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77
177
어떤 이유에서건 상조문과 독조림을 멸살시킨 호채마가 버젓이 나돌아 다닌다는 것은 남무림의 수치였다.
문제는 호채마의 무공이 상당하다는 것.
우습게도 남만에 모인 무인들로는 호채마를 상대할 수 없다는 판단이 섰다.
진퇴양난이다. 머리는 있으되, 머리를 받쳐 줄 힘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물러서야만 될 형국이다.
한데 뜻밖의 구원군이 나타났다. 사방천마가 호채마를 급습할 줄은 그조차도 예측하지 못했다.
사방천마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계략, 계획은 정보에 바탕을 둔다. 정보 없는 계략은 있을 수 없다.
사방천마는 남도문의 조종을 받지만, 묘하게도 그들에 대한 정보는 일절 없다. 그러니 그들을 계획 속에 포함시킨다는 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다.
좌우지간 누군가는 사방천마를 움직였다.
흑조편복도 좋은 역할을 해줬다.
추루족, 수리, 산인들…… 비록 큰 타격은 주지 못했지만 실망할 필요는 없다.
남만인과의 싸움이 시작되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제 호채마는 힘든 여정을 견뎌야 한다. 남만에서는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할 것이고, 조직적인 저항도 받게 될 게다.
‘가만…… 가만…… 어중이떠중이는 필요없고, 그래도 신경을 건드릴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남만에는 남만인만의 독특한 무공이 있다. 중원인은 남만인을 야만인, 미개인 정도로 치부하지만 남만 역시 사람 사는 곳인데 무공인들 발전하지 않으랴.
구환자에게는 남만 무림에 대한 정보가 상당히 축적되어 있었다.
‘호채마가 남무림을 휘젓는다는 건 말도 안 돼.’
구환자의 머릿속에 몇몇 인물이 떠올랐다.
흑조편복은 남만인에 대한 정보가 없었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남만 무림을 알았다면 수리나 추루족을 사용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어쩌다 용케 산인들을 동원하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효율적으로 쓰지는 못했고.
호채마를 치기 위해서는 단단한 껍질부터 벗겨야 한다.
천멸도 살수들로 둘러쳐진 벽은 웬만한 도검으로는 뚫리지 않을 것이다.
‘중원은 너무 무공에만 집착해서 탈이야. 다행히 남만은 그렇지 않지. 칼로 죽이나 올가미로 죽이나 죽이기만 하면 그만. 가장 잘 죽일 수 있는 자가 가장 강한 자. 이것이 남만 무림의 율법.’
구환자는 서신을 써 내려갔다.
한 통, 두 통…… 열 통…….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남만 무림의 살객들에게 전해질 서신들.
그들을 움직이는 것은 너무도 쉽다. 원하는 것을 주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사람을 움직이는 용병술의 기본이다.
사람을 움직일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은 움직일 사람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아는 것과 직결된다.
‘이놈들은 움직일 거야.’
2
수리는 아무런 은원이 없어도 눈에 띄기만 하면 공격부터 하고 보는 사나운 종족이다. 그들 눈에 띄었다면 공격받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추루족은 왜 공격해 왔을까?
다담선자가 급히 풀어야 할 숙제였다.
하나 이번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뒤에는 마야가 있고, 마야가 모든 난관을 해결해 줄 터였다. 그리고 또 주의해야 할 일이 있으면 어떤 수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연락을 취해올 것이다.
쉴 때는 편히 쉬고, 걸을 때는 주위 풍광을 감상하며 유유히 걸으면 그만이다.
마야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이만큼 컸다.
금연화가 뜨거운 뙤약볕에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남만에 와서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공격해 왔을까요?”
“건드리면 안 될 걸 건드렸나? 뭐 조상 무덤 같은 것 말예요.”
일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꾸했다.
“어쨌든 빨리 빠져나가야 될 것 같아.”
“공격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있을 거야. 아니, 있어. 이 정도로 끝나지 않을 거야.”
금연화와 일령은 천천히 말을 주고받았다.
급한 것은 없었다. 길을 서둘지도 않았다.
남만의 정오는 동물이나 식물이나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모두들 펄펄 끓는 태양의 열기를 피해 그늘로 숨어들었다.
나른한 낮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다.
천멸도 살수들은 낮잠을 청하기도 하고, 젖은 수건으로 몸을 닦기도 했다. 어떤 사람은 백포를 풀고 고름이 흐르지 않는 몸, 짓무르지 않은 살을 드러냈다.
나병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이런 식으로라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쉭! 척! 쉭! 사악!
사방이 온통 푹푹 찌고 있지만 유독 날카로운 검풍이 부는 곳, 그곳에는 으레 수검과 마도가 있었다.
