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6
16
절혼마녀가 삶은 문어를 음미하며 먹었다.
‘돈을 노리는 사람은 아니었어.’
금연화도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서 단숨에 털어 넣었다.
처음 술을 마실 때는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는데, 이제는 입 안에 감도는 주향을 느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무척 달콤하면서 향긋한 술이다.
“대가, 대가. 대가라면 뭘 구할까? 일령을 원할까? 아니야. 여자로 움직일 사람도 아니야. 돈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고…… 도대체 원하는 게 뭘까?”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접근했어. 수묘인 따위가 혈귀대주의 묘비를 만들 수 있어? 없어. 혈귀대주를 찾느라 눈에 뒤집힌 여자에게 대주의 묘비를 새기고 있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어떻게 될까? 큭큭큭! 사내가 필요한 일이 생겼을 때 제일 먼저 그 사람부터 떠오르겠지. 그 사람이 네 생각을 읽었다면 딱 적당한 위치에 있었던 거야. 의도는 모르겠지만 계획적이었던 것만은 틀림없어.”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다.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소립파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접근해 왔다고 생각한다. 시마의 정체가 탄로나 제 갈 길로 갔는데도 주변을 맴돌며 보살펴 주는 것이 좋은 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없는데.
“여자 때문인가? 자하령은 숨어 사는 귀신들이니 얼굴을 보지 못했을 테고, 그 사람과 언제 만난 적 있어? 동생 미모에 꼭지가 훼까닥 돈 사내들 많잖아. 아냐, 그랬으면 왜 일령에게만 다정하게 말했지? 동생에게 욕심이 있다면 다른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말아야 하는데.”
절혼마녀는 술기가 도는지 혀 꼬부라진 소리로 끊임없이 이 소리, 저 소리를 늘어놓았다.
하루 해가 떨어진다.
이 밤…… 여기서 자야 하는 것인가, 밤길을 재촉해 어디론가 가야 하는 것인가. 소립파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 것일까.
일령이 손님처럼 들어와 옆자리에 앉았다.
“어떤 자들이 배를 훔치고 있는데요.”
뜻밖의 소리!
“뭐?”
“여자 세 명. 옥봉(玉鳳)님과 동방주님, 그리고 저로 위장한 차림이었어요. 수묘인이 손을 쓴 것 같아서 내버려 두었는데, 잡을까요?”
도무지 소립파의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없다.
은밀히 행동해야 할 사람들의 정체를 드러내게 한 것은 무엇이고, 또 숨기려는 것은 무엇인가.
금연화는 꼬마아이가 걸어오는 것을 보며 말했다.
“아니, 내버려 둬. 우린…… 이 방면에서 최고를 만난 것 같아.”
꼬마 여자애가 상큼상큼 걸어와 다 먹지도 않은 술과 안주를 치우며 말했다.
“여긴 조그만 마을이라서 볼 것이 없지만 강에서 보는 야경은 정말 멋져요. 보지 않을래요? 배가 준비되어 있는데.”
준비된 배는 단정(端艇)이다.
속도와는 거리가 먼 배로 비교적 큰 거룻배다.
‘이건 뭐 하는 짓이지? 유람이라도 하라는 건가?”
소립파는 보이지 않지만 항상 곁에 있다. 그가 쉴 시간과 떠날 시간을 조율한다.
“그 사람을 잘못 봤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욕심이 생겨?”
절혼마녀가 술기 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금연화는 화려한 등불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는 석해진에서 눈길을 떼지 않았다.
“풋! 그런 게 아니라…… 동원된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물자들도 그렇고. 비조선을 탔을 때도 그렇지만, 이 배만 해도 그래요. 혼자 준비했다고는 볼 수 없잖아요. 그를 돕는 사람이 많은 건지, 거대 문파의 하수인인지……. 이런 생각도 들어요. 남도문에서 대주의 죽음을 이용하기 위해 우릴 끌어들이려는 게 아닌가 하고.”
“남도문에서 이 일을 벌였다고? 호호! 우린 그렇게 귀하신 몸들이 아냐.”
