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82
182
“이놈의 세상, 마음에 안 들어. 전부 못마땅해.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한 군데도 없어. 이년도 그렇고.”
―콘은 사람을 죽인 후에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콘!’
산주는 검을 쳐 낼 용기마저 잃어버렸다.
이 세상 누구와도 검을 부딪칠 수 있지만 지옥에서 보낸 악귀인 콘하고만은 싸울 수 없다.
감정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은 냉혹한 눈길.
아내는 어떻게 저런 눈길을 접하면서도 열락에 들떠 몸을 비틀 수 있는 것일까.
콘이 말했다.
“그만. 이제 지겨워.”
산주는 아내의 심장에 단도가 틀어박히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아이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린 동작, 하지만 정작 피하고자 하면 어느 곳으로 피해야 할지 망설이게 되는 공격, 그래서 결국 도가 심장에 꽂힐 때까지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멀거니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
푸욱!
아내의 생명이 이승을 떠나는 소리였다.
“콘…….”
“콘?”
“콘!”
산주는 검을 놓고 깊이 대례를 올렸다.
괴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콘이라는 말이 상당히 낯선 듯…… 하지만 싫지는 않은지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콘…… 콘…… 큭큭!”
산주는 콘의 잔인한 웃음 속에서 진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온 세상을 피로 물들일 듯 인정이라고는 티끌만치도 찾을 수 없는 살소(殺笑)였다.
“재미있는 일…… 재미있는 일 좀 만들어 봐.”
“네?”
“뭐가 되었든…… 재미있는 일 좀 만들어 봐. 이놈의 세상…… 너무 따분해.”
산주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건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다.
콘은 남만인이 아니다. 그는 한인(漢人)이다. 경황이 없어서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는 한어를 쓰고 있다. 자신 역시 한어로 대답하고 있었고.
콘은 남만의 전설인데 어찌 한인이 콘이 될 수 있을까. 하면 이자는 누구인가?
악마…… 덕망 높은 스님이 평생을 회개시켜도 선한 마음을 심을 수 없는 자다. 이토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악으로 똘똘 뭉친 인간도 없을 게다.
‘콘…….’
산주는 의구심을 애써 밀어냈다. 남만인이 아니고 한인이지만 콘의 심정을 지닌 자가 남만에 있다면 그가 콘이 아니고 무엇인가.
‘콘의 전설은 진실이야.’
산주는 죽은 호법들을 쳐다봤다. 꼴사납게 널브러져 있는 아내의 몸뚱이도 봤다.
자신이 재미있는 일을 만들지 못하면 이 같은 살육은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이다.
‘남만을 피로 물들일 수는 없어.’
그때, 산주의 머릿속에 현 상황과 평소 꿈꾸던 야망이 한데 어우러져 기가 막힌 그림을 그려냈다.
“콘과 어울릴 만한 자가 있습니다. 그자를 만나면 아주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소, 속하! 자신합니다.”
“속하? 키키키! 좋아. 심부름꾼 하나 두는 것도 괜찮지. 계속 말해봐. 나와 어울릴 자가 누구야?”
“마궁의 궁주라는 자입니다.”
산주는 마군을 떠올렸다.
현 마궁의 궁주는 마야, 마군은 전임 궁주다. 한데도 ‘마궁의 궁주’하면 마야보다는 마군이 먼저 떠오른다.
마군은 산주의 머릿속에 콘만큼이나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콘에게 저항하지 못하듯 마군에게도 검을 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평생을 수련해도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하늘이었다.
콘과 마군.
좋은 상대다. 둘이 승부를 결하면 어느 한쪽이 이긴다고 할 수 없다. 필시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끝날 공산이 높다.
마군은 죽고 없다. 하지만 중원에는 마군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고수들이 존재한다. 그것도 일곱 명이나 있다. 무신들이라고 불리는 천하의 하늘이다.
‘남만의 힘으로 중원을 짓이기는 것도 괜찮겠지.’
“마궁 궁주. 키키키! 너, 혓바닥 뽑히고 싶은가 보구나?”
콘은 믿지 못하겠다는 투였다.
산주는 깊이 부복하며 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속하를 믿어주십시오. 중원에는 무신들이라는 무인이 있습니다. 그들의 무공은 가히 하늘. 하지만 무신들도 마궁 궁주에게는 한 수 양보했다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물론 마지막 말은 자신이 지어낸 말이다.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콘은 마군을 모르는데.
“재미없어. 재미없어.”
산주는 목숨의 위협을 느꼈다.
콘은 마군에게 흥미를 보이는 듯했지만 곧 관심을 끊었다. 이는 자신의 목숨도 끊어진다는 뜻이다.
무엇이 콘으로 하여금 세상에 염증을 느끼게 한 것일까?
산주는 나름대로 분석했다.
‘절대자의 고독. 상대가 없는 절대 무인의 외로움.’