사방천마와의 싸움은 마도나 수검에게 일생 최대의 심득을 안겨주었다.
정체되어 있는 무공을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들은 살인적인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았고, 도를 휘둘렀다.
“그런데 우리 지금 어디로 가는 거예요? 여기가 어딘지는 알아요?”
일령이 다담선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금연화와 일령은 남만이 초행이었다. 절혼마녀도 마찬가지다. 혈귀대주의 죽음이 없었다면 북무림 사람으로서 남무림 땅에 들어서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게다.
“몰라. 여기가 어디쯤일까?”
다담선자 대신 절혼마녀가 대답했다.
낯선 길이지만 불안하지는 않았다.
일령도, 금연화도, 절혼마녀도…… 천멸도 살수들도 생전 처음 가보는 길이요,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는 밀림 속을 헤매고 있지만 얼굴 표정은 무척 편안했다.
마야가 뒤에 있기 때문이다.
“언니 좀 봐. 뭘 생각하고 있기에…….”
일령이 다담선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처럼 다담선자는 넋 잃은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눈동자는 한 군데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총기도 실려 있지 않았다.
“다담? 다담!”
다담선자는 절혼마녀가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말로 되지 않아서 소매를 잡아끌자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걱정거리라도 있어?”
다담선자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걱정거리는요.”
“근데 왜 넋을 놓고 있어?”
“저게 이상해서요.”
다담선자가 고갯짓으로 앞쪽을 가리켰다.
“뭐가?”
절혼마녀, 금연화, 일령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봤지만 폭염에 축 늘어진 나뭇가지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저거 안 보여요? 벌.”
“벌?”
다담선자가 그렇게 말하니 보인다. 벌 몇 마리가 왱왱거리며 밀림 사이를 날아다닌다.
“저게 어때서?”
“이상하잖아요. 꼭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지 않아요?”
“너무 신경과민 아냐?”
세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밀림이다. 어디에 무엇인들 없으랴. 벌 몇 마리가 날아다니는 게 무슨 대수인가.
“일령과 남방천마가 마주쳤을 때, 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다담선자의 말이 이어지자 세 여인은 다시 한 번 벌을 쳐다봤다.
“아!”
일령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왔다.
왕벌! 왕벌이다! 크기가 손가락만한 놈들이라 단번에 알아봤어야 하는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무심코 지나쳤다. 왕벌이 아니라 일반적인 벌이라면 눈에 보이지도 않을 먼 거리인데 왜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러고 보니…… 쫙 깔렸네.”
절혼마녀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쪽만이 아니다. 좌측에도, 우측에도, 뒤에도 사방이 온통 왕벌투성이다.
“이건 뭐야? 왕벌에게 포위당했잖아!”
금연화의 아미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왕벌과 사투를 벌일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진다. 한두 마리가 아니라 수백, 수천, 수만 마리라는 데 기가 질린다.
눈에 보이는 것은 몇 마리뿐이다.
앞에 몇 마리, 옆에 몇 마리, 뒤에 몇 마리. 하나 그 뒤에는 헤아릴 수 없는 공포가 숨어 있으리라.
“우리를 쫓아오고 있어.”
다담선자는 확신했다.
“언제, 언제부터 쫓아오기 시작했어요?”
일령은 눈으로 보면서도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그때부터. 네가 남방천마와 마주쳤을 때부터. 그러니까 가가가 천멸도주와 함께 나병을 치유하고 왔을 때부터.”
“마야가 왕벌을 조종한단 이야기에요?”
금연화는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더욱 크게 떴다.
마야의 능력이 기기묘묘하다는 것은 알지만 왕벌을 조종할 수 있다고까지는 믿을 수 없는 게다.
“그럴 가능성이 커.”
“정말요?”
“두고 보면 알겠지. 당장은…… 우리에게 해가 되지 않으니 두고 보자고.”
왕벌이 공격해 오지 않는다. 그러면서 주위를 맴돈다.
이보다 확실한 방어막은 없을 것이다. 남만의 어떤 부족도, 사방천마까지도 왕벌을 무시하고 달려들지는 못할 게다.
“뭐야, 그럼 정말 늘어지게 자는 일만 남았잖아.”
여태까지 한쪽에서 네 여인이 나누는 말을 듣고 있던 혈유가 본격적으로 자리를 깔고 누웠다.
“저것들, 언제까지 퍼질러 누워 있을 참이지?”
천멸도주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무엇이 딱히 못마땅한 것은 아니다. 푹푹 삶아대는 더위가 말투까지 사납게 만들었다.
