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ya RAW novel - Chapter 184
184
마인들에게는 은형시도 통하지 않는다. 궁왕이 직접 쏜다면 몰라도 사천궁의 솜씨로는 마인들 중 어느 한 사람도 잡아내지 못했다. 하늘도 인정한 사천궁이 이토록 무력할 줄은 진정 꿈에도 몰랐다.
마야를, 금연화를 죽이기 위해서는 사천궁이라는 별호를 버리고 삼천이란 숫자에 힘입어 개싸움을 해야만 한다.
한데 여기에도 제약이 있다.
군웅들이 쏟아내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들은 말로는 당장이라도 호채마를 때려죽일 기세이지만, 기실 싸움이 시작되면 앞장설 인물들은 몇 되지 않는다.
왕벌과 천멸도 살수들에게 겁을 집어먹어 몸만 사리는 허수아비들인 것이다.
그런 자들이 욕심은 많다.
마야가 왕벌을 부리는 능력은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
왕벌은 멸신구관에서 나타났다. 구구한 세월을 땅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마야가 나타남과 동시에 세상을 날아다니고 있다.
왕벌과 마야와 멸신구관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강금산이 멸신구관에서 기연을 얻었듯이, 마야도 기연을 얻었다.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왕벌을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이 얼마나 흥분된 일인가.
왕벌을 수하로 두는 순간, 무신은 여덟 명으로 늘어나리라.
사람을 더욱 미치게 하는 것은 마야가 왕벌을 부릴 수 있으면서도 무공은 펼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의 머릿속에는 수만 가지의 무공이 담겨 있다. 오죽하면 일견후즉파라는 말을 듣겠는가. 그러면서도 일초반식(一招半式)조차 펼칠 수 없는 몸이라니.
마야는 그 자체가 하나의 보물이다.
강금산은 지금 이 순간에도 멸신구관에서 얻은 무공을 깨우치고 있으리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강해질 것이고, 그에게 접근할 가능성은 멀어진다.
멸신구관의 무공을 얻을 수 없다는 말이다.
마야는 다르다. 어떻게든 마야만 수중에 넣을 수 있다면, 그를 위협할 위치만 차지한다면 무신이 되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죽는 순간까지, 아니, 삼대나 사대를 이어가도 무신과 버금갈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그 꿈이 눈앞에 있다. 또한 누구도 쉽게 접근할 수 없지만, 여건만 조성되면 삼천 명의 군웅 중 누구라도 마야를 손에 쥘 수 있다.
사천궁은 이런 군웅들의 심리를 꿰뚫어보았다.
즉, 군웅들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마야에게 갈 수 있도록 길을 뚫어주는 것뿐이다.
만약 마야를 죽이려 한다면 삼천 명 중 적어도 절반 이상은 뒤로 빠질 게 틀림없다.
마야를 죽인다. 그러기 위해서 왔다. 마야가 얻었다는 멸신구관의 능력 따위는 조금도 미련이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군웅들이 눈치 챘어도 어쩔 수 없도록 순식간에 해치워야 한다.
음모 속에 음모를 심는, 그야말로 진흙탕에 뛰어들어 구린내 나는 싸움을 해야 하는 것이다.
궁왕 강창도는 이런 싸움을 싫어했다. 극도로 혐오했다. 상대를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전략, 전술이지만 목숨을 거두는 일은 손수 활을 들었다.
“전쟁을 해야겠지?”
“해야겠지. 능력이 부족하니.”
사천궁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하류잡배로 전락하고 만 자신들을 스스로 비웃는 조소였다.
싸움터가 정해졌다.
벌들은 불에 약하다. 아무리 맹렬한 독을 지녔어도 불길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천멸도 살수들도 불에 약하다. 은신술이란 보이지 않는 거죽을 뒤집어쓰고 숨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엎어져 있는 자들 머리 위에 불길을 뒤집어씌운다면 꼼짝없이 죽고 만다.
호채마를 상대하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은 화공(火攻)이다. 또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군웅들은 화공을 쓰기에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온통 빽빽한 숲이 연이어져 있는 밀림에서 또 무슨 장소를 찾는단 말인가.
찾아야 한다.
넓게 펼쳐진 개활지면 좋다. 갈대처럼 불을 쉽게 전달시켜 줄 매개체도 있어야 한다.
군웅들은 멸신구관 입구에 발생한 산불을 잊지 않았다. 작은 불은 통제할 수 있지만 큰 불은 인간마저 삼켜 버린다는 사실을 명심했다.
밀림에 불을 낼 수는 없다. 불을 내어 사람을 죽이되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마야는 살려놔야 하니까.
그래서 택한 곳이 마릉 초원이다.
마릉 초원은 하늘이 화공을 펼치라고 특별히 마련해 준 듯 보였다.
오목한 분지지만 어지간히 빠른 신법을 지닌 자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을 만큼 넓으며, 무엇보다 갈대가 무성하다. 분지라서 바람의 특성에도 영향을 받지 않고, 기름을 쏟아 붓기도 용이하니 금상첨화가 따로 없다.
