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51
151
마야 7
이육위호(以肉喂虎) ― 고기를 먹여 호랑이를 키우다
제1장 전굴륭(填窟窿) ― 구멍을 메우다
1
몸이 딱딱하게 굳어져 움직일 수 없었다. 앞으로 나갈 수 없으면 뒤로라도 물러서야 하는데 발바닥이 땅에 붙어버려 그조차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후사관 제일관이 주는 공포는 그만큼 지독했다.
흡혈고인(吸血孤蚓)은 피를 빨아먹는 지렁이다. 거머리는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빨지만, 흡혈고인은 살 속으로 파고들어 가서 혈관을 안방 삼아 누비고 다닌다.
혈관은 흡혈고인의 번식 장소가 된다.
피는 양식이 된다.
거머리는 떼어내면 된다. 하나 흡혈고인은 죽이거나 떼어낼 방도가 없다.
흡혈고인에 당하면 한두 시진 동안 극심한 현기증에 시달리게 된다.
유언이 있으면 이때 해야 한다. 못다 한 일이 있으면 머리가 빙글빙글 돌지만 이때 끝내야 한다.
한두 시진이 경과하면 현기증조차 느끼지 못한다.
혈관이 막혀 의식을 잃게 되며, 이후부터는 인간의 껍데기만 뒤집어쓴 고깃덩이로 전락한다.
하지만 쉽게 죽지는 않는다.
흡혈고인은 몸에서 유백색의 점액을 흘려내는데, 이것을 마유(魔油)라고 부른다.
마유는 피에 섞여 심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심장의 생명력을 지속시켜서 가능한 오래도록 피를 뿜어내게 만든다.
뇌는 죽어버렸는데 심장은 살아서 움직이는 인간.
흡혈고인에 당해서 반사(半死) 상태에 빠진 사람 중 한 번이라도 깨어난 사람은 없다.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을 만큼 바짝 마른 장작이 될 때까지 한낱 미물에게 육신을 제공하다가 숨을 거둔다.
이곳은 흡혈고인 천지다.
걸음을 떼어놓는다는 것은 흡혈고인이 우글거리는 곳에 몸을 들이미는 것과도 같다.
흡혈고인은 실보다 가늘며 색깔은 투명하다.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곤란하다. 하물며 이토록 주위가 산만하고 어두운 곳이라면 눈앞에서 살을 파고들어도 알지 못한다.
소립파는 부산히 생각을 거듭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지식들 중에서 흡혈고인에 관한 것이라면 먼지만 한 것도 모두 끄집어냈다.
피를 빨 동물이 없을 때, 흡혈고인은 다른 지렁이들처럼 땅에서 먹이를 흡수하며 살아간다. 그러다 동물만 나타나면 전혀 다른 개체인 듯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걸어갔을까?
흡혈고인에 당했을까?
소립파는 숨소리까지 죽였다. 흡혈고인을 자극할 것 같아서다.
그가 서 있는 곳도 안전하지 않다. 흡혈고인이 예고하고 달려드는 놈이던가.
가만히 서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안일한 태도는 아닐까?
흡혈고인은 상당히 넓게 분포되어 있다. 광목으로 이뤄진 굴 전체가 흡혈고인으로 빽빽하다. 앞에, 옆에…… 그리고 걸어왔던 길, 뒤 역시 흡혈고인이 꿈틀거린다.
흡혈고인에게 포위당한 것이다. 아니, 흡혈고인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태연히 걸어 들어왔다.
벌써 당한 건 아닐지.
그런 생각을 하자 몸속에 지렁이가 꿈틀거리는 듯해서 온몸이 근질거렸다.
‘이걸 어떻게 빠져나가나…….’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소립파는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차분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방법이 없다면 운에 맡기는 거야.’
반 시진 정도 더 걷자 흙으로 이뤄진 굴이 끝나고 석굴이 나타났다.
“휴우!”
안도의 한숨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흡혈고인이 살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은 없었다.
약간 따끔한 느낌, 조금 간지러운 느낌, 혹은 나뭇잎이 살짝 닿은 것 같은 느낌이라도 있을까 싶었는데 어떤 느낌도 감지하지 못했다.
흡혈고인에게서 완전히 벗어난 것일까?
자신하지는 못했다. 흡혈고인에게 당하는 느낌이 구구각색인 것처럼 당한 후의 증상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사람이 없다. 흡혈고인이라는 것이 말로만 전해질 뿐, 인세에 나타난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흙 굴이 끝났으니 다행이다.
소립파는 한달음에 석굴로 뛰어들었다. 한데,
“흑!”
급하게 튀어나온 헛바람이 발목까지 붙들었다.
어두컴컴한 곳, 햇볕 한 점 들지 않는 곳…… 그곳에 새까만 곰팡이가 빼곡했다.
미염흑매(微髥黑댈)란 놈이다.
