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71
171
죽음의 살인벌이 이토록 반가울 수도 있구나.
남방천마는 서둘러 물러섰다.
투망을 거둘 새도 없었다. 일령을 챙길 시간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왕벌의 무서움을 잘 알았다. 무공으로 대적할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천지를 삼켜 버릴 불만이 왕벌을 태워 버릴 수 있으리라.
왕벌은 적토마도 간단하게 따라잡는다. 피하려면 조금이라도 빨리 피하는 게 능사다.
남방천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일령은 조심스럽게 투망을 걷어냈다.
왜애애애앵!
왕벌이 요란스럽게 주위를 맴돌았다.
정말 크고 징그럽다. 웬만한 벌레는 두 다리로 잡아 쭉 찢을 것 같다. 톱니 모양의 입은 단번에 몸뚱이를 끊어버릴 수 있다.
침은 더 위협적이지만 침이 아니더라도 끔찍한 놈들이다.
‘저리 가. 제발.’
벌침에 네다섯 방만 쏘이면 휴극(休克:쇼크)이 일어난다고 들었다.
처음부터 공격을 받지 말아야 한다.
벌은 적을 발견하면 독을 뿌려대는데, 이런 독액 속에는 동료들을 부르는 물질이 섞여 있다. 냄새를 맡은 동료들이 달려와 같이 공격하는 것이다.
네다섯 방 쏘이는 것은 눈 깜짝할 순간이다.
조심조심 투망을 걷어낸 후, 몸을 일으켰다.
왜애애애앵!
왕벌들은 요란스럽게 날개를 퍼덕였다. 수십 마리가 그녀의 어깨에, 몸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갔다.
일령은 식은땀을 흘렸다.
땀 냄새는 벌을 자극한다. 안다. 하지만 마음을 착 가라앉혀도 땀이 솟구치는 걸 어찌 막으랴.
일령은 왕벌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면서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떼어놓았다.
왕벌과 눈이 마주쳤다. 그럴 리는 없지만 수십 마리가 쳐다보는 것 같은 착각을 받았다.
‘제발…….’
일령은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왕벌이 이상한 기미를 눈치 챘는지 수십 마리가 날아올라 주위를 맴돌았다.
어떻게 할까? 이대로 굳어버릴까? 왕벌이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까지 기다릴까?
그때 또 한 번의 기적이 그녀를 도왔다.
왜앵! 왜애애앵!
왕벌 몇십 마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날아올랐다.
그들 속에 여왕벌이 섞여 있는 것 같다. 다른 벌도 일제히 날아올라 무리를 쫓아가기 시작했으니까.
‘살았어. 휴우!’
왕벌은 사라졌다. 왔다 간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주위만 둘러보고서는 방금 전까지 왕벌로 가득 채워졌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게다.
일령의 행동을 제약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일령은 움직이지 못했다.
“마야!”
그녀의 눈길에 마야가 걸렸다.
분명히 마야다. 그의 곁에 백포로 전신을 감싼 사람은 천멸도주가 틀림없다.
“어쩌다 남방천마와 부딪친 거야?”
천멸도주가 투망을 걷어 올리며 물었다.
“싸, 싸움 중이에요, 사방천마와.”
일령은 괜히 속상했다.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을 보였을 때의 기분이다.
언제부터 봤을까? 남방천마에게 패배할 때부터? 투망에 걸려들었을 때? 아니면 왕벌에 둘러싸였을 때?
언제부터든 마야에게 보이기 싫은 모습이다.
“선유비조신법은 경지에 이르렀는데 염화옥수는 조금 부족해. 모르고 있는 건 아냐. 알고 있으면서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거지. 한 시진만 집중해서 수련하면 한결 좋아질 거야.”
‘싸울 때부터 봤어.’
“호호호! 정말 놀라운 일이야. 우리 애들한테 쩔쩔맬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남방천마와 손속을 겨루고.”
일령은 천멸도주의 말을 듣고서야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참! 병은 고쳤어요? 어땠어요?”
“고쳤어. 말끔히 나았어.”
그래서일까? 천멸도주의 음성이 한결 부드러워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다. 그래서가 아니다. 전혀 색다른 냄새가 난다. 사내를 받아들였을 때만 풍길 수 있는 냄새다.
‘괜찮아. 천멸도주는 원래부터 그랬으니까.’
첫사랑이 자기 자리를 찾았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축하해요. 정말로요.”
일령은 엉겁결에 그녀의 두 손을 잡았다.
다른 때 같으면 얼른 몸을 사렸다. 지금도 습관처럼 몸을 뺐다. 하지만 전처럼 완강한 몸놀림은 아니었다.
‘확실히 고쳤어. 세상에! 나병을 고치다니!’
말을 듣지 않았어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복이 터졌네.”
“무슨 복?”
“저 꼬마까지 몸을 비비 틀잖아.”
“…….”
“언제 해치울 거야?”
“거, 말 좀.”
“알았어. 곱게 할게. 언제 잘 거야?”
“관심없어.”
“엉큼하기는. 열 여자 줘서 싫다는 남자 못 봤어.”
