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7
17
세상은 잠들기 전처럼 조용하다. 강물을 가르며 나아가는 소리만 철썩철썩 들려올 뿐 잠을 방해하는 소리도 없다. 그래도 눈이 떠진다. 묘한 긴장감이 그녀를 깨운다.
“완벽하게 포위됐어요.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요.”
일령의 음성이 모습은 보이지 않은 채 들려왔다.
“포위?”
“천비대예요.”
“뭣!”
잠이 확 달아났다.
“쉿! 음성을 낮추세요.”
금연화는 창문가로 바짝 다가가 밖을 쳐다봤다.
날이 밝아오고 있다. 방금 잠들었다가 깬 것 같은데 누가 떠메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이 들었었나 보다.
밖은 물안개가 짙게 깔려 있어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안력 대신 청각을 높였다.
스스슷! 차차차착……!
물 가르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려온다. 비조선만이 낼 수 있는 소리다. 단정을 조여오는 비조선의 숫자는 대략 삼십여 척. 포위망이 완벽하게 구축되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소립파는 뭘 하고 있었단 말이야.’
이상하다. 그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다. 그가 어떤 일을 할 의무도 없다. 하나 일이 급박해지자 제일 먼저 그가 떠오른다. 속수무책으로 포위망에 걸려든 것이 모두 그의 탓만 같다.
지난밤에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했던 절혼마녀도 깨어나 창가로 다가왔다.
“이건 피할 수 없겠는데.”
절혼마녀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하나 자신없는 표정은 아니었다.
“어떻게…… 말로 해볼 거야?”
“통하지 않겠죠?”
“눈으로 본 건 아니지만 적선서라는 요물까지 동원했다니까 아무래도 그렇겠지?”
“이 포위망…… 우리를 노린 것일 테고요.”
“지금으로서는 그렇다고 봐야 할 거고.”
“말은 통하지 않을 것 같네요.”
“그럼 치는 거지 뭐. 기습은 두 배의 효과를 올릴 수 있으니…… 일령을 내게 넘겨. 일령과 내가 어떻게든 포위망을 뚫어볼 테니까,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
“그럴 수는 없어요. 같이 왔으니 함께…….”
“이래서 자하부가 핍박받는 거라니까. 버릴 때는 버릴 줄 알아야 하는데. 날 데려온 건 이럴 때 써먹으려고 한 것 아냐? 여기서 모두 개죽음당할 거면 뭐 하러 나섰어. 단문협에 가. 가서 봐. 어떤 놈들이 혈귀대를 몰살시켰는지. 그리고 꼭 복수해. 동생 무공으로는 꿈같은 일이겠지만…… 어떻게든 해봐.”
비조선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배 한 척에 대여섯 명이 타고 있으니 어림잡아도 백오십여 명이나 된다. 한 명당 오십여 명씩을 꺼꾸러뜨려야 하는데 천비대의 무공 역시 녹록치 않으니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일령, 너는 이제부터 나와 함께 죽는 거야. 알았지!”
스스스슥……!
일령이 신속하게 위치를 잡았다. 절혼마녀의 뜻을 짐작하고 기습하기에 가장 좋은 요처를 차지했다.
일검에 한 명, 운이 좋으면 두 명. 그래 봤자 네 명이다. 기습으로 거둘 수 있는 성과는 그게 최고다.
그때, 문이 덜컹 열리며 선원 한 명이 스르륵 스며들어 왔다.
‘무공?’
‘상당한 신법!’
선원이기에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경계심이 자연스럽게 든다.
“돼지 오줌보에 익숙하다 들었습니다만.”
‘돼지 오줌보? 소립파?’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준비하시기를.”
사내는 금연화가 잠을 청하던 침상 밑에서 돼지 오줌보를 꺼내 아무렇게나 홱 던져 주었다.
공기를 불어넣지 않아서 납작하게 짓눌린 것이 흐물흐물거린다.
선원은 돼지 오줌보로 어찌하라는 말도 없이 침상 다리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그가 여인들을 쳐다봤다.
