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63
163
죽었는지 혼절했는지 힘없이 축 늘어져 있던 모습.
정말로, 정말로 운이 좋아서 강금산 혼자만 살아났을 수도 있다.
여러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지만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겨둘 뿐이다. 이는 강금산이 입을 열거나 또 다른 사람이 멸신구관에서 돌아왔을 때에야 풀릴 것이다.
강금산의 등장은 호채마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일단은 주목받는 선에서 그치리라.
달려들지도 않고, 멀리 떨어지지도 않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부단히 감시할 게다.
호채마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마야.
호채마에게는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마야가 멸신구관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잠시 동안은 막연히 기다리면서 차후 행동을 모색할 터이다.
호채마가 기다리는 동안에는 같이 기다려 줄 수 있다. 하나 호채마가 마야를 포기하고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그들의 존재는 혹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니 단숨에 제거하는 편이 낫다.
마야가 돌아온다면?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당장 공격이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릴 놈은 살리고…… 마야의 입을 열게 해줄 놈은 살리고, 마음을 얻지 못한 놈은 죽이고.
호채마는 집중 감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이게 강금산이 호채마에게 준 영향이다.
어쨌든 당장은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내려왔으니 두 발 쭉 뻗고 깊은 잠을 잘 수 있게 되었다.
“팔십일전혼은 대통륜(大通輪)을 유지해! 주림! 입구에 구궁진(九宮陣)을 펼쳐! 종청호! 망진(網陣)! 이동 시간을 반각으로 당겨!”
천멸도주가 간결하게 명을 내렸다.
대답은 없었다.
팔십일전혼은 도주가 왔음에도 숨어 있는 땅속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삼재에서 사상으로 이어지고, 사상은 오합으로 넓혀지며, 오합은 육합과 연결되고, 칠성이 네 개의 진을 관통한다. 스물다섯 명이면 천하의 변화를 모두 담아낼 수 있으니, 이를 대통륜이라고 한다.
알고 있어도 펼치기는 힘든 진이다. 아니, 불가능하다.
원칙적으로 진과 진이 겹치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자유롭게 이동해야 할 공간에 다른 진이 들어서 있으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고, 충돌을 피하자면 행동이 정체된다.
차라리 각개로 흩어지는 것만 못하다.
대통륜에는 스물다섯 명의 움직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진과 진의 변화가, 개개인의 움직임이 들줄 날줄처럼 정밀하게 정리되어 대우주의 변화를 표현한다.
원래 대통륜에는 세 가지 진법이 더 가미된다.
팔십일전혼이 펼친 대통륜 바깥으로 팔괘진이 포진되며, 칠성진과 직각으로 구궁진이, 그리고 열 명의 사내가 곳곳으로 흩어져 최후의 단점을 보완하니 십방진(十方陣)이 된다.
이렇게 대통륜은 쉰두 명이 펼치게 되어 있다.
현재 팔십일전혼은 스물세 명밖에 안 된다.
제일 마지막 칠성진에 구멍이 생겼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무궁무진한 변화를 창출할 수 있으니 가히 철옹성이다.
천멸도주는 두 가지 진형을 더 펼쳤다.
주림과 백인수 아홉 명은 구궁진을 펼쳐 일차 접전을 벌이게 된다.
최후까지 버틸 필요는 없다. 일차 타격을 가한 후 즉시 뒤로 물러서면 된다.
십팔밀막검이 펼치는 망진은 그물처럼 촘촘히 짜여 구궁진 뒤를 받친다. 서로 간에 위치 이동이 반각이면 잠시도 쉬지 말고 번을 서라는 뜻이다.
천멸도주는 잠시 천멸도 살수들이 자연과 일체가 되어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잠시 후, 그녀는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됐어. 이제는 쥐새끼 한 마리 들어올 수 없어.”
너무 밝은 음성이라서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았나 하고 착각할 정도였다.
왜 그럴까? 그녀의 밝은 음성이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만드는 것은.
소립파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어서일까? 애증을 가슴속에서만 삭혀야 하는 천형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마야와 대면했을 때는 감정을 안에 숨긴 채 얼음처럼 차가워질 것이라는 거다.
모두 흑살마녀의 초옥에 모여들었다.
“마야는 한 시진 전에 왔으며, 지금은 이곳 지하에 있습니다.”
황전륜이 포권지례를 취하며 보고해 왔다.
‘한 시진?’
‘지하?’
불현듯 의문이 치밀었다.
흑살마녀는 천면겁에 깊이 취해 있었다.
마야도 천면겁을 해혈(解穴)하지 못하는 것인가? 한 시진 전에 왔다면서 왜 손을 쓰지 않았지? 흑살마녀를 위해서라면 살과 뼈도 기꺼이 내놓을 사람인데.
“어디야?”
천멸도주가 입구를 물었다.
