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70
170
“이제는 할 수 없네. 성공하길 빌어.”
천멸도주가 옆에 와 다소곳이 앉았다.
소립파는 그녀처럼 다급하지 않았다. 실패할까 봐 조마조마하지도 않았다.
나균이 아무리 지독하다 해도 흡혈고인에 비할까. 미염흑매에 견줄까. 이미 산봉을 올라서본 사람에게 계곡 조금 거닐면서 힘들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저 웃을 뿐이다.
“한 시진이면 돼.”
소립파는 약탕관을 기울여 단숨에 들이켰다.
단약의 기운이 전신을 구석구석 뒤져 나갔다.
잠복해 있던 나균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영매술까지 가미된 단약을 이길 수는 없었다.
소립파는 이 모든 과정을 내관(內觀)했다.
단약은 미완성이다. 세상의 모든 약이 그렇다. 완벽한 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미완성의 약이 몸에 들어와서 육신이 자체적으로 생산한 군사와 합류한 후 병균을 치는 것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미완성의 약은 비로소 완성된다. 몸이 만들어낸 군사가 없다면 약은 완성되지 못한다.
나환자들은 면역 체계가 무너져서 자체적으로 군사를 생산해 내지 못한다.
소립파는 자신의 몸속에서 완성된 단약 기운을 수로로 몰았다.
서둘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하지만 쉬임없이 몰아서 손가락 끝에 집중시켰다.
성공할 것인가, 실패할 것인가.
이제는 삼목을 열 차례다.
‘지금이야!’
그의 머릿속에서 흘러나온 영파(靈波)가 천멸도주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었다.
천멸도주는 망설이지 않고 소검을 들어 마야의 손가락을 쨌다.
주르륵……!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소립파는 단약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감지했다.
성공이다.
‘천멸도 식구들이 사용할 만큼 많은 양이 나와야 되는데…….’
가능한 많은 피를 뽑아내야 한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뽑아낼 수는 없다. 약기운이 섞이지 않은 피는 약효만 떨어뜨릴 뿐이다. 단약 기운이 섞였는지 섞이지 않았는지 잘 판별해야 한다.
‘됐어. 이제.’
소립파는 손을 거뒀다.
천멸도주는 소립파가 흘린 피에 찹쌀 풀을 섞어가며 환을 만들었다.
“이거 얼마만 하게 만들어야 해?”
“엄지손가락만 하게.”
“효과 있을까?”
천멸도주의 음성은 흥분으로 떨렸다.
소립파가 운공을 마칠 때까지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손에서 피가 흘러나왔지만 그때도 믿지 못했다. 소립파가 운공을 마치고, 완쾌되었다는 말을 했을 때에서야 비로소 나병을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 들기 시작했다.
희망은 전율로 변했다.
지긋지긋한 나병에서 드디어 해방된다. 이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소립파가 옆에 와 같이 환단을 만들었다.
“현재 천멸도 식구가 몇 명이나 돼?”
“이백 명 정도.”
‘이백 알.’
환단이 완성되었다.
겨우 백여 알.
생각보다는 많이 나왔지만 이백 명분은 턱도 없다.
황정초와 청령단이 또 있다면 모르겠는데…… 청령단은 남도문에 있지만 황정초는 구할 수 없다.
천멸도주가 소립파의 마음을 읽고 밝게 말했다.
“괜찮아. 우린 이제 희망이 생겼잖아. 황정초와 청령단만 있으면 나을 수 있다는 희망. 천하를 뒤져서라도 구할 거야.”
“그래, 그러자.”
소립파는 환단 한 개를 천멸도주의 입에 넣어주었다.
2
그는 네모난 얼굴에 수염이 거칠게 자라 있었다.
위로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주먹으로 한 대 엊어맞은 듯 움푹 들어간 코가 그의 인상을 뚜렷하게 각인시켰다.
또 다른 특징, 사내는 아무런 기운도 풍기지 않았다.
날카롭다거나 묵직하거나 사납거나…… 사내들에게서는 여러 가지 기운들이 풍겨나는데, 마치 그림을 대하는 것처럼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일령은 그를 보자마자 사방천마 중에 일인임을 짐작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앞에 있는 사내는 그녀가 만나본 적수들 중에서 가장 강했다. 잠깐의 방심이 목숨을 앗아갈 것이다.
“크크크! 어딜 그렇게 부지런히 가시나?”
사내의 음성은 낮고 컬컬했다.
“동서남북 중 뭐예요?”
일령은 태연히 물었다.
“이 몸? 크크크! 이 몸이 남방천마이시지.”
“여자가 한 명 있었죠?”
“동방천마지. 동방천마한테 걸리면 뼈도 못 추려. 관심도 갖지 마.”
“일장쇄암이라는 장법을 쓰죠?”
“크큭! 여러 장기 중에 하나지. 이 몸은 하도 여러 가지를 써서 어떤 게 장기인지 나도 몰라. 그저 닥치는 대로 쓰는 거지. 크크크! 또 궁금한 게 있나? 있으면 다 물어보라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일령은 천천히 다가섰다.