“듣고 보니 그러네요.”
“천한 것들일수록 연결된 줄이 끈끈해. 창기들…… 지렁이처럼 밟으면 콱 터져 버릴 것 같지? 천만에. 창기들도 서로를 보호할 줄 알아. 숨기려고 마음만 먹으면 천비대도 곤혹을 치를걸? 하물며 무림에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는 마도인들이라면 더욱 끈끈하겠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냐. 우리한테는 때려죽일 인간이 시마지만, 마도 무리들에게는 반드시 보호해야 할 인간이기도 해. 그놈은 마도인들의 우상이니까. 시마가 움직였다면 이보다 더한 사람들도 움직일 수 있어.”
“그렇군요.”
강바람이 머리칼을 쓸고 지나간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데, 마도 무리들이라고 살길을 찾지 않을까. 절혼마녀의 말이 맞을 게다.
“내가 낙화향을 지킬 때…… 가장 염려되는 것이 뭔지 알아? 내 행동 때문에 낙화에게 피해가 가지 않느냐 하는 거야. 항상 그 점이 염려됐어. 언젠가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자를 만날 것 같고, 그때가 되면 나는 물론이고 낙화들까지 개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
“추적에는 달인들이라는 사람들이 천비대야. 그들이 농사꾼을 내버려 둘 것 같아? 우리가 마을에 머물렀던 흔적을 찾아내지 않을 것 같아? 농사꾼이 우리를 도왔듯이, 우리도 농사꾼을 도와야 해. 소립파, 그 사람은 양쪽 모두 생각하고 있는 거야. 치고 빠지고, 치고 빠지고. 이쪽을 잡으려고 하면 저쪽이 움직이고, 저쪽을 잡으려고 하면 이쪽이 움직이고. 위태위태하지만 효과는 있어.”
천비대가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해가 가는 말인데…… 불행히도 천비대에게는 양쪽 모두를 잡아챌 능력이 있다. 소립파가 정작 그런 목적으로 정체를 드러내게 한 것이라면 양쪽 모두 위험하다.
“여기 계실래요? 전 들어가서 잠 좀 자야겠어요.”
“들어가서 자. 난 저 달이 좋아.”
절혼마녀는 술병을 들었다.
***
“치 떨리게 만드는군. 계집……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그는 잿더미로 변한 마을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천비일조(天秘一組) 조장(組長), 무림에서는 추혼검수(追魂劍手)로 더 많이 알려진 그에게 목전의 현실은 치욕이었다.
천비대가 소유한 적선서는 모두 열두 마리다. 그는 그중 다섯 마리를 가지고 나왔고, 물웅덩이와 빙굴을 거쳐 오는 동안 다섯 마리를 모두 죽이고 말았다.
남만(南蠻)에서 태어나 더위에 익숙한 적선서가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죽는 것은 당연하다.
무공을 수련한 무인들조차 진기를 가득 끌어올리고도 고전한 극한의 한기인데, 하물며 적선서가 견뎌낼 리 없다.
적선서들은 옥갑(玉匣) 안에서 꽁꽁 얼어 죽었다.
기가 막힐 노릇이다. 금이야 옥이야 정성스레 다루던 적선서가 한낱 추위 따위에 얼어 죽다니.
쉭! 쉭쉭! 쉬익!
마을 곳곳에서 흔적을 찼던 천비대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마을이 불탄 것은 어제 낮. 실화(失火)가 아닌 방화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개미새끼 한 마리 남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낮, 언제야!”
“정오입니다.”
“치욕이군. 반나절을 줄이라고 하명받았는데 오히려 반나절을 늘렸어. 적선서까지 다섯 마리나 죽이고. 자하부의 여우에게 발뒤꿈치를 물린 꼴인가? 아니야, 이 마을도 그렇고…… 그년에게 조력자가 있어. 찾아내라. 어떤 자가 감히 천비대 일을 훼방놓는지 찾아내!”
“봉명!”
“이 마을 놈들도 모두 찾아야 돼. 흔적을 찾아라. 한 놈도 놓쳐서는 안 돼! 알았나!”
