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69
169
왜? 이들은 마궁의 궁도이니까.
마궁의 궁도는 그 누구와의 싸움도 피해서는 안 된다. 당당히 겨루고 져도 당당히 져야 한다. 원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죽음의 공포도 의연히 받아들여야 한다.
마궁의 궁도가 되기는 어렵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궁도가 되고자 찾아오겠지만 마궁의 이름에 욕칠을 할 자 같으면 받아들일 수 없다.
겁쟁이, 욕심쟁이, 간사한 자……
마궁은 모든 무인들이 우러러보는 이상향(理想鄕)이 되어야 한다.
“너와 나. 한 번은 부딪쳐 봐야 하는데.”
“후후!”
“이제야 하는 말인데, 전에 말이야, 꼭 죽는 줄 알았다. 혈염도, 정말 장난이 아니데. 몸에 탁 틀어박힌 순간, 온몸의 피가 다 빨려 나가는 줄 알았다니까.
“그 맛을 또 보고 싶어서 그래?”
“혈염도 맛을 봤으니 내 검 맛도 봐야지.”
두 사람은 유일한 호적수다.
마도는 수검을, 수검은 마도를 압도적으로 제압하지 못한다.
두 사람이 수련한 무공도 팽팽하다. 혈염도법이 무적도라 불리지만 사흡검법도 무적검이라는 말을 듣는다.
두 사람은 최고가 될 능력이 있으며, 무공의 이름값을 하기 위해서라도 꼭 최고봉이 되어야 한다.
한데 형편없이 무너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천멸도 살수에게, 사방천마에게, 강금산에게……
이제부터라도 그런 일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사방천마와의 싸움을 자청한 것은 오랜 시간 싸움을 하지 않아서 굳어져 버린 혈기를 일깨우기 위해서다. 그것이 설혹 죽음으로 이어질지라도.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왔으면 좋겠는데.”
수검이 뉘엿뉘엿 저물어 가는 저녁노을을 보며 말했다.
제8장 현신적(顯神跡) ― 기적을 보이다
1
절벽에서 내려다보는 밀림은 포근한 담요를 깔아놓은 듯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여기는 어떻게 알았어?”
“몇 살 때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몇 번 와본 적이 있어.”
“기억나지 않을 정도면 무척 어렸을 때네?”
“글쎄…… 이곳을 오르내렸으니까 그렇게 어리지는 않았을 거야.”
소립파가 가리키는 절벽은 내려다보기만 해도 아찔했다.
천멸도주는 ‘어린애가 어떻게 이런 곳을’ 따위의 말은 하지 않았다.
마야는 어렸을 적부터 남달랐다. 힘도 없으면서 지기는 싫어해서 얻어맞기 일쑤였다.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없었다면 골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을 게다.
모순되게도 그런 근성이 그를 건드리지 못할 존재로 인식시켰다.
마야라면 이런 곳을 오르내리며 자랐을 것 같다.
“내려가지.”
그는 앞서서 절벽을 기어 내려갔다.
천멸도주는 바로 뒤따랐다.
이곳은 마야가 이 세상에 만들어놓은 고처(高處) 다섯 군데 중 하나다.
세상이 온통 적들뿐일 때, 심한 중상을 입어서 치료를 받아야 할 때 혹은 아무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조용히 쉬고 싶을 때 그렇게 해주는 곳이다.
당연히 침입을 방지하는 조치가 마련되어 있다. 마야가 그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준비한 조치이니 쉽게 생각할 수 없다. 마야가 내려간다고 함부로 뒤따라갔다가는 죽기 십상이다.
천멸도주는 마야를 따라서 십여 장이나 내려갔다.
염려했던 함정이나 암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특이한 점은 눈에 띄지 않았다.
“여기가 정말 고처 맞아?”
“맞아.”
“아무나 함부로 못 내려온다며?”
“맞아.”
“아무나 내려와도 될 것 같은데?”
“말릴 생각은 없어.”
“얼마나 더 가야 돼?”
“다 왔어.”
손가락 하나만 간신히 걸칠 수 있는 돌 틈에 의지해 이십여 장이나 내려갔다.
그곳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봤을 때도, 아래 계곡에서 올려다봤을 때도 전혀 보이지 않은 곳이다.
“묘한 곳에 동굴이 있네?”
천멸도주의 음성은 자신도 모르게 떨려 나왔다.
마야와 단둘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는 어려서도 기가 돌지 않았고, 그의 기가 굳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줬다.
서로 어렸다. 뭐 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했다.
나중에서야 남녀 교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고, 서로가 영원한 반려자로 생각했다.
그즈음에, 행복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나병이 찾아왔다.
병이 아니라 하늘의 저주였다.
나병을 주느니 차라리 목숨을 가져가라고 절규했다.