미염흑매의 특징은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새까맣다. 수염 같은 게 살랑거린다. 돌에서 자란다. 냄새가 전혀 없다. 곰팡이라면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데 미염흑매는 아무런 냄새도 풍기지 않는다.
어두컴컴한 석굴에 시커멓고 냄새조차 없는 곰팡이가 피어 있으니 식별해 낼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될까.
소립파도 만공심안이 아니었다면 보지 못할 뻔했다.
‘미, 미염흑매가 이런 곳에…….’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할까? 흡혈고인에서 벗어나자마자 미염흑매라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미염흑매는 돌에 붙어 있는 것 같지만 허공을 부유하고 있다. 입을 벌리면 입 안에 침착되고, 숨을 쉬면 코로 흡입된다.
그 순간부터 지옥보다도 더한 고통이 시작된다.
고통? 육체가 받는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다. 검에 베이거나 화살을 맞는 고통이 훨씬 크다.
미염흑매는 살을 썩힐 뿐이다. 시간을 두고 서서히…… 미염흑매로 인해 죽기까지는 무려 이십 년이 걸린다고 하니 치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문제는 몰골이 나병 환자보다 더 지독하게 변한다는 것이다. 온몸에서 동시에 부패가 진행되면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편하다고 느끼게 된다.
미염흑매의 무서운 점은 또 있다.
가공할 번식력이다.
옆에 동물이 있으면 동물에게, 사람이 있으면 사람에게 전염된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공기를 타고 전해진다.
미염흑매에 걸린 사람은 심신산골에 혼자 숨어 살아야 한다. 미염흑매에 걸린 사람이 민가에 나타나면…… 최고의 방책은 멀리서 화살을 쏘거나 돌을 던져 때려죽이는 것이다.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 많은 사람이 중독되니 어쩔 수 없다.
흡혈고인이 살을 뚫고 들어왔는지 어쩐지는 모른다. 하지만 미염흑매에 중독된 것만은 틀림없다. 미염흑매를 눈으로 보았을 때는 이미 중독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오직 이 길뿐이다. 오는 동안 앞서 간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으니 이미 이 길을 지나갔다고 봐야 한다.
마음을 크게 열어 만공심안을 더욱 밝게 했다.
미염흑매는 바닥에도 가득했다. 그리고 검은 융단 위에 확실하게 찍힌 발자국이 보였다.
‘안…… 돼!’
사단이 크게 벌어졌다.
밖에 나가면 무신들을 죽일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자유분방하게 돌아다닐 것이고,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들을 이곳에 잡아놔야 한다. 가능하다면 모두 죽이는 것이 상책이고, 불가능해도 묶어놓기는 해야 한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이제 바깥세상과는 안녕이다. 많은 사람이 보고 싶을 테지만, 그들을 위한다면 고독을 삭혀야 한다.
흡혈고인처럼 미염흑매 역시 치료약이 없다.
무신들을 빨리 쫓아가야 한다는 조급함과 영원히 멸신구관에서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어우러졌다.
‘차라리 흡혈고인에 중독되는 게 낫겠어.’
소립파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미염흑매를 무더기로 들이마시며 뛰고 또 뛰었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살이 찢어지는 느낌이었지만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무신들, 서군봉과 강금산을 빨리 만나야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우선 만나고 볼 일이다.
마음은 무척 급했다. 하지만 달리기는 이제 그만 멈춰야만 한다.
“으음……!”
달리던 그대로 무릎이 풀썩 꿇렸다.
갑자기 제동이 걸린 몸은 생명 잃은 나무토막처럼 내동댕이쳐져서 데굴데굴 굴렀다.
발에 무엇이 걸린 것은 아니다. 숨이 차지도 않다. 중일관에서 얻은 상처 때문도 아니다.
어지럽다. 현기증이 치민다. 보이는 것은 어둠뿐이지만 세상이 빙글빙글 돈다.
흡혈고인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증상이다.
‘이젠 다 끝났어.’
소립파는 엎어진 상태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세상이 평온해졌다. 미염흑매뿐인 어두컴컴한 석굴도 세상 그 어느 곳보다 아늑했다.
현기증은 한두 시진 정도 지속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영원한 침묵이 지속된다. 몸은 살아 있겠지만 두 번 다시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일은 없으리라.
이제 미염흑매에 중독된 저들은 세상 사람들 몫이 되었다. 저들이 날뛰며 다니게 만들든 때려죽이든 세상 사람들이 결정해야 한다.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갔다.
너무 짧게 살았다. 억울하다. 머릿속에 든 것은 많은데 마음껏 펼쳐 내지를 못했다. 억울하다. 진기를 운용할 수만 있었어도 무신에 버금가는 무공을 펼쳤을 텐데, 그놈의 절맥이…… 너무 억울하다.
아니다. 그만하면 됐다. 영원히 사는 사람이 있던가. 잠깐 스치듯 지나가는 것이 세상살이다.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하지만 경험은 경험으로만 그칠 뿐, 풀어내는 것은 거의 없다.
