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55
155
강금산은 무슨 생각인지 순순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을 취했다.
강금산은 원기왕성했다. 한 번의 운공조식이 그를 죽음에서 끌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옛날의 그로 되돌려놓았다.
그가 주위를 돌아보다가 말했다.
“이런 곳에서도 마음껏 활보하다니 괴물이 따로 없군.”
“입 다물어.”
“후후!”
“웃지도 마라. 이 석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 가급적이면 숨도 쉬지 마.”
소립파는 강금산을 위해서 끊임없이 음양이기를 순환시켜야 했다.
나쁘거나 힘든 일은 아니다. 진기를 운용할수록 독단이 강성해지니 오히려 도움이 된다. 하지만 효과가 미약하다. 남아 있는 미염흑매는 솜털 같은 것들뿐이라서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혼자였으면 부풍약영을 최대한으로 펼쳐서 빨리 지나가는 쪽을 택했으리라.
“이 안에 있는 게 미염흑매라던데, 맞나?”
“…….”
“이백(二伯)이 그러더군, 미염흑매라고. 먼저 지나왔던 굴에는 흡혈고인이 깔려 있었고. 후후후! 흡혈고인에 미염흑매라. 나 같은 사람은 더 들어가지 말란 소리지.”
강금산은 죽음이 두렵지 않은지, 아니면 소립파를 믿는지 태연히 입을 놀렸다.
“하나만 묻자. 내 몸에 들어온 흡혈고인은 어떻게 제거한 거냐? 미염흑매도 그렇고. 흑침무를 제거한 수법은 뭐야?”
“…….”
“그럼 이런 질문은 어때? 일견후즉파라고 했나? 네가 보기에 우리 집안의 궁술은 어떤 쪽이지? 완벽한가? 아니면 손댈 데가 있나? 아버님과 큰형님의 활도 보았으니 더 이상 보여줄 활은 없어. 어때?”
“넌 입방정 때문에 최소한 다섯 번은 죽었어. 이제 그만 입 다물어.”
소립파는 묵묵히 걸었다.
치료를 끝으로 강금산과는 인연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한데 이 사내는 호기심이 치미는지 끊임없이 말을 걸어온다.
마침내 석굴이 끝났다. 그리고 또 다른 석굴이 나타났다. 빨간색…… 적석(赤石)으로 이뤄진 석굴이다.
“적선태(赤蘚苔)! 흡혈고인, 미염흑매, 적선태! 삼충살육진(三衝殺戮陣)!”
소립파는 이제야 후사관 중 제일관의 정체를 알아냈다.
독관(毒關)이다.
흡혈고인과 미염흑매만으로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거기에 적선태까지 가세하면 곧장 염라대왕과 대면하게 된다.
붉은 이끼, 적선태는 흔하다. 어디서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석굴에 있는 적선태는 남만에서도 오직 추루(?陋)에서만 자라는 해괴한 식물이다.
적선태는 독이 아니다. 인체에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 보통 이끼와 똑같다. 한데 흡혈고인, 미염흑매와 어울리는 순간 상황이 돌변한다.
흡혈고인이 미쳐 날뛴다. 미염흑매의 성장 속도가 수십 배는 빨라져 그림자가 드리워지듯 살이 썩는다.
적선태는 인간의 후각에는 잡히지 않는 향기를 뿜어내고, 그 향기에 유독 예민하게 반응하는 유일한 두 독물(毒物)이 바로 흡혈고인과 미염흑매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
적선태가 내뿜는 향이 두 독물의 번식 능력을 무한정으로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포자 하나가 순식간에 퍼져서 온몸을 뒤덮는다. 흡혈고인 한 마리가 숨 한 번 들이킬 사이에 천여 마리로 불어난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번식 속도다.
다른 독물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오직 흡혈고인과 미염흑매만이 적선태의 향기에 주체하지 못하고 번식한다.
이런 사실을 알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오귀궁의 독귀(毒鬼)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모르는 사실을 단 한 사람만 알았다고 할 때, 그것은 진(陣)이 되고도 남는다. 이른바 삼충살육진이다.
또 오귀다.
멸신구관은 오귀가 만든 것일까?
그럴 가능성도 있다. 자신에게 멸신구관의 입구가 전해진 것도 그 때문일 수 있다.
“삼충살육진.”
소립파는 눈빛을 빛내며 적선태를 쳐다봤다.
2
“뭔지 가르쳐 주겠나?”
강금산은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는지 선뜻 발을 떼어놓지 못했다.
‘삼충살육진’이라고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말에서 죽음의 기운이 섬뜩하게 전달되었으니 철석간장을 가진 강금산이라 한들 마음이 내킬 리 없었다.
“…….”
소립파는 생각에 잠겨 있느라고 강금산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건 아주 신중하게 처리할 문제다.