나환자들에게 세상 사람은 이방인이었다. 세상은 넓으나 그들이 갈 곳은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지만 그들은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했다.
병보다도 더욱 힘든 것은 고독이었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절망감이었다.
나환자가 믿고 의지할 사람은 나환자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환자를 믿지 않았다. 의지하지도 않았다. 그녀의 마음은 죽어 있었고, 바라는 건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 되어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종청호, 황전륜, 주림, 안량빈……
많은 사내가 그녀에게 접근해 왔다. 하지만 그녀는 단 한 번도 이성의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진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몸으로 정사를 갖겠단 말인가?
미친놈들…….
독심(毒心)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 보고 배운 것도 많다. 마야 주위에는 늘 지독한 사람들만 있어서 항상 긴장하곤 했다.
그녀는 단연 두각을 나타냈고, 천멸도주가 되었다.
힘들고, 괴롭고, 고독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그런 세월을 마감할 수 있을지.
크게 기대는 하지 않는다.
시도해 보았다는 것으로, 손을 써준 사람이 마야라는 사실로 한만 풀면 된다.
“마음 편하게 가져. 준비하는 데 이틀 정도 걸릴 거야.”
갑자기 묘한 배신감 같은 게 느껴진다.
황정초와 청령단으로 단약을 만드는 데 겨우 이틀밖에 안 걸린다니.
그런데 나중에 해준다고 했나. 천멸도 식구들의 한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따위 소리를 했나?
“이틀이면 돼?”
“응.”
“근데 왜 나중에 해준다고 했어?”
“내 목숨을 걸어야 하니까.”
배신감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대신 싸늘한 한기가 등줄기를 훑어 내려간다.
“무슨 소리야? 목숨을 걸어야 하다니?”
“황정초와 청령단은 약성(藥性)이 너무 강해. 불필요한 것도 많고. 불필요한 것은 체력만 소모시키지. 그래서 다른 약재를 써서 이틀 정도 희석시킬 거야. 나병에 소용되는 성분만 남겨놓는 거지.”
“그게 목숨과 무슨 관계인데?”
“내 몸에 나균(癩菌)을 빨아들일 거야.”
“뭐!”
“단약도 내가 복용할 거고.”
“미쳤구나!”
“내 몸에 들어온 나균이 죽는다면…… 내 피가 치료약이 될 거야.”
천멸도주는 한참 동안 마야를 쳐다봤다.
말이야 쉽지만 십중팔구 또 한 명의 나환자가 생길 뿐이다.
“넌 좀 다른 방도가 있을 줄 알았는데.”
“줘. 황정초와 청령단.”
“나 간다.”
천멸도주는 동굴을 나서려고 했다.
이 미친 짓에 동참할 수는 없다. 도대체가 말이 되어야 웃음이라도 지어주지.
천멸도주는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이 얼어붙었다. 아니, 아교로 땅에 붙여놓은 듯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점혈(點穴)당했다!
마야가 병을 고치고 운기를 시작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이 정도까지 고수였던가. 쥐도 새도 모르게 점혈할 정도까지 발전했는가.
“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점혈했어.”
“알아! 어서 풀지 못해!”
천멸도주는 진기를 이끌어보았다.
희한하다. 진기가 끌어올려졌다. 점혈을 당하면 진기를 움직일 수 없는데 자신의 경우에는 정상적으로 운기되었다.
대주천을 해봤다. 어느 혈을 점혈당했나.
미칠 노릇이다. 점혈당한 혈이 없다. 한데 마야는 분명히 점혈했다고 하고, 자신의 몸은 점혈당했을 때의 증상을 보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수로! 주로가 아닌 수로를 점혈했어! 그렇다면 이미 수로가 활성화되었다는 말…….’
마야의 내공은 어느 정도인가. 종잡을 수가 없다. 어떤 때는 미약하기 이를 데 없는데, 어떤 때 보면 누구보다도 강하다. 이제 갓 운기를 시작한 사람이.
“옷을 벗길 거야.”
천멸도주는 기겁했다.
“뭐, 뭐! 너, 뒈지고 싶어! 소, 손 치우지 못해! 야, 이 새끼야! 어, 어서 손 치…….”
마야의 손이 백포를 만진다 싶었다. 그리고 얼굴에 감겨 있던 백포가 스르르 풀려 나갔다.
천멸도주는 눈을 감았다.
미친놈! 옛날 모습만 기억할 것이지. 문드러지고 허물어진 얼굴은 봐서 뭐 하겠다고. 진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는데 뭘 보겠다고. 아직도 옛날 얼굴인 줄 아나.
얼굴을 감췄던 백포가 완전히 풀렸다.
마야는 한참 동안 얼굴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나직이 말했다.
“고생 많았다.”
“새끼, 지랄하고 있네. 뒈지고 싶지 않으면 빨리 백포나 감…… 흡!”