“이놈의 돼지 오줌보와는 인연이 깊네.”
절혼마녀는 돼지 오줌보에 공기를 불어넣은 후 입구를 단단히 봉쇄했다. 그리고 서슴없이 열려진 공간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침상 밑에는 몸을 숨길 수 있는 조그만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한 명, 몸을 바짝 붙이면 두 명까지는 숨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거기 밑에.”
절혼마녀는 한편으로는 선원의 말을 듣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가리킨 쪽을 바라봤다.
그녀가 서 있는 발밑에 또 다른 통로가 있는 듯 문고리가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면 고리를 걸어야 합니다. 반드시.”
‘고리를 걸어?’
생각할 겨를이 없다. 지금 이 순간 천비대는 접선을 시도하고 있을 게다.
절혼마녀는 급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뻥 뚫려진 공간, 한 사람이 간신히 기어 들어갈 만한 공간이 입을 쩍 벌리며 드러났다.
‘소립파…… 대장부는 아닐 거야. 암굴도 그렇고 여기도 그렇고 좀 넓은 곳을 준비해 놓으면 오죽 좋아.’
절혼마녀는 망설임없이 구멍 안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쉭! 쉬익!
금연화와 일령이 일순간에 빨려 들어왔다.
절혼마녀는 모두 들어선 것을 확인한 후에 문고리를 잡아당겨 뚜껑을 닫았다.
사위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바로 옆에 금연화와 일령이 서 있지만 느낌만 있을 뿐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걸으라고 했는데…….’
손을 들어 뚜껑 주변을 더듬어봤다.
무엇인가 손에 잡힌다.
‘가죽 같은데 왜 이렇게 미끈거려?’
다른 손까지 필요하다. 한 손은 가죽을 잡았으니 걸 만한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한다. 고리를 건다? 그럼 가죽 반대편에 걸 만한 곳이 있을 텐데……
다른 손은 불록 튀어나온 곳을 여러 곳 찾아냈다.
미끈거리는 가죽을 끌어당겨 차곡차곡 튀어나온 곳에 채워 넣었다.
가죽에는 단추를 잠글 때처럼 고리가 만들어져 있어서 걸기는 어렵지 않았다.
후두두둑……! 후두둑……!
뚜껑 위로 무엇인가 떨어져 내렸다.
짐작컨대 그녀들이 위치한 곳은 배 밑바닥일 것 같다. 딛고 있는 나무를 부수면 바로 강물 속으로 빠질 게다.
여인들은 청각을 바짝 곤두세워 위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탐지하려고 애썼다.
끼이익! 끄으으윽……!
무엇인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선원이 그랬던 것처럼 침상이 끌리는 소리다.
‘천비대가 돌아갔나?’
아니다. 뒤이어 들리는 소리가 그녀들의 바람을 산산조각 냈다.
“아이고! 소인들이 죽으려고 거짓을 아뢰겠습니까. 수적(水賊) 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이런 방도라도 강구해야지 별수있습니까요. 이건 저희의 목숨입죠. 무인님들이야 재물을 돌같이 보시니까 별일이야 없겠습죠?”
“들어내라!”
“예? 아니, 왜……? 아이고! 안 됩니다요. 이건 저희 목숨입니다요.”
차앙!
“헉! 돼…… 됐습니다요. 가, 가, 가져가십쇼. 모, 모, 목숨만…….”
“조용히 해라. 들어내!”
스륵! 촤라락!
위의 상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었다.
‘우리가 들어섰던 공간을 무엇으로 채운 듯한데…… 들어낸단 말이지. 그럼 문고리도 눈에 띌 테고…… 차라리 기습하느니만 못하잖아. 이건 굴에 갇힌 생쥐 꼴이니.’
절혼마녀의 눈이 독광으로 번뜩이며 삭사를 꺼내려고 할 때, 금연화가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돼지 오줌보를 줄 때는 물과 연관있는 거 아녜요? 여기서 물을 찾을 곳은 바닥밖에 없는데, 바닥에 뭔가 있을 것 같은데요?”