언장은마가 파놓은 지하 땅굴은 천멸도주조차 찾지 못할 정도로 은밀했다.
“탁자 밑입니다.”
모두들 허름한 탁자 밑을 쳐다봤다.
정말 감쪽같다. 나무의 이음매를 그대로 살려서 만든 널판은 마룻바닥과 전혀 다를 바 없다. 말해줬으니까 알지 말해주지 않았으면 평생 찾아도 못 찾을 뻔했다.
이때부터 천멸도주의 행동은 달라졌다.
짐짓 냉랭한 태도를 유지하며 뒤로 물러섰다.
“뭐 해! 탁자 밑이라잖아!”
말투도 신경질적으로 변했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떠맡아서 귀찮아 죽겠다는 투였다.
“참 알다가도 모르겠어.”
일령이 입을 삐죽 내밀며 널판을 들어 올리려고 했다.
“일령, 오랜만이다.”
일령은 깜짝 놀라 손을 멈췄다.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활짝 펴졌고, 입가에는 웃음이 매달렸다.
“정말 왔네요! 왔어요!”
“회포는 나중에. 천면겁을 풀어야 하는데, 도와주겠지?”
“제가요? 왜 직접……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예요?”
“안 좋기는…… 자, 침상 옆으로 갈까?”
“지금요? 알았어요.”
다른 사람이 보기에 일령은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혼자서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데 미치지 않았으면 뭐겠는가. 한데 초옥에 있는 사람들은 주의 깊게 귀담아들을 뿐, 일령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령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나.
‘제가요? 왜 직접……’은 일령에게 무엇인가를 부탁했다는 것이고, 나중 말은 지금 당장 시행하라는 뜻이다.
조각난 몇 마디 말을 맞춰서 마야와 일령의 대화를 유추해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와락 걱정이 앞섰다.
마야에게 사단이 생겼다.
지하에 있어야만 하는 이유와 직접 흑살마녀를 해혈할 수 없는 이유는 동일할 것이다.
“준비됐어요.”
“잘 들어. 시작하면 팔백예순두 혈을 재빨리 짚어 나가야 해. 시간 차가 나거나 한 번이라도 잘못 누르면 내상(內傷)으로 이어져.”
“꼬, 꼭…… 제가 해야 돼요?”
“지금부터 혈을 불러줄 테니 외워. 해혈할 때 다시 불러주겠지만, 순서를 외워놓는 게 도움이 될 거야. 시작은 임맥(任脈) 자궁혈(紫宮穴)이야. 엄지손가락으로 육 푼. 다음 중정(中庭) 검지로 삼 푼. 다음 기해(氣海) 주먹을 쥐고 검지 둘째 마디로 한 치…….”
일령은 즉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마야가 불러주는 구결을 뇌리에 각인시켜 나갔다.
일령이 혈 자리를 외우는 데만 두 시진이 걸렸다. 거의 반나절이다. 하지만 팔백예순두 군데의 혈을 누르는 데는 일다경도 소요되지 않았다.
마지막 혈은 독맥(督脈)의 상성혈(上星穴)에서 일 촌(一寸) 오 푼(五分) 옆에 위치한 오처혈(五處穴)에서 끝났다.
경락의 구분이 없이 전신을 누빈 끝에 도착한 마지막 목적지다.
“커억!”
일령은 오처혈을 누르자마자 허파에 바람이 스며드는 듯한 소리를 흘렸다.
과도한 심력 소모에 일시 진기가 뒤틀린 것이다.
다행히도 그녀 주위에는 그녀를 잘 아는 사람들이 많았다.
금연화와 다담선자는 일령이 칠백 개째 혈을 누르는 순간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금연화가 장심을 일령의 기해혈(氣海穴)에 붙였다. 다담선자의 손은 명문혈(命門穴)에 밀착되었다.
츠츠츠츠……!
두 여인의 진기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가 뒤틀린 진기를 제자리로 이끌었다.
일주천, 이주천, 삼주천…… 십팔주천……
금연화와 다담선자의 진기는 서로의 꼬리를 물고 물리며 일령의 몸속을 휘저었다.
일령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뒤틀린 진기가 제자리를 잡자마자 곧 본신진기를 이끌어 대주천을 시작했다.
평소 같으면 이것으로 안정되었으리라.
한데 삼십육주천을 지날 무렵, 일령의 진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령이 몸 안에서 본신진기와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진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정체가 무엇인지, 어느 경락을 이용하는지 모를 괴진기였다.
괴진기는 점점 강성해졌다.
일령이 다스려 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금연화와 다담선자의 진기는 외부에서 강제로 주입되는 진기인지라 일령의 본신진기보다 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의 진기는 밖으로 튕겨났다.
“헛!”
“아!”
두 여인은 망연자실 서로를 쳐다봤다.