“후후! 쉴 땐 쉬어야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있던 소립파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흑살마녀의 초옥을 떠나오기 전에 몇 가지 지침을 정했다. 그중에 하나가 정오부터 두 시진 동안은 무조건 쉬라는 것이다.
한서(寒暑)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들이 무인이지만 남만의 정오는 조심해야 한다. 탈수, 일사병, 뇌출혈…… 수많은 질병들이 남만 기후에 낯선 중원인을 괴롭힌다.
가장 확실한 예방책은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다. 폭염을 피하고, 벌레에 물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왜 저것들만 쉬고 난 바빠야 하냐, 이 말이지.”
“다담이나 절혼으로 바꿔줄 수도 있는데.”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그 꼴은 더 못 보지.”
천멸도주가 검을 꺼내 날을 살폈다.
인기척이 감지된다. 적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아니다. 적이다. 세상 만물이 축 늘어진 더위 속을 바쁘게 헤집고 다가오는 자들이라면 악의를 품고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천멸도주는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나병까지 완쾌된 지금은 일부러라도 싸움을 벌여 가뿐해진 몸을 시험해 보고 싶다.
“노래 하나 불러줄까?”
“노래보다는 그 뭐야…… 적멸주라던가, 뭐 그런 게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들어봐. 재미있는 노래야.”
“음치가 부르는 노래가 다 그게 그거…….”
천멸도주는 말을 멈췄다. 검을 만지작거리던 손도 뚝 멎었다. 온 신경이 노랫소리에 맞춰졌다.
“수심공(手心空), 사검활(使劍活). 족심공(足心空), 행보첩(行步捷). 정심공(頂心空), 심안일(心眼一).”
‘심공가(心空歌)!’
어떤 검법의 심공가다. 초보자에게는 검을 전개할 때의 마음가짐 정도로 소개하지만, 고수에게는 검법의 궁극적인 요체가 된다.
검법에 따라서 연검가(練劍歌)에 요체를 담기도 하고, 용검지요결(用劍之要訣)에 풀어놓기도 하지만 대체로 심공가에 최종 득의(得意)를 담아놓는다.
‘손을 비워 검에 생명을 불어넣고, 움직임을 비워…… 인위적인, 인위적인 움직임을 비워 보법을 최상으로? 이게 맞을 거야. 마지막은 머리를 비워…… 머리로 판단하지 마란 소리겠지. 마음과 눈을 하나로 하여 적을 본다?’
천멸도주가 심공가를 풀이하고 있을 때,
“전재관변(全在觀變), 피미동아선동(彼微動我先動), 동즉변(動則變), 변즉저의(變則著矣)…….”
소립파는 용검요결을 읊어나갔다.
‘전재관변, 모든 변화를 온전히 본다. 이건 안법(眼法). 피미동아선동, 미미한 움직임일망정 먼저 움직인다. 선공(先攻)? 이건 수법(手法)이고. 동즉변, 움직이면 변할 것이요, 신법이지. 변즉저의, 변하는 것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보법.’
천멸도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풀이를 하다 보니 너무 기본적인 요결이다.
난생 처음 무공을 접한 초심자도 알아들을 수 있는 요결이며, 검법을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어느 정도 싸움판을 전전한 자라면 이미 몸에 체득하고 있을 요령들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왜?”
“뭐 하는 거냐고 물었지!”
“이런, 이런…… 잘하면 패겠는데?”
“야!”
천멸도주가 소리를 빽 질렀다.
“난 또 무슨 절기라도 전수해 주는 줄 알고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잖아! 지금 이런 장난할 때야!”
소립파는 손을 들어 귀를 후볐다.
“난 그저 노래 한가락 부른 것뿐인데…… 내가 언제 절기를 전수해 준다고 했나?”
“저 얄미운 입하고는…… 미워죽겠어.”
“그리고 말이야.”
“또 뭐!”
“남들은 무당검법십삼세(武當劍法十三勢)라면 너처럼 태연하지 못하던데.”
“뭐, 뭣!”
무당검법십삼세.
천하대파 무당파의 최강 검법이며, 오직 장문인에게만 전수된다는 일인비전(一人秘傳)의 무공.
무당검법십삼세에도 어떤 검법 명칭이 있을 터였다. 하나 세인들은 알지 못한다. 언젠가 열세 가지 초식으로 이뤄졌다는 말이 흘러나왔고, 그 후부터 무당검법십삼세라고 불리게 되었다.
현재 북무림 최강의 검법이라면 북검문 북천신검의 천광일섬이지만, 무당검법십삼세 또한 능히 태산이 될 수 있는 최강 검법인 것만은 틀림없다.
“마, 말도 안 돼. 심공가도 그렇고 용검요결도 그렇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