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58
158
소립파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군.’
강금산은 소립파를 내버려 두고 등에 업혀 있는 서군봉을 끌어내 상태를 살폈다.
서군봉은 세상모르게 잠이 들었다. 어린아이처럼 새근거리며 잠들어 있는 모습이 무척 편안해 보인다.
‘됐어.’
그 지독하던 열기에 머리카락 한 올 손상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솜처럼 보드라운 피부가 그을리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정신을 차렸으면 배도 고프고 덥기도 했을 텐데, 아무것도 모르고 잠이 들었으니 다행이다.
그녀를 편히 뉘고 일어섰다.
‘이곳은 어디……!’
궁금증이 한순간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강금산은 눈꼬리가 찢어져라 눈을 부릅떴다.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석상(石像)들……
햇볕이 스며들어서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석상에 야광 가루가 발라져 있는 것 같다. 아니면 발광(發光)하는 물질로 석상을 만들었거나.
강금산은 귀신에게 홀린 사람처럼 휘적휘적 걸어갔다.
석상이 그를 이끈다. 가까이 오라 한다. 와서 보라 한다.
갔다. 가서 봤다.
“이, 이건! 무, 무공이야!”
강금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쩍 벌렸다.
어지간한 무공에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그다. 남무림에 존재하는 무공들은 거의 대부분 견식해 봤다. 본 것으로 그치지 않고 도전했으며, 꺾기까지 했다.
그 결과, 판단이 내려졌다. 남무림 최강의 무공은 아버님의 궁술이다. 제삼무신가의 은형시야말로 최강이다. 제이무신가와 제일무신가의 무공이 존재하지만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 판단할 수 없고, 눈으로 본 것 중에서는 단연코 최강이다.
한데 석상에 있는 무공은…… 은형시를 깨뜨릴 수 있다. 순수하게 내공을 제외한 무학만을 비교했을 때, 은형시는 절대로 석상의 무공을 이길 수 없다.
석상은 모두 다섯 개다.
오행 방위를 점하고 서 있는데, 단순히 서 있는 자체만으로도 숨이 막힐 정도의 살기가 뿜어져 나온다.
네 석상은 검도창편(劍刀槍鞭)을 들고 있지만, 나머지 한 석상은 맨손이다.
강금산은 눈을 부릅떴다.
하나라도 놓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이거야! 이게 멸신구관의 기연이야! 내가…… 내가 기연의 주인이야! 내가 얻었어!’
미칠 것 같다. 어린아이처럼 심장이 마구 뛴다. 또 그만큼 조급해진다. 금방이라도 무신들이 석벽을 뚫고 들어올 것 같아서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석상을 샅샅이 훑었다.
예상대로다. 석상에는 무공 구결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검법과 도법의 경우에는 석상 앞뒤로 빼곡히 적혀 있고, 창법과 편법은 앞면에만 적혔다.
‘이런 무공이! 이 무공들은 서로 연환한다. 검에서 도로, 도에서 창으로. 검을 써도 되고, 도를 써도 된다. 검도창편, 그 어떤 병기를 사용해도 돼. 어떻게 이런 무공이!’
검법과 창법은 병기의 길이에서부터 무게까지 완전히 다르다.
당연한 말이지만 검법은 검에 최적화된 무공이고, 창법은 창이 지닌 효용을 최고로 끌어올리도록 창안되었다.
검으로 창법을 시전하면 제 위력이 나올 수 없다. 또한 창으로 검법을 시전해도 마찬가지의 결과가 나온다.
물론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나뭇가지도 창이 되고 검이 된다. 하나 그런 경지에 이른 사람도 같은 수준의 고수끼리 결전을 벌일 때는 성명병기를 사용한다.
네 석상은 이러한 무림의 상식을 깨뜨린다.
어떠한 병기를 사용해도 최상의 무학이 펼쳐질 수 있게끔 정리되어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맨손의 석상에 해답이 있다.
가슴 부위에 적힌 약 쉰 자 정도에 불과한 내공심법이 불가능을 가능으로 이끌어준다.
변색룡(變色龍:카멜레온)은 주위 환경에 적응하여 몸 색깔을 바꾼다.
석상에 적힌 내공심법이 그렇다. 어떤 병기를 손에 들든 내공이 병기에 순응하여 변화한다.
내공만 변하는 게 아니다. 육체도 변화한다.
창법을 수련하여 내지르기에 익숙해진 손이 검을 움켜쥐자 찌르고 휘두르는 것에 능숙해진다는 무리(武理)다.
세상의 모든 물을 흡수하는 바다처럼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사람이 일약 세상의 모든 무공을 펼칠 수 있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공을 펼칠 수 있다. 내공심법을 몰라도 소림사의 무상금강권(無常金剛拳)을 펼쳐 낸다.
