웠다. 둘 중에 하나가 죽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필사적이었다.
마령음도 소용없고, 적멸주도 통하지 않는다면 더 해볼 게 없다. 이제는 두 호랑이 중 한 마리가 죽을 때까지 지켜보는 것만 남았다.
마지막으로 환희마소는 어떨까?
피 튀기며 싸우는 호랑이 사이로 파고들어서 씩 웃어줘? 죽으려면 뭔 짓인들 못할까.
그런데 소립파는 호랑이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미친 짓이야. 가지 마.’
소립파는 실소를 터뜨렸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는 행동이었다. 피 냄새가 풀풀 풍기는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두 다리가 신기하게 여겨졌다.
기이한 일은 또 있다.
소립파가 다가가자 두 호랑이는 싸움을 멈추고 맴을 돌았다. 소립파는 중심에 두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서로를 노려보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허! 이놈들, 이제 보니 물과 기름이네. 내가 둘 사이를 갈라놓는 완충지대란 말이지.”
이제는 호랑이들이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귀엽고 측은했다. 할 수 있다면 가까이 불러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싶었다.
한데 호랑이들은 그것만은 용납하지 않았다.
소립파가 조금이라도 움찔거리면 서로에게 달려들려고 도약을 준비했다.
“이놈들아, 좋다. 배짱은 너희만 있는 게 아냐. 그래, 우리 끝까지 해보자.”
소립파는 호랑이 사이에 털썩 주저앉았다.
으르릉!
상처 입은 호랑이가 코앞에 이빨을 들이대며 침을 흘렸다.
소립파는 웃었다. 만공심안, 적멸주, 마령음, 환희마소…… 모든 것을 다 잊고 그냥 환히 웃었다.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선(善)이며, 미(美)였다.
호랑이도 웃었다. 활짝!
‘호…… 랑이가 웃어?’
소립파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 두 호랑이는 최후의 결전을 시작했다.
쉬익! 쉭!
동시에 허공으로 도약한 두 호랑이는 소립파의 머리 위에서 얽혔다. 미처 말릴 틈도 없었다. 그저 어어, 하며 당황하는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목이 정통으로 물렸다. 강력한 앞발은 정수리를 정확히 가격했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사생결단(死生決斷).
으르렁거림도 없었고 살기도 드러내지 않았다. 두 호랑이는 일격에 상대를 끝내고 있었지만, 실은 상대의 일격에 자신을 내주고 있었다. 이제 그만 편안해지고 싶다는 듯이.
퍽! 퍼억!
두 호랑이는 고스란히 소립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천 근 거암이 떨어진 듯했다. 머리가 부서지고 배가 터져 창자가 쏟아지는 줄 알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람.’
눈이 떠졌다.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커먼 어둠뿐이다. 볼에 돌바닥의 차디찬 감촉이 느껴진다.
‘내가 왜 여기에…….’
기억은 금방 얼마 전의 현실을 되찾아주었다.
지독했던 공격, 도무지 피할 곳이 없던 악몽(惡夢).
‘훗! 살았군.’
별다른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없었다. 눈이 떠지고 돌바닥이 만져지니 살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 이대로 깊은 잠에 빠지고 싶었다.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눈에 보이기에 하는 행동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한데,
“끄응!”
신음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손가락에서 불길이 일어난다. 뼈란 뼈는 모두 부서졌는지 조금 꼼지락거렸을 뿐인데 머리끝이 쭈빗 선다.
갑자기 정신이 활짝 열렸다.
그렇구나! 이곳이 중일관이구나! 악몽이 현실이었구나! 온몸이 난자당했는데, 그것도 사실이구나!
비로소 눈을 뜬 게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처참하게 당했는데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다니.
“끄응!”
전신에 힘을 주었다. 일어나야 하지 않겠나. 하지만 벼락이 내리치는 듯한 통증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관통하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쩔쩔맸다.
‘명뇌인! 명뇌인!’
왜 명뇌인까지 잊어버렸을까.
“후웁! 후웁! 후웁……!”
급하게 숨부터 골랐다. 명뇌인을 펼치려면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명경지수(明鏡止水)로 만들어야 한다.
입을 벌렸다. 그리고 소리를 냈다.
가아아아아……!
가장 빨리, 가장 쉽게 명뇌인으로 들어가는 길은 자신에게 적멸주를 펼치는 방법뿐이다.
제일 먼저 몸부터 둘러봐야 했다. 얼마나 다쳤나, 어느 정도로 중한 상태인가.
