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80
180
명령을 내린 사람이 누구인가?
‘만사무불통지!’
소립파는 눈을 번쩍 떴다.
그가 알고 있기로 남도문에서 형옥대를 남무림 밖으로 빼낼 수 있는 자는 무신들밖에 없다.
형옥대는 외장 삼첨 중 하나에 불과하다. 삼첨이란 말 그대로 남도문의 대소사를 집행하는 세 개의 창 중 하나다.
그들 전부를 이동시킬 수 있는 자는 거듭 생각을 고쳐 봐도 무신밖에 없다.
그럼 누가? 남도문주? 아니다. 궁왕 강창도? 강창도는 남무림을 위해 활을 들지만 남도문의 조직을 건드릴 사람은 아니다. 그는 제삼무신가를 벗어나면 눈과 귀를 닫아버리는 사람이다.
만사무불통지밖에 없다.
만사무불통지가 멸신구관에서 살아나왔다. 멸신구관에서 빠져나와 제일 먼저 형옥대부터 움직였다.
왜? 무엇 때문에?
강금산이다! 강금산을 죽이러 왔다.
형옥대만 움직이는 게 아니다. 추혼단도 움직이고 있다. 남무림에 있던 형옥대를 남만으로 불러왔는데, 남만에 있던 추혼단을 굳이 돌려보낼 이유가 없다.
지금쯤 추혼단은 강금산의 꼬리를 잡아챘을 게다. 형옥대는 추혼단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움직이는 중일 테고.
우연히, 아주 우연히 형옥대가 가는 길목에 강금산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어서 확인한 것에 불과했는데…… 뜻밖에도 아주 큼지막한 월척이 걸려들었다.
형옥대가 마야를 찾아낸 것은 강금산을 찾은 것 못지않은 수확이다. 강금산 이외에도 멸신구관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또 존재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호기심거리다.
단단하게 엮여진 매듭은 만사무불통지와 형옥대를 하나로 연결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풀렸다.
‘만사무불통지가 살아나왔다면 삼원로 역시 빠져나왔을 공산이 크겠군. 아니, 벌써 빠져나왔어.’
소립파는 희미한 미소를 배어물었다.
강금산은 멸신구관에서 얻은 무공으로 마도나 수검, 혈유를 어린아이처럼 다뤘다.
그런 경지라면 무당검법십삼세를 깨달은 천멸도주도 승부를 장담하지 못한다.
한데 형옥대는 천멸도주에게 농락당했다.
이러한 상황은 무엇을 말하는가.
섶을 지고 불속으로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형옥대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말인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 없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 천하제일지자라는 만사무불통지가 주도하는 일이잖은가. 강금산과 형옥대가 만나는 순간 강금산은 필히 죽는다.
이런 경우는 강금산의 무공에 허점이 있어야 하며, 형옥대가 허점을 요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생각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밖에 없다.
만사무불통지는 멸신구관의 무공을 알고 있다. 최소한 누가 어떤 목적으로 멸신구관을 만들었는지, 멸신구관이 무엇을 노리는지 정도까지는 파악해 냈다.
소립파의 눈빛이 깊은 호수처럼 잔잔해졌다.
흔히들 말한다. 멸신구관은 유계의 주공을 죽이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세상에서 가장 지독한 관문이라고.
소립파가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수련한 무공에 따라서, 지닌 능력에 따라서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는 곳이었다. 무신도 죽일 수 있는 곳이지만 무공을 모르는 소립파도 살아나온 곳이다.
멸신구관은 특정한 사람을 노리고 만들어졌다.
그게 누군가. 누구를 무슨 목적에서 끌어들였나.
멸신구관에 대한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다.
형옥대가 남만에 온 이유를 알아냈다. 그리고 강금산과 형옥대의 싸움은 마야의 입장에서 수수방관해도 상관없다.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다만 남만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폭풍의 핵이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멸신구관의 무공이라면 검을 든 사람이라면 누구 할 것 없이 귀가 솔깃해지리라.
‘최대한 빨리 남만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아냐, 다른 게 있어. 만사무불통지가 멸신구관의 무공을 안다면…… 무신인 그마저 긴장해야 하는 무공이라면…….’
생각이 깊어졌다.
‘북검문, 남도문에 이어 또 다른 하늘이 열리고 있어. 유계의 하늘인 줄 알았는데…… 강금산의 하늘이란 말인가. 그럴 정도의 무공이라면, 그만한 파괴력이라면…….’
눈에 보인다. 강북 무림인들이 시산혈해가 되어 쌓이는 모습이 뚜렷이 보인다.