이런 일은 난생처음이다. 어떻게 한 몸에 진기가 두 가닥이나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경락을 타고 오지도 않았다. 어디선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서 엄청난 힘으로 밀어냈다.
일령에게 남모를 사연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놀란 토끼눈하고는. 아직도 모르겠어? 새끼가 장난치는 거잖아!”
천멸도주가 한기 풀풀 날리는 음성으로 쏘아댔다.
“아!”
다담선자는 그제야 자신들 곁에 마야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야는 항시 옆에 있었다. 일령의 상세를 치료하느라고 잠시 잊었고, 처음 겪는 괴상한 일에 정신을 빼앗겼을 뿐이다.
마야는 마령음을 쏘아내서 진기를 북돋아주곤 했다. 한데 이제는 뜻으로 형체를 이룰 수 있다는 의형(意形)의 경지에까지 올랐단 말인가. 뜻만으로 다른 사람의 몸에 진기를 형성시킨다면…… 그의 능력은 어디까지가 한계인가.
일령의 얼굴은 어느새 편안해졌다.
괴진기를 밀어내기 위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야 하는데, 얼굴이 편안하다는 것은 괴진기와 협상했다는 뜻이다. 괴진기가 몸속에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고 있다.
마야에게 들은 말이 없다면 절대 불가능하다.
모두들 편안히 앉아서 일령과 흑살마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진기가 흐르는 경락 이외에 또 다른 경락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말하는 사람이 마야이니 믿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일령이 직접 몸으로 겪어봤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정말 놀라운 말이다.
하나 무림사에 일대 획을 긋게 될 수로의 활용도 호채마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끌끌! 헛살았어, 헛살아. 이 나이가 되도록 뇌력금황기란 게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어. 쯧! 뭘 하며 살았나.”
시마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건 그만의 자조가 아니었다. 그 누구도 뇌력금황기라는 게 존재하는 줄 몰랐다.
번개를 맞아야 수련할 수 있는 무공? 미친…….
소립파는 번개 대신 황수를 이용하여 수련했다. 이는 뇌귀가 생각해 낸 수련 방법이기도 하다. 하지만 뇌귀조차도 황수와 번개의 차이점을 알지 못했다.
물론 황수는 번개만큼 강렬한 열을 낸다. 화력만큼은 뇌력금황기를 수련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다.
한데 뇌귀조차도 간과한 것이 있다.
번개에는 화력 이외에도 자기(磁氣)가 내포되어 있다. 하늘에서 내리쳐지는 힘도 포함된다. 번개는 순식간에 육체를 관통한다. 황수는 의념으로 받아들이고, 의념으로 몰아내야 한다.
너무 큰 차이다.
그 결과 소립파는 정상적인 몸을 유지하지 못하고 극양진기에 시달리는 몸이 되었다.
털이란 털은 모조리 타버려서 보기 흉한 모습이 되었다. 머리칼과 눈썹이 없을 뿐인데 전혀 다른 인상으로 변했으니. 그런 것은 괜찮다. 얼굴이 온통 곰보가 된다 한들 어떠랴.
지하의 음기를 흡수해야만 견딜 수 있을 정도로 몸에서 열이 팔팔 끓고 있다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소립파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한 달 정도만 쉬면 돼. 잘됐지. 이 기회에 내공들이나 높여.”
소립파가 의지한 것은 영매술이다. 영매술은 몸의 균형을 최적의 상태로 유지해 준다. 넘치는 것은 흘려보내고, 부족한 부분은 끌어들이면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몸을 유지해 준다.
지금 당장은 양강지기가 넘쳐 나지만, 시간이 흐르면 제자리를 잡아줄 게다.
나머지는 영매술이 알아서 한다.
영매술…… 영혼을 중매 서주는 술법.
실제로는 무의식 깊숙이에 숨어 있는 생존 본능을 일깨워 면역력을 극대화시키는 자가치료법.
소립파가 할 일은 없었다.
기껏 하는 일이라는 게 열양의 기운을 뱉어내기 쉬운 장소에서 낮잠을 자는 정도였다.
생각을 깊게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북검문도 생각하고, 남도문도 생각하고, 친구 놈의 혈한도 되새겨 보고, 지금까지 지나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길도 숙고해 보고……
벗들의 무공도 극대화시켜야 한다.
마인들이 세력을 불릴 수 있는 방법은 몇 가지 안 된다.
이권(利權)이 달려 있거나 돈이 걸려 있다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이 꼬여들 터이지만, 보이는 것이 암울한 험로뿐일 때는 가슴에 한이 맺힌 사람이 아니고는 동참하지 않는다.
결국 소수 정예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방법은 찾았다. 주로 외에 수로까지 운용시키면 내력이 배가될 테고, 개개인이 커다란 산봉으로 우뚝 설 게다.
실험도 해봤다.
내공 조율이 가장 쉬울 것 같은 일령을 택해서 수로를 움직였는데, 결과는 대만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