결과는 당장 의원의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중하다는 것이다.
잡귀의 영매술이 아니었다면 일어나지도 못할 뻔했다. 아니, 영매술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영매술이 아니었다면 혼절을 끝으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으리라.
한데…… 이상한 게 있다.
호랑이 두 마리가 자꾸 떠오른다. 혼절 중에 꿈을 꾼 것 같은데, 현실처럼 너무 생생하다. 포효하는 모습하며, 싸우던 모습, 상처에서 흘리던 피까지 뚜렷하게 되살아난다.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냈다.
움직여야 하는데, 여기 머물러 있을 수는 없는데…… 가지고 있는 금창약이라야 팔 하나 바르면 동이 날 분량밖에 안 된다.
보아하니 무신들은 아직도 중일관을 통과하지 못한 것 같다. 서군봉과 강금산도 그렇고. 그들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나? 적멸주를 펼치면 그들을 이곳으로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싫다. 그들과 함께하기가 싫다.
웃으면서 등을 때리는 사람들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상종하지 못할 인간들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고, 의리가 있고, 믿음이 있으니 사람인 게다. 무림인이 범인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무인에게는 무(武)가 있고, 협(俠)이 있다.
무신들에게는 무는 있을지언정 협이 없다. 차라리 마인들이 낫다. 마인들에게는 정도인에게서 찾을 수 없는 무협이 있다.
싫다.
‘어떻게 되겠지.’
무인들처럼 운공조식을 할 수 있으면 한결 도움이 될 텐데…….
그때다. 소립파는 호랑이들을 또 떠올렸다.
‘호랑…… 이 둘! 자오법신!’
생각이 들자 즉시 몸을 관조(觀照)했다. 진기를 운행하지는 못하지만 들여다보는 것까지 못하지는 않는다.
과연! 과연! 과연이다!
몸을 양분하고 있던 자오법신이 사라졌다. 한쪽은 음기가, 다른 한쪽은 양기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꿈이 아니었다. 혼절 중에 자오법신이 뒤섞였다.
꿈은 기(氣)를 보지 못한다. 그런 연유로 음기, 양기를 호랑이라는 동물로 조형(造形)시켰다.
어찌 된 일인가. 왜 갑자기 자오법신이 합쳐진 것일까? 저주의 자오법신이 이토록 간단하게 깨진 원인이 어디 있을까.
꿈에 보았던 호랑이를 잘 관찰하면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게다.
소립파는 생각을 집중했다. 망각된 기억 속으로 들어가 지난 꿈을 되살렸다.
상처 입은 호랑이. 그렇다. 호랑이는 처음 나타날 때부터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자오법신이 상처를 입었다. 어디서?
제사관의 폭약 때문일 수도 있다. 중일관에서 천참만륙당한 것 때문일 수도……
아! 그것 때문이다. 중일관의 살법(殺法)은 육신뿐만이 아니라 기맥(氣脈)까지 끊어냈다.
앞뒤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잘라냈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던 두 세력이 느닷없이 쳐온 칼날에 풍비박산(風飛雹散)난 것이다.
산산조각 나서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두 기운은 미지근한 물끼리 섞이듯 별다른 저항 없이 섞이고 말았다.
저주의 자오법신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이 이것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루로 만들어 버리는 곳에서 부서지면 죽는 거고, 부서졌다 다시 태어나면 산다고 했다.
멸신구관이 아닌 밖에서는 하지 못할 치료다.
누군가에게 치료 목적으로 기맥을 끊어달라고 부탁하면 어떨까? 안 된다. 누구도 송장이 다 되도록 칼질을 하지는 못한다. 잔혹한 심성을 지닌 마인들도 이런 치료는 못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완전히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수족을 쓰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같은 것은 아예 집어치워야 한다. 반신불수가 될지도 모른다, 백치(白痴)가 될지도 모른다, 정말 죽을 것이다…… 이런 모든 염려를 완전히 버리고 인정사정없이 칼질을 해대야만 가능하다.
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까?
멸신구관은 한다. 사람이 아니라 기관이기 때문에 인정이라는 것이 없다.
‘저주를 벗겨냈어. 그럼 이제 빠져나가기만 하면…….’
멸신구관의 기연 따위는 관심없다. 그런 것에 연연했으면 아무도 모르고 있을 때 혼자 들어왔을 게다. 그럴 기회는 수천 번도 넘게 있었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되었으니까.
저주의 자오법신이 아니었다면 멸신구관을 찾는 일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