삼천 군웅이 분지를 둘러싸면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다.
“날개가 달렸다면 몰라도 여기선 죽을 수밖에 없어.”
“놈들은 지둔술을 잘 쓴다고 하던데.”
“지둔술까지는 어쩔 수 없지. 땅속으로 기어든다는 데 뭘 어떡해. 불만 믿어야지.”
“아니, 아니. 그래선 안 돼. 지둔술에 대한 대비책도 강구해 놓아야 해. 빠져나갈 구멍이 있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지둔술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생각들 해보자고.”
지둔술을 방지할 묘책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땅속이야말로 철옹성 중에 철옹성이다. 불도 통하지 않고, 암기도 통하지 않으며,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병기도 해를 끼칠 수 없다.
유일한 방법이라면 같이 파고 들어가 척살하는 것뿐인데, 언장은마처럼 땅을 잘 아는 사람도 없으려니와 무공 대 무공으로 호채마를 상대할 무인조차 드무니 논외로 해야 한다.
기름을 쏟아 붓는 방법도 생각했다.
어림없다. 넓디넓은 마릉 초원에 기름을 쏟아 부으려면 최소한 성 한 채는 팔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도 효과는 지극히 미미할 터이고.
무슨 방법이 없나?
사천궁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군웅들 중 한 인물이 그들을 찾아왔다.
“소신은 독조림에 몸을 담고 있던 자 올습니다.”
호채마에게 멸문당한 독조림? 생존자가 있었던가?
아직도 독조림을 입에 담고 다니는 자라면 독술이나 암기술이 일정 경지에 이르렀다는 뜻일 게다. 평소 독조림에 원한을 품고 있던 자들의 표적이 되어도 무방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이니까.
그런데 독조림에 있던 자가 왜?
“저놈들 중에는 지둔술을 아주 잘 쓰는 놈이 있습죠. 언장은마라고. 말 그대로 두더집니다.”
사천궁의 눈빛이 반짝였다.
“언장은마라는 자를 잘 아느냐?”
“소신과는 그야말로 숙적(宿敵). 소신이 독조림 사람입니다만, 그건 개인적인 사정이 있기 때문이고…… 아무튼 언장은마와는 목숨을 걸고 다퉈왔습죠.”
“그대의 별호는?”
“워낙 미미한 존재인지라 별호까지야…… 호칭을 알아보실 요량으로 물으신 거라면 생각나시는 대로. 제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라면 무공으로 가늠해 보시길.”
사천궁은 다시 한 번 눈빛을 반짝였다.
눈앞에 서 있는 정체 모를 자가 미덥지 못하다.
실력은 있을 게다. 언장은마와 목숨을 걸고 싸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야가 보낸 간자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만큼 신분이 의심스럽다. 결정적인 전쟁터를 마련했는데, 신분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 자를 믿고 써야 하나.
“말부터 듣지. 그래서?”
주요 관심사는 눈앞에 있는 사내가 내놓을 비책(秘策)이다. 호채마가 땅속으로 스며드는 걸 막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벽을 뚫는 재주가 있는 놈은 벽을 못 뚫게 하면 그만이고, 달아나는 재주가 특별한 놈은 두 다리를 잘라 버리면 되고, 두더지 특성을 지닌 놈은…… 흐흐!”
“땅을 파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우리가 지리(地利)를 가졌습죠. 마음껏 수단을 부려놓을 수 있는데 걱정할 게 뭡니까.”
그렇다! 걱정할 게 없었다. 마릉 초원을 지폭뢰(地爆雷) 밭으로 만들어 버리면 된다.
불과 화살과 지폭뢰.
놈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군웅들은 어떻게든 마야만은 사로잡고 싶겠지만, 마른 초원이 지옥불로 뒤덮이는 순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폭뢰를 구해야겠군.”
“설치는 이놈이 합죠. 땅을 파는 것도 아무 땅이나 파는 게 아닙죠. 무른 땅, 결이 잘 나 있는 땅. 흐흐! 땅이란 게 모두 같은 땅처럼 보이지만 저희 같은 놈들 눈에는 여인네 속살처럼 맨들맨들한 땅이 딱 들어옵죠.”
“그런가.”
“그런 땅이 많은 것 같아도 실은 별로 없습죠. 십중팔구, 아니, 십중십 걸려들 것이라고 장담합죠.”
“됐어. 이야기는 들었고…… 그럼 이제 자네가 누군지 보여주게.”
사내는 눈가에 의미심장한 빛을 담았다.
“두 가지를 보여드립죠. 하나는 독조림의 문양(紋樣).”
사내는 옷섶을 젖히고 왼쪽 가슴을 드러냈다.
붉은 전갈이 까만 여의주를 물고 있는 특이한 문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두말할 나위 없이 독조림의 문양이다.
독조림 사내들은 가슴에 전갈 문신을 새긴다. 먹물로 새기는 문신이 아니라 독즙을 발라 상처가 부풀어 오르게 하는 특이한 문신법을 애용한다.