강금산 같은 경우에는 동네 산보하듯이 유유자적 걸어가면 된다. 적선태는 흡혈고인이나 미염흑매를 지닌 사람에게만 저주를 걸기 때문에 상관없는 사람은 태평해도 무방하다.
소립파의 몸속에는 흡혈고인이 가득 들어 있다. 진액의 형태로, 마유로, 체액으로 바뀌어서 상처를 낫게도 했다. 미염흑매는 더욱 확실하다. 독단이 단전 자리에 틀어박혀 있으니 이를 어쩌랴.
독귀도 미염흑매와 흡혈고인을 가공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흡혈고인을 녹여서 흡수하고, 미염흑매로 독단을 쌓았다고 하면 시신일망정 벌떡 일어나리라.
적선태가 살아 있는 생물이 아니고 가공된 가공물에도 여전히 영향을 미칠까?
영향을 미친다면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격이 된다.
‘번식 능력을 촉진시키는 건…… 살아 있을 때나 가능한 건데. 죽은 것은 번식할 수 없어.’
남이 들으면 미쳤냐고 할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 아닌가. 세상에 죽어서도 번식하는 것이 있던가. 병균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살아 있을 때 번식한다.
손을 뻗어 적선태를 한 움큼 떼어냈다.
스스스슷! 파아앗!
적선태의 기운을 몸 안으로 빨아들였다.
영매술과 외기를 흡입하는 음양이기가 어우러지자 손 안에 있는 적선태는 금방 생기를 빼앗겼다.
이 순간, 소립파의 손은 죽음의 손이다.
적선태는 촌각도 버티지 못하고 앙상한 풀 부스러기가 되어버렸다.
‘됐어! 괜찮아!’
적선태의 생기와 함께 향기도 빨려들었지만 마유와 독단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서군봉은 죽음도 단정한 자세로 맞이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았으며, 두 손은 다리 위에 살포시 올려놓았다. 허리는 벽에 기대어 중심을 잃더라도 무너지지 않도록 조처했다.
안색은 편안했다. 못다 핀 인생에 대해서 애증이 있을 법하건만, 잔잔한 미소를 머금어 한도 원도 없는 편안한 죽음을 보여주었다.
“음……!”
강금산이 뱃속에서부터 쥐어짜인 신음을 토해냈다.
소립파가 삼십여 걸음 전에 본 것을 두어 걸음 앞에서야 본 것이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석굴 속에서는 내공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삼목은 횃불처럼 밝은 빛을 뿜어냈다.
지금도 그렇다. 그는 강금산과 서군봉의 상태를 본인들보다도 더 자세히 알았다.
강금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본인은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얼굴 근육만은 어쩌지 못했다. 어쩌면 캄캄한 어둠 속이라 애써서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고.
‘격정을…… 남의 태자(太子)가 북의 신녀(神女)를 보고 격정을 일으키면…….’
소립파는 강금산의 몸과 마음을 읽어보았다.
심장이 무너진다.
팔과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호흡이 불규칙해졌다.
진기도 흐트러진다. 분노가 이성을 휘감고 있기 때문이다.
‘이건 사랑이군.’
세상사가 이래서 웃기다는 것인가.
강금산과 서군봉이 만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얼마 안 되는 기간 중에도 적과 적이 되어 서로를 무시하던 시간도 있었다.
언제 사랑을 느낄 틈이 있었는가.
무엇보다도 두 사람은 인력으로는 어쩌지 못할 환경 속에 놓여 있다. 북검문과 남도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영원히 적이 되어야 하는 관계다.
두 사람의 사랑은 비련(悲戀)이다.
그때, 강금산이 말을 건네왔다.
“날 치료해 주었는데…… 지금은 안 되겠나?”
장난기가 없다. 툭 던져 보는 소리도 아니다. 진심이 배어 있다. 간절함이 스며 있다.
강금산 같은 사내가 검을 겨눠야 할 적에게 이런 부탁을 할 때는 간도 쓸개도 다 버리는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웬만하면 도와주고 싶다. 하지만 죽은 사람을 살릴 방도는 없다.
소립파가 대답을 하지 않자 강금산이 서군봉을 향해 두 손을 뻗어 어깨를 움켜잡았다. 잡아 일으키려는 듯…… 하나 곧 생각을 바꿨는지 손을 놓았다.
“자네에게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 같은데. 적선태라고 했나? 이 부근에 있는 것만 떼어주지.”
차마 거절할 수 없는 부탁이다. 큰 힘도 들지 않는다.
두 손을 들어 올려 수평으로 쭉 뻗었다.
스스스슷……!
적선태의 생기가 빨려왔다.
사실 적선태의 생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다. 상처를 입었다면 몰라도 완전히 아물어 버린 지금은 쓸모없는 영양분을 과잉 섭취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넘치면 버리는 것이 영매술의 효험.
오른손을 통해서 들어온 기운이 왼손을 통해 빠져나갔다.
한데 기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면도(緬刀)를 만진 것처럼 손끝이 짜릿했다.