무(武)와 더불어 신(神)까지 수련한 사람은 하늘이 되어 유유히 세상사를 벗어나지만, 오직 무만 수련하여 최고봉에 이른 자는 속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뭇 인간들 사이에서 좌충우돌한다.
콘은 파괴자일 뿐, 더도 덜도 아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피히족이라고 있습니다. 피히족은 코끼리를 이용하여 싸움을 하는 부족인데 죽이는 손맛이 남다르실 겁니다.”
어쩔 수 없다. 몇몇 부족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들에게도 잘못은 있다. 중원으로 가는 길목에 터를 잡았다는 자체가 잘못이다.
“코끼리? 큭큭! 좋아. 가자.”
콘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
“강금산…….”
서군봉은 이를 악물었다.
손에 쥐고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사내가 손아귀를 벗어났다. 잠깐 놓친 것이 아니라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갔다. 두 번 다시 잡을 수 없는 먼 곳으로.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 때문에 자신의 인생이 뒤틀리지만 않았다면 미련없이 등질 것이다.
강금산은 그녀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북검문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들었다.
처녀가 짓이겨졌다. 야수에게 짓밟힌다고 해도 그토록 수치스럽지는 않았을 게다.
처녀? 그까짓 게 뭐라고. 그 정도뿐이라면 똥 밟은 셈 친다.
놈은 육신마저 갈가리 찢어놓았다. 전신을 난자한 것도 모자라서 가슴을 도려냈다. 몸뿐이 아니다. 얼굴도 망쳐 놨다. 입을 찢고, 코를 베어내고, 귀까지 잘랐다.
놈은 미쳤다.
“결코…… 결코 용서하지 않아!”
서군봉의 눈에서 화염이 이글거렸다.
그녀는 신형을 날려 두 남자를 뒤쫓았다.
2
예상했던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왕벌들이 좌우로 나뉘어 호위하는 한은 두 다리 쭉 펴고 잠자리에 들어도 괜찮다.
쉭쉭쉭!
무풍지대를 치달려 가는 신형이 경쾌하기 이를 데 없다.
“말을 바꿔야겠군. 시간이 촉박할 줄 알았는데 이런 속도라면 보름 이전에 도착하겠어.”
마도가 신형을 뽑아 올리며 말했다.
“저놈들 되게 배 아프겠는데?”
언제부터인가 마도와 단짝이 되어버린 수검이 어깨를 나란히 하며 말했다.
저 멀리서 많은 무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다가오지 못했다. 만반은 준비를 갖춘 듯 온갖 병기를 손에 들고 있지만 왕벌들에게 가로막혀 막연히 지켜보기만 했다.
“크크! 이걸 보고 바로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본다고 하는 게야.”
시마도 혈전을 피한 게 다행인 듯 밝게 말했다.
저들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일부는 쫓아올 생각을 버린 채 쳐다보기만 했고, 일부는 거리를 둔 채 따라오는 것으로 보아 몇몇 부류가 섞여 있다는 느낌만 들 뿐 정확한 것은 알 길이 없었다.
천멸도 살수들도 모습을 드러냈다.
왕벌이 지켜주고 있으니 힘들게 숨어서 나아갈 필요가 없었다.
마야 일행은 속도에 치중하여 최대한 빨리 달렸다.
피융! 쉬익!
공기를 찢어내는 파공음이 귓전을 울리는 순간, 절혼마녀는 귀적무를 펼쳐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순간적으로 위험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탁!
한 대의 화살이 그녀를 스치고 지나가 커다란 나무를 관통한 후 땅에 틀어박혔다.
“대단하군!”
수검이 감탄했다.
왕벌의 방어막을 뚫고 들어온 화살은 웬만한 사람은 쏘아낼 수 없는 강궁이었다.
어디서 누가 쏘아낸 것일까?
급히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따라붙는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누가 쏘아냈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제삼무신가의 화살이야!”
혈유가 땅에 꽂힌 화살을 뽑아왔다.
강철 화살을 사용하는 문파는 중원 천지에 오직 한 곳, 제삼무신가뿐이다.
“상당해. 상당한 궁술이야. 한데 어찌 궁왕보다는 신력(神力)이 떨어진다는 느낌인데…… 나만 그런가?”
시마가 강철 화살을 쳐다보며 말했다.
궁왕이 사용하는 화살은 은형시(隱形矢)라고 부른다. 화살이 활에서 떠나는 순간부터 목표에 틀어박힐 때까지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제삼무신가의 왕자들도 은형시를 사용한다.
금연화에게 죽은 금궁 강화명과 둘째인 독궁 강경승, 셋째 유궁 강금산까지 완벽한 은형시를 쏘아낸다. 한데 절혼마녀를 향해 쏘아진 화살은 흐릿하게나마 형체가 보였다. 궁왕이나 궁왕의 세 아들보다는 신력이 뒤진다는 의미이다.