경험만 하다가 가는 게 삶이다.
많은 경험을 했다. 됐지 않나.
몸이 깊은 나락으로 침몰했다. 머리 뒤쪽에 깊은 호수가 있어서 자꾸만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어지럽다는 것…… 세상이 빙빙 도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군.’
갑자기 할 일이 없어졌다.
삶을 향해 지독하게 달리다가 뚝 멈추고 나니 무엇을 향해 달렸는지 모르게 되었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현기증을 즐겼다.
한두 시진…… 짧게는 한 시진이고 길게는 두 시진이다. 책 한 권도 읽을 수 없는 시간이면서 낮잠을 푹 잘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지럼증에 어느 정도 적응되자 자연스럽게 흡혈고인이 어떤 놈인지 호기심이 치밀었다.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몸을 파고들었다.
몇 마리나 들어왔을까? 벌써 알을 낳기 시작했을까? 혈관은 어느 정도나 막혔을까?
만공심안을 몸 안으로 돌려 혈관을 지켜봤다.
진기를 한 바퀴 돌려보면 간단히 파악할 일이지만 소립파는 머리를 활짝 열고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혀 몸 안의 광경이 환히 보일 때까지 기다렸다.
동맥과 정맥이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제 혈관을 보자. 심장에서부터 폐로, 동맥으로, 혈관으로, 정맥으로, 그리고 다시 심장으로…… 피가 흐르는 경로를 따라가며 이질적인 물체가 붙어 있는지 살폈다.
처음 한 바퀴 돌아봤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두 번째로 살펴봤을 때도 감지되는 건 없었다.
‘흡혈고인이 예상외로 작군.’
심안을 더욱 밝게 밝혀야 한다. 급한 마음을 버리고 여유있게 살펴봐야 한다.
‘급한 것도 없잖아.’
세 번째 만공심안을 전개했을 때, 머리카락보다도 가느다란 이물질이 걸려들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의외로 많다. 이토록 많은 지렁이가 몸에 들어와 있던가 하고 스스로도 놀랐다.
사십 마리가 넘고, 오십 마리도 넘고…… 중간에 몇 마리는 헤아리지도 못한 채 백 마리를 넘어섰다.
정녕 놀랄 일이다. 이토록 많은 지렁이가 몸 안으로 들어왔는데 아무 느낌도 없었다니.
흡혈고인의 움직임이 비교적 세세하게 보였다.
지렁이는 체절(體節)이 백에서 백오십 마디 정도 된다. 하지만 종류만 삼천 종을 넘어가듯이 체절 역시 각기 다르다. 어떤 놈은 스무 마디에도 못 미치고, 어떤 놈은 이백 마디를 훌쩍 넘긴다.
흡혈고인은 십에서 십오 마디 정도 되니 비교적 움직임이 둔한 편이다. 뿌리를 내린 곳에서 좀체 움직이는 일이 없다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한 가지 특이한 사항도 알아냈다.
책에서는 흡혈고인이 마유를 뿜어낸다고 했다. 마유가 심장을 자극하여 끊임없이 피를 뿜어내게 한다고 적혀 있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지렁이는 숨구멍이 따로 없다. 그래서 몸으로 피부호흡을 한다.
흡혈고인처럼 피를 즐기는 종류는 액체 속에 들어 있으니 피부호흡을 할 수 없게 된다.
마유는 피 속에서도 피부호흡을 할 수 있게 해주는 흡혈고인의 생명줄이다.
반질거리는 기름을 뿜어내 피와 몸 사이에 옅은 막을 형성시키고, 그 안에 공기를 가둬둠으로써 몇 날 며칠을 살 수 있게 된다.
한데 빠른 속도로 흐르는 피가 흡혈고인이 쳐둔 장막을 걷어가 버린다. 흡혈고인에게는 생명줄을 빼앗긴 셈이 된다.
흡혈고인이 마유를 내뿜는 것이 아니라 피가 마유를 빼앗아 오는 것이다.
흡혈고인은 살기 위해서 혈관에 붙어 있지 못하고 피부 밖으로 나갔다가 공기를 머금고 다시 돌아온다. 마유를 뿜어내 공기를 가두고, 피가 또 쓸어가면 다시 피부 밖으로 나갔다 들어오고……
흡혈고인은 같은 일을 계속 반복하고 있다.
만약 이런 경우가 아니라 혈관에 딱 붙어 있는 경우라면 엄청난 속도로 피를 빨아대는 바람에 한두 시진은커녕 반 시진도 버티지 못하고 혼절했을 게다.
들어오고 나가고, 또 들어오고…… 흡혈고인들은 소림파의 몸을 제집 안방처럼 들락거렸다. 그리고 소립파는 이러한 움직임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흡혈고인에 관해 책에 적힌 내용들은 대폭 수정되어야 한다.
지렁이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한 번에 피를 얼마씩 빨아먹으며, 알은 어디에 어떻게 낳는지…… 모든 것을 지켜볼 심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