“제발 좀 그만 해. 목소리 좀 낮추고. 듣겠어.”
“벌써부터 듣고 있었는데 몰랐어?”
소립파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천멸도주가 원래부터 이러지는 않았는데…… 왜 이렇게 변했는지.
“막내! 이리 와봐. 괜히 못 들은 척할 것 없어.”
천멸도주는 앞서 가는 일령을 부르기까지 했다.
여자는 딱 연애할 때까지만 아름답다.
제9장 호리락(好利落) ― 완쾌되다
1
마도와 수검은 일남일녀를 맞이했다.
몸이 단단해 보이는 사내와 요염함이 극치를 이룬 여인이다.
“내가 일도참혼의 주인이다.”
사내, 서방천마는 소도를 꺼내 입으로 도신을 핥았다.
마도가 일어섰다.
혈염도는 이미 뽑혀 손에 쥐어져 있었다.
“만나고 싶었다.”
마도의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후후후! 만나지 않는 게 좋았을걸. 오래 살고 싶다면 말이야.”
파파팟! 쒜에엑!
서방천마는 일직선으로 달려와 붕 떠올랐다.
놀라운 것은 그의 손이다. 아래에 있던 손이 어느새 비스듬히 비껴져 관자놀이를 찔러왔다.
마도는 반사적으로 혈염도를 곧추세웠다.
까강!
도와 도가 부딪치며 불똥을 튀겨냈다.
“제법인데?”
“당신 역시.”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며 빙글 반 바퀴 정도 돌았다.
타타탁! 쒜에엑!
사방천마의 공격 수법은 거의 비슷했다.
거침없이 달려와 전신을 활짝 열어젖힌 채 도를 쳐낸다.
알면서도 막을 수가 없었다. 그의 신형이 너무 빨라서 잡을 수 없었고, 공격 부위가 기상천외해서 매번 깜짝깜짝 놀라야만 했다.
몸이 움직이는 방향으로 봐서는 상반신을 공격할 것 같은데 다리를 친다. 허리를 굽혔으니 다리를 베는 것이 당연한데 손이 위로 꺾어져 가슴을 찌른다.
감각도가 아니라 초식에 얽매인 도법 같았으면 벌써 승부가 났다.
“괜찮네. 혈염도법. 용하게 버텼어. 자, 간닷!”
서방천마가 달려와 소도를 떨쳐 냈다.
캉! 캉캉캉……!
불똥이 연속적으로 튀었다.
이번 공격은 열두 번이나 이어졌다.
“남방천마는 지금쯤 한참 열이 올라 있을 거야. 일령인가 하는 여자, 어리면서도 정말 육감적이더군. 뭐, 남방천마의 씨앗을 배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여인은 고혹적으로 웃었다.
수검은 검을 가슴에 품고 여인을 노려봤다.
동방천마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여인이 아니다.
“방해받지 않는 곳으로 갈래?”
“길게 끌 건 없을 것 같군.”
수검의 눈길에서는 독기가 피어났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차디차게 얼어붙은 눈이었다.
“재미없는 사내네. 당신 같은 사람은 맛이 없어. 몸이 너무 경직되어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없거든. 기술만 좋으면 최상일 수도 있는데, 어때?”
‘이런!’
수검은 움찔거렸다.
목숨을 건 사투를 앞두고 상대에게 욕정을 느꼈다면 뭐라고 할까?
미친놈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죽고 싶으면 무슨 짓을 못하느냐는 말도 들을 게다.
수검이 현재 그런 상태였다.
동방천마…… 상당히 매혹적인 여자다.
예쁜 여자들은 많이 봤다. 다담선자, 절혼마녀, 금연화, 일령…… 어느 한 여인도 미색이 빠지지 않는다. 누구든 처음 보는 순간부터 빠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매혹적인 여자들이다.
동방천마는 다른 매력을 지녔다.
이상하다. 그녀를 보고 있는데 알몸이 떠오른다. 발가벗은 몸으로 나긋나긋 말하고 있다.
수검은 머리를 크게 흔들었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지금도 늦지 않았어. 방해받지 않는 곳으로 가는 게 어때? 우리가 싸우면 내가 죽든 네가 죽든 둘 중에 하나는 죽을 거야. 어차피 죽을 몸뚱이, 보시하는 셈 치면 되잖아?”
그녀의 말에 따르고 싶다. 지금이 아니면 동방천마 같은 여자는 평생 안아보지 못할 것 같다.
그녀를 죽일 수도 있다. 그때는 늦는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녀의 말에 따르지 않은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게다.
“갈래?”
수검이 침을 삼켰다.
‘빌어먹을! 갈증까지 치밀다니!’
더욱 미치겠는 것은 양물이 곤두서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싸움을 앞두고 욕정이 치솟다니! 옆에서는 서방천마와 마도가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는데 여자 알몸이나 떠올리고 있다니.
‘빨리 끝내야겠어.’
“제안은 솔깃하지만 거절하겠어. 우리도 그만 시작하지.”
“좋아. 시작해.”