만능의 무학.
입이 쩍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다.
‘이거야말로 천하제일!’
강금산은 이성을 잃었다.
지금 이 순간, 그의 눈에는 오직 무공 구결밖에 보이지 않았다.
불속에 있다면 불에 타 죽었을 게다. 물속이라면 익사했을 게다. 어떠한 경우든 무공 구결을 놓칠 수 없었다.
서군봉도 잊고 소립파도 잊었다.
‘머릿속에 외워야 해.’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외우고 외우고 또 외웠다.
평생 무공만 수련하며 살아온 몸이다. 무공 비급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달려들던 때도 있었다.
반각도 지나지 않았을 때, 무공 구결은 모조리 그의 머릿속으로 옮겨졌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믿었다. 암기력도 믿었다. 한데도 불안했다. 혹여 한 글자라도 잘못 암송했으면 어쩌나 싶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글자를 한 자 한 자 되짚어가며 확인을 거듭했다.
‘됐어. 완벽해!’
다시 반각이 지난 후에야 그는 자신의 암기력을 확신했다.
조금 여유가 돌아왔다.
누가 남긴 절공인지는 알 수 없지만 소문이 틀린 게 아니라면 천하제일로 만들어줄 무공임에 틀림없으리라.
수련을 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 어디에서 수련할까? 남만에서? 아니면 제삼무신가로 돌아가서?
머릿속에 떠오른 모든 것이 즐거웠다.
한 가지 일이 남았다. 기연은 한 사람만 얻으면 된다. 여러 사람이 얻는다면 기연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 이제 다섯 석상은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다.
쉬익! 퍼억! 퍽퍽퍽!
강금산은 미친 사람처럼 석상을 때려 부쉈다.
혹여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가 맞춰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러려면 글자가 보여서는 안 된다. 만사무불통지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글자 몇 개만으로도 석상에 적힌 절공을 유추해 낼지 모른다. 안 된다. 철저하게 부숴야 한다.
쾅! 쾅! 퍽퍽퍽……!
손에 돌멩이를 들고 힘껏 내리찍었다. 석상에 있는 글자들이 모두 부서질 때까지.
석상에 매달려 있던 두 시진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강금산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서군봉을 들쳐 업었다. 그리고 그제야 아직도 큰대자로 누워 있는 소립파에게 신경이 돌아갔다.
“이봐.”
소립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소립파에게 다가가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헉!”
그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이나 물러섰다.
소립파는 어디 가고 웬 귀신이 누워 있었다. 귀신까지는 너무하더라도 얼굴을 맞대고는 도저히 같이 식사할 수 없는 추물 중에 상추물임에는 틀림없었다.
머리카락과 눈썹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얼굴은 여기저기 불에 그슬려 목불인견(目不忍見)이 따로 없었다.
목에 손을 대 맥을 살폈다. 뛰지 않았다. 코에 손을 대 콧바람을 살폈다. 숨도 쉬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맥을 짚어보았다. 맥도 뛰지 않았다.
“쯧! 용케도 여기까지 왔는데…….”
왜 자꾸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는 속담이 생각날까?
참 고생스러웠다. 죽음의 고비도 숱하게 넘겼다. 고비마다 소립파가 난관을 뚫어주었지만 결국 이렇게 죽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기연을 코앞에 두고. 기연의 방에 제일 먼저 들어왔으면서 쳐다보지도 못하고 죽는 신세라니.
소립파의 죽음이 애석하지는 않다. 언젠가는 죽여야 할 자, 차라리 지금 죽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저승에서는 마인이 되지 말거라.”
강금산은 몸을 일으켰다.
생각할수록 웃음이 새어 나온다.
무신만 네 명이 들어왔다. 모두들 기연에 눈이 벌게져서 난리 꼴갑을 떨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자신이 기연을 머릿속에 담고 유유히 사라지는 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하하!
멸신구관은 끝났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저편에 그를 기다리고 있는 통로는 함정이 아니라 영광으로 가득 차 있다.
쉬이익!
강금산의 발걸음을 하늘을 나는 듯 가벼웠다.
“카악! 컥!”
숨을 막고 있던 그물막이 찢어질 듯 벗겨져 나갔다.
“카악! 휴우!휴우! 휴우우우…….”
큰 숨을 연거푸 들이켰다. 그동안 들이키지 못했던 숨들까지 한꺼번에 들이켰다.
숨이 돌아왔다.
소립파는 눈을 떴다.
심장에서 갈라져 백회혈과 용천혈로 달려간 두 줄기 양기는 열기라기보다는 차라리 들끓는 용암이었다.
꽝!
머릿속에서 화약이 터졌다. 전각 한두 채는 통째로 날려 버릴 정도로 강력한 화약이 머리끝과 발바닥 한가운데서 터졌다.