이 순간, 그녀는 호승심(好勝心)을 이기지 못했다.
마도와 수검이 사방천마와 싸우고자 한다. 그들은 나름대로 이길 자신이 있다고 했다.
일령은 마도와 수검이 두렵지 않았다. 그들이 무적도, 무적검을 수련했지만 선유비조신법을 베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사방천마는? 마도와 수검이 상대하고자 하는 자들이니 자신 역시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가장 만만해 보여서 말이야. 이거나 풀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남방천마는 징그럽게 웃으며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이것도 인연인데 뜨겁게 얽혀보자고.”
“호호호! 유감이네요. 제가 그렇게 만만하게 보였다니.”
“만만하게 보였지. 공령문의 선유비조신법을 극성으로 수련한 것 같은데, 아직 최후의 오의는 깨우치지 못한 것 같단 말이야. 부드러움은 있는데 신선이 구름 속을 누비는 것 같은 유유(幽幽)는 없어. 그 정도는 상대해 줄 수 있지.”
순간 일령은 소름이 쫙 끼쳤다.
신법을 단숨에 알아봤다. 그리고 다가왔다.
‘길(吉)보다 화(禍)가 많겠어.’
그제야 다담선자가 신신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사방천마를 만나거든 즉시 몸을 빼내라고 했다. 호승심을 누르고 전체 속에 하나가 되라고 했다.
일령은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이미 늦은 것을 어찌하랴. 서로 간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뒤로 몸을 빼내려다가는 당할 가능성이 너무 높은 것을.
“원래 맨손으로 싸우나요?”
“흐흐흐! 나는 늘 그래.”
“잘됐군요. 저도 맨손으로 할게요.”
일령은 염화옥수(拈花玉手)를 떠올렸다.
꽃을 짚듯이 살짝!
“이런! 한바탕 해볼 모양이네. 그냥 눕지. 땀 흘리면 냄새 나서 안 좋을 텐데. 크크!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크크크!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여자 맛본 지 얼마나 됐더라? 제길! 기억도 안 나네.”
쏴아아아……!
남방천마의 움직임은 곰처럼 둔해 보였다. 한데 그가 신법을 일으키자 번개처럼 빨랐다.
파파팟!
일령도 자신감을 가지고 선유비조신법을 펼쳤다.
천멸도 살수들을 상대로 완성시킨 신법이다. 황전륜의 팔십일전혼이, 종청호의 십팔밀막검이 암중에서 쳐왔지만 비켜냈다.
그때가 그립다. 소립파가 마령음을 전개하여 내공을 북돋아주던 그때가. 정말 신선이 구름 속을 노니는 듯 황홀함을 느꼈는데.
“좋아! 간발의 차이! 여자가 수련하기는 최상의 신법이지! 크크크! 자, 그럼 염화옥수 맛 좀 볼까?”
순간이다! 남방천마의 손에서 무엇인가 기다란 것이 쭉 솟구치더니 몸을 휘감아왔다.
촤라락!
사슬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헉!’
일령은 내심 당황했다.
일장쇄암을 대비 중이었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인가.
이런 경우, 있었다. 천멸도 살수들의 검 앞에 풍전등화(風前燈火)처럼 위태로웠던 때가 있었다.
‘신체동지전(身體動之前:몸이 움직이기 전에), 심선동(心先動: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심동지전(心動之前:마음이 움직이기 전에), 역기선동(力氣先動:기운이 먼저 움직인다)…….’
선유비조신법의 심결을 유유하게 풀어냈다.
보인다. 기다란 사슬이 뱀처럼 휘어져 몸을 휘감아온다.
찌르고 베는 것보다 휘감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나?
탁! 탁탁탁!
엄지발가락에 있는 은백혈(隱白穴)에서 진기가 연신 터졌다. 터뜨리려고 터뜨린 게 아니다. 심결을 일으키자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선유비조신법은 이미 몸의 일부였다.
촤락!
쇠사슬이 아슬아슬하게 발밑을 스쳐 갔다.
일령은 그 틈을 노리고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남방천마와의 거리를 육박(肉薄) 거리로 좁혀야 염화옥수를 전개할 수 있다. 한데!
슈우욱!
쇠사슬은 어디로 사라지고 느닷없이 기다란 창이 불쑥 솟구쳤다.
마치 남방천마의 가슴에 기관으로 발사되는 창이 숨겨져 있었던 것처럼 무척 빠르게 튀어나와 당황할 틈도 없었다.
‘심즉기(心卽氣). 마음은 곧 기운이라…….’
탁! 탁탁!
창이 코끝을 스쳐 갔다.
지척에서 터져 나온 창을 용케도 피해냈다.
창이 빗나가자 남방천마는 유유히 물러나 일 장 거리를 유지했다.
“비겁하군요.”
“크크크! 어리기는. 이건 비겁한 것이 아니라 병기의 묘용을 살린 거야. 비겁하기로 따지면 궁왕처럼 비겁한 사람이 없지. 안 그래? 크크! 멀리서 톡톡 건드리기만 하면 되는데 뭐 하러 바짝 붙어서 드잡이질을 쳐. 난 너 죽이기 싫다니까. 이걸 풀어야지.”