“어서 빨리 찾아보자.”
미세한 움직임이 어둠을 흔들었다.
“여기 뭔가 있어요.”
일령이 모깃소리만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 여기도 뭔가 있는데?”
절혼마녀도 불록 튀어나온 것을 찾아냈다.
“여기도…….”
금연화도 같은 소리를 했다.
문고리 같은 것, 위에서 끌어 올리도록 되어 있는 것.
스륵! 촤아악!
위에서 들리는 소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모두 잡아당겨 봐!”
실과 허를 뒤섞어놓은 것인지, 아니면 안배와는 전혀 다른 장치인지 모르지만 차분히 분간해 낼 시간이 없다.
세 여인은 일시에 고리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벌어진 일!
츄욱! 촤아아……!
바닥을 통해 손가락 굵기의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물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워낙 작은 구멍이다 보니 쏟아져 들어오는 물의 양도 많지가 않다.
“더 있을 거야. 더 찾아봐. 찾는 족족 열고.”
절혼마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바닥을 더듬었다.
“거기는 안 됩니다요. 거기를 열면 배가 가라앉습니다요. 비, 비상용 탈출구. 탈출구입니다요. 제발 거기만은…….”
무인들은 듣지 않았다. 약재를 꺼내고 빈자리에 들어선 무인은 수상쩍은 고리를 발견했고, 힘껏 잡아당겼다.
부욱!
나무 아래쪽에서 무엇인가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뚜껑이 활짝 열렸고, 차디찬 강물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엇!”
무인은 깜짝 놀라 황급히 되닫았다. 하지만 강물은 뚜껑 틈 사이로 쉴 새 없이 스며들어 금방 가슴 높이까지 차올랐다.
탁! 쉬익!
무인은 바닥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밑바닥입니다. 바닥에서 무엇인가 찢어졌는데…….”
“뭔가?”
무인이 선주(船主)를 노려보며 말했다.
“말했잖습니까? 비상용 탈출구라굽쇼. 바닥에는 물이 스며들지 말라고 상어 가죽을 대놨습죠. 그걸 찢어버리셨으니…… 지금 배를 수리하지 않으면 가라앉고 맙니다요. 제발 배라도 수리하게 해주십쇼.”
“수리해라.”
선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선원을 다그쳤다.
“빨리, 빨리! 배가 가라앉는단 말이야! 빨리 움직여!”
무인들은 침중해졌다.
뚜껑 밑에다 대놓은 가죽이 멀쩡했다면…… 누가 위에서 열고 내려가지는 않았다는 말이 된다. 비상용 탈출구는 있지만 탈출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가자!”
무인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쾌속하게 사라졌다.
“푸웁! 후우!”
그녀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한 명씩 뱃전으로 올라왔다.
그녀들이 다 올라온 후 선원 몇 명이 강물 속이나 다름없는 배 밑바닥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이 뚫린 밑창을 잘 막았는지 배를 집어삼킬 듯 솟구치던 물줄기가 뚝 멎었다.
“눈치채셨겠지만 천비대가 다녀갔습죠. 제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야 믿는 족속들이라서…… 저희 배는 얼마 가지 못합죠. 워낙 영악한 놈들이라 금방 눈치채고 다시 올 겁니다요.”
선주를 유심히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다. 선원들 중에는 무공을 수련한 것으로 보이는 자가 몇 명 있기는 한데, 선주는 전혀 티가 나지 않는다. 소립파처럼. 아니면 정말 무공을 수련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거나.
“조금 있으면 절벽 바위가 나오는데, 거기까지만 안내합죠.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편히 쉬면서 가실 수 있을 겁니다요.”
“마차라고 했어요?”
금연화가 아미를 상큼 추켜올리며 물었다.
“마차도 팔두마차입죠. 안락하고 푹신한 침상도 준비되어 있고…….”
“무슨 수작이지?”
“예, 예? 수, 수작이라뇨?”