독즙을 이용한 문신은 상처가 양각되어 금방이라도 팔짝 뛰어오를 듯 생동감이 있어서 보기 좋다. 하나 이 때문에 독즙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독즙은 일반적인 독이 아니라 홍갈(紅?)의 맹독을 쓴다.
그 정도는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어야 독조림의 문도가 될 수 있다는 뜻이지만, 셋 중 하나는 문신을 새기는 도중에 사망하니 야만적인 관습이라 할 것이다.
사내는 확실히 독조림 문도였다.
“두 번째 보여드릴 것은…….”
사내는 독수리 발톱처럼 생긴 철수(鐵手)를 꺼내 손에 끼었다. 그리고 눈 한 번 끔뻑하는 사이에 땅을 파고 들어갔다.
신기에 가까운 지둔술이었다.
사천궁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서로를 쳐다봤다.
근심 걱정거리가 말끔히 가시는 순간이었다.
***
“이게 뭔가?”
사내는 수레에 가득 실린 죽통을 쳐다보며 말했다.
“굉천뢰(轟天雷)라는 물건이지.”
“뭐, 뭣! 이 미친 늙은이!”
어지간해서는 놀랄 일이 없을 것 같던 사내도 굉천뢰라는 말에는 사색이 되었다.
“욕심이 없었지. 그저 승률을 조금 높여주자 하는 심정에서 거들었는데…… 이곳이 썩 마음에 들어. 이만한 곳은 애써 찾아도 찾기 힘들 거야. 안 그런가?”
“늙은이…….”
“그렇게 정답게 부르지 않아도 돼.”
“날 불러낼 때, 이미 굉천뢰를 마음에 두고 있었군.”
“허허허!”
파르라니 깎은 머리, 살 속에 깊이 패인 계인(戒印). 흑조편복은 사내의 말을 가벼운 웃음으로 받아냈다.
흑조편복이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 조금이라도 꾸물거리는 날에는 자네 안전도 장담하지 못해.”
“마릉 초원…… 저 초원에 발을 들여놓는 자는 모조리 뒈지겠군. 아니, 굉천뢰의 여파가 상당할 테니 기웃거리는 놈들 중에도 상당수가 뒈지겠어.”
“자네야 빨리 박아놓고 빠져나오면 그만 아냐?”
“후후후!”
사내는 입술을 비틀며 툴툴 웃었다.
화약을 터뜨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거의 대부분 도화선을 연결하고 불을 붙인다.
도화선, 폭발과 은신 사이의 시간을 벌어주는 유일한 도구.
도화선을 얼마나 길게 쓰느냐에 따라 불을 붙이는 순간부터 폭발까지의 시간이 정해진다는 것은 어린아이도 아는 상식이다.
한데 굉천뢰에는 도화선이 없다.
죽통을 부수면 마찰력에 의해 화약이 터지도록 고안되었다. 자신의 안전을 도외시해야만 사용할 수 있는 자폭용 화약인 것이다.
위력은 어마어마하다. 반경 사오 장은 풀뿌리 하나 남아나지 못한다. 지하 반장 정도까지는 삽으로 떠낸 듯 푹 파 버려 천번지복(天飜地覆)이라는 말을 실감케 한다.
사내는 굉천뢰가 연쇄 폭발하도록 폭발 위력이 미치는 곳에 또 다른 굉천뢰를 심어놓아야 한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렸다가 때가 되면 굉천뢰를 터뜨려야 한다.
이것이 흑조편복의 주문이다.
박아놓고 빠져나와? 후후후! 차라리 말이나 하지 말 것이지.
“늙은이가 준 목숨, 다시 거둬가겠다는 데 할 말은 없지만…….”
“그럼 하지 마. 할 말이 없다면서 무슨 말을 구구절절하려는가. 다 부질없지.”
“후후후! 후후!”
“그렇게 웃지도 말고. 마음만 아프잖은가.”
“늙은이에게도 마음이란 것이 있었나?”
“난 살수지. 노린 자들 중 단 한 건도 실패한 적이 없는 전설적인 살수가 날세. 난 이런 게 좋아. 노리는 목표가 있으면 난 나도 모르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돼. 살아 있는 느낌. 그래, 난 꼭 이럴 때만 살아 있는 느낌이 들어. 아마도 상대를 죽이는 과정에서 말 못할 희열을 느끼나 봐.”
“굉천뢰는 터질 거야. 이제 늙은이와 셈은 끝났으니까 꺼져.”
“후후후! 후후후! 어쩌랴, 어쩌랴. 굉천뢰를 터뜨릴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딱 한 사람뿐인 것을. 후후후! 하하하!”
흑조편복의 웃음 속에 아픔이 깃들었다.
“그만 꺼져. 일해야 되니까.”
흑조편복은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걸어가다 우뚝 멈춰 섰다.
“위안 삼아 말하자면…….”
“말할 필요 없어. 내게 최대 위안거리는 더 이상 늙은이의 음성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몰랐나? 내 수고가 헛되지 않게 놈이나 이쪽으로 확실히 유인해. 꺼져.”