남방천마가 또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남방천마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다. 그의 말대로 사로잡아서 욕정을 해소할 모양이다.
흥분해서는 안 된다.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 격장지계(激將之計)에 넘어가면 바로 끝이다.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유가 못 된다. 어쨌든 남방천마와 나는 동수(同手)다. 서로가 서로를 어쩌지 못해. 내가 남방천마를 건드리지 못하듯이 남방천마도 나를 잡지 못했어. 좋아! 해보자!’
자신감을 가졌다.
탁! 탁탁탁!
은백혈에서 진기가 튕겼다. 그녀의 신형은 허공에 띄워졌고, 순식간에 일 장이라는 거리를 좁혔다.
“아이구, 깜짝이야! 크크! 놀랐잖아.”
남방천마의 좌측 소매에서 손가락 두 개를 합친 정도의 협검(狹劍)이 솟아나왔다. 오른쪽 소매에서는 이미 견식한 쇠사슬이 풀렸다.
타악!
그녀의 신형이 쇠사슬 밑을 파고들었다. 당연히 오른쪽 겨드랑이 밑에 허점이 보였다.
슈욱!
다섯 손가락이 한데 모아져 살짝 짚어 나갔다.
꽃잎을 잡듯이 부드럽게 짚기만 하면 된다. 짚는 즉시 진기가 파고들며 화려한 폭발을 일으키리라.
한데 그토록 크게 보이던 허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촤라락!
머리 위로 비껴냈던 쇠사슬이 일직선으로 쏘아져 내려왔다.
아니다. 이건 쇠사슬이 아니다. 협검이 좌우로 쫘악 갈라지며 얇은 투망(投網)으로 변신했다.
‘위험!’
물러서기는 늦었다. 그녀의 신형이 아무리 빨라도 투망의 범위를 벗어나기는 힘들다.
일령은 남방천마의 가슴에 안기기라도 하겠다는 듯 바짝 다가섰다.
오른손은 습관처럼 오므라졌으며, 남방천마의 가슴을 짚었다.
“되게 만지고 싶었던 모양이군.”
남방천마는 가슴을 활짝 내줬다.
‘승부!’
일령은 전신진기를 염화옥수에 모아 영대혈(靈台穴)을 짚었다.
파앗!
전신진기가 다섯 손가락을 통해 일시에 쏟아져 들어갔다.
퍼억!
일령도 대가를 치렀다. 옆구리에서 묵직한 통증을 느끼는 순간 허리가 푹 꺾였다.
촤라라락!
투망이 전신을 뒤덮은 것은 그다음이다.
‘이겼어.’
일령은 투망을 걷어내기 전에 긴 숨부터 들이켰다.
옆구리에 받은 타격이 만만치 않다. 며칠 동안은 몸을 놀리기가 불편할 게다. 얼음찜질을 하면 좋겠지만 남만에서 얼음을 구한다는 건 하늘의 별 따기고.
투망에 짓눌린 고개를 들어 앞을 봤을 때, 일령은 기겁할 듯 놀라고 말았다. 쓰러져 있어야 할 남방천마가 멀쩡하게 서서 싱글싱글 웃고 있지 않은가.
“어떻게……?”
염화옥수는 분명히 영대혈을 가격했다. 영대혈에 취집된 진기는 폭발을 일으켰을 거고, 남방천마는 쓰러져 있어야 한다. 도저히 멀쩡할 수는 없다.
두어 번 눈을 끔뻑거리며 남방천마의 가슴을 쳐다보았다.
그제야 해답이 찾아졌다.
남방천마는 특이한 신공을 수련했다. 전신진기를 일 점에 집중시킬 수 있는 신공이다. 일시적이지만 순간적으로 잠력까지 모두 끌어올려 한 점에 모을 수 있다.
일장쇄암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세맥 속에 잠들어 있는 진기까지 사용하니 타격을 가했을 때의 힘은 평소보다 서너 배의 위력을 뿜어냈을 게다.
남방천마는 그 힘을 영대혈에 모았다.
일령의 염화옥수는 영대혈에서 취집할 수 없었다. 강력한 반탄력에 밀려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쫓겨났다.
한 번만 되짚었다면 승부는 달라졌을 게다. 그렇다면 정말로 남방천마가 쓰러져 있으리라. 염화옥수가 터진 것으로 안도감을 느낀 것이 패인이다. 끝까지 경각심을 지니고 있어야 했는데.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졌다.
이런 게 싸움이다. 이기면 영원히 이길 수 있을 것 같고, 지면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 것 같고.
일령은 눈을 감았다.
욕을 당할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남방천마가 순순히 놔줄 것 같지도 않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일령은 진기를 다시 한 번 끌어올렸다.
심맥(心脈)을 끊기는 쉽다. 그것이 욕을 당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제길! 이게 뭐야!”
느닷없이 남방천마가 펄쩍 뛰었다.
왜애애애앵……!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왕벌?’
그렇다. 왕벌이다. 왕벌이 무더기로 날아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