“봉명!”
추혼검수는 자신이 천비대주가 아닌 것이 통탄스러웠다.
천비대를 모두 움직일 수 있다면 당장 추적대를 편성해서 보냈을 텐데. 추적대를 편성하는 권한은 대주에게만 있으니 이처럼 탄식을 토할 일이 또 어디 있으랴.
“그년들이 사라진 방향은?”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다섯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곧 반 시진 내에 한 군데로 좁히겠습니다.”
“교란책까지? 확실히 도와주는 작자가 있군. 모두 잡아야 돼! 뿌리까지 캐내야겠어. 어떤 놈들인지.”
천비대주의 생각도 같으리라. 전서구를 받는 즉시 추적대가 편성되어 뒤를 쫓으리라. 자신이 할 일은 추적조가 허탕을 치지 않도록 정확한 사실 관계를 파악해서 보고하는 일이다.
천비대원들이 신속히 몸을 놀려 사라졌다.
그들의 칼날 같은 눈초리는 조그만 흔적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반 시진이 지나면 자하일봉 금연화가 사라진 방향을 찾아낼 게다. 그녀를 도와준 인간들은 내일 정오 무렵이면 잡아들일 수 있을 것이고.
“대주님께 무슨 말을 올려야 한단 말인가. 이 치욕을 어떻게 보고한단 말인가.”
추혼검수는 두 주먹을 으스러져라 움켜잡았다.
천비대는 약속한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반각이 채 되기도 전에 대원 한 명이 추혼검수에게 보고를 했다.
“다섯 방향 모두 단문협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가장 빠른 길을 택한 게 두 곳, 험산을 택한 게 두 곳. 한 곳은 직강을 택했는데 이는 돌아가는 길입니다. 저희는 직강 쪽이라고 단정 내렸습니다.”
“근거는?”
“마을 마당에서 대패로 깎은 나무 부스러기를 다수 발견했습니다. 나무 종류는 삼나무와 노나무. 부스러기가 떨어진 범위로 추정컨대 삼나무는 비조선을 만드는 데 쓰였고, 노나무로는 노를 만들었습니다. 비조선 한 척과 노 네 개. 자하부 계집들이 이동한 방향은 직강입니다.”
“멀리 돌아간단 말이군. 죽기로 작정한 것들이지 않은가.”
“비조선이라면 지금쯤 석해진을 통과했을 겁니다. 석해진은 직강과 장타수가 합류하는 곳. 단문협으로 가려면 당연히 사매성(沙買城)으로 방향을 틀어야겠지만 적혈구(邦穴口)로 가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행로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추혼검수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즉시 명령을 하달했다.
“석해진에서 갈라진단 말이지. 당장 석해진으로 간다.”
그는 부랴부랴 전서를 작성하여 매 발목에 매달았다.
천비대원들은 자신의 판단에 단 한 번도 의구심을 품어본 적이 없다. 흔적을 찾을 때는 수천 가지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탐색한다. 그러나 결정을 내린 후에는 철석같이 믿는다.
천비대원들은 석해진을 향해 치달렸다.
“조장님!”
추혼검수는 자신을 부른 천비대원을 쳐다봤다.
천비대원은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손가락 끝을 좇아 하늘을 보자 날개에 빨간 물감을 들인 매 한 마리가 허공을 선회하고 있다.
“삐이익……!”
추혼검수는 망설임없이 호각을 꺼내 불었다.
매는 즉각 반응했다. 먹이를 노릴 때처럼 벼락같이 내리 꽂히더니 추혼검수의 팔목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추혼검수는 발목에 매달려 있는 전통을 열고 전서를 꺼내 읽었다.
“이, 이건 뭐야?”
‘됐어!’가 튀어나와야 할 그의 입에서 엉뚱한 말이 흘러나왔다.
사매성에서부터 적혈구까지 천라지망이 펼쳐졌다. 강뿐만이 아니라 육상 통로도 모두 봉쇄되었다. 자하부 계집들이 빠져나갈 구멍은 그 어디에도 없다.