“정말 기분 이상해지네. 석해진에서는 우리로 가장한 여자들이 비조선을 탈취하여 사라졌어. 그때는 천비대의 이목을 따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오히려 천비대의 이목을 끌어당기려는 거였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족집게처럼 포위당할 리 없지.”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 내가 잘못 판단한 거야. 우린 석해진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어. 적선서인가 뭔가 하는 요물도 너희가 지어낸 말 아냐?”
“그럴 리가요. 천비대는 분명 적선서를 열두 마리 가지고 있습죠. 그중 다섯 마리를 천비일조가 소유했고. 잘은 모르겠지만 나머지 일곱 마리도 곧 배달될 것이라는 정보가 있었습죠만.”
“뭐야! 일부러 알리고 숨겨주고. 이제는 팔두마차로 이목을 한껏 끌어당기겠다 이거지. 적선서가 뒤쫓아온다면서 잔뜩 겁을 주고는 또 숨겨주겠지? 무슨 수작이야. 뭐 하는 짓거린지 똑바로 말하지 않으면 한 놈도 살아나지 못할 줄 알아.”
“화를 누르시고. 저희 배웅이 섭섭하셨다면 원하시는 대로 가셔도 좋습죠. 이 배를 내놓으시라고 하시면 드릴 용의도 있습죠. 비조선을 원하시면 비조선을, 말을 원하시면 말을. 말씀대로 해드릴 용의가 있습죠.”
“동생, 내가 말을 할게. 화 좀 가라앉혀. 이봐요, 사람이 일을 할 때는 이유가 있는 법이에요. 제가 생각해도 번잡한 일들이 사태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되는데, 이유가 있나요?”
절혼마녀가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여기서 그분 말씀을. 그분 왈(曰), 장강은 이쪽이든 저쪽이든 넘을 수 없는 철옹성이다. 평시에도 항상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하나 천비대의 추적을 뿌리치고 단문협에 들려면 장강을 넘는 수밖에 없다.”
“또 구슬리는 건가요?”
“말씀을 끝까지. 헤헤, 철옹성을 어떻게 넘을 것인가? 굳건한 제방도 미세한 균열로 무너지듯 흠집을 내야만 한다. 밀고 당기고, 밀고 당기고.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장강까지 가면 원래 펼쳐져 있는 천라지망과 천비대가 펼친 천라지망이 충돌하며 균열이 생긴다. 전 여기까지만 말씀을 들었습죠.”
“그 사람 뭐죠?”
“예?”
“그 사람이 무슨 집단의 우두머리라도 되나요?”
“무슨 말씀을.”
선주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무림 쪽 일은 잘 모르지만 그분이 어느 집단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입죠. 아! 우리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만도 합죠만…… 헤헤, 요즘 세상은 돈이면 귀신도 부릴 수 있습죠. 하룻밤 동안 조금 수고하고 조금 연극하면 배 한 척을 양도받기로 했는데, 그만하면 천비대가 아니라 북검문주가 와도 거짓을 아뢸 수 있습죠. 헤헤.”
절혼마녀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의혹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니지만 소립파가 나쁜 행동을 한 것은 없지 않은가. 번잡스럽고 마음이 조마조마하지만 피할 길은 항시 마련해 주었고.
그냥 믿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동원된 많은 사람들이 단순히 돈 때문에 움직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돈도 쓰였다. 하지만 돈 이외의 것 때문에 움직였을 공산이 훨씬 크다.
혹, 강성한 무력에 눌려 지하로 숨어든 사람들, 마인들이 서로를 돕고 있는 것은 아닌지.
소립파가 어느 집단의 우두머리일 가능성은 몹시 낮다. 마공을 수련한 마인들은 뭉치면 죽고 훑어져야 산다. 두 사람만 뭉쳐 다녀도 당장 북검문이나 남도문의 주목을 받게 되고, 추살당하는 게 현실이다.
“절벽 바위라는 건 어디쯤에 있는 거죠?”
절혼마녀가 몸에 붙은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