쒜엑! 패애애앵!
은형시가 다시 날아왔다.
화살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린다.
실체보다 뒤처져서 따라오는 소리다. 소리를 귀로 들었을 때는 이미 화살이 목표를 꿰뚫은 후다.
이런 공격은 오직 실전 감각으로 파악하는 것이지 눈과 귀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날아온 화살은 세 대, 노리는 목표도 셋.
마도와 시마는 급히 바위 뒤로 몸을 숨겼고, 혈유는 전력을 다해 신법을 펼쳐 냈다.
“쯧쯧! 미련 곰퉁이 같은 놈. 몸만 숨기면 될 것을 뭐 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시마가 혈유를 놀렸다.
혈유는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법으로는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해 왔는데 한낱 화살을 피하면서 식은땀까지 흘리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마도와 시마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에 팽팽하게 당겨진 위기를 느꼈고, 본능적으로 몸을 숨겼다.
혈유는 조금 달랐다.
그는 절혼마녀의 귀적무를 보았다. 은형시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절혼마녀는 보았다. 신법을 펼쳐서 정확히 한 걸음 차이로 피해냈다.
혈유는 신법으로만 따지면 누구에게도 양보할 생각이 없는 사람, 그는 은형시가 날아오는 것을 감지했으면서도 한 호흡을 쉬었다가 움직였다. 은형시가 육신을 꿰뚫으려는 순간에 절혼마녀처럼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한데 결과는 달랐다. 절혼마녀는 유유히 피해냈는데, 혈유는 부챗살 하나 정도를 남기고 간신히 피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삼류에 불과했던 그녀의 신법이 어느새 그를 앞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새끼인지 되게 잘 쏘는데!”
그는 수검이 터뜨린 감탄을 몸으로 겪고 난 후에야 토해냈다. 그때,
“동서남북 사방(四方)이다.”
마야가 말했다.
“뭐? 사방천마?”
혈유는 말귀를 잘못 알아들었다.
“동서남북 사방진(四方陣). 궁수는 한 명씩, 네 명. 네 명이 사방진을 펼쳤다면…… 무슨 생각이 드나?”
마야가 사방을 휘휘 둘러보며 말했다.
“주제를 모르는 놈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혈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당금 무림에서 호채마를 상대로 단 네 명이 포위진을 펼쳤다면 누구라도 미쳤다는 말부터 하리라.
“클클! 그렇게만 볼 수 없지. 놈은 경고까지 했는걸.”
시마가 혈유 손에 들려 있는 강철 화살을 가리켰다.
“시중에 이런 말이 있지. 궁왕의 자식은 서른 명이 넘는다고.”
남아(男兒)만 서른 명이다. 피와 살을 물려받은 사내는 세 명이나 그가 혼신을 다해 궁술의 정점으로 이끈 제자가 서른 명이나 된다는 소리다.
궁왕과 세 아들, 그리고 궁왕의 제자들. 이들이 제삼무신가의 모든 것이다.
“사천궁(四天弓).”
그중에서도 사천궁은 단연 으뜸이다.
죽은 금궁의 죽마고우로 삶과 죽음을 함께하겠다고 맹세했다는 사내들.
마야는 단정적으로 사천궁이라는 별호를 입에 담았다.
“…….”
모두 할 말을 잃었다.
사천궁이 왔다면 모든 게 이해된다.
그들이 사방진을 펼쳤다면 감히 주제를 모른다는 소리는 하지 못한다. 그들은 당당한 자신감으로 포위진을 형성했다.
“골치 아프게 됐군.”
마도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도주, 가장 빠른 타격이 필요해.”
마야의 눈빛은 깊었다. 너무 깊어서 무표정한 것 같기도 하고 냉정한 것 같기도 했으며, 살기로 번뜩인다는 느낌도 들었다. 어떤 느낌인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소름이 오싹 돋는 것으로 보아 좋지는 않았다.
“어, 어디를 칠까?”
천멸도주가 어색하게 말했다.
쒜엑! 패애애앵!
세 번째 은형시가 날아왔다.
노리는 사람은 마야와 시마.
절혼마녀는 파공음이 들리기도 전에 마야의 몸을 부둥켜안고 옆으로 두 걸음을 옮겼다.
쒜엑! 타악!
은형시는 간발의 차이로 몸을 스쳐가 바위에 꽂혔다.
시마는 좀 더 느긋했다. 그는 상체를 뒤로 발딱 젖혀 화살을 피해낸 후,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동요는 없었다.
모두들 언제 화살 공격을 받았냐는 듯 담담했다.
호채마의 관심은 마야에게 집중되었다.
마야가 달라졌다. 평소의 마야가 아니다. 확실히 마야는 마음을 죽였다. 애써 활심(活心)을 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는 살풍(殺風)이 몰아친다는 전조다.
무림인이여! 길을 비켜라! 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