망설일 게 없다. 지금이야말로 마인들이 오매불망(寤寐不忘)하던 그들만의 세상을 열어줄 절호의 기회다. 막연히 대지와의 싸움을 시작하고자 했는데, 정확한 시기가 도래했다.
확실히 멸신구관은 함정이다. 사람을 죽이는 함정이 아니라 세상을 혼돈 속으로 몰아넣는 함정이다. 북검문과 남도문으로 고착된 세상을 뒤흔들려는 수작이다.
만사무불통지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삼원로도 대책을 세우고 있을 게다.
이토록 세상이 혼란스럽다면 세상의 한 귀퉁이를 허물어 마인들의 세상을 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이건 직감이다. 직감에 불과하다. 하지만 믿는다.
생각만으로는 얻는 게 없다. 움직여야 얻는다.
‘대지와의 싸움을 시작한다. 자식…… 오래 기다렸구나. 조금만 더 기다려라.’
혈귀대주, 술 한 잔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승을 등져 버린 못난 놈. 그의 영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지난밤은 고요했다.
무슨 일인가 일어날 것 같으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폭풍 속의 고요가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칼날 위에 목숨을 맡긴 사람들에게 이 정도의 긴장은 기분 좋은 활력소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진정한 휴식을 취했다.
“아함! 잘 잤다!”
시마가 길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시마 옆에는 혈유가 팔짱을 끼고 다리를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야, 야! 꼬마!”
시마가 혈유를 발길로 툭툭 걷어찼다.
아직 잠이 덜 깬 상태라 정신이 또렷하지는 않았다. 하나 안개가 짙게 깔린 밀림의 아침이 썩 기분 좋지 않다는 사실만은 감각적으로 느껴졌다.
폭풍 속의 고요는 고요로 끝나지 않는다. 반드시 무슨 일인가를 몰고 오며, 지금이 어떤 일이든 일어나기에 최적의 시간이다.
“야! 꼬마!”
발길로 허리를 걷어찼다.
이번 발길질은 조금 힘이 실려 있어서 혈유의 몸이 반 바퀴는 밀려났다.
“뭐야! 왜 귀찮게 그래.”
혈유는 비몽사몽간에 투덜댔다.
그도 일어날 시간이라는 건 안다. 다만 잠의 달콤함을 벗어나기가 싫어서 꼼지락거리는 것뿐이다.
혈유가 깬 것을 확인한 시마는 더 이상 발길질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침 안개를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침부터 푹푹 찌는군.”
“오늘은 손맛 좀 보겠지? 큭큭!”
혈유가 뒤척이며 말을 받았다.
누가 무엇 때문에 싸움을 걸어오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무인의 예감이 모종의 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말해준다.
남도문일까?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다. 남도문과는 악연이 첩첩이 쌓였고, 어제만 해도 형옥대원 몇 명이 죽었다.
그런 면에서는 북검문도 만만치 않다.
남만이란 곳은 북검문도 조심해야 할 곳이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대대적인 공격이 가능하다.
북검문도는 강북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일반적인 정설이다.
과연 그럴까? 그들이 모두 돌아갔을까? 아직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방천마일 가능성도 있다. 그들이 무엇 때문에 왜 공격을 가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서로가 한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처지인 것만은 틀림없으니 언제 어느 때 공격해 와도 이상하지 않다.
흑조편복도 적이다.
한때는 친밀하게 다가온 적도 있지만 모두가 약조를 지키기 위함이었을 뿐, 더도 덜도 없다.
그는 이제 목숨을 벌었다. 싱겁게 목숨 한 개를 잃었지만 아직도 두 개가 더 남아 있다.
차후, 그가 또 공격해 온다면 치명적일 공산이 크다.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을 때? 치열한 접전을 벌여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도 없을 때? 호채마가 흩어져 개별적으로 움직일 때?
어쨌든 호채마의 전력이 정점에 있는 지금은 아니다.
사리사욕에 눈이 먼 자일 수도 있다.
‘멸신구관에서 살아나온 사람’은 적어도 무림인에게는 억만금의 가치가 있다.
더욱이 지금은 강금산이 놀라운 무위를 보여준 후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식으로 몇몇 무인이 작당하여 몰려들 수도 있다.
몇몇? 아니다. 몰려든다면 군중 심리가 작용했을 터이니 남만에 있는 전 고수가 달려든다고 봐야 한다.
형옥대가 소문을 냈을까?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형옥대와 부딪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소문이 날개를 달았다고 해도 십 리 안짝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십 리 안에 있는 무인은 많이 늘려 잡아도 백여 명이 채 되지 않는다.