천비일조의 판단이 십 할 반영된 포위망인가? 아니다. 전서에는 뜻밖의 사건이 기재되어 있다. 절혼마녀와 금연화가 석해진에 모습을 드러낸 사건.
‘내가 보낸 전서는 도착하지도 않았을 거야. 빌어먹을! 포위망이 펼쳐진 상태에서 도착하는 전서라면……. 빌어먹을 놈들 때문에 반각이란 시간만 소모하지 않았어도…….’
그녀들 스스로 모습을 드러냈으니 천비일조가 한 일은 뒷북치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
“이런 빌어먹을 일이!”
추혼검수는 전서를 와락 구겼다.
천비대의 모든 역량은 천라지망에 집중되어 있다. 천비일조에게도 내일 정오까지는 석해진으로 들어가 퇴로를 봉쇄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다.
추혼검수가 뿌리 뽑고자 했던 일이 엉망으로 변했다. 마을에서 자하부 여인들을 도와주고 교란책까지 감행한 자들을 뿌리 뽑아야 하는데 누가 그들을 추적한단 말인가.
천비대주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녀들을 도와준 마을 사람들은 방자(幇者)에 불과하다.
단문협으로 가고자 하는 자하일봉과 단지 도움만 준 것뿐인 방자와는 우선순위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자하일봉은 반드시 잡아야 하지만 방자는 잡아도 좋고 놓아주어도 좋은 자들이다.
추혼검수는 본능적으로 불길함을 감지했다.
석해진에서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면 무엇 때문에 교란책을 사용했는가. 겨우 반각 차이밖에 나지 않을 것을.
‘반각…… 반각…… 반각에 중요한 의미가 있나?’
순간, 그의 머릿속에 최악의 상황이 그려졌다.
천비일조가 암굴에서 나오는 시간을 정확히 예측했다면? 자신들이 나오는 시간에 맞춰서 석해진을 들쑤셨다면? 양쪽의 행동을 눈으로 보듯 파악해 내는 자가 있다면?
천비대주는 포위망을 전개하라는 명령과 동시에 천비일조에게도 전서를 띄웠으리라. 그로부터 반각 후에 도착하는 천비일조의 전서.
천비일조에 대한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천비십조 중 천비일조의 능력은 단연 발군이다. 언제 어디서나 추적이 시작되면 천비일조가 앞장섰다. 한데 신뢰가 무너지면 천비일조는 뒤로 물러서게 되고, 다른 조가 앞장서게 된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었던 천비대의 추적이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아닌 미미한 흔들림일 수 있지만, 그런 점까지 계산해서 교란책을 사용한 것이라면 보통 문제가 아니다.
천비대는 남북무림 인사들의 동향을 낱낱이 파악하고 있다.
그중에는 당연히 자하부의 자하일봉도 포함되어 있다. 한데 천비일조를 골탕 먹인 사람이 바로 자하일봉이라면, 그동안 천비대가 파악했던 정보들은 빙산의 일각만 더듬었다는 결과가 된다.
‘빨리 가야 돼. 자하일봉, 보통 계집이 아냐!’
“내일 정오까지 석해진에 들어서야 한다. 잠 잘 틈도 없으니 그리 알아!”
추혼검수는 소리를 빽 질렀다.
2
금연화는 긴장이 풀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소립파라는 사람은 그가 본색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의 의도는 모르지만 그가 마련해 준 배를 타고 있으니 하선할 때까지는 안전하다고 볼 수 있다.
이상한 말이지만 뒤를 쫓고 있을 천비대도 신경 쓰이지 않는다.
그들을 죽이건, 가로막건, 따돌리건 모두 소립파가 신경 쓸 문제이지 자신들과는 무관하다는 생각이 든다.
금연화는 일령에게 휴식을 충분히 취하라고 말한 후 자신도 죽은 듯이 잠들었다.
‘눈을 뜨면 아침이겠지. 어디쯤 가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든 것 같은데…… 방금 전에 눈을 감은 것 같은데…… 그녀는 눈을 번쩍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