그녀는 사뿐사뿐 걸어왔다.
완전히 무방비 상태다. 검을 쳐내기만 하면 목이든, 가슴이든, 배이든 베어낼 수 있다.
수검 자신이 뒤로 물러섰다.
이런 일도 처음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끝장냈다. 적인데 베지 않고 물러서는 일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싸운다면서?”
“준비해라.”
“그냥 베어줘. 살기 싫어.”
“가라!”
수검은 흥미를 잃었다. 그는 싸움을 하고 싶었지 도살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동방천마가 다가왔다.
처연한 눈망울, 활력을 잃은 눈동자, 권태로 찌든 마음……
‘정말 죽고 싶어 하는군. 불쌍한…….’
그때다. 수검은 절혼마녀를 떠올렸다.
절혼마녀에게는 귀루와 사루의 무학이 있다. 그전에는 정한문(情恨門)의 무공을 습득했다.
탈백섭심공(奪魄攝心功)이라는 요사한 사공(邪功)이다.
요즈음 절혼마녀는 탈백섭심공을 다시 연구하고 있다.
귀루와 사루의 무학이 합쳐져서 탄생하는 귀수에 탈백섭심공까지 가미시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의 손이 될 거라고 했다.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눈뜬 상태 그대로 절명시켜 버리니까.
갑자기 전신에 오한이 느껴졌다.
‘탈백섭심공!’
수검이 경각심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동방천마는 너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퍼억!
수검의 허리가 툭 꺾였다.
동방천마의 일권은 명치에 틀어박혔고, 가슴뼈를 으스러뜨렸다.
“컥! 커억!”
수검은 거친 숨과 함께 피를 토해냈다.
부러진 뼈가 장기를 찌른 모양이다.
“호호호! 거봐. 당신 같은 사내는 맛이 없다고 했잖아.”
여인의 손이 들어 올려졌다.
회칠을 한 것처럼 하얀 손이다. 파괴력이 무지막지해서 일장쇄암과도 견줄 수 있다. 욕금진기(慾擒眞氣)와 함께 동방천마가 가장 즐겨 사용하는 음령소수(陰靈素手)다.
“유계 놈들! 무인다운 무인이 없어. 커억!”
수검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휘청거렸다.
“무인이 뭔데?”
수검은 온 정신을 모아 일검을 떨쳐 냈다.
쉬익! 철컥!
서른여섯 가지의 집검법(執劍法), 백팔 개의 접검법(接劍法), 사십팔 개의 운검법(運劍法), 열여덟 개의 수검법(收劍法).
총 삼백만 가지의 검로 중에 하나가 전개되었다.
사아악!
동방천마는 즉시 물러섰다. 수검이 검을 잡는 순간 뒤로 몸을 뺐다. 하지만 수검의 검이 조금 더 빨라서 가슴 앞섶이 베이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비취색 겉옷이 베이고, 빨간색 가슴 가리개가 잘렸다. 그리고 매혹적인 속살에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동방천마가 고개를 숙여 가슴을 내려다봤다.
“빠른데?”
“고맙군.”
“그래도 넌 죽어. 예쁘게 죽여줄게.”
수검은 고개를 크게 흔들었다.
정말 대단한 미염공(美艶功)이다. 도무지 정신 차릴 틈을 주지 않는다. 가슴뼈가 부러지고 피를 토하는 처지에서도 색욕(色慾)이 치밀어 오른다.
까앙! 깡깡깡깡……!
마도와 서방천마의 싸움은 순식간에 이백여 합을 넘어섰다. 서방천마의 일방적인 공격에 마도의 방어로 이루어진 싸움이다.
수검과 동방천마는 싸움 양식이 전혀 다르다.
저들이 몸의 싸움이라면 자신들은 정신의 싸움을 하고 있다.
절혼마녀와 동방천마가 붙었다면 볼 만한 싸움이 되었을 텐데. 한데 동성(同姓)끼리도 미염공이 통할까?
수검은 눈을 감았다.
적을 앞에 둔 사람이 행할 수 없는 행동이다.
사흡검법은 뛰어난 검학이다. 마도의 혈염도법과는 무리가 전혀 다른 정반대의 검법이다.
혈염도법은 수천, 수만 번의 실전을 통해 깨우치는 감각도다. 반면에 사흡검법은 삼백만 개의 검로를 설정해 놓고 최대한 많은 검로를 숙달시키는 과정을 택한다.
혈염도법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라면, 사흡검법은 유에서 유를 이끌어낸다.
어느 쪽이 낫다고는 할 수 없다.
타고난 싸움꾼이라면, 본능이 탁월한 무골이라면 혈염도법이 쉬워 보일 것이다. 반면에 한 계단, 한 계단 밟아 올라가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면 사흡검법이 손대기 쉬워 보인다.
두 무공 모두 일정 수준에 이르면 자신감이 팽배해지는 것도 똑같다. 혈염도법은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고, 사흡검법은 세상의 검법을 모두 손아귀에 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그즈음 주인의 목숨을 가장 많이 빼앗는다는 점에서도 혈염과 사흡은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