남도문이거나 북검문이거나 사방천마이거나.
“그런데 우리 두목께서는 뭘 하시나…… 흡!”
시마는 반농담조로 말하며 소립파를 쳐다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거목(巨木)과 동화되어 또 하나의 나무가 되어버린 소립파.
그는 어제의 그가 아니었다.
쇳덩어리다. 속에는 화약이 가득 들어 있어서 건드리기만 하면 즉시 폭발하고 마는 철탄이다.
소립파에게서는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난폭함, 위험함이 풍겨 나왔다.
확실히 어제의 그는 아니었다.
“가아아아아…….”
적멸주인지 마령음인지 모를 소리를 쏟아냈을 때, 그의 위험함은 실체가 되어 나타났다.
우우웅……! 우우우웅! 파닥! 파닥……!
밀림 곳곳에서, 여기저기서 나뭇잎이 펄럭거렸다. 나뭇잎들은 연기가 되어 똘똘 뭉쳤다. 검은 구름 한줄기가 소름 끼치는 기음을 토해내며 하늘로 솟구치더니 소립파에게 달려들었다.
“엇! 저건!”
“뭐, 뭐야! 이, 이게!”
“어멋! 이건!”
모두들 할 말을 잃어버렸다. 입이 있어도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수만 마디가 들어 있는데 한마디도 꺼내놓을 수 없었다.
왕벌!
“쿠오오오! 가아아!”
왕벌이 두 무리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좌측 숲으로 흘러들었고, 또 한 무리는 우측 숲으로 빨려들었다. 그리고 나무가 되어, 나뭇잎 속에 숨어 사라졌다.
침묵이 길게, 아주 길게 이어졌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같았다.
소립파에게는 기이한 능력이 있다. 모든 마인들의 머리에 우뚝 설 만큼 뛰어난 능력이다. 해서 그에게 마야라는 호칭을 주었다. 한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게 말이 되는가. 왕벌들을 수족처럼 부린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왕…… 벌들이 나타나서 나를 구한 게 우연이 아니었네요?”
일령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남방천마와의 싸움을 생각하면 지금도 모골이 송연하다. 정말 실낱같은 차이로 구사일생했다. 왕벌이 아니었다면,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남방천마가 손길을 멈췄을 리 없다.
우연인 줄 알았는데…….
“놈의 복수부터 한다.”
일성(一聲)이 떨어졌다.
“상조문과 독조림은 멸문했으니 남은 건 철사문과 궁왕 강창도.”
“…….”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궁왕을 친다고 했다. 무신을…… 남도문의 삼두(三頭) 중 하나를 죽인다고 한다.
이게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듯이 쉽게 행할 수 있는 일인가.
“철사문과 궁왕 강창도를 치는 데 가로막아서는 게 있으면 가차없이 베어 넘긴다.”
금연화가 가장 고대하던 말이다.
혈귀대주가 죽는 순간부터 오로지 이런 날이 있기만을 기다렸다. 한데 정작 그녀가 소원하던 말이 나왔어도 반갑지만은 않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자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 죽어서 이룰 수만 있다면…… 풋! 내가 무슨 생각을. 모두 죽어도 이룰 수 없는 일이야. 아냐, 마야가 말했으니 혹시…….’
생각이 극과 극으로 뒤바뀌었다.
옳은 것은 없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었다. 그야말로 행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어림도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마야가 선언한 말이니만큼 믿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마야는 대지(大地)와의 싸움을 선언했다. 지상의 모든 무인을 쓸어버리겠다고. 그에 비하면 철사문과 강창도를 죽인다는 것은 지엽적인 일에 지나지 않는다.
가볍게 우선순위를 정했다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그럼 모령(牟嶺)까지 곧장 가는 거야?”
혈유가 물었다.
모령은 남도문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무적의 기마대인 철사문이 존재한다.
“그전에…… 숨어 있는 친구들을 모두 불러 모아야겠지. 마야의 이름으로.”
“후!”
수검이 격한 숨을 토해냈다.
이런 날이 있으리라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그날이 오늘이다.
마야의 이름으로 지하에 숨은 마인들을 불러 모은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삼척동자도 안다.
마도의 부활!
유계의 마인들과는 전혀 다른 마야의 세상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마인들은 살업(殺業)을 타고 태어났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며 살아야 한다. 무조건 죽이지는 않는다. 극강을 향해 치달려 가는 사나이의 길을 이해해 주는 사람만 죽인다. 그런 사람이 누구인가. 무인이다. 무인 대 무인의 싸움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