순간, 속이 텅 빈 대나무 창에 꿰뚫린 것과 똑같은 기분이 들었다.
대나무 창이 백회혈을 뚫고 들어와 용천혈까지 꿰뚫었다.
몸에 통로가 생겼다. 텅 빈 공간이 생겼다. 그 속으로 공기며 바람이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천지관통(天地貫通), 천지교태(天地交泰)가 이뤄졌다.
하늘과 땅이 일직선으로 연결되었다. 하늘과 땅이 만나 서로 화합을 이뤘다.
전신 경락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용암보다 더욱 뜨거운 열기가 쏟아져 나갔다.
외부진기를 받아들였다가 토해낸 게 아니다. 황수의 기운을 빌린 것도 아니다. 순수하게 인체가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인간의 몸에서 극양의 기운만 결집시킨 결과였다.
외부진기와 독단을 접목시키면 무한정 변신을 일으킬 열화진기(熱火眞氣)가 탄생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뇌귀의 뇌력금황기는 열화진기를 일시에 폭발시킨다. 그 힘은 능히 철뢰를 터뜨리는 것과 견줄 수 있다.
소립파는 빠져나간 뇌력금황기가 보충될 때까지 기다렸다.
영매술이 주변의 기운을 걷어왔다. 그동안 육체가 소비하는 체력은 최소한으로 줄였다. 하다못해 숨까지 막아서 폐가 사용하는 동력까지 아꼈다.
뇌력금황기가 보충되자 육신은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위력은 가공한데…… 한 번 사용하면 치명적인 빈틈이 드러나는군.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한 사용해서는 안 될 물건이야.”
뇌귀가 창안해 낸 방법은 번개를 맞으면서 수련하는 뇌력금황기와 비교해 볼 때 상당한 차이가 났다.
수십 번 사용해도 거뜬한 무공과 한 번만 사용하고 나면 한동안 폐인이 되어버리는 무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은 자연과 어울렸을 때 최상의 힘을 얻는다.
몸을 일으켰다.
주위에 널려 있는 돌조각들이 눈에 들어왔다.
기연이 새겨져 있었을 석상들이다.
어떤 무공일까?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진정 욕심은 나지 않았다.
석상에 새겨져 있는 무공이 어떤 무공이든 인간이 창안해 낸 무공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 무공은 많이 알고 있다.
머릿속에는 평생을 수련해도 다 못 배울 무공이 수북이 쌓여 있다.
당장 뇌력금황기만 해도 미완성이다. 완성되면 어떤 절공도 두렵지 않은 패도절학이지만 아쉽게도 빈틈이 있다. 틈을 메우는 것만 해도 고된 여정이 될 게다.
다른 무공에 눈길을 돌릴 여유는 없다.
강금산이 흥분한 것을 보면 보통 무공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다.
그렇다. 그는 강금산이 하는 행동을 빤히 보고 있었다.
혼절? 아니다. 비몽사몽? 아니다. 쏟아져 나간 양기를 보충하기 위해 육신을 조절하고 있었을 뿐이다. 의식은 너무도 또렷하게 주위를 지켜보았다.
강금산이 무공을 얻고 석상을 부수는 모든 것을 보았다. 그가 중얼거렸던 말을 전부 들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 폐부를 찔렀다.
저승에서는 마인이 되지 말거라.
마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그토록 증오하는 마인이라면 도움은 왜 받는가. 필요할 때 받아들이고 필요없으면 내뱉는 것이 보편적이지만, 의협(義俠)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무인까지 그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서둘지 않고 천천히 걸어나갔다.
강금산이 사라진 통로로.
제4장 주기회(湊機會) ― 때를 만나다
1
십팔밀막검은 출구를 찾지 못했다.
‘마 마’를 샅샅이 뒤졌다. 풀 한 포기, 돌멩이 하나까지 다 들춰냈다. 오죽하면 수천 군데도 넘는 개미집이 어디 어디 있는지까지 알고 있겠는가.
‘마 마’에는 출구가 없다.
예정된 날짜도 지났다.
소립파가 저주의 자오법신을 풀어내지 못했다면 차디찬 땅에 몸을 뉘였으리라.
“입구를 봉쇄해.”
다담선자의 말은 지금까지의 계획을 뒤집는 것이었다.
“봉쇄하라고?”
천멸도주의 안광이 백포를 뚫고 날카롭게 쏘아져 나왔다.
“응. 그래줘.”
“무슨 소리야? 이미 소문을 다 내놨는데. 이젠 어쩔 수 없어. 온갖 쓰레기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는데 이제 와서 입구를 봉쇄하라니…… 입구를 막는 방법은 하나뿐이야. 저 쓰레기들을 전부 죽여 버리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