착각이 아니다. 계속해서 예리한 칼날에 살점이 잘려 나가는 느낌이 전해진다.
‘살아 있다!’
서군봉이 살아 있다. 확실하다. 적선태의 생기는 밋밋하다. 절대 날카롭지 않다. 날카로운 기운이 전해져 오는 것은 강금산의 경우처럼 서군봉의 내공이 딸려오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삼목에도 잡히지 않은 생기가 존재하다니!
자세가 바뀌었다. 오른손은 여전히 허공을 향해 수평으로 뻗었지만 왼손은 서군봉의 머리 위, 백회혈(百會穴)을 짚었다.
스스스스스……!
적선태의 생기를 극성으로 빨아들였다. 들어온 만큼 빠져나가는 생기는 서군봉의 백회혈로 집어넣었다.
강금산이 다섯 걸음이나 물러섰다.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는 것은 직감으로 느꼈다. 그것도 서군봉에게 일이 벌어졌다.
좋은 현상이다. 죽은 사람에게 일이 생겨봤자 더 나빠질 것이 무엇인가. 일이 생긴다면 좋은 일만 생길 것이다.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 한 걸음이라도 가까이 가서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또 그러려고 했다.
한데 몸은 마음과는 달리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소립파를 중심으로 심상치 않은 와류(渦流)가 형성되었다.
기분 나쁜 바람, 죽음을 부르는 바람.
바람이 몸을 스칠 때마다 왠지 소름이 쭉쭉 끼친다. 죽음을 몰고 온 악마가 몸을 쓰다듬는 것 같다.
도저히 가까이 있을 수 없었다.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나? 무인이 기에 눌려 물러서는 경우도 있나?
상대가 예측을 불허하는 마야이니 가능하다. 그가 하는 일치고 상식 안에서 이뤄진 일은 거의 없다. 늘 상식 밖에서 기상천외한 일만 터뜨린다.
이것 역시 좋은 현상이다. 어쩌면 서군봉이 살아날지도…….
영매술은 주위의 모든 기운을 가리지 않고 뺏어온다.
적선태뿐만이 아니라 서군봉, 강금산의 생기도 흡수한다.
강금산이 다섯 걸음이나 물러선 것은 본능이 시켜서다. 생기를 빼앗기지 않으려면 물러서야 한다는 생존 본능이 몸을 움직였다.
서군봉은 기를 빼앗기기도 했지만 백회혈을 통해 보충되기도 했다.
빼앗기는 기운 속에는 상당량의 독기도 포함되었다.
적선태에 제대로 자극받은 흡혈고인과 미염흑매의 독기는 소립파가 쌓아놓은 독단과 버금갈 정도로 강렬했다.
그녀의 상태는 강금산보다 서너 배는 지독했다.
강금산을 버릴 때만 해도 중독을 알지 못했을 텐데 이토록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니.
미염흑매가 전신에 퍼져 있다. 혈관이 모두 흡혈고인으로 이뤄지지 않았나 싶다.
이게 바로 적선태의 작용이 부른 결과다.
스스스스스……!
시간이 흐를수록 독단의 밀집도가 점점 좁혀졌다.
이는 독단이 쇳덩이처럼 단단해진다는 뜻이며, 내력이 그만큼 중후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서군봉의 몸에서 독기가 빠져나왔다는 말도 된다.
‘틀렸어! 너무 지독해!’
간신히 독기는 빼냈지만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탓에 장기나 뇌 손상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손을 거뒀다.
주위에 있는 적선태는 바짝 말라 바람만 불어도 먼지처럼 부서졌다.
“고맙네.”
강금산이 다가서며 말했다.
“이런 말은 낯간지러워서 묻지 않는 편인데…….”
강금산이 말뜻을 알아들었다.
“나도 몰랐는데, 사랑했던 모양이야.”
강금산이 축 늘어진 서군봉을 안아 들었다.
온기는 없었다. 호흡도 없고, 심장도 뛰지 않는다. 살아 있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믿는다. 소립파가 손을 댔으니 틀림없이 살아 있다.
“쉽지 않을 거야.”
믿도 끝도 없는 말, 강금산은 이번에도 알아들었다.
“얼마나 걸리겠나?”
“…….”
“설마?”
“천기수사의 머리를 이어받았다는 서군봉은 이 세상에 없어. 칠성군의 육신녀도 사라진 셈이지.”
“…….”
“어떤 형태로 깨어날지 장담 못해. 몸도 그렇고. 한두 군데 마비가 올지도.”
“살아만 있으면 돼.”
무엇이 강금산으로 하여금 한 여인에게 푹 빠지게 만들었을까?
사람과 사람의 일을 예단할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일이 사람과 사람의 일이고, 그중에서도 남녀 간의 일이다.
소립파는 강금산을 힐끔 쳐다본 후, 앞서 걸었다.
거대한 석문이 앞을 가로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