천멸도주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마야가…… 소립파가 그녀의 몸을 와락 껴안았다. 뿐만이 아니다. 입술에 그의 입술이 느껴지고, 이빨을 밀치며 혀가 들어왔다.
“흡! 흐읍!”
천멸도주는 밀쳐 내려고 발버둥쳤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미친 새끼! 죽여 버릴 거야! 넌 죽었어! 정말 죽여 버릴 거야!’
소립파는 애무를 참 잘하는 사내였다. 입맞춤도 달콤하게 잘했다. 그의 입에서는 항상 풋풋한 사과향이 풍기곤 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때보다 훨씬 능숙해졌다.
‘안 돼. 이래서는…… 나병에 걸린단 말이야. 그만둬. 그만 해.’
마음은 그를 거부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이미 그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가뭄에 바짝 탄 논이 물을 만난 것처럼 그의 모든 것을 갈구했다.
잊혀졌던, 억지로 잊었던 욕구가 꿈틀거렸다.
‘내게 욕정이! 아직도 이런 게…….’
몸을 휘감은 백포도 풀리기 시작했다.
‘안 돼. 이건 정말…… 이것만은…….’
천멸도주는 백포가 완전히 풀릴 때까지 ‘안 돼’를 외쳤다. 몸이 들리고 침상에 뉘어졌을 때도 ‘안 돼’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웠다.
그가 마법을 걸었다.
육중한 몸으로, 그의 체취로, 따뜻한 입으로……
천멸도주는 주문을 잊어버리고 가는 비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아아……!”
그녀는 열망했다. 그의 모든 것을 갖고 싶다는 욕구가 전신을 휘감았다.
이윽고 강렬한 불화살이 그녀의 육신을 관통했다.
“너…… 죽여 버릴 거야. 아아!”
동굴 안쪽에는 작은 개울이 흘렀다.
소립파는 온 정성을 다해 진물을 닦아냈다. 천멸도주는 멍한 표정으로 몸을 맡겼다.
이제는 늦었다. 소립파는 나균에 전염되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천멸도 식구가 될 것이냐, 나균을 몰아내느냐인데 후자는 성공한 사례가 없었다.
“후우! 후우우!”
나오느니 한숨뿐이었다.
“한숨 쉬지 마. 난 괜찮다니까.”
“휴우!”
“여긴 벽곡단 밖에 없어. 그걸로 부탁해.”
“휴우!”
천멸도주는 연신 한숨만 내쉬었다.
옛날에도 지금과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천멸도주는 마야와 함께 억지로 동굴에 갇혔다.
그곳에는 이곳처럼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식수 대용으로 사용할 개울, 벽곡단, 돌 침상, 그리고 수십 권의 무공 비급.
그녀는 소립파의 양기를 자극할 도구로 넣어진 것이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와 함께 있다는 게 좋기만 했다.
소립파가 무공 비급을 완벽히 외우기까지는 대략 이틀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틀 동안은 그와 그녀만의 세상이다.
그녀는 벽곡단을 먹기가 싫어서 물에 불린 후 불에 구웠다. 그럼 벽곡단은 바삭바삭한 과자가 되었다.
“알았어. 해줄게.”
그녀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소립파는 마흔두 종의 약재를 혼합하여 얕은 불로 끓였다.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나 추하지 않아?”
“어두워서 안 보여.”
“하나도 안 웃겨. 썰렁해.”
“난 너를 알아. 몸과 얼굴 모습은 달라졌지만 네 마음은 그대로인 걸 알지.”
“많이 변했어.”
“변한 게 보이지 않아. 옛날 그대로야.”
“그래? 그럼 옛날처럼 해줘.”
기혈 때문이 아니더라도 한참 이성에게 호기심이 생길 무렵이었다. 한데 남녀를 한 동굴에 넣어둔다는 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밖에 되지 않았다.
“그때처럼?”
“그때처럼.”
천멸도주는 소립파의 입술을 찾았다.
소립파는 운기조식을 취했다.
그가 믿은 것은 영매술이다.
흡혈고인, 미염흑매, 적선태…… 독하다는 독물도 모조리 흡수해 버린 영매술이니 나균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다고 독단과 합일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자신의 몸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천멸도 식구들의 염원을 풀어줘야 하기 때문에 해결책을 찾아야만 했다.
나균이 퍼지도록 내버려 둔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매술이 작용하는 것을 방해해야만 했다. 다른 방법으로는 나균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는 것도 가능했다.
소립파는 후자를 택했다.
천멸도주와 정사를 벌임으로써 나균은 자연스럽게 흡수되었다.
이틀 후, 약탕관을 열자 황정초와 청련단은 흔적없이 녹아서 걸쭉한 진액이 되어 있었다.
첫맛은 달콤하지만